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뱀 머리가 쇄액, 쇄액, 소리를 지르며 우박을 피해 물러났다. 우박은 겨우 3초 남짓 쏟아졌을 뿐이지만 몸을 피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리타와 에드워드가 무사히 이쪽에 합류했다. 그리고 뱀 꼬리에 박힌 검을 발견한 에드워드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케인 씨가 저런 겁니까?”
왜인지 새틴이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해 새틴은 약간 시무룩해졌다. 에드워드는 새틴의 속도 모르고 이어 말했다.
“머리 쪽엔 칼날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꼬리 쪽은 아니군요.”
“잘라 버릴 생각이었는데 실패했어.”
“다시 해 보죠. 우리가 주의를 끌 테니 케인 씨가 꼬리를 자릅시다.”
에드워드의 의견에 리타가 반발했다.
“왜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리타 씨, 우리가 주의를 끕시다.”
“알겠어!”
별 의미는 없는 반발이었던지 리타는 금세 수긍했다. 새틴은 가만히 보다가 슬그머니 나섰다.
“나는?”
“넌 뱀이 아까 그거 다시 쓰려고 하면 경고해 줘.”
리타에게서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어딘지 섭섭하다. 가스 누출 경보기도 아니고 부탁할 일이 겨우 그것뿐인가.
그러나 다른 역할을 조를 때가 아니었다. 뱀이 다시 달려들고 있었다.
새틴을 제외한 모두가 맡은 임무를 행하려 움직였다. 리타와 에드워드는 뱀의 머리 쪽으로, 케인은 꼬리 쪽으로.
케인이 뛰어가다가 생각난 듯 외쳤다.
“벽에서 떨어지지 마! 절대로!”
“알았다고…….”
새틴은 순순히 벽에 몸을 붙였다. 썩 멋은 없는 역할이지만 생각해 보면 사실 이게 맞는다.
‘원래 마왕은 셋이 무찌르는 거니까 난 구경하는 게 맞지.’
자기 합리화하던 새틴은 벽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글자?’
아까 리타가 발견한 그 문장이다.
<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일행이 뱀과 싸우느라 고군분투하는 동안 새틴은 간혹 경고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뿐이었다.
‘시험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원숭이의 시험, 뱀의 시험, 그다음에도 무언가 시험이 있다면.
‘인원 제한은 없나?’
원숭이나 뱀은 여러 마리일 수 있지만 설마 마왕이 여러 명일 리는 없다.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여러 명이라고 모두에게 마왕이 배정되진 않을 거란 말이다.
새틴 일행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마왕을 무찌르면 어떻게 될까. 설마 주연들이 다 여기 있으니 그런 일이 있을까 싶지만…….
‘또 모르지.’
어쨌든 계속 시험을 치르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리타가 우박을 떨어뜨리자 뱀이 쐐액, 소리를 지르며 방향을 틀었다. 에드워드는 뱀을 유도하듯 달렸다.
그사이 케인이 뱀의 등에 올라탔다. 케인은 휘청이면서도 꼬리를 향해, 아까 검을 박아 둔 지점을 향해 달렸다. 체조 선수가 되었어도 될 만큼 균형 감각이 훌륭했다.
기합 한번 내지르지 않고 케인은 검을 휘둘렀다. 아까 검이 박힌 바로 그 옆에 또 한 자루 검이 박혀 들었다.
쐐애애액! 뱀이 몸을 틀어 케인에게 향하려 하자 리타가 우박을 뿌렸다. 뱀이 어쩔 줄 모르고 구불구불하게 몸부림을 쳤다.
“따갑지! 요놈! 따갑지!”
위기감은 어디로 갔는지 리타가 뱀을 놀리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리타가 뭐라 하는지 알아듣기라도 한 양 뱀이 리타를 향해 입을 쩍 벌렸다.
그사이 케인은 검을 도로 뽑아 콱, 다시 한번 내려찍었다. 그리고 세 번째 같은 행동을 반복하려니 짜증이 났는지 인상을 쓰고 입술을 달싹였다.
리타와 에드워드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새틴은 케인이 무얼 하는지 바로 알았다. 마법이었다.
듬성듬성 이가 빠진 칼날을 타고 불길이 피어올랐다. 쇄애액! 쇄액! 쇄애액……! 뱀이 괴성을 질렀다. 겉가죽엔 불 마법이 통하지 않더니 속살은 사정이 다른 모양이다.
연기를 뿜으려는지 뱀의 턱 아래가 급하게 불룩거렸으나 새틴이 경고할 필요는 없었다. 가느다란 연기가 뱀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맹렬히 쏘아 낼 때와 달리 아주 보잘것없었다.
뱀은 공격 의지를 잃고 고통스레 몸부림쳤다. 그 위에 선 케인의 몸도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새틴은 행여 케인이 나동그라질까 초조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케인, 그만하면 됐어! 이제 피해!”
말은 지지리도 안 듣지. 케인은 검을 놓지 않았다. 칼날을 따라 일렁이는 불길도 꺼지지 않았다.
고약한 냄새가 공동을 메웠다. 고기도 나무도 아닌 것을 태우는 냄새였다. 실제로 타고 있긴 할 것이다. 뱀의 꼬리 가죽이 울룩불룩해졌다. 안쪽의 살이 부푸는 것인지, 오그라드는 것인지.
쇄액, 쇄액……! 뱀의 비명이 서서히 작아졌다. 맥없이 벌어진 입에서 피어오르던 연기는 점차 희미해지고 움직임도 느려졌다.
“귀 따가워.”
발 디딘 자리가 안정되자 케인은 작게 투덜거리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번쩍 쳐들었다가 내리그었다. 푹 익어 버린 꼬리가 완전히 끊어졌다.
그 순간 화로의 불이 꺼지고 뱀의 비명도 멎었다.
∞ ∞ ∞
원숭이 다음은 뱀이었는데 그다음은 뭘까. 일행은 모두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기다렸지만 천장에서는 아무것도 내려오지 않았다. 불 꺼진 화로도 죽은 듯 잠잠했다.
“끝인가?”
리타의 목소리가 거대한 홀 안을 낮게 울렸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라도 된 양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기긱, 기기긱, 기긱. 무거운 것이 바닥에 끌릴 때 나는 소리였다.
모두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까 지나온 복도의 반대편 벽이 열리고 새로운 복도가 나타났다. 그곳은 어두운 홀과 대조적으로 밝았다. 마치 그리로 오라는 듯 횃불이 늘어서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 에드워드가 제안했다.
“일단 조금 쉬는 편이 좋겠습니다. 다음에 또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요.”
“에구구…….”
에드워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리타가 털썩 주저앉았다. 내내 긴장해 있느라 몸이 뻐근해졌는지 팔과 다리를 부지런히 주물러 댔다. 그 모습을 보니 케인은 새틴이 걱정되었다.
‘뼈만 앙상해서는 무슨 검을 휘두르겠다고.’
새틴에게 검을 사 준 리타가 원망스러웠지만 굳이 말 섞고 싶지 않아 케인은 리타를 등지고 새틴에게로 향했다. 새틴은 벽에 붙어 있으란 말을 지키지 않고 또 한참이나 앞으로 나와 있었다.
케인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물었다.
“다친 데는.”
“무슨 소리야?”
새틴이 고개를 갸웃했다. 유순한 얼굴은 길을 잘못 든 초식 동물처럼 어리바리했다. 실제로도 초식 동물 같은 면이 있긴 했다. 시금치 따위를 좋아하지 않던가.
“다친 데 없냐고.”
다시 물으니 그제야 의미를 알아듣고 새틴이 혀를 찼다.
“내가 다칠 일이 뭐가 있어. 내내 벽에 붙어 있었는데. 너나 좀 봐.”
퉁명스레 말하며 새틴이 케인의 몸을 살폈다. 말과 달리 다정한 행동이었다. 괜히 가슴께가 근지러워 케인은 심드렁한 체 대꾸했다.
“저게 뭐 별거라고 다치겠어. 긁힌 게 다야.”
“다행이네.”
새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약간 멋쩍어하며 투덜거렸다.
“다음엔 그러지 마. 나만 아무것도 못 하는 거 별로야.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라고.”
“아무것도 안 해도 상관없잖아. 내가 네 대신 하면 되지.”
“아, 무슨 소리야. 넌 네 일을 하고 난 내 일을 해야지.”
“너 아니었으면 난 여기 오지도 않았을걸. 그러니까 네 할 일을 내가 하면 그걸로 됐지.”
논리적인 설명이었는데 납득하기가 어려운지 새틴은 표정을 구기고 케인을 쳐다봤다. 하지만 결국 입은 열지 못했다.
케인은 새틴의 어깨에 묻은 검댕을 툭 털어 내며 말했다.
“아무튼 좀 쉬어. 불편한 데 있으면 저 장사꾼한테 말하고.”
“장사꾼?”
“신관 말이야.”
“아, 말 좀……. 됐다.”
새틴이 무어라 타박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만히 앉아서 좀 쉬면 좋겠는데 구태여 리타와 에드워드가 있는 쪽으로 간다. 그들이 저보다 훨씬 쌩쌩한데 걱정이라도 되는지.
영 탐탁잖았지만 케인은 더 잔소리하지 않고 새틴의 뒤를 따라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앉아서 쉬던 리타는 어느새 일어나 뱀 대가리를 칼끝으로 쿡쿡 찌르고 있었다. 새틴이 그 옆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뭐 하는 거야?”
“혹시 쓸 만한 게 있나 보고 있지.”
아까는 징그럽다고 소리소리를 지르더니 이제 적응한 모양이다. 리타는 칼로 뱀의 입을 벌리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제 안 타네.”
뱀이 살아 있을 때는 침이 떨어지는 곳마다 거멓게 타들어 갔다. 성분 불명의 연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직도 기다란 그을음이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 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침은 그냥 바닥에 고였다. 얼핏 봐선 물 같았다.
잠깐 고민하던 리타가 결심한 듯 말했다.
“조금 채취해 가야겠어.”
“……침을?”
새틴이 기겁했지만 리타는 배낭을 뒤적여 핀셋과 조그만 통을 꺼냈다. 새끼손가락 크기의 통은 철제였는데 뚜껑을 열자 솜이 들어 있었다.
리타가 핀셋으로 솜을 집어 침 웅덩이에 가져다 댔을 때.
“어, 뭐야?”
리타가 깜짝 놀라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왜 그러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모두가 지금 벌어지는 일을 보고 있었다.
거대한 뱀의 사체가 스르르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원숭이들의 사체도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았다.
리타는 핀셋을 쥔 채 허망하게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은 젖은 자국도 탄 자국도 없이 깨끗했다. 아무것도 채취할 것이 없었다.
리타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며 새틴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다 바로 뒤에 서 있던 케인과 부딪쳤다. 케인은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 혼자 움찔 놀라더니 옆으로 비켜났다.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새틴이 어색하게 웃었지만 케인은 웃지 않았다.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아직도 이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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