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음, 집이지.”
케인이 너무 기겁을 하니 새틴은 좀 민망해졌다.
솔직히 마을의 다른 집에 비해 초라하긴 하다.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다. 수도도 있고, 벽난로도 있고.
살며 불편함을 전혀 못 느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 정도 불편은 어떤 집에서나 느꼈을 거다. 세탁기는 아마 왕궁에도 없을 테니까.
오두막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오르며 새틴은 민망하지 않은 척 말했다.
“곧 저녁이니까 불편해도 오늘은 우리 집에서 묵어.”
“오늘만?”
짧게 되묻는 케인의 목소리가 음산했다.
“어, 음. 여기서 계속 지내기 싫은 거 아니야?”
“맞아.”
“그럼 내일은 다른 데로 가는 수밖에 없지, 않나?”
흘끔 케인의 표정을 본 새틴은 말을 더듬었다. 별다른 실수를 하지 않았는데 케인이 우거지상을 했다. 표정이 좋지 않으니 커다란 체구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케인이 작게 혀를 차더니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절대 나 혼자 안 갈 거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어, 그래…….”
새틴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지금은 저렇게 말해도 얼마나 갈지.
‘내일 아침에 바로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언덕을 모두 올라 텃밭에 도달했을 때 새틴은 위화감을 느꼈다. 텃밭이 말끔한 것이야 마을 사람이 와서 돌봐 준 덕이겠지만 오두막의 열린 문은 무엇 때문일까. 설마하니 마을 사람이 멋대로 집 안까지 들어갔을 리는 없는데.
‘여기 사람들은 그렇게 무례하지 않단 말이지.’
새틴이 걸음을 서두르자 케인은 의아해하면서도 따라왔다. 곧 새틴이 왜 서둘렀는지 알아차리고 말했다.
“집에 누가 있나 본데.”
새틴은 대답하지 않고 얼른 텃밭을 가로질렀다. 오두막이 가까워지며 안의 기척도 느껴졌다. 무언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가 저녁 준비라도 하듯.
지금이 저녁을 먹을 시간이긴 하다만 대체 누가 남의 집에서, 그것도 빈집에서 요리를 하는 거지? 우렁각시?
이윽고 새틴은 열린 문 앞에 이르렀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가 움찔 놀랐다. 수염이 부숭부숭 돋은 덩치 큰 사내가 부엌에서 나오다가 새틴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시오?”
새틴이 하고 싶은 말이다.
∞ ∞ ∞
졸지에 무주택자가 된 새틴은 크게 상심했다.
‘원래도 내 집이 아니긴 했는데.’
내내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니 그만 제 소유라 착각하고 말았을까.
새틴은 할아버지와 오두막에 살며 실소유주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 섣불리 판단했다. 초라한 오두막 하나를 구태여 찾으러 올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 버렸네.’
아까 만난 숲지기의 말에 따르면 얼마 전 관청이 숲을 다시 팔았단다. 인근 숲의 새로운 주인은 숲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고, 숲지기로서는 스카우트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일터로 돌아온 숲지기는 원래 지내던 오두막에 짐을 풀었다. 그사이 오두막에 누가 들어와 살았다 한들 알 게 무언가. 그가 주인인데.
새틴으로서는 비용 청구를 당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형편이었다.
‘이세계도 주택난이 심각한가요…….’
망연자실한 와중 재미있는 타이틀을 뽑아 보았지만 별로 흥은 나지 않았다.
반면 케인은 어딘지 후련해 보였다. 식사 중이던 마부를 붙잡고 당장 이 마을을 떠나자고 재촉했다. 마부는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따졌지만 케인이 삯을 세 배로 준다고 하니 포크를 내던지고 일어났다.
‘더러운 자본주의.’
아무튼 새틴은 클로버랜드로 돌아왔다.
‘돌아왔다는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클로버랜드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묵을 여관을 찾는 것이었다. 가는 데만도 시간깨나 걸렸는데 왕복을 했더니 이미 새벽이었다. 다른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날이 밝은 후 새틴은 케인을 따라 거리로 나갔다.
“어디 가?”
“지낼 곳은 있어야 할 거 아냐.”
길을 몰라 그저 발 가는 대로 다니던 새틴과 달리 케인은 클로버랜드의 골목골목을 잘 아는 듯했다. 걸음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하기야 얜 여기 출신이지.’
새틴은 케인을 믿고 졸졸 따라갔다.
케인이 향한 곳은 복덕방이었다. 물론 이곳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않겠지만.
늙수그레한 노인이 가게를 지키고 있다가 케인을 보고 목을 뺐다.
“일 찾으러 왔냐?”
아무래도 케인을 원래 아는 사람인지 말투가 퍽 편했다.
‘의외네.’
여태 새틴은 케인이 누군가와 친분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케인도 사람이니 알고 지내는 사람이 있을 만도 한데.
케인은 흘끔 새틴을 한 번 보더니 노인을 향해 대답했다.
“아니, 집을 찾으려고.”
나이가 세 배는 많아 보이는 노인에게 케인은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썼다. 유교의 나라에서 나고 자란 새틴이 당황하든 말든 할 말을 했다.
“둘이 살 거야. 너무 시끄럽지 않으면 좋겠어.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야 하고, 채광도 좋아야 돼. 수도가 깨끗하면 더 좋아. 아, 쓰레기 수거가 자주 밀리면 안 돼. 더러운 건 질색이야.”
케인의 설명을 들으며 노인은 인상을 썼다. 까다로운 조건에 놀랐을까.
새틴은 다른 이유로 놀랐다.
“둘이 산다는 게 무슨 말이야? 너랑 나랑 산다고?”
“갈 데 있어?”
“없긴 한데…….”
“여관에 장기 투숙하는 편이 나아?”
“아니, 그건 아닌데.”
“뭐가 문제야?”
“난 네가 내 집을 알아보러 온 줄 알았단 말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나 혼자 지낼 집 말이야.”
이유야 어찌 되었든 케인은 새틴을 아주 걱정하고 헌신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그런데 어제 새틴이 무주택자가 되는 모습을 봤다. 몸을 의탁할 지인이 없는 것도 안다.
새틴으로서는 조금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지낼 곳을 알아봐 주진 않을지. 거기에 더해 일자리를 알선해 주면 더 고맙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케인은 클로버랜드에서 오래 지냈고 그만큼 잘 아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지.
케인이 표정 없는 얼굴로 물었다.
“혼자 지내면 돈 나올 구석은 있어?”
일을 구하면 된다. 케인이 도와주면 좋기야 하겠지만 혼자서도 못 구할 이유는 없다. 새틴은 성인이고 할아버지와 살 적에도 여러 잡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거야 일을 해서…….”
새틴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케인의 얼굴에 서서히 불편한 심기가 드러나고 있었다. 새틴은 공연히 죄지은 사람의 기분이 되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이래.’
곧 케인이 입을 뗐다.
“넌 나하고 같이 살 거야.”
“나한테도 물어봐 주지 않을래?”
“어떤 집을 원하는데.”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새틴이 할 말을 찾느라 입을 뻐끔거리는데 여태 구경하던 노인이 끼어들었다.
“집을 볼 거야, 말 거야?”
∞ ∞ ∞
“이 집이야.”
노인은 짐짓 자랑스레 가슴을 폈지만 케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어쩌라고.”
“괜찮지 않아?”
“안을 봐야 알지. 겉만 보고 어떻게 알아.”
좋게 생각하면 꼼꼼한 태도다. 노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그야 그렇지.” 하고 대문을 열었다. 노인의 뒤를 케인이 따르고, 새틴은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작은 단독 주택은 꽤나 번듯했다. 정원이 좁긴 하나 번화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감지덕지였다. 꽃나무를 키우기는 무리지만 조그만 텃밭을 하나 만들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새틴은 텃밭을 만든다면 뭘 심을지 잠깐 고민했다.
‘고추는 힘들어. 일을 해야 하니까 손이 덜 가는 걸로 심어야지.’
생각하다 보니 우스웠다. 아직 이 집에 살기로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뭘 심을지 생각하고 있다니. 더부살이 주제에.
“왜 웃어?”
새틴이 웃는 소리를 들었는지 케인이 돌아보았다. 새틴은 손사래를 치며 둘러댔다.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닌 게 뭔데.”
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시 둘러댔다간 괜한 의심만 살 판이라 새틴은 재빨리 털어놓았다.
“그냥, 텃밭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
말을 하다 보니 쑥스러워 새틴은 멋쩍게 웃었다. 케인은 의외로 비웃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문은 하늘색이었다. 칠한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색이 아주 또렷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며 노인이 또 자랑했다.
“이 주변에선 제일 최신식이야. 지은 지 아직 5년밖에 안 됐거든.”
“말로는 뭐라고 못 하겠어.”
그리 대꾸하면서도 케인은 꽤 성의껏 집을 살폈다. 벽지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바닥을 두드려 보는가 하면 창문을 여닫으며 소리를 듣기도 했다.
새틴은 케인만큼 꼼꼼히 보지는 않았다. 그래도 괜찮은 집이라는 노인의 말에 동의했다. 지난 4년간 지내던 오두막에 비하면 어느 집이 좋지 않겠느냐만 이 집은 정말로 좋아 보였다.
‘노부부가 살던 집이랬나?’
오는 길에 노인에게 들은 설명을 떠올렸다. 예상외로 중후하기보다 화려한 집이다. 벽지엔 촘촘한 무늬가 빼곡하고, 계단 난간의 장식 조각은 손때를 타 반들거렸다.
가구도 하나같이 고풍스러웠다. 응접실의 의자는 임금님이 쓰던 거라고 해도 깜빡 속을 정도다.
‘하긴, 단순한 디자인은 오히려 현대에 와서 나타났다고 하니까.’
그리고 특히 부엌이 좋았다. 부엌의 설비는 과장을 좀 보태 1900년대 중반의 미국 가정집 정도는 되어 보였다. 오두막의 부엌에서도 새틴은 별 불편 없이 요리를 했는데 여기서는 더 쉽게 할 수 있을 듯했다.
“어때?”
별다른 문제점을 찾지 못한 케인이 새틴의 의견을 물었다.
“난 괜찮은데.”
“괜찮은 정도로는 안 돼. 마음에 드냐고.”
“아, 어. 마음에 들어.”
엉겁결에 대답하자 케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새틴의 말이 진짜인지 그냥 하는 말인지 가늠하는 표정이었다. 옆에서 노인이 새틴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며 호응했다.
“요새 이만한 집 찾기 어려워. 여기가 말이야. 시장도 가깝고, 이웃 사람들도 다 괜찮아.”
베테랑 부동산업자처럼 노인이 새틴의 마음을 들쑤셨다. ㅇㅇ는 내내 아버지와 살다 나중엔 누나와 산 터라 자취 경험이 없었다. 노인의 말에 냉큼 넘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은 노인을 살짝 노려보다 한숨을 쉬었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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