76화
하기야 직접 만나 보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마을 사람들도 위험한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하니 마을을 떠나지 않았겠지. 이런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를 이어 살아온 토박이다. 어지간한 이유로는 터전을 떠나지 않는다.
괴물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왜 하필 지금 나타났을까. 큰 시련이 닥친다는 신탁이 나온 지금 전에 없던 괴물이 나타난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마신의 끄나풀이라든지.
“혹시 신탁하고 관련이 있을까?”
새틴의 말에 미처 케인이 대꾸를 하기도 전에 앞에서 리타가 돌아보았다. 밤이지만 근처 민가의 불빛이 있어 표정 정도는 보였다.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있었다.
“오, 그럴 수도 있겠는데?”
리타가 쪼르르 새틴의 옆으로 와 섰다. 케인은 탐탁잖은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리타를 떠밀어 쫓아내지는 않았다.
“징조일지도 몰라. 마신이 나타나기 전에 그 졸개들이 인간들을 침략하는 거지.”
“리타 씨, 그런 불길한 소리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아직 괴물이 사람을 해친 적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이잖아,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지.”
“리타 씨는 괴물이 사람을 해치길 바라시는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거야. 누구 한 사람 죽고 나서 괴물을 처치하면 그게 어떻게 기쁜 일이겠어. 안 그래?”
리타는 종종 대책 없이 행동하지만 남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은 아니다. 에드워드도 진심으로 화를 낼 마음은 없었는지 더 뭐라 하지 않았다.
리타는 에드워드가 입을 다물자 자신감에 차서 의견을 설파했다.
“큰 지진이 나기 전에 벌레들이 먼저 알고 도망친다고 하잖아. 그 징조를 눈여겨본 사람만 화를 피하겠지.”
새틴도 비슷한 얘기들을 들은 적이 있다.
큰 지진을 앞두고 심해어가 수면으로 밀려왔다느니 벌레들이 떼 지어 이동을 했다느니. 구름의 모양이나 달의 크기에 관한 얘기도 있다.
과학적 근거는 분명하지 않으나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법 진지하게 오가는 얘기다. 누구나 불길한 일의 징조를 알고 싶어 한다.
“그러니 모든 수상한 일을 눈여겨봐야 해. 그래서 나중에 또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리타가 말을 하다 말았다. 아무도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지척에 여관이 보였다. 그 너머에 민가가 두어 채. 그리고 그 뒤쪽, 나무가 성기게 자란 낮은 언덕에 무언가 서 있었다.
얼핏 보아선 사람 같았다. 두 다리로 서서 두 팔을 늘어뜨릴 수 있는 짐승은 많지 않으니.
하지만 사람이라 속단하기엔 미심쩍은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머리 위로 솟은 뾰족한 짐승 귀라든지 지나치게 커다란 발이라든지. 털인지 가시인지 모를 어깨의 그림자도 괴이쩍다.
새틴은 특히 눈이 무섭다고 생각했다.
‘사람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이 세계에 오기 전이라면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을 보고도 으레 고양이려니 하는 기대를 품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새틴은 아까 식당 종업원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클로버랜드를 떠나기 전 정가를 주고 산 검은 케인이 괜히 손 다치지 말라며 가져가 버려서 새틴은 지금 변변한 무기도 없었다. 그러나 새틴이 검을 돌려 달라고 하기도 전에 케인이 먼저 말했다.
“뒤로 가.”
말만 그렇게 할 뿐 케인은 새틴이 직접 움직일 틈을 주지 않았다. 덥석 새틴의 팔을 붙잡아 제 뒤로 끌어당겼다. 지금껏 새틴은 스스로가 번듯한 성인의 체격이라 생각해 왔는데 케인에게 붙잡히니 종이 인형이 된 기분이다.
실은 제일 연장자인데 제일 뒤에 있자니 민망해서 새틴은 괜히 나불거렸다.
“지금까지 사람을 습격한 적은 없다고 하니까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새틴은 하려던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돌연 괴물이 고개를 쳐들더니 길게 울었다. 아우우우우! 늑대의 하울링과 흡사한 소리였다.
의미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친해지자는 인사 같진 않았다. 어쩌면 동료들을 부르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낌새가 이상하군요.”
에드워드가 검을 뽑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식당 종업원은 괴물이 소리를 낸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깜빡 잊고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면 저 괴물이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으, 진짜 말이 씨가 됐나.”
리타가 검을 뽑고 곧바로 불화살을 만들었다.
괴물은 그저 이쪽을 바라만 볼 뿐 당장 덤벼들지 않았다. 그러나 일행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 상태로 몇 초가 지났을 때 케인이 속삭였다.
“사람들이 있어.”
“어?”
“내다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새틴은 반사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어두운 시간이지만 한밤중은 아니다. 가까운 민가의 창문에 빛과 함께 사람 그림자가 일렁였다. 케인의 말마따나 바깥의 동태를 살피는 듯했다.
“울음소리를 들었나 봐. 위험할지도 모르니 나오지 말라고 해야 할까?”
새틴이 걱정하자 케인이 코웃음 쳤다.
“어차피 안 나올 거야. 생판 모르는 남을 돕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알아?”
냉소적인 말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 선뜻 괴물 앞에 나서기가 쉬울 리 없다. 게다가 새틴 일행은 이 마을에 처음 왔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생면부지다.
그래도 새틴은 케인에게 변명을 하고 싶었다. 꼭 그렇게 냉정하게만 생각하지 말라고.
그러나 새틴이 그리 말할 새도 없이 케인이 낮게 외쳤다.
“온다.”
내내 붙박이처럼 서 있던 괴물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달려왔다. 두 발로 달리는데도 네 발로 달리는 짐승만큼이나 재빨랐다.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지 못한 리타는 “으악, 일단 맞아라!” 하며 불화살을 내던졌다.
크르릉! 괴물이 갑자기 나타난 불화살에 놀라 멈칫하며 흘린 소리는 갯과 동물의 으르렁거림과 비슷했다. 사람처럼 두 발로 달리지만 근본은 개나 늑대에 더 가까운 모양이다.
‘라이칸스로프 같은데. 상당히 고전적인 괴수인걸.’
거리가 좁혀지며 분명히 드러난 괴물의 머리를 보고 새틴은 상황에 걸맞지 않은 평가를 했다.
“하압!”
불을 피하느라 속도가 늦어진 늑대 인간에게 에드워드가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현실은 게임이 아니기에 전투 중에 힐러의 역할이 따로 없었다.
늑대 인간이 에드워드를 막느라 몸을 튼 사이 리타가 그 뒤쪽으로 달려가며 다시 한번 불화살을 던졌다.
크와아아아! 늑대 인간이 성을 내며 몸을 비틀다 에드워드의 검에 옆구리를 베였다. 다급하게 팔을 휘둘러 공격했지만 에드워드는 어렵지 않게 피했다.
아무래도 늑대 인간은 그다지 전투력이 높은 편은 아닌 모양이다. 움직임이 별로 체계적이지 않았다.
그리 생각한 사람은 새틴만이 아니었다.
“저 정도면 내버려 둬도 되겠군.”
케인의 말이 용케도 들렸는지 리타가 꽥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치사한 놈아!”
케인은 리타의 원망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렸다. 새틴은 그러지 못했다.
“저, 케인.”
“왜.”
“우리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리타와 에드워드가 늑대 인간을 상대하는 동안 뒤에 쏙 빠져 있자니 좀 민망해서 새틴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케인이 흘끔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저놈을 해치우면 넌 뭘 해 줄 건데?”
“해 주다니?”
“보상이 있어야 할 거 아냐. 일단 아무거나 말해 봐.”
케인의 얼굴에 떠오른 저 너그러운 미소는 무슨 뜻일까.
사실 케인이 나서지 않아도 조만간 괴물은 에드워드와 리타의 선에서 정리될 듯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이 협력하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음, 그래도 케인한테 이래라저래라 하긴 좀…….’
케인은 분명 몸도 잘 쓰고 마법도 쓸 줄 아니 새틴보다 나은 전력이다. 그렇다 해서 힘든 일을 대신 시킬 수는 없다. 부탁하면 얼마든지 들어줄 테지만.
‘그건 내 몫도 아닌 호의를 멋대로 이용해 먹는 꼴이잖아.’
새틴은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 검이나 줘. 나서고 싶지 않으면 넌 나서지 않아도 돼.”
새틴이 손을 내밀었지만 케인은 검을 내주지 않았다. 가만히 새틴의 얼굴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케인의 표정이 평소와 좀 다르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새틴은 짚어 내지 못했다.
‘짜증이 났나? 아니면, 서운한가?’
새틴이 정답을 찾기 전에 케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치사한 건 내가 아니라 너 같아.”
“어?”
새틴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케인의 주변에 흰빛이 모여들었다. 마법이었다. 아까 리타가 불화살을 만들 때보다 훨씬 환한 빛은 다소 과할 정도로 거대한 불의 벽을 만들어 냈다.
“아니, 그렇게까지…….”
새틴의 당황 어린 중얼거림은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붉은 벽은 잠깐의 뜸도 들이지 않고 늑대 인간을 향해 쇄도했다. 리타와 에드워드가 황급히 좌우로 몸을 피했다.
“으악, 이 미친놈아! 이런 걸 쓸 땐 말을 해!”
리타의 당황 어린 외침은 뒤이은 늑대 인간의 비명에 밀려났다. 크워어어어! 고통스러운지 늑대 인간은 사지를 뒤틀며 불길을 피해 나뒹굴었다. 하필 리타가 피한 방향이었다.
“아, 신발!”
리타가 뜬금없는 단어를 외치며 늑대 인간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노렸는지 우연인지는 모르나 검 끝이 라이칸스로프의 목덜미에 박혔다. 제법 멋진 일격이었음에도 새틴은 감탄 대신 딴생각을 했다.
‘막타 스틸?’
정말로 게임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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