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2부 스포일러에서 안개라는 단어를 본 것 같다. 새틴은 흐릿한 기억을 헤집었다. 그러는 동안 마부가 자세한 사정을 설명했다.
“새벽녘에 숲에서 안개가 피어올랐대요. 본 사람들이 있어요. 누가 불이라도 피우는 모양이지 했는데, 글쎄. 아침에 해가 뜰 때쯤 되니까 클로버랜드 전체가 안개에 싸여 있더란 거예요!”
숲에서 피어난 안개. 새틴은 서서히 상황을 파악했다.
‘마왕이야. 마왕이 나타난 거야.’
주인공 일행이 안개를 헤치고 마왕성으로 갔다는 구절이 얼핏 떠올랐다. 이 안개는 마왕성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였다.
‘내가 왜 이걸 잊고 있었지!’
다크에이지에서 악역 새틴은 마왕을 소환하다가 케인 일행에게 죽는다. 그러나 소환은 중단되지 않아 마왕이 강림한다. 그게 바로 2부의 내용인데.
저도 모르게 새틴은 케인을 쳐다봤다. 혹시 이 상황에 대해 할 말이 있지 않을까?
“오늘 돌아가긴 그른 것 같군.”
케인의 어조는 태연했다. 딱히 이 상황을 반기는 기색은 아니나 안타까워하는 기색 또한 아니다. 그저 불편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뿐, 마왕이 나타났다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게 말이야.”
새틴은 맥 빠진 어조로 대꾸했다.
그야 케인은 모르겠지. 자기가 중단한 소환이 계속됐을 줄 어떻게 알겠어.
새틴은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생각해 봤다. 생각하다 보니 의문이 들었다.
‘근데 이거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나?’
새틴은 마왕을 소환하려 한 적이 없다. 마왕을 물리쳐야 할 의무도 없다. 즉, 지금 이 상황과 아무 관계 없다.
새틴은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대신 남은 돈을 계산했다. 어젯밤엔 리타 덕분에 고급 여관에 묵었지만 오늘은 다른 여관을 찾아야 했다. 첫날 묵은 곳처럼 값이 싼 곳으로.
‘오래는 못 지낼 텐데.’
길어야 2박 3일의 일정이 될 거라 예상한 터라 가지고 온 돈이 많지 않았다. 애초에 모은 돈도 그리 많지 않았고. 새틴이 지낸 마을에서는 큰돈을 쓸 일이 없었기에 저축의 필요성도 내내 느끼지 못하며 지냈다.
‘여관보다 차라리 싼 셋방을 알아보는 게 나을지도 몰라.’
안개는 마왕이 없어지면 자연히 사라질 거다. 그럼 봉쇄령도 풀리겠지. 하지만 그날이 언제일까.
새틴은 케인을 흘끔 봤다.
‘얘가 물리치겠지? 물리칠까? 안 물리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니, 이럴 때가 아냐. 지금 내 코가 석 자잖아.’
다크에이지고 뭐고 일단 새틴은 본인이 살 궁리부터 해야 했다.
‘지낼 곳을 일단 구하고. 아, 밥값은 어쩌지.’
아무리 싼 여관이라도 며칠이나 묵으면 숙박비가 적지 않다. 거기에 식대까지 붙으면 상당한 거액이 될 텐데. 아무래도 묵을 곳과 함께 돈 구할 곳도 찾아봐야 할 성싶었다.
‘여기도 인력 사무소가 있으려나.’
힘쓰는 일 하는 데는 늘 손이 필요한 법. 케인이나 에드워드만큼 건장하진 않지만 새틴도 일단 남자니 곧바로 퇴짜를 맞지는 않을 거다. 행여 요령이 없어 금방 잘리더라도 일당을 챙기면 하루 이틀은 더 지낼 수 있다.
새틴이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는 동안 리타는 마부에게 꼬치꼬치 상황을 캐물었다.
“언제까지 봉쇄한다는 얘기는 없었어요?”
“안개의 정체를 모르니까 확인될 때까진 닫아 둔답디다.”
“확인은 언제 되는데요?”
“그야 모르지요.”
“그까짓 안개가 뭐라고.”
“아휴, 손님. 나가서 한번 보세요. 일단 보면 그까짓 안개라고 말 못 하실 겁니다.”
어쨌든 계약금을 돌려줬으니 이만 가 보겠다며 마부가 여관을 떠났다. 여관 로비 곳곳에 비슷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보였다.
머리를 벅벅 긁은 리타가 새틴을 돌아보며 물었다.
“일단 여기서 며칠 더 지내는 게 어때?”
“응, 안 그래도 지낼 곳을 알아볼 생각이야. 여긴 좀 비싸니까.”
리타가 말하는 여기를 클로버랜드로 이해한 새틴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하자 리타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 말이야, 여기. 나 때문에 일정이 틀어진 거니까 당연히 내가 비용을 대야지.”
“아, 정말? 그럼 정말 고맙고.”
괜찮다며 사양하기엔 당장 내일모레쯤부터 길에서 자야 할 형편이라 새틴은 얼른 감사를 표했다. 사실 리타의 말이 틀리지도 않았다. 리타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새틴은 어제 클로버랜드를 떠났을 테니.
비용을 대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신세 지기가 좀 미안했겠지만 새틴은 리타의 정체를 안다. 리타가 돈 때문에 곤란할 일 없는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넌 어쩔 셈이야?”
리타가 케인에게도 물었다. 새틴도 케인을 쳐다봤다. 그동안 케인은 내내 클로버랜드에서 지낸 모양이니 별문제 없지 않을까. 집에 가면 되니까. 그리고 안개의 정체를 알아낸 다음엔 마왕을 물리치러…….
케인은 새틴의 예상을 벗어난 말을 했다.
“새틴이 여기 묵는다면 나도 여기 묵을 생각인데.”
“와, 이거 진짜 찰거머리네!”
케인은 리타의 말을 이번에도 못 들은 체했다.
∞ ∞ ∞
여관 안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한 후 세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안개를 보려면 성문 근처까지 가야 할 줄 알았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저게 안개라고?”
리타가 기겁해 소리쳤다. 새틴도 그 옆에서 입을 크게 벌렸다. 상상 이상으로 스산했다.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케인뿐이었다. 멋진 미술 작품이라도 본 양 태연히 한마디 했다.
“과연.”
클로버랜드의 건물은 거의 단층 아니면 2층이었다. 그보다 높은 건물도 몇 있긴 했으나 한데 모여 있지 않고 곳곳에 흩어져 있어 경관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덕분에 클로버랜드를 둘러싼 안개는 어디에서나 보였다.
‘색깔이 왜 저래?’
새틴이 익히 아는 안개는 희뿌연 색이었는데 지금 보이는 안개는 거무죽죽했다. 아까 마부가 말한 대로 불길하기 그지없는 모양새였다. 신기하게도 도시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 역시 보통의 안개 같지 않아 기분 나빴다.
이미 한참 전부터 저 상태였던 탓인지 거리의 사람들은 간혹 수군거릴 뿐 새틴 일행처럼 멈춰서 구경하지 않았다. 일단 도시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굴러가는 듯했다.
그렇다고 새틴은 안심하지 않았다.
‘저런 게 평범한 안개일 리 없어.’
리타 역시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이대로라면 클로버랜드가 위험해. 여긴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곳이야. 경작지도 거의 성문 밖에 있고. 저 안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해.”
마치 심시티 계정주처럼 말한 리타가 제안했다.
“치안청에 가 보자.”
꼭 따라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던 숙박비가 리타 덕분에 쉽게 해결되었으니 일자리 찾기는 이제 급하지 않았다.
다만 새틴은 케인이 걱정스러웠다. 리타와 에드워드가 신고를 하지 않기로 했다 해도 케인은 불순한 마법을 쓰려던 사람이다. 치안청에 가기가 꺼려질지도 모른다. 물론 자기가 정말로 마왕을 소환해 버렸다는 건 아직 모르지만.
“음, 어차피 여기로 돌아올 테니까 꼭 따라오지 않아도 되는데.”
새틴이 나름대로 배려를 담아 말했지만 케인은 픽 웃으며 무시했다. 다크에이지는 꽤 오래된 소설인데 케인의 행태는 원작에 비해 상당히 트렌디하다.
‘최근엔 마이페이스 주인공이 많지.’
그리하여 세 사람은 치안청으로 가는 역마차에 올랐다. 먼저 탄 승객들도 모두 안개 이야기 중이었다. 불길하다느니, 조금 무섭다느니 그런 내용이었다.
치안청은 여관에서 그리 멀지 않아 금세 도착했다. 이미 치안청 앞에는 상황에 관해 알아보러 온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클로버랜드 시민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새틴과 리타처럼 외지인도 많았다. 봉쇄령 때문에 발이 묶인 여행자들이었다.
케인이 사람들 무리를 보며 살짝 인상을 쓰더니 말했다.
“이래서야 들어가기도 힘들겠는데.”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래?”
새틴의 배려는 또 무시당했다.
신전과 달리 줄이라 할 만한 것이 없어 그냥 밀고 들어가는 사람이 우선인 상황이었다. 리타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끼어들 틈을 찾았다.
“일단 내가 먼저 들어갈 테니까…….”
“리타 씨?”
에드워드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왔다. 방향을 보아하니 치안청에서 나오는 길인 듯했다.
“세 분 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해? 들어갔다 나온 거야?”
“예, 봉쇄령 때문에요.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있었는데 그새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들었네요.”
에드워드는 어제도 가장 일찍 일어나더니 오늘도 누구보다 이르게 치안청에 방문한 모양이다.
아무튼 새틴 일행으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에드워드에게 물으면 굳이 안까지 들어가지 않고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일단 붐비는 사람들을 피해 길 건너로 이동했다. 그러는 동안 이쪽의 목적을 알았는지 에드워드가 먼저 말했다.
“남쪽 숲에서부터 시작된 안개라고 합니다. 치안청 마법사는 마법이거나 혹은 그 비슷한 것이라고 추측하더군요.”
새틴은 안개가 보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와 다를 바 없는 거뭇한 안개 주위로 마력은 보이지 않았다. 시작점에 가면 뭔가 더 보일지도 모르나 일단 여기서는 분명히 마법이라 확인할 수 없었다.
새틴과 마찬가지로 안개를 살피던 케인이 툭 말했다.
“마법은 아닌 거 같은데.”
그 소리를 듣고 어깨를 으쓱한 에드워드가 이어 말했다.
“일단은 추측이니까요. 아무튼 치안청에서 원인 규명을 하려고 수색대를 보냈다고 합니다. 마법사님도 함께 가셨다니 뭔가 알아낼 수 있겠죠.”
“치안청의 마법사라면 4년 전 흑마법사를 사살한 그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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