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내 생각에도 마신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봐.”
“새틴 씨까지 그런 소리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에드워드는 마치 말썽쟁이 딸내미가 데려온 말썽쟁이 친구를 보듯 새틴을 쳐다보았다. 새틴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들어 봐. 대신전에서 소문을 낸 이유가 자연재해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면, 더 쉬운 방법이 있잖아. 대신전에서 식량을 비축하라고 하면 사람들도 대충 눈치를 챌 거 아냐.”
“그건 그렇군요.”
“굳이 시련이니, 더 큰 시련이니. 이런 모호한 표현을 쓴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사람들한테 걱정을 심어 주되 너무 큰 혼란은 주고 싶지 않았다든지.”
꿈보다 해몽 같은 소리였지만 일단 에드워드에게는 먹혔다. 에드워드는 리타를 핀잔할 때보다 훨씬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짚이는 일이 있습니다.”
“짚이는 일?”
“리타 씨가 보낸 사람을 만나기 전에 저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에드워드가 클로버랜드의 신전에 있을 때라면 누가 찾아왔다 해도 별스러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순례 중인 신관을 굳이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신관의 도움이 필요한 시민이었다면 에드워드가 굳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이유가 없다.
“신전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저는 데이지랜드로 간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거든요. 의아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뭐래?”
리타가 채근했다. 에드워드는 턱을 매만지며 대꾸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순례 길을 축복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신관은 스스로 축복을 내릴 수 없거든요.”
‘축복은 안 돼도 치료는 되겠지? 힐러가 자힐을 못 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새틴은 저도 모르게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헛기침을 했다. 다행히 에드워드는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다.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제게 축복이 필요한 상황이 올 거라고 예상했을까요? 꼭 제가 아니라도 순례를 하는 신관에게 위험할 만한 일이 있다든지 말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케인을 제외한 세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곧 리타가 푹 익은 당근을 한 조각 먹고 말했다.
“일단 수도로 가자. 대신전에서 확실한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가 있겠어.”
“그래도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가려던 곳이 있을 텐데.”
“아, 원래도 수도로 갈 생각이었어.”
들은 적 없는 계획이지만 예상하던 터라 새틴은 당황하지 않았다. 새틴이 가만있으니 케인도 가만있었다. 에드워드만 의문을 표했다.
“리타 씨는 모든 도시를 여행할 계획이 아니었습니까?”
“마신이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한가롭게 여행이나 할 순 없잖아.”
“마신이 수도에 나타난다는 보장도 없잖습니까.”
“아니, 마왕보다 나쁜 놈이면 사람이 더 많은 데 나타나지 않을까 했지.”
“……효율적으로 몰살을 하려 한다면 그편이 합리적이긴 하겠군요.”
“어떻게 그런 무서운 말을!”
리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경악한 표정으로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에드워드는 즉각 얼굴을 구겼다.
“리타 씨가 한 말하고 똑같다고요.”
∞ ∞ ∞
에드워드가 일행에 합류했으니 이제 더는 시간 끌 이유가 없었다. 일행은 이튿날 바로 길을 나섰다.
“미리 성물을 사 오셨다니 잘되었군요. 다음에 들를 곳에 신전이 있으면 성물을 사자고 이야기를 할 참이었습니다.”
“아, 데이지랜드에는 신전이 없나 보네.”
에드워드 외에는 모두 데이지랜드 초행이었다. 클로버랜드와 비슷한 규모의 도시 같은데 신전이 없다니. 새틴은 조금 의외라 생각했다. 그 이유는 에드워드가 가르쳐 주었다.
“신전은 큰 도시에만 짓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은 반대입니다.”
“실제로 큰 도시에만 있지 않아?”
여러 도시에 가 본 적이 있는 리타가 고개를 갸우뚱하니 에드워드가 살짝 웃었다.
“그리 크지 않은 도시에 신전을 세웠는데 사람들이 모여들며 커진 거지요. 클로버랜드에 처음 신전이 생겼을 때는 아마 데이지랜드보다 훨씬 낙후했었을 겁니다.”
“오, 그렇구나.”
“유일하게 예외인 곳이 수도의 대신전입니다. 대신전이 지어진 시기가 이 나라 왕조의 시작과 비슷하다는 건 다들 아시겠지요.”
새틴은 몰랐지만 그냥 아는 척 가만히 있었다. 기억 상실 핑계를 대기엔 이 세계에서 산 시간이 짧지 않다. 상식을 모르는 사람보다는 과묵한 사람이 되는 편이 나았다.
“예로부터 왕실과 신전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죠. 요즘 각 도시의 신전들이 힘을 못 쓰는 건 어쩌면 왕실의 힘이 약해져서일지도 모릅니다.”
새틴은 무심코 리타의 표정을 살폈다. 리타는 발끈하지 않고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정말인가 보네.’
전에 리타가 이야기하길 행정 실무는 거의 관리들이 하고 왕은 도장만 찍는 역할이라고 했다. 판타지 소설의 배경이라기엔 상당히 현대에 가까운 느낌이다. 다크에이지를 볼 때는 그런 생각을 안 했는데.
미묘한 위화감이 들지만 새틴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작가의 의도가 소설에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 경우야 흔하다. 누나는 이 나라를 입헌군주제로 설정했지만 묘사할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번 일에 왕실이 관여했을지도 모르겠군요.”
“뭐어?”
이번엔 리타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리타가 공주라는 사실을 모르는 에드워드는 의아해하며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놀랍니까?”
“아니, 그냥.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라.”
리타가 어색하게 얼버무렸다.
마침 기다리던 마차가 왔기에 대화가 끝났다. 리타는 마차에 오르기 전 마부에게 행선지를 확인했다.
“미들랜드로 가는 거 맞죠, 아저씨?”
“네, 사흘 정도 걸립니다. 빠뜨린 거 있으면 지금 말씀하세요. 다음에 들를 마을은 아주 작으니까.”
간단히 짐을 한 번 점검한 후 모두 마차에 올랐다. 최소 여섯 명이 타야 출발하는 마차였다. 일행은 모두 넷. 마부는 두 자리가 더 차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했다.
클로버랜드를 떠나고부터 부쩍 말수가 줄었던 케인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이상한 기분이야.”
케인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새틴만 들으라는 듯. 꽤 오래 가야 할 테니 잠시 눈을 붙일까 하던 새틴은 자세를 고치며 물었다.
“왜, 어디 안 좋아?”
“그건 아니야. 이렇게 멀리까지 나오는 게 처음이라.”
케인은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새틴은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여행이 처음이라 그런가 보네.”
“그런가?”
“금방 익숙해질 거야.”
“넌 아무렇지 않아 보이네.”
뜨끔했지만 새틴은 태연한 체 웃었다.
“그래 보여? 성격이 무뎌서 그러나.”
새틴은 한숨 자야겠다며 눈을 감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 케인의 허벅지를 베고 눕지는 못했지만 어깨에만 기대도 제법 편했다.
어깨를 살짝 낮춰 주며 케인이 속삭였다.
“혹시 불편하면 말해.”
“……응.”
새틴은 이런 다정함이 때때로 간지럽게 느껴졌다. 솔직히 싫지만은 않았다.
케인은 새틴이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 ∞ ∞
말은 달리기를 좋아하는 동물이지만 그렇다고 하루 종일 달릴 수는 없다. 탈진하지 않으려면 달리는 중간중간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 새틴도 안다.
‘그야 마차를 한두 번 타는 게 아니니.’
말이 쉬는 사이 새틴은 잠깐 스트레칭을 하러 내렸다. 일행은 물론 다른 승객들도 내렸다.
새틴이 잠든 사이 친분이 생겼는지 리타는 모르는 사람과 잘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넉살이 좋지는 않은 에드워드는 리타의 곁이 아닌 새틴과 케인의 옆에서 허리를 붕붕 돌렸다.
“왜 그렇게 봐?”
갑자기 케인이 퉁명스러운 소리를 해 새틴은 고개를 들었다. 새틴이 아니라 에드워드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괜한 트집인가 했더니 정말로 케인을 보고 있었는지 에드워드는 당황하지 않고 말을 받았다.
“궁금한 게 있어서 말입니다.”
“뭔데.”
“케인 씨는 마법을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새틴은 케인이 짜증을 낼까 봐 약간 긴장했다. 그런데 의외로 케인은 성질을 부리지 않고 지그시 웃었다.
“누구면 어쩌려고.”
웃는다고 말투까지 상냥해지진 않았다.
“어쩌려는 건 아니고 궁금했을 뿐입니다.”
에드워드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인 후 말을 이었다.
“예전에 새틴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새틴 씨를 만나고도 별생각 없었습니다. 우연히 이름이 같은 줄 알았죠.”
허리 스트레칭을 하느라 상체를 한껏 뒤로 젖히고 있던 새틴은 갑자기 들린 제 이름에 놀라 배에 쥐가 날 뻔했다. 겨우 몸을 일으키고 에드워드를 보았다.
에드워드는 잔잔한 물에 돌을 던진 사람 같지 않게 태연했다. 그래서 알았다.
‘이거 갑자기 꺼낸 얘기가 아니구나.’
새틴은 바짝 긴장했다.
‘설마 이제 와서 흑마법사의 제자라며 날 끌고 가진 않겠지?’
그럴 가능성은 작다. 에드워드는 케인이 마왕을 부르려 했다는 얘기를 듣고도 신고하지 않았다. 생김새는 고지식해 보이나 실제 성격은 그보다 융통성이 있다.
에드워드는 새틴이 아니라 케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의 제자인 새틴이라는 아이가 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사망했다, 그렇게 알려져 있는데 말입니다. 그 아이가 정말 흑마법사의 제자였을까요?”
“글쎄.”
케인은 여전히 가벼운 미소를 띤 낯이다. 새틴처럼 긴장한 기색은 전혀 없다.
“혹시 그때 죽은 줄 알았던 아이는 무고하고, 살아난 아이들 사이에 진짜 흑마법사의 제자가 있던 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그게 내가 아니냐고 묻고 싶은가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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