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시험이란 게 기준에 따라 응시자들의 당락과 순위를 가리는 거잖아. 그렇다면 시험장과 시험관이 아무리 거창해도 응시자보다 중요할 수 없지.”
새틴은 수많은 기록 경기들을 생각했다. 이를테면 육상이나 수영 같은. 그 종목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누가 신기록을 세웠다고 하면 반짝 관심을 보인다. 반면 경기장이나 심판에 관해서는 대부분 무심하다. 오심이 나온 것이 아니고서야.
용사가 시험을 가장 먼저 통과하는 사람에게 붙는 칭호라고 가정해 봤다. 그러니까 마왕을 가장 먼저 토벌한 사람을 용사라 한다면.
‘용사님은 마왕성 MVP……. 어, 좀 재밌어 보이는데?’
에드워드가 새틴의 의견에 동의하고 나섰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면 전부 이해가 되는군요.”
리타는 그런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다 또 의문을 표했다.
“근데 선별해서 뭘 어쩌려는 거였을까?”
“꼭 뭘 어떻게 할 필요는 없죠. 그저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나오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말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뭐 하러 그런 사람을 만드냐고.”
“감히 짐작을 하자면, 신께서 인간들을 북돋워 주시는 방법이 아닐까요?”
“음, 우상을 만들어 준다는 뜻?”
“신전에서 본 기록에도 그런 의견이 있었습니다. 상당히 급진적인 의견이긴 하나 꼭 아니라고 할 순 없다고 봅니다.”
긴가민가하던 리타가 케인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넌? 넌 어떻게 생각해?”
“아무 생각도 안 하는데.”
케인은 아무래도 좋은지 다른 데를 보며 하품을 했다. 슬슬 졸릴 시간이기는 했다.
“하여간 비협조적이라니까.”
리타는 작게 불만을 토로했지만 케인을 붙잡고 싸우지는 않았다. 다시 새틴을 쳐다보며 물었다.
“일단 네 말이 맞는다고 쳐. 그럼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린 왜 여기 있는 거야? 시험이 끝났을까?”
“글쎄…….”
새틴은 말꼬리를 흐리며 멋쩍게 웃었다. 아직 시험 중인지, 아니면 시험이 끝났는지에 대해서는 판단할 근거가 부족했다.
때마침 에드워드가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분, 여기 길이 있습니다.”
불화살이 에드워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스르륵 이동하자 어둠에 가렸던 길이 드러났다. 오랫동안 사람이 다니지 않아 가장자리에 잡풀이 심하게 우거져 있긴 해도 일단은 길이었다.
“와!”
리타가 반색하며 배낭에서 나침반을 꺼냈다.
여기가 클로버랜드 남쪽 숲이라면 길을 따라 북쪽으로만 가도 클로버랜드에 도착할 수 있다. 마차를 타고 온 거리를 걸어서 가려면 다소 시간이 걸리기야 할 테지만.
에드워드가 잡풀을 헤치고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정확히 여기가 어딘지 알게 되면 우리의 가정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왜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도요.”
다행히 길을 따라 걸은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새틴 일행은 불빛을 발견했다.
가장 먼저 리타가 호들갑을 떨었다.
“사람들이 있나 본데? 그것도 꽤 많이.”
리타의 말대로 불빛 근처에 적잖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듯했다. 아직 거리가 제법 먼데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사람들이 보이니 자연히 일행의 걸음이 빨라졌다. 어떻게 저리 한자리에 모였는지는 모르나 이 상황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한 명은 있지 않을까.
그런데 사람들이 가까워질수록 무언가 이상했다. 정확히는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새틴은 고개를 갸웃하다 알아차렸다.
‘여기 아까 거기 아냐?’
줄줄이 늘어선 마차와 사람들. 여태 지나온 길과 달리 깨끗한 길. 아무래도 마왕성이 있던 자리 같았다.
‘맞는 거 같은데?’
에드워드가 보폭을 늘려 성큼 앞으로 가더니 말했다.
“마왕성이 없어졌군요.”
“그 큰 게 갑자기 없어졌다고?”
리타가 믿지 못하고 반문했지만 에드워드는 태연했다.
“갑자기 나타났으니 갑자기 없어졌다 해도 이상할 건 없지요. 그보다 이렇게 되면 아까 새틴 씨가 한 말이 꽤 가능성 있지 않습니까? 마왕성이 시험장이란 거요.”
먼저 모여 있던 사람들은 불쑥 나타난 새틴 일행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누군가는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기까지 했다.
“마차 타려면 저 뒤로 줄 서시오.”
“클로버랜드로 돌아가는 마차입니까?”
에드워드가 물으니 친절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성은 어떻게 됐습니까?”
“나도 보진 못했는데 갑자기 사라졌다더구만. 문지기들 말로는 시험이 끝났으니 다 돌아가라고 했대.”
에드워드가 거보라는 듯 리타에게 눈짓한 후 또 물었다.
“마왕을 물리친 겁니까?”
“그렇다는데 진짠지는 모르겠고. 내일쯤 신문에 나오겠지. 아무튼 안개가 없어진 걸 보면 정리가 되긴 했나 봐.”
친절한 이는 대충 설명하고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일단은 새틴 일행도 줄 끝에 섰다. 마차를 타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판이라 바닥에 대충 자리를 만들어 앉았다.
새틴은 그새 근육이 뭉친 다리를 툭툭 두드리며 목을 쭉 빼 줄을 살폈다.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빨리 왔으면 우리가 마왕을 잡았을지도 모르겠는걸.”
“생각보다 마왕이 변변찮았나 봐. 그놈들 별로 대단해 보이지도 않던데.”
“성물이 번쩍번쩍했다는 얘긴 진짠가?”
“이렇게 쉽게 끝날 줄 알았으면 치안청에서 포상금을 그렇게 크게 걸지 않았을 텐데.”
가만 듣자 하니 다들 기회를 놓쳤다 생각하며 아까워하고 있었다. 마왕을 퇴치한 사람들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던 걸까.
하기야 새틴 일행도 여태 다친 데 하나 없다. 마왕성이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마왕 앞까지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랬어야 하지 않나? 주인공들이 다 여기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마왕을 무찔렀다고 하니 새틴은 영 께름칙했다.
‘따지자면 마왕성이 시험장인 것부터가 정상적이지 않지만.’
전개가 어떻게 되려는지 이제는 전혀 짐작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아예 손을 떠나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알던 이야기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든지.
그리 생각하니 어쩐지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다크에이지는 누나의 흔적이었는데.
작게 한숨을 쉬는 새틴의 옆에서 케인이 중얼거렸다.
“그만두길 잘했네.”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일까.
새틴이 반사적으로 쳐다보자 시선을 느꼈는지 케인이 고개를 들었다.
“왜?”
“아니, 무슨 말인가 해서.”
“난 마왕이 나타나면 클로버랜드 사람들이 다 죽을 줄 알았거든.”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다시 들으니 떨떠름해서 새틴은 말문이 막혔다. 케인은 픽 웃더니 이어 말했다.
“마왕이 겨우 이런 건 줄 알았으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텐데.”
“이제 안 찾아도 되잖아.”
“그렇지. 사람들이 죽든 말든 이제 상관없지.”
……원작의 내용대로 마왕을 물리쳤더라도 이야기가 제대로 흘러가기는 무리였을까.
∞ ∞ ∞
줄은 한참이나 줄지 않았다. 클로버랜드에 갔다가 돌아온 마부는 해가 뜬 후에나 마차가 충원될 테니 줄 뒤편의 사람들은 야영 준비를 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조언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즉각 불만을 토로했지만 그런다고 없는 마차가 생겨나진 않았다. 결국 대부분 사람들이 야영 준비를 했다. 새틴 일행도 그중에 포함되었다.
다행히 날이 춥지 않아 거창한 작업은 필요치 않았다. 새벽녘 공기가 쌀쌀해질 때를 대비해 모포를 한 장씩 두르는 것으로 끝이었다.
새벽이 되니 주변의 소음도 거의 잦아들었다. 잠들지 않은 사람들도 피로해서인지 아까처럼 떠들지 않았다.
새틴도 하품을 하며 꾸벅꾸벅 졸았다. 박자 놓친 딱따구리처럼 끄덕대다 몇 번인가 선잠에서 깨자 케인이 혀를 차며 제 허벅지를 두드렸다.
“누워.”
“아니, 괜찮은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 줄 알고. 그냥 누워.”
새틴은 못 이긴 척 슬며시 케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케인의 허벅지는 바닥과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딱딱했지만 새틴은 금세 잠이 들었다. 할아버지와 지낼 때도 늘 바닥에서 잔 터라 불편한 잠자리는 졸음을 쫓아내지 못했다.
그럭저럭 숙면하던 중 간혹 주위의 소음에 깨어날 때마다 새틴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어쩐 일이지.’
평소 꿈을 자주 꾸는 편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자꾸만 꿈을 꾸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이와 비슷한 꿈을 예전에도 꾼 적이 있는 것 같다. 아주 시끄럽고 호들갑스럽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두서없는 생각을 하며 자다 깨다 하다 보니 해가 떴다. 여름이 목전이라 해가 떴다 해도 아직 이른 시간일 테지만 새틴은 몸을 일으켰다. 내내 잠을 안 잤는지 케인의 눈이 또렷했다.
간밤에 하품하는 모습을 봤는데 억지로 졸음을 참았을까. 왠지 미안해서 새틴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물었다.
“피곤하지?”
“별로.”
진심인지 허세인지는 모르나 케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왜 안 피곤한 체하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새틴은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나만 잤나?’
리타와 에드워드도 자고 일어난 기색이 아니다. 피로가 짙게 묻어나는 얼굴이었는데 어째 분위기가 묘했다.
“배는 고프지 않습니까?”
“나는 괜찮은데. 넌?”
“저도 괜찮습니다.”
“클로버랜드로 돌아가면 내가 아주 크게 한턱낼게.”
“아주 클 필요는 없습니다. 적당히만 해도 됩니다.”
“뭐야, 안 먹는단 소린 안 하네?”
“왜 안 먹습니까. 사 준다는데 먹어야지요.”
대화를 나누는 리타와 에드워드의 거리가 이상하게 가까웠다. 함정에 떨어지며 비의도적 스킨십을 했을 때는 안 친한 홍학들처럼 이상하게 거리를 벌리더니, 지금은 1인 좌석에 억지로 끼어 앉은 커플처럼 친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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