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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71화 (71/139)

71화

모험가 연합의 옆옆 건물이 마침 식당이었다. 이른 오전이다 보니 손님이 아무도 없어 이야기를 나누기엔 더없이 적절했다.

자릿세 삼아 가벼운 음식을 두 개 시키고 새틴은 구석 자리에 리타와 케인을 몰아넣었다.

‘와, 양치기 된 기분. 야호…….’

양들이 생김새만큼 유순한 성격은 아니라던데.

새틴의 무의식적 현실 도피는 허락되지 않았다. 리타가 몹시 영민해 보이는 얼굴로 찬찬히 말했다.

“꼭 위험하다고만 생각할 필요 없어. 난 마법사고 너도 마법사잖아. 마법사가 둘인데 뭐가 무서워?”

괴물 뱀과 골렘에게 마법이 통하지 않아 고생했던 건 그새 까먹었을까. 아니면 마법사로서의 자부심이 너무 강한지도 모르겠다.

새틴이 그 점을 지적하기 전에 케인이 먼저 대꾸했다.

“내가 널 따라갈 거라고 생각해?”

“새틴이 오면 올 거잖아.”

“아니지. 새틴을 보낼 생각이 없으니 나도 안 가겠지.”

“어쨌든 결정은 새틴이 하는 거야.”

리타가 새틴을 쳐다보았다. 케인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새틴을 쳐다보았다. 부담스러운 시선 속에서 새틴은 억지로 입을 열었다.

“어, 음. 네 마음은 알겠어. 리타, 너는 좋은 일을 하려는 거잖아. 그렇지?”

“그래!”

“근데 사실 나는 저번에도 별로 한 일이 없잖아. 내가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은데.”

리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얼마나 도움이 됐는데. 네가 없었으면 나랑 에드워드는 질질 녹아서 마왕성 지하의 광택제가 됐을걸!”

상상만으로도 징그러운 소리를 하고 있다. 새틴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이어 말한다.

“그리고 행여 도움이 안 됐다고 해도 그게 뭐가 중요해. 우리가 동료인 게 중요하지!”

조금 감동적이다. 승패보다는 과정에 집중하는 마음가짐이 꼭 스포츠맨십 같기도 하고. 그러나 감동과 별개로 새틴은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도 나보다는 도움 될 만한 사람이 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새틴은 살짝 분위기를 살핀 후 케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케인은 잠시 의아해하다 눈살을 찌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내가 가라고?”

“아니, 꼭 가라는 건 아니고, 혹시 네가 관심이 있다면 가도 된다는 뜻이지. 클로버랜드에 있으면 그.”

“그?”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말이야.”

케인은 정말로 마신 토벌에 관심이 없을까.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본능적인 흥미라든지, 그런 게 정말 조금도 없을까?

새틴은 케인이 클로버랜드에 남아 주인공답지 않은 삶을 살아도 상관없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지. 그렇기에 케인이 주인공다운 삶을 살겠다고 떠나도 상관없다.

물론 아까 물었을 때 케인은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잠깐 사이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번복이 꼭 나쁜 일은 아니다.

새틴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정말 진짜 진심으로 아무 관심 없어?”

“없어.”

케인이 즉답하자 다시 리타가 새틴을 설득했다.

“새틴, 도움 되는 사람보다 믿을 만한 사람이 더 찾기 힘든 법이야.”

맞는 말이다. 도움이 되는 사람은 찾기 어렵지 않다. 조금 전에 들렀던 모험가 연합만 해도 돈과 노동력을 연결해 주는 곳이 아닌가. 그러나 믿음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난 네가 믿을 만한 친구라고 생각해.”

그리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것도 아닌데 리타는 새틴을 철석같이 믿었다. 고맙긴 하나 그런 이유만으로 위험한 길을 따라나설 순 없다.

새틴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니 리타의 어조가 점점 빨라졌다.

“혹시 다칠까 봐 걱정이야? 걱정할 필요 없어. 에드워드를 데려가면 다쳐도 바로 치료할 수 있으니까.”

새틴은 치료할 수 있으면 다쳐도 된다는 저 사고방식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일단은 다른 것부터 물었다.

“에드워드하고도 연락이 닿았어?”

“아직 닿진 않았지만 곧 닿을 거야. 사람을 많이 보냈으니까.”

“사람?”

“모험가 연합에서 사람도 찾아 주거든. 오늘은 널 찾아 달라고 의뢰할 생각이었어.”

리타는 세상이 참 좋아지지 않았냐며 웃었다. 동의하진 않지만 새틴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재회했을 때부터 리타의 얼굴에는 줄곧 자신감이 넘쳤다. 당장은 거절해도 결국 새틴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믿고 있을까?

문득 새틴은 의문이 들었다.

‘이건 혹시 일종의 강제력일까?’

리타의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라 세계의 강제력이라면 어쩌지. 자유 의지처럼 보이지만 사실 무의식에 세계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든지.

빙의물에는 종종 있는 패턴이다. 사건을 떠나 안빈낙도하려던 주인공들은 어떻게든 사건의 중심으로 돌아간다. 원작의 주인공보다 더 큰 활약을 할 운명이다.

‘이게 만약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강제력이라면? 계속 거절해도 되나? 그럴 수 있나? 아니, 난 주인공이 아니니까 상관없나? 근데 내가 안 가면 케인도 안 갈 텐데?’

새틴이 계속 침묵하자 리타는 케인을 건드렸다.

“야, 찰거머리.”

케인은 대답하지 않고 리타를 쳐다보기만 했다. 리타는 아까보다 더 영민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서 말했다.

“이번 일은 너한테도 좋은 일 아니야?”

“무슨 개소리야?”

“새틴이 간다고 하면 너도 갈 거 아냐.”

“새틴이 안 간다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아니, 생각해 봐. 하루 종일, 아니지. 몇 날 며칠을 같이 다니면 넌 좋지 않아?”

“누굴 진짜 거머리로 아나.”

케인은 인상을 쓰고 대꾸했지만 새틴은 봐 버렸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리타는 케인의 마음까지 마구 흔들어 댔다.

“무슨 일 생기면 네가 다 해 줄 텐데, 생색내기도 좋겠네.”

“누가 생색을 낸다고.”

“야영이라도 하면 같은 담요 덮고 잘 수도 있고. 으, 이건 좀 징그럽다.”

리타는 제가 말해 놓고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케인은 답이 없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새틴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지금 설득되고 있는 거야? 이딴 소리에?’

누가 보면 새틴이 케인의 목숨을 구한 친구가 아니라 짝사랑 상대인 줄 알겠다. 무심코 그리 생각한 새틴은 이내 당황했다.

‘……아니지? 아니겠지?’

의처증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긴 한데 진짜 의처증일 리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왜 안 되냐고 하면 물론 할 말이 없다.

어영부영 이야기가 굴러가고는 있지만 이미 원래의 이야기와는 상당히 달라졌다. 리타는 에드워드와 썸을 타고, 마왕은 엉뚱한 사람이 무찔렀다. 그리고 케인은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가 됐다.

주인공의 지위조차 간당간당한 케인이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해도 사실 굉장한 이변은 아니다.

‘옛날 판타지 소설들이 오히려 브로맨스에 관대했지. 그런 게 우정이면 세상엔 사랑이 존재하지 않아…….’

새틴은 멍한 머리로 딴생각을 하다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그렇다고 케인이 나를 좋아하면, 좀 그렇잖아. 나는, 그, 진짜도 아닌데.’

흘끔 케인의 얼굴을 봤다가 새틴은 뜨끔했다. 케인이 새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왜, 왜?”

“어떻게 하면 좋겠어?”

“……왜 나한테 물어.”

“들었잖아. 네가 가면 나도 간다고.”

난처함을 감추지 못하고 새틴이 우물쭈물하니 케인이 눈을 그윽하게 내리떴다. 설마하니 일부러 예쁜 척을 하는 것은 아닐 텐데 새틴은 목이 탔다. 작게 헛기침하니 케인이 물잔을 밀어 주었다.

새틴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는 동안 케인이 다시 물었다.

“갈까?”

새틴은 대답을 미루려고 물을 더 마셨다.

“네가 싫다면 같은 담요를 덮자고는 안 할게.”

“크흡!”

억지로 마시던 물이 역류했다. 입과 코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이자 리타가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저번 날 헤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가방에 뭐가 많이 든 행색이다.

새틴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케인은 여전히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새틴은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물었다.

“……나하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건, 내가 네 목숨을 구해 준 친구라서지?”

“따지자면 그렇지.”

케인은 새틴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는 기색이었다. 케인에게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지만 순수해 보였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까?

사라진 새틴은 케인에게 분노를 남겼다. 그리고 지금의 새틴은 그 분노를 두려움으로 바꿨다.

두려움이란 경계가 흐린 감정이다. 새틴도 그것을 안다. 어두운 밤. 두려운 것이 어둠인지, 고요함인지, 상상 속의 귀신인지, 어딘가 있을 사람인지. 산 자인지, 죽은 자인지. ㅇㅇ는 언제나 분간하지 못했다.

케인이 그런 두려움을 품은 채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케인이 잃을까 두려워하는 그것은 이미 사라진 것이다.

새틴은 케인이 보상을 받길 바란다. 하지만 사라진 새틴은 영영 되돌려받지 못하겠지. 그렇다면 본래 가졌어야 하는 것이라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모험과 명예, 친구, 사람들의 환호, 역사에 남을 발자취.

이리 생각하는 것 역시 세계의 강제력 때문일까. 본래대로라면 거부감이 들어야 하지만, 여기는 누나가 만든 세계다. 주인공을 주인공답게 만드는 것이 누나의 바람이라면 그 결과는 결코 틀릴 리 없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번복은 딱히 나쁜 일이 아니다. 생각을 마쳤다.

새틴은 씩씩한 척 말했다.

“좋아, 가자. 이번 모험은 분명 우리 우정을 더 공고히 만들어 줄 거야.”

“뭐야, 닭살 돋게.”

“아무튼.”

새틴은 케인이 더 말하도록 시간을 주지 않고 리타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타는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고 웃었다.

“잘 생각했어. 우정을 위한 모험이라니, 정말 멋지다.”

심지어 새틴의 속도 모르고 손뼉까지 친다. 그저 케인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길 바라서 한 말일 뿐인데 리타에게는 퍽 낭만적으로 들린 모양이다.

자축을 마친 리타가 대장답게 첫 번째 일정을 읊었다.

“자, 그럼 일단 신전에 들르자.”

“신전? 에드워드를 데리러 가는 거야?”

새틴은 고개를 갸웃했다. 에드워드는 지금 클로버랜드에 없지 않나.

리타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신전에서 성물을 하나 사 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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