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데이지랜드는 클로버랜드와 마차로 겨우 이틀 거리라 분위기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유행도 비슷한지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복장이 익숙했다.
‘어느 쪽이 선두주자일까, 이크.’
새틴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행인과 부딪칠 뻔하자 케인이 쓱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두 걸음.”
케인이 경고하듯 짧게 읊조렸다. 새틴은 기가 차 중얼거렸다.
“여긴 위험하지도 않잖아…….”
새틴의 불만을 케인은 들은 체도 안 했다.
에드워드의 뒤를 따라가다 보니 점점 클로버랜드와의 차이점이 드러났다. 날이 그리 선선하지도 않은데 케인이나 에드워드처럼 긴 로브를 입은 사람이 여럿 보였다. 아마도 여행자이리라.
“여긴 여행자가 많은 거 같아.”
새틴의 말에 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썹 사이를 살짝 찌푸린 채 주위를 휘둘러보며 대꾸했다.
“클로버랜드에 일어난 일을 모르거나 과장이라 생각하는 거겠지.”
아마도 후자가 맞을 거라고 새틴은 짐작했다.
검은 안개 때문에 클로버랜드가 고립되었던 기간은 겨우 이틀이다. 당사자들에게 이틀의 고립은 아주 긴 시간이지만 외부인들이 보기엔 아니다. 이틀 정도야 순식간에 지나간다. 원래 시간은 힘든 일이 있을 때 느리게 가는 법이다.
‘플랭크를 할 때는 시간이 정지한다는 얘기도 있잖아.’
클로버랜드에 머무르던 여행자들은 모두 떠나 버렸다지만 이곳을 보니 원래의 모습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성싶다.
일단 클로버랜드의 시민이 된 입장에선 다행이나 의문이 들었다.
‘수도는 여기보다 머니까 클로버랜드의 일에 관해서도 잘 모르지 않을까?’
가장 가까운 도시에서도 이리 무심한데 수도에서 호들갑을 떨 것 같진 않았다. 대신전은 시련과 더 큰 시련을 정말로 걱정하고 있을까?
‘신탁은 어떻게 내려오는 거지.’
케인은 덮어놓고 의심했지만 새틴은 궁금증이 일었다. 정말 그들은 신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혹시.
‘누나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아니, 섣부른 기대는 하지 말자.’
새틴은 애써 진정했다. 확실치 않은 일을 기대하면 낙심할 가능성이 크다. 일단은 눈앞의 일만 생각하는 편이 낫다.
새틴은 케인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데에 골몰해 걸음을 옮겼다.
일행은 곧 에드워드가 묵는 여관에 도착했다. 썩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여관이었다.
리타는 그리 탐탁잖은 듯 여관의 외관을 훑어봤지만 옮기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여행에는 이런 묘미도 있는 법이지.” 하며 혼잣말만 했다.
리타는 일 인실을, 케인은 이 인실을 빌렸다. 케인은 당연히 새틴이 자신과 같은 방에 묵을 거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리타는 이제 그 정도로는 찰거머리라며 흉을 보지도 않았다.
에드워드가 일행을 아까 언급한 식당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식사하면서 얘기를 해 볼까요? 여러분이 어쩌다 다시 모이셨는지 참 궁금하군요.”
새틴은 그 말을 듣고서야 알아차렸다. 에드워드는 지금 이 구성원들이 왜 다시 모였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대신전발 소문에 관해서도 모르는 게 아닐까. 리타는 그저 기다리라는 말만 했을 뿐 무엇 때문에 기다려야 하는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은 모양이니.
기가 차서 새틴은 리타를 쳐다보았다가 이내 에드워드를 쳐다보았다. 생각해 보니 에드워드 쪽이 더 어이없다.
‘그럼 얘는 이유도 모르면서 리타가 기다리란다고 그냥 기다린 거야?’
이거 순례는 완전히 뒷전이 아닌가.
∞ ∞ ∞
대신전에서 시작됐다는 소문을 들은 에드워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무언가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의도?”
리타가 되묻자 에드워드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 지나치게 빨리 퍼지지 않았습니까. 수도에서 클로버랜드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일부러 사람을 보내 퍼뜨렸다고 하는 편이 옳겠지요.”
새틴도 그런 의심을 했던지라 말없이 수긍했다.
에드워드의 말이 이어졌다.
“이곳 사람들은 클로버랜드에서 일어났던 일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클로버랜드에서 온 사람들이 있지 않아? 직접 겪은 얘기인데도 안 믿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리타가 물으니 에드워드가 고개를 저었다.
“안 믿는 게 아닙니다. 다만 과장일 거라고 생각하죠. 치안청이 일부러 선동을 하려고 별거 아닌 일을 크게 만들었다고요.”
“클로버랜드 치안청이 여기까지 악명을 떨치는 거야?”
“그도 그렇지만 협박범에 관해 알려져 있는 탓이 더 큽니다.”
“협박범?”
리타보다 먼저 케인이 에드워드의 말을 받았다.
그때 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와 잠깐 이야기가 끊겼다. 종업원이 요리를 늘어놓고 떠난 후 에드워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클로버랜드 치안청에 지속적으로 협박 편지가 왔다는 거 알고 계십니까?”
대답이 아닌 물음이었다. 리타는 고개를 저었고 케인은 가만히 있었다. 새틴은 슬쩍 눈치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새틴은 클로버랜드에 처음 발을 들인 날 협박 편지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협박 편지 때문에 순찰과 불심 검문이 늘었다던가. 그런데 클로버랜드 사람들은 원래도 종종 있던 일이라며 대수롭잖아했다.
에드워드는 그 일을 잘 모르는 두 명을 위해 설명했다.
“클로버랜드 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내용의 편지가 몇 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왔다고 하더군요.”
“어느 겁쟁이가 사람들을 골리려고 한 짓이겠지.”
리타가 혀를 차며 말하자 케인이 픽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새틴밖에 듣지 못했다. 새틴은 눈을 부릅떴다.
‘설마 네가 한 거니? 주인공이 테러 협박을 하고 있었던 거야?’
정말이라면 그야말로 통탄할 노릇이다.
“최근에는 오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미 데이지랜드까지 소문이 났더군요.”
에드워드의 말에 새틴은 소리 없이 안도했다. 이전에 협박 편지를 보낸 건 분명 큰일이지만 이제라도 그만뒀다면 참으로 다행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 부끄러운 짓을 한 경험이 있다. 케인이 한 행동도 어느 정도 참작해 줘야 한다.
‘중2병이라는 거지, 이게. 얘가 지금은 이렇게 크지만 전엔 나보다 작았다잖아. 애가 철없는 행동 좀 할 수도 있지.’
새틴은 애써 케인을 두둔하며 에드워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데이지랜드는 최근 납치 범죄가 기승이라서요. 부유한 여행자가 대상인데, 그 탓에 분위기가 썩 좋지 않습니다.”
‘납치보다는 그래도 협박이 낫지? 아닌가?’
새틴은 납치와 협박을 당하는 상상을 해 봤다. 어느 쪽도 겪을 일 없을 테지만 굳이 당한다면 그래도 협박이 나을 것 같다. 그나마.
“아무래도 제 발등의 불이 더 뜨거워서인지, 여기 사람들은 마왕성 사태를 믿지 않더군요. 클로버랜드 치안청이 분위기 쇄신을 할 셈으로 작은 일을 과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시민들을 속이려고요.”
“실제로 그런 의도가 있던 것도 맞지 않나.”
케인이 심드렁하게 덧붙이니 에드워드가 살짝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 토벌 후에 있던 행진은 확실히 그런 의도 같았죠.”
에드워드의 말을 마지막으로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식사를 하며 이야기하던 중이라 침묵은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저마다 음식을 조금씩 먹은 후 대화가 재개되었다. 화제는 처음으로 돌아갔다.
“만약 대신전에서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뜨렸다고 하면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의외로 에드워드는 대신전이 그런 짓을 할 리 없다고 믿지 않는 모양이다. 신관치고는 현실적이다.
리타는 구운 돼지고기 뒷다릿살을 우물거리다 가볍게 대꾸했다.
“보통 소문을 퍼뜨리는 건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서지.”
“사람들이 뭔가 하길 바랐을까요?”
새틴은 마왕성이 처음 나타났을 때를 떠올렸다.
클로버랜드 치안청은 신문을 통해 마왕성의 등장을 알렸다. 동시에 포상금을 내걸었다. 사람들은 마왕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먼저 거액에 반응했다.
대신전이 퍼뜨린 소문은 그와 다른 양상이다. 사람들이 대의를 위해서든 물욕을 위해서든 직접 움직일 요인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미묘한 불안만을 느낄 뿐이다.
‘그럼 선동이 목적이 아니지 않을까?’
새틴은 생각한 바를 말했다.
“미리 판을 까는 걸지도 몰라.”
“판이요?”
에드워드는 고개를 갸웃하고, 리타는 불룩한 뺨을 한 채 새틴을 쳐다보았다. 케인만 무던한 표정으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별스러운 상황도 아니어서 새틴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클로버랜드 치안청은 돈을 걸어서 사람들이 정상적인 판단을 못 하게 했잖아. 무섭다는 생각도 못 하고 무작정 달려들도록. 다행히 별일 없이 끝났지만 만약 마왕이 정말로 위험한 존재였다면 대참사가 됐을 거야.”
그랬다면 케인 외의 모든 클로버랜드 사람들이 슬퍼했겠지.
반박 의견이 없어 새틴은 마저 이야기했다.
“대신전은 그와 반대로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경계하게 만들 셈이 아닐까? 진짜 큰일이 났을 때 놀라지 않도록.”
이를테면 재난 대비 훈련 같은 거다. 불길한 소문은 사람들의 의식에 걱정을 주입한다. 언제 큰일이 닥칠지 모르니 방심하지 말라고. 큰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정말로 큰일이 난다고 해도 사람들이 조금은 덜 허둥거릴 터.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틴의 의견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다. 리타는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우리가 마신을 물리치겠다고 당장 나설 필요는 없는 건가?”
새틴이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에드워드가 먼저 나섰다.
“마신이요? 리타 씨는 마신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아니, 마왕보다 더 큰 시련이라잖아. 마왕 다음은 마신이지.”
리타가 나름대로 논리를 펼쳤지만 에드워드는 눈살을 찌푸릴 뿐 넘어가지 않았다.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홍수나 가뭄 같은 자연재해일 수도 있지요. 사람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시련이란 보통 그런 것 아닙니까.”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리타가 허를 찔린 표정이 되어선 이마를 쳤다.
‘하지만 마신이 맞을 거야.’
새틴은 다크에이지를 읽었기에 자연재해보다는 마신 쪽이 더 가능성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크에이지를 근거로 댈 수는 없기에 다른 이유를 생각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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