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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45화 (45/139)

45화

해가 뜨고도 한참이 지나 오후가 되어서야 네 사람은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여관 바로 옆에 붙은 식당에 모였다.

리타는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종업원을 불렀다.

“네, 주문하시겠어요?”

종업원이 메뉴판을 내밀자마자 리타는 메뉴판의 위부터 아래까지 손가락으로 훑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주세요.”

늦게 일어나느라 허기가 졌는지 음식을 많이도 시킨다. 어차피 리타가 계산할 테니 새틴은 속으로만 감탄하고 말았다. 잠깐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리타의 본래 신분은 공주다. 식대 정도로 허리가 휠 걱정은 없었다.

리타의 신분을 모르는 케인은 깜짝 놀라지 않았을까. 새틴이 슬쩍 살폈지만 시큰둥했다.

‘하긴, 케인은 원래 귀여운 스타일이 아니지.’

다크에이지에서 리타는 케인보다 나이가 많다. 하지만 케인은 딱히 귀여운 연하남의 면모를 보여 준 적이 없다. 애초에 로맨스에 그렇게 치중한 스토리도 아니고.

리타의 과잉 주문에 놀란 사람은 에드워드뿐이었다. 일행(일단은) 중 가장 일찍 일어나 모두가 나오길 기다렸다는 에드워드는 배가 고팠을 텐데도 정도를 지키려 했다.

“리타 씨, 다 먹지 못할 음식을 시키는 건 죄입니다.”

에드워드의 점잖은 훈계를 들은 리타는 귀를 긁으며 되물었다.

“값을 치르는데 왜 죄야?”

“낭비니까요. 사람이 겨우 넷인데 요리를 여덟, 아홉, 맙소사. 열한 개나 시키다니요.”

메뉴판을 흘끔 보며 숫자를 세던 에드워드의 표정에 경악이 서렸다. 한 여덟아홉 개쯤 시킨 줄 알았는데 세어 보니 열한 개나 되어 당황한 모양이었다.

“남기지 않으면 낭비가 아니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요. 겨우 넷이서 그만큼을 어떻게 다 먹습니까?”

“네가 힘내면 되겠네.”

씩 웃은 리타는 두 주먹을 쥐고 “아자!” 하며 에드워드를 응원했다. 물론 그 몸짓을 진짜 응원이라고 받아들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라 더 훈계를 하고 싶은 기색이던 에드워드는 가게 주인이 직접 첫 번째 요리를 내오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다음 요리도 금방 나옵니다!”

겨우 넷이 와서 주문을 잔뜩 하니 기분이 좋았는지 주인이 싱글벙글했다. 에드워드도 그 얼굴을 보고는 낭비니 뭐니 더 말하지 못했다.

줄줄이 접시가 나오고 어영부영 식사가 시작되었다. 지난밤의 일에 관한 이야기 또한.

“그래서, 어젯밤엔 거기서 대체 뭘 한 거야?”

리타가 묻자 케인이 뚱하게 대꾸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뭘 묻지?”

“저주를 하고 있었다고?”

“무슨 개소리야, 그건.”

케인이 눈살을 찌푸리자 리타가 태연하게 늘어놓았다.

“난 네가 저주나 망자 회생을 하려고 했다고 생각했는데.”

“기대를 저버려서 미안하지만 난 그런 마법의 공식은 몰라.”

새틴은 약간 감동했다. 정말로 케인이 흑마법사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나 보다. 다크에이지의 전개로 돌아갈 가능성이 1% 정도는 남아 있다는 뜻 아닐까.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저 말은 다른 마법의 공식은 안다는 의미다. 실제로 지난밤에 케인이 무언가 마법을 쓰긴 했다. 이는 새틴이 눈으로 확인한 사항이다.

‘다크에이지에서 케인은 마법을 쓴 적이 없는데…….’

보지 못한 2부나 3부에서는 어땠을지 모르나 일단 1부에서 케인은 그냥 기사였다. 클로버랜드에 적을 둔 수습 기사.

그런데 지금 케인은 마법사다. 체격만 보면 기사라고 해도 깜빡 속을 듯하지만 소지품 중에 검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가 되면 신분 상승을 한다고 들었는데.’

새틴은 슬쩍 케인을 곁눈질했다.

‘겉모습만 봐선 잘…….’

남루하진 않지만 특별히 부티가 흐르지도 않았다. 검은 로브 차림은 그냥 옷이 더러워지는 꼴을 보기 싫은 여행자처럼 보였다.

혹시 변변찮은 마법밖에 모르는 건 아닐까. 마법사라 내세우기 민망해서 조용히 살고 있다든지.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물론 변변찮은 마법이 뭔지는 새틴도 모른다.

“그럼 무슨 마법이었는데?”

새틴이 하고 싶던 질문을 리타가 대신 했다. 케인은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제물을 바치는 마법.”

“미쳤어?”

무심코 말해 놓고 새틴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런다고 이미 튀어 나간 말이 취소되진 않았다.

케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미소 같은데, 실상은 무슨 의미인지 새틴은 짐작할 수 없었다.

“왜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

“그야, 제물을 바친다고 하니까…….”

“제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목적이 중요한 거 아니야?”

그런가. 새틴은 저도 모르게 설득되고 말았다.

제물이라는 말에서 무심코 인간을 생각했는데 꼭 그렇진 않을지도 모른다. 제사가 목적이었거나, 기도를 할 셈이었다면 제물은 그저 음식이나 물건, 동물일 수도 있다. 지금껏 이 나라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일단 확인차 물었다.

“무슨 목적이었는데?”

“마왕을 소환하려고.”

“미쳤어?”

저도 모르게 또 큰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건 케인이 할 일이 아니었다. 새틴이 해야 할 일이다. 할 마음이야 당장은 없지만 꼭 해야 한다면…….

‘해야 하나?’

이미 다 어긋난 전개를 구태여 되돌릴 필요가 있을까?

‘꼭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난 마왕 소환할 줄도 모르는데.’

하지만 악역이 사라졌다고 주인공이 악역을 맡는 꼴은 못 본다. 누나가 만든 주인공이 그런 짓을 하는 모습은 절대 못 본다.

새틴은 별로 좋지 않은 말주변을 써서라도 케인을 설득해 보기로 했다.

“왜 그런 걸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일 아니야? 그만두면 어떨까?”

“왜 나쁜데?”

“흑마법사는 위험하고, 죽을 수도 있고…….”

“아니, 무슨 설득을 하고 있어? 당장 이놈을 신전으로 끌고 가자!”

리타가 새틴의 말을 자르고 포크 쥔 손으로 식탁을 쿵 내리쳤다. 때마침 다음 요리를 가지고 나온 종업원이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하며 접시를 내려놓고 갔다.

“일단 식사부터 하죠. 흥분하지 말고요.”

에드워드는 흑마법사를 검거하는 일보다 음식을 낭비하지 않는 일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여기는 기색이었다. 리타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접시의 음식을 덜었다. 김이 펄펄 나는데 냉큼 입에 넣더니 “앗, 뜨거!” 하며 종업원의 주의를 부질없게 만들었다.

진지함을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 탓인지 케인은 시종일관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나를 신전으로 끌고 가서 뭐라고 할 건데?”

“뭐라고 하긴, 네가 흑마법사라고 고발하는 거지. 흑마법사는 무조건 처형이야. 알지?”

입천장을 데었음에도 리타의 발음은 명확했다. 과연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새틴은 속으로만 감탄했다.

케인은 리타가 명확한 발음으로 하는 위협에 전혀 겁먹지 않았다.

“무슨 근거로?”

“뭐? 마왕을 소환하려고 했다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흑마법사가 뭔지나 알아?”

케인이 빈정거렸다. 새틴은 슬쩍 눈치를 봤다. 리타가 흑마법사에 대해 알려 줬다고 지난밤에 말했는데 벌써 잊어버렸을까.

어이가 없어 눈살을 찌푸린 리타를 앞에 두고 케인이 차분히 나열했다.

“인격을 훼손하지 않을 것. 생명을 이용하지 않을 것. 망자를 모욕하지 않을 것.”

케인에 비해 상당히 흥분한 채로 리타가 대꾸했다.

“그걸 누가 몰라?”

“인격을 훼손하지 말라는 건 정신을 조종하지 말란 뜻이고, 생명을 이용하지 말라는 건 산 사람에게 실험하지 말란 뜻이지.”

“아, 나도 안다니까? 세 번째를 어겼잖아. 망자를 모욕하지 않을 것!”

“내가?”

“시치미 떼지 마. 그게 아니면 왜 하필 그런 데서 마법을 쓰고 있었는데. 그것도 야심한 시간에.”

야심한 시각, 유골이 잔뜩 묻힌 장소에 나타난 검은 로브의 마법사. 문장만 봐도 수상함이 넘쳐흘렀다.

새틴은 케인이 무어라 변명할지 궁금했다. 에드워드도 쉼 없이 식사하며 케인을 흘끔거렸다.

케인은 대답하지 않고 먹기 좋을 정도로 식은 요리를 제 접시에 덜었다. 할 말이 없어 뜸을 들이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약을 올리려고 시간을 끄는 걸로 보였다. 태연히 한 입 먹고 나서야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 밑에 묻힌 사람이 누군지 알아?”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리타는 눈만 껌뻑일 뿐 대답하지 못했다. 케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망자는 죽은 사람을 말하는 거잖아.”

“그래. 그게 뭐.”

리타가 퉁명스레 받아쳤지만 케인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밑에 있는 것들이 진짜 사람이야?”

“뭐? 당연히 사람이지, 무슨 소리야.”

“사람을 그렇게 쓰레기 모으듯 한자리에 몰아넣고 태운다고?”

“그건.”

리타는 클로버랜드 사람이 아니다. 화장터에 관해서도 어제 처음 알았다. 그럼에도 케인의 말에서 무언가 깨달은 얼굴이었다. 에드워드도 식사를 멈췄다.

“열 명, 스무 명, 수십 명을 병 걸린 가축 버리듯 구덩이에 내던지면 철퍽 철퍽 소리가 나. 그러다 보면 이 사람 팔 밑에 저 사람 머리가 있고, 그 밑에는 또 딴 사람 엉덩이가 있어. 그렇게 켜켜이 쌓이면 불쏘시개를 넣고 불을 붙여. 하루 종일 태우는 거야.”

마치 직접 목격한 듯 생생한 묘사였다.

“다 타고 나면 그 위로 흙을 뿌려. 구덩이 위로 날리는 뼛가루는 빗자루로 휙휙 쓸어 넣고. 대충 흙이 차면 그 자리엔 아무것도 안 남아. 묘비도 없고, 기도하는 사람도 없어.”

넓은 공터에는 그런 구덩이 흔적이 몇 개나 있었다. 막연히 사람을 태워 묻은 자리라고 생각했을 뿐 새틴은 그 과정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리타와 에드워드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럼 이제 다시 말해 봐. 그게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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