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깜빡할 뻔했지만 새틴도 검이 있었다. 둘러메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는데 어떻게 쥐어도 자세가 어설펐다.
‘그래도 식칼을 몇 년이나 썼는데 되게 어색하네.’
새틴이 느낀 점을 케인이라고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흘끔 돌아보더니 곧장 인상을 썼다.
“휘두를 생각은 절대 하지 말고 쥐고만 있어. 알겠어?”
“……어.”
걱정해서 하는 말임을 알지만 떨떠름하다. 그래도 지금은 조심하는 편이 좋을 테니 잠자코 있었다.
그때 리타가 외쳤다.
“뭔가 떨어진다!”
모두가 천장을 보았다. 타오르는 화롯불 주변으로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깃털처럼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수가 한둘이 아니다. 그림자들은 바닥에 가까워지며 그 형태가 분명해졌다.
“……원숭이?”
케인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새틴은 ‘어, 정말이네.’ 하고 속으로 대꾸했다. 대꾸를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
“리타, 조심해!”
입은 더 급한 말을 해야 했으니까.
바닥에 내려앉은 검은 원숭이들은 벼룩처럼 빠르게 뛰어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화로와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리타가 놈들의 첫 번째 목표물이었다.
“징그러워!”
리타가 기겁하며 불화살을 만들어 내던졌다. 우끼익! 끽끽! 원숭이들이 머리며 꼬리에 붙은 불을 끄느라 정신없이 날뛰며 흩어졌다.
참으로 놀라운 적중률이다. 저 정도면 투수가 되어도 되겠다고 새틴이 저도 모르게 생각했을 정도다.
‘맨날 꼴찌 하는 구단에서 데려가면 되겠네.’
구체적으로 생각나는 구단은 없었다. 인터넷에 야구팬들이 쓰는 글을 보면 모든 구단이 꼴찌 같았다. ‘파이팅!’보다 ‘해체해!’라고 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리타가 몇 마리의 원숭이를 해치우는 동안 에드워드라고 쉬고 있진 않았다. 원숭이들은 쉴 새 없이 떨어지는 중이었다. 에드워드도 금세 원숭이들에게 둘러싸였다.
“하압!”
에드워드는 제법 그럴듯한 모양새로 검을 휘둘렀다. 그나마 협동심 없는 원숭이들이라 다행이었다. 한 번에 달려들었다면 곤경에 처했을 텐데 순차적으로 달려든 덕분에 에드워드는 어렵잖게 역경을 빠져나왔다. 에드워드가 배팅 센터 단골처럼 원숭이를 쳐 날리며 외쳤다.
“새틴 씨! 그쪽은 괜찮습니까?”
“이쪽은 괜찮아!”
새틴은 엉겁결에 대답했다. 리타와 에드워드의 상황에 비하면 확실히 케인과 새틴은 사정이 나았다. 케인이 만들어 놓은 불꽃 방벽 덕분에 방어가 한결 수월했다. 원숭이들은 불길에 털이 그슬릴까 봐 쭈뼛대느라 공격을 주저했다.
‘이 정도면 나도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새틴은 그만 건방진 생각을 하고 말았다.
케인의 등 뒤에서 살짝 빠져나온 세틴은 검을 치켜들었다. 마침 불길을 피하느라 자세가 엉거주춤한 원숭이 한 마리가 코앞에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원숭이는 새틴을 향해 위협하듯 입을 벌렸다. 키아악!
‘징그러워.’
아까 리타가 외친 말이 바로 이해되는 생김새였다. 팔이 길고 다리가 짧은 몸뚱이는 원숭이와 아주 닮았는데 얼굴은 전혀 달랐다. 눈은 벌겋고 이빨은 톱니 같았다. 게다가 뾰족한 귀 뒤로는 비늘 비슷한 것이 돋아 있었다.
새틴은 혐오를 의욕으로 치환해 팔에 힘을 주었다. 한 번에 힘을 줘서 그으면 목이든 어디든 갈라지겠지. 검의 무게가 상당하니 가속도도 붙을 테고.
“흡!”
그러나 미처 내려치기 전에 케인이 새틴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새틴은 엇, 하며 뒤로 기우뚱하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섰다. 새틴보다 먼저 케인이 벌컥 화를 냈다.
“뭐 하는 짓이야?”
“뭐 하는 짓이긴, 앗!”
불꽃 방벽이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새틴이 타깃으로 삼았던 원숭이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더니 재빨리 물러났다.
새틴이 원망스레 쳐다보자 케인은 도리어 제가 더 성을 냈다.
“아무것도 하지 마. 싸울 생각도 하지 말고, 누구 구할 생각도 하지 마.”
“아니, 눈앞에 저것들이 있는데…….”
지금도 리타와 에드워드는 열심히 원숭이들을 해치우고 있었다. 꾸역꾸역 쏟아지는 원숭이들은 끝이 없었다.
케인이 새틴을 벽 쪽으로 밀고 등을 돌렸다. 불꽃이 크게 치솟으며 원숭이들을 덮쳤다. 커다란 짐승이 아가리를 벌려 사냥감을 집어삼키듯.
그 광경을 목도한 원숭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끼에엑! 키야악!
새틴은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속이 영 메스꺼웠다. 넘실대는 불꽃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원숭이들의 모양은 약간, 사람과 비슷했다. 춤추는 사람 같다.
“웁…….”
보지도 않고 새틴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케인이 작게 혀를 찼다.
“보지 마.”
말하면서 케인이 새틴을 완전히 가리고 섰다.
“이 미친놈아! 적당히 해! 나까지 죽겠어!”
흉악한 불길에 놀란 리타가 무어라 성을 내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 소리를 할 정도면 그래도 당장 위기에 처하지는 않았다는 뜻이겠지.
새틴은 가만히 숨을 몰아쉬었다. 대충 이십 정도 세고 나니 괜찮아졌다. 다시 검을 쥐고 앞으로 나서려는 차.
쿵! 아주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원숭이들이 일제히 멈췄다. 엉겁결에 일행도 움직임을 멈췄다. 케인이 세운 불꽃 방벽이 낮아지며 새틴도 주위 상황을 훤히 볼 수 있게 되었다.
“뭐지……?”
에드워드가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리타는 에드워드와 등을 맞대고 서 있었는데 마침 그 방향이 홀의 중앙 쪽이었다.
“어, 불이 꺼지는데?”
천장에 닿을 만큼 치솟았던 화로의 불길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원숭이의 비도 그쳤다. 남은 놈들은 기가 죽어 끽끽 소리를 내며 저희끼리 모였다. 더는 날뛸 때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기색이었다.
케인이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일단 이 틈에 정리하지.”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던 불꽃 방벽이 다시금 사납게 피어올랐다. 아까는 짐승의 아가리 같았는데 이제 보니 파도와 닮았다. 파도는 남은 원숭이들을 뒤에서부터 쫓았다.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한 원숭이들은 홀의 구석으로 도망치다 차례로 재가 되었다.
다른 방향으로 달아난 원숭이들은 리타와 에드워드가 차근히 해치웠다. 에드워드는 검으로, 리타는 백발백중 불화살로.
리타는 아까보다 여유가 생겼는데도 이 상황이 다소 불편해 보였다.
“으, 학살자 된 기분.”
쌓이는 원숭이 사체를 슬쩍 피하며 리타가 중얼거렸다.
새틴은 리타에게 수고했노라고 한마디 하려다 멈칫했다.
‘뭐지?’
무언가 벽을 타고 움직였다. 그러나 너무 희미해 확신은 할 수 없었다. 정말 움직였나? 새틴은 긴장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곧 새틴은 제가 본 게 무엇이었는지 알았다. 아주 작은 빛의 입자였다. 빛은 서서히 짙어졌고, 그쯤 되니 다른 이들도 위화감을 느꼈다. 기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뭐야, 뭔데.”
리타가 당황해 중얼거렸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불화살의 모양이 리타의 놀란 상태를 대변하는 듯했다. 그 옆에서 에드워드가 침착하려 애쓰며 독려했다.
“긴장을 놓치면 안 됩니다. 또 뭐가 오려는지 모르니까.”
“하, 이번엔 원숭이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미지의 무언가를 찾느라 신경을 곤두세운 두 사람과 달리 케인은 곧바로 새틴과의 거리를 좁혔다. 자긴 검도 뽑지 않았으면서 새틴의 부주의함을 타박했다.
“내가 떨어지지 말라고 했잖아.”
“아니, 이번엔 네가 간 거야. 난 가만히 있었어.”
새틴이 억울해서 변명했지만 케인은 인상을 쓰며 억지를 부렸다.
“아무튼.”
과보호 받는 어린이가 된 기분이라 새틴은 논리적으로 타일렀다.
“난 네가 보호해 줘야 하는 아이가 아니야. 따지자면 내가 더 어른이지. 네가 보기엔 내가 미덥지 않을 수도 있지만.”
“미덥지 않아서가 아니야.”
“그럼 뭐야?”
케인은 대꾸 없이 새틴의 얼굴을 빤히 볼 뿐이다. 새틴은 재촉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리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벽을 타고 오르던 빛들이 이제 반대로 움직였다. 천장에서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벽만이 아니라 허공까지 모두 점령할 기세다.
케인을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 새틴은 마른침을 삼키며 경고했다.
“위쪽에서 뭔가 오는 거 같아.”
그리고 얼마 후.
“저것 봐!”
리타가 천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의미 없는 수선이었다. 이미 모두가 그것을 보았다.
형태는 알아보기 어려우나 거대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검고 불쾌한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아직 전신을 드러내지도 않았는데 살아남은 원숭이들이 혼비백산해 흩어졌다. 당황스러운 모습이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얼마나 무서운 놈이기에…….”
괴물 원숭이들이 무서워하는 무언가. 적의 적은 동료라지만 새틴은 저것과 동료가 될 수 있을 성싶지 않았다. 물론 되고 싶지도 않고. 말은커녕 손짓 발짓도 통하지 않을 것 같다.
화로의 불이 서서히 작아지며 그것도 천천히 기어 내려왔다. 허공에서 움직이고 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날아서 내려온다고 해야겠지만.
거리가 가까워지며 형상이 또렷해졌다. 뱀이었다.
“뱀? 원숭이 다음은 뱀이야? 징그러워 죽겠어!”
리타가 질색하며 에드워드의 뒤로 몸을 피했다. 에드워드가 펄쩍 뛰며 옆으로 비켜났다.
“저도 뱀 싫어합니다! 제 뒤로 숨지 마세요!”
“아, 번갈아 가면서 숨자. 그럼 되지?”
“되긴 뭐가 됩니까!”
리타와 에드워드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새틴의 눈에는 사랑싸움처럼 보여 언짢았다. 언짢을 이유가 없는데 언짢았다.
‘주인공은 인생이 고달파서 악당이 될 뻔했는데.’
새틴이 연민을 담아 흘끔 쳐다보자 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귀신같이 눈치챈 모양이다.
“뭐야. 왜 그렇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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