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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46화 (46/139)

46화

케인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 물을 마셨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새틴은 깨달았다. 여태 미소 짓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입이 가리자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 밑에 있는 것들이 정말 사람이라면, 누굴 더 원망할까? 그 위에서 마법을 쓴 나하고, 그딴 식으로 파묻어 치워 버린 놈들 중에 말이야.”

식탁 위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른 손님들이 떠드는 소리가 이상하도록 멀게 느껴져서 새틴은 괜히 귀를 문질렀다.

한참 후에야 리타가 입을 뗐다. 아까와 달리 축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네 말대로 누가 누구한테 뭐라고 할 입장이 아닌 건 알겠어. 그렇다고 마왕을 소환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잖아.”

“내가 왜 술술 털어놨겠어. 이제 그럴 마음이 없어졌으니까 그렇지.”

리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인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새틴을 쳐다보았다. 새틴이 당황해서 두리번거렸지만 케인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등에 땀이 났다.

‘뭐야, 왜 보는데.’

여기서 무슨 말을 하라고.

새틴은 접시가 가득한 식탁을 흘끔거리며 쭈뼛대다 겨우 한마디 했다.

“……시금치 먹을래?”

“좋아.”

“어?”

“시금치 달라고.”

새틴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제 접시에서 시금치를 집어 케인의 접시로 옮겼다. 사실 우스운 행동이었다. 굳이 나눠 주지 않아도 될 만큼 음식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케인은 새틴이 나눠 준 시금치를 집어서 먹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웃었다.

“당근은 안 줘?”

농담인지 진담인지 잘 구분이 안 돼서 새틴은 당근도 나눠 주었다. 케인은 당근까지 먹더니 맞은편의 리타와 에드워드를 보며 “뭘 봐?”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시금치나 당근을 빼앗아 갈 리도 없는데.

“보긴 누가 봤다고.”

리타가 투덜거리며 식사를 재개했다. 에드워드도 그 옆에서 그러게 이렇게 많이 시키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며 핀잔하고 음식을 먹었다. 대화는 어물쩍 끝나 버렸다.

식탁에 꽉 들어찼던 접시들은 시간이 지나니 어떻게든 정리가 되었다. 리타는 보통보다 좀 더 먹는 편이었고, 에드워드는 그보다 더 먹었다. 그리고 케인은 그보다도 더 먹었다. 보통 사람만큼 먹는 새틴은 졸지에 소식가가 되었다.

“더 먹지 그래?”

새틴에게 그리 물은 사람은 케인인데 고개를 들고 보니 리타도 쳐다보고 있었다. 모자란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음식을 더 주문할 기세였다.

새틴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배가 불러 토할 지경이었다.

“아냐, 이제 충분해…….”

네 사람은 식당을 나와서 일단 이동하지 않고 서 있었다. 새틴은 건너편 가게를 구경하는 척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이제 어쩌지.’

리타는 궁금하던 것을 알았고, 에드워드와 새틴은 리타를 더 도와줄 일이 없다. 케인은 애초에 이 일행이 아니다.

다 함께 이동하기도, 그렇다고 밝게 인사하고 헤어지기도 애매하다.

‘뭐라고 인사를 해야 자연스러울까.’

다행히 리타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럼 이만 헤어질까?”

새틴이 인사말을 채 고르기도 전에 케인이 픽 웃었다.

“신전엔 안 갈 생각인 모양이지?”

“안 가. 이제 마왕이고 뭐고 소환할 마음 없다며.”

“그걸 믿어?”

“역시 거짓말이었어?”

리타가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부릅뜨자 케인이 픽 웃었다.

“아니.”

잘생긴 이목구비는 재수 없는 표정을 짓는 데도 더 유리한 걸까. 정말로 놀랍도록 얄미운 표정이었다. 리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케인이 저보다 세 살 많은 어른을 농락하는 모습을 보며 새틴은 한숨을 쉬었다. 다크에이지 1부에서 두 사람은 믿음직한 동료였지 이렇게 톰과 제리 같은 사이가 아니었는데.

“그쪽은? 신전으로 갈 건가?”

이번에 케인이 물은 대상은 에드워드였다. 에드워드가 신관이라는 얘기는 한 적이 없는데 케인은 이미 아는 듯했다. 옷자락을 보고 짐작했을까, 아니면.

‘기억을 하나?’

케인과 만나기 전에 에드워드에게서 4년 전 흑마법사 토벌 때의 이야기를 들었다. 에드워드는 케인의 이름을 듣고도 그때 살아난 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하기야 에드워드는 케인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케인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다크에이지에서는 둘이 처음부터 친구로 나오는데.’

좀 더 시간이 있으면 늦게나마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나마 리타보다는 에드워드가 가능성 있어 보인다.

에드워드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아니요. 전 순례를 끝마칠 때까지 소속 신전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하찮은 의무는 다들 잘 지키는군.”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좋은 말은 분명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발끈해 나서지는 않았다. 어차피 헤어질 마당이니 굳이 다투고 싶진 않을 테다.

‘얘네도 친구 되긴 글렀구나.’

새틴은 조금 전에 한 생각을 취소했다.

리타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새틴에게 물었다.

“넌 지금 출발할 거야? 내가 마차를 빌려주기로 했잖아.”

“아, 글쎄…….”

새틴은 분명히 말하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시간이 애매했다. 클로버랜드에 올 적에 하루가 꼬박 걸렸다. 아침에 출발했는데 클로버랜드에 들어서니 이미 저녁이었다. 밥 먹을 기운도 없어 그대로 여관에 들어가 쓰러져 잤다. 지금 출발하면 도중에 밤이 될 텐데.

새틴은 곧 결정을 내렸다. 오래 고민할 만큼 중요한 일도 아니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에 출발하는 편이 낫겠어.”

“그래, 그럼 오늘 나하고 같은 여관에 묵자. 오늘 마차를 미리 섭외해 놓으면 내일 아침에 원할 때 출발할 수 있을 거야.”

리타가 시원스레 말해 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리타에게도 향후 일정을 물었다.

“넌? 계속 클로버랜드에 있을 예정이야?”

“일단 며칠은. 별일이 없으면 다른 도시로 갈 생각이야.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도시를 둘러볼 계획이거든.”

상당히 거창한 계획이었다. 활기가 넘치니 여행도 좋아하는 모양이다.

이제 남은 사람은 케인뿐이다. 새틴은 케인에게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야 할지 망설였다. 리타나 에드워드는 당연히 물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소외감을 느끼진 않겠지?’

무던한 표정에서는 속내를 읽기가 어려웠다. 새틴은 그냥 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여기서 헤어질 텐데 구태여 친구인 체하는 것도 우스웠다. 케인이 새틴을 안다 해도 그건 지금의 새틴이 아니다. 새틴은 지난밤에 케인을 처음 봤다.

에드워드가 먼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다들 건강하십시오.”

리타와 새틴에게 가볍게 묵례한 에드워드는 잠깐 머뭇거리다 케인에게도 인사했다. 케인은 건성으로나마 인사를 받아 주었다.

“우리도 갈까? 내가 그저께 묵은 여관이 아주 좋았거든. 거기서 묵자.”

리타가 새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방향을 가리켰다. 새틴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케인을 보았다.

“음, 만나서 반가웠어. 잘 지내고…….”

“꼭 헤어지자는 인사 같네.”

헤어지자는 인사 같은 게 아니라 헤어지자는 인사인데.

새틴이 눈을 슴벅이고 있으니 케인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서 시선을 마주쳐 왔다. 위압적인 체구 탓인지 특별할 것 없는 자세도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뭐 하는.”

리타가 끼어들려 했지만 케인은 그쪽을 보지도 않고 손을 들었다.

“내가 아직 얘기하고 있잖아.”

케인의 목소리에는 그다지 달라진 부분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다. 괜스레 한기가 들어 새틴은 슬쩍 어깨를 움츠렸다.

쯧, 케인이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고 한껏 친절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서늘하던 분위기는 가셨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지 몰라 새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케인이 살짝 몸을 굽혀 얼굴을 가까이 했다.

“난 여기서 너하고 헤어질 마음 없어.”

“아, 어디까지 가는데? 혹시 가는 길이 같으면…….”

“그 뜻 아닌 거 알잖아. 아는 얼굴인데.”

새틴이 입을 다물자 케인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 순간 새틴은 날 리 없는 꽃향기를 맡은 듯했다. 케인이 너무 묘하게 웃고 있으니 꼭 유혹이라도 당하는 기분이다.

“난 헤어질 마음 없어.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 ∞ ∞

“봉쇄요? 전부 다요?”

리타의 목소리가 커졌다. 원래도 목소리가 큰 편인데 지금은 더했다. 어조와 성량에서 당황과 경악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리타의 목소리 높이기 대회에 동참하진 않았으나 새틴도 당황했기는 마찬가지다.

어제 오후 에드워드와 헤어진 후 나머지 세 사람은 북문 근처의 고급 여관에 묵었다. 리타는 방을 두 개만 빌렸다. 둘 다 일 인실이었다.

케인은 섭섭해하지 않고 알아서 방을 빌렸다. 새틴이 묵기로 한 방의 바로 옆방이 마침 비어 있었다.

「하이고, 좋은 일 하러 갔다가 찰거머리 붙이고 왔네!」

리타는 케인이 들으란 듯 소리쳤지만 케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새틴은 케인이 마을까지 따라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밤을 보냈다. 주인공을 그 조그만 마을에 데려가도 되는 걸까. 하도 작은 마을이라 거긴 여관도 없는데 케인은 어디에 묵어야 할까. 설마 오두막에서 재워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각자 갈 길을 가자고 설득할 근거를 충분히 찾지 못한 채 아침이 왔다. 그런데 어째 상황이 이상했다. 애써 케인을 설득할 필요가 없게 됐다.

새틴을 집까지 데려다주기로 한 마부가 일찍부터 찾아와 클로버랜드의 성문이 모두 봉쇄되었다고 알렸다. 새틴이 집에 갈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리타는 기막혀하며 따졌다.

“어젯밤까지는 열려 있었잖아요. 아니에요?”

“그랬지요. 경관님한테 들었는데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답니다.”

“무슨 일이요?”

“정확히는 모르는데 아무튼 그 일 때문에 클로버랜드 주변에 불길한 안개가 끼었어요.”

불길하다는 형용사와 안개라는 명사는 제법 어울렸다. 그리 생각한 순간 떠올렸다.

‘다크에이지에서도 안개에 관한 얘기가 나오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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