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44화 (44/139)

44화

새틴이 고민에 빠져 있는데 케인이 대뜸 중얼거렸다.

“수상해.”

“뭐, 뭐가.”

“일부러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나야 모르지. 너는 아무 얘기나 다 하는 척하면서 결국 중요한 순간엔 입을 다물잖아.”

그렇게 말해 봤자 새틴은 알아듣지 못한다.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하고 막연히 추측할 뿐.

새틴이 아무 대꾸하지 않고 어색하게 웃으니 케인이 혀를 찼다. 새틴이 슬그머니 고개를 물리자 케인도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 에드워드와 리타는 저만큼이나 앞서가고 있었다.

“정말 기억을 못 하는 거 같기도 하고.”

“같기도 한 게 아니라 정말이라니까.”

“어떻게 믿겠어.”

퉁명스레 말하지만 새틴은 케인이 제게 상당히 호의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부쩍 거리를 좁힐 때마다 새틴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면 케인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몸을 물렸다. 새틴의 반응을 세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다.

몇 걸음인가 가다가 케인이 물었다.

“어디까지 기억이 나?”

“……어디부터냐고 묻는 편이 정확하지 않을까?”

“그래, 어디부터 나는데.”

새틴은 저 멀리 보이는 클로버랜드 서문의 횃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말을 골랐다.

“캄캄한 데서 정신이 들었어.”

마침 그때처럼 어두워서인지 기억은 쉽게 떠올랐다. 캄캄한 공간은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만질 수 없었다.

“주변을 더듬으면서 돌아다니는데 발치에 뭐가 걸리더라. 느낌이 사람 같더라고. 얼른 확인해 보니까 살아 있어서 어찌나 다행이던지.”

어째 말하다 보니 다른 장르 도입부 같다. 눈 뜨니 기이한 공간. 주위엔 모르는 사람들이 여럿 쓰러져 있고, 그 사람들이 깨어나면 정체 모를 존재나 메시지창이 나타나 게임을 시작하는 거지.

‘전부 무쌍 찍는 내용이었는데…….’

재밌는 게 참 많았는데 이제 못 본다 생각하니 새삼 아쉽다. 많이는 아니고. 그간 목가적으로 지내며 웹소설이나 웹툰 없이 지내는 데는 익숙해졌다.

새틴은 딴생각을 접고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였는데, 의식이 없었어.”

“……할아버지?”

케인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이 부분은 원작대로네.’

할아버지는 아마 흑마법사였을 거다. 케인이 미워해 마지않는 흑마법사. 새틴이 해야 할 일을 케인이 대신하고 있기에 혹시 흑마법사와의 관계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달라진 부분은 새틴과의 관계뿐일까. 겨우 그거 때문에 이렇게까지 전개가 바뀌었다니.

새틴이 나비 효과라는 말을 떠올리고 있는데 케인이 불쑥 물었다.

“그래서? 죽였어?”

“뭐?”

“농담이야. 그다음에 어떻게 했는데.”

상당히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다크에이지에서 케인은 무난한 성격이었다. 특별히 재밌거나 명랑하지 않지만 분위기를 깨지도 않는. 그런데 실제로 만나 보니 좀 다르다. 농담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사람 같다.

“응?”

전혀 귀엽지 않은 채근에 새틴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야, 업고 길을 찾으려고…….”

돌연 등줄기가 서늘해서 새틴은 잠시 말을 멈추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낮과 달리 밤공기는 꽤 찼다. 작년 이맘때에도 가벼운 감기에 걸린 적이 있다.

“그 미친, 늙은, 할아버지를 업고 길을 찾았어?”

“으응, 하루 넘게 걸었던 거 같아. 앞은 안 보이고 배는 고프고 죽겠더라고.”

“힘들었겠네.”

“정말로. 할아버지를 버리고 싶었다니까.”

“안 버렸어?”

케인의 목소리가 또 음산해졌다.

새틴이 흑마법사를 죽였거나 버렸다는 대답이 듣고 싶었을까. 그렇다면 미안해서 어쩌지.

새틴은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같이 나왔지. 어두운 데서 혼자 있으면 더 무섭겠더라고.”

사실은 아니다. 새틴은 어둠도 혼자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할아버지가 아니라 건장한 남자였다면 그냥 두고 갔을지도 모른다.

‘노약자라서 데리고 나왔다고 하면 황당해할 테니까.’

새틴 딴에는 케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고른 대답이었다.

그런데 새틴이 말을 마친 직후 어디서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새틴은 무슨 소리인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어두워 별다른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방금 무슨 소리 안 들렸어?”

“못 들었는데.”

“잘못 들었나…….”

“그래서. 그다음엔?”

∞ ∞ ∞

클로버랜드 서문으로 들어섰을 때는 새벽녘이었다. 모두 피곤한 상황이라 일단은 가까운 여관으로 들어갔다. 케인이 뒤따라 들어가는데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케인도 잠자코 있었다.

리타는 방을 세 개 빌렸다. 하나는 자신이 쓸 것, 또 하나는 에드워드가 쓸 것, 나머지 하나는 새틴과 케인이 쓸 것이었다. 딱히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새틴과 한방이라니. 케인은 또 잠자코 있었다.

새틴이 열쇠를 받으며 고개를 갸우뚱하자 리타가 목소리도 낮추지 않고 주의를 주었다.

“잘 감시해. 무슨 짓을 또 할지 모르니까.”

일부러 케인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케인은 코웃음만 쳤다.

2인용 객실로 들어온 후 새틴은 리타의 주의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케인을 남겨 둔 채 태연히 씻고 오더니 훌훌 옷을 갈아입었다. 케인은 그 모습이 영 탐탁지 않았다.

‘고생을 해서 저렇게 비쩍 마른 건가.’

케인의 속도 모르고 새틴은 실없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음, 잘 자.”

그리고 침대에 파고들자마자 순식간에 잠들었다.

케인은 새틴의 고른 호흡을 확인한 후에야 몸을 씻고 왔다. 새틴이 얌전히 잠들어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어처구니가 없네.’

오는 내내 들은 이야기는 곱씹을수록 어이가 없었다.

원래도 케인은 신을 믿지 않았다. 4년 전부터는 더 적극적으로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 정말로 신이 있다면 위선을 하는 신관과 성기사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되었다.

이제는 정말 일말의 기대마저 사라졌다.

‘신은 없어. 확실히 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새틴이 여태 그 미친 늙은이와 함께 있었을 리 없다. 기억을 잃은 채로 정신 나간 늙은이와 살았단 이야기를 들으며 케인은 그야말로 진창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새틴이 기억을 잃은 이유는 아마 그 늙은이가 한 짓 때문이다. 예전에도 새틴은 기억을 잃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늙은이가 뭔가 수작을 부리려다 실패한 결과일 터. 그 자신이 백치가 된 이유는 모르겠지만.

‘천벌은 아니겠지. 신이 없는데 무슨 천벌이 있어.’

바보가 되어서는 새틴의 수발을 받으며 살다 죽었다니. 악당에게 어울리지 않는 최후였다. 자기가 한 짓을 모두 돌려받으면서 고통스럽게 죽었어야 했는데.

‘아니, 무력하게 죽은 것도 나름대로 어울리나?’

배변조차 혼자 하지 못하는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겠지. 남의 목숨을 이용해 만든 결과물로 칭송을 듣고, 내내 저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잘난 척이나 할 줄 알았겠지.

꼴좋다고 생각을 하다가 도로 열불이 터졌다.

‘그 꼴로 혼자 살다 뒈졌어야 했는데.’

뒈질 때까지 새틴에게 고생을 시키다니. 대체 얼마나 좆같은 악연인 건지.

케인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급히 고른 여관이라 별로 설비가 좋지 않았다. 좀 격하게 움직였다고 침대에서 끼익 소리가 났다.

혹시 새틴이 그 소리를 듣고 깼을까 봐 케인은 황급히 확인했다. 다행히 새틴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으니 속이 울렁였다.

‘살아 있었어.’

한동안은 의심 속에 살았다. 죽었을 리 없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속였다. 허물어진 학교 터에 몇 번이나 찾아갔는지 모른다. 이미 치안청에서 샅샅이 뒤졌음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러다 로저스와 마주쳤다. 로저스 역시 새틴을 찾으러 그곳에 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추모를 하러 왔다고 했다. 로저스는 케인에게도 같은 이유로 왔냐고 물었고, 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케인은 로저스의 연민과 죄책감 가득한 얼굴을 보며 허튼짓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우쳤다.

그 후로 그곳에는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다.

‘멍청한 날다람쥐 자식. 추모는 무슨.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

케인은 안 만난 지 벌써 3년이 넘은 로저스를 비웃었다. 못된 놈은 아니었으니 아직도 조금은 죄책감을 느끼면서 살고 있을 테다. 물론 그런다고 새틴을 데리고 가 보여 줄 마음은 없다. 계속 그렇게 살라지.

그리 생각하다 돌연 의심스러워졌다.

‘진짜 살아 있는 건가?’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 맞는지 불안해졌다. 케인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새틴의 침대로 다가갔다.

예나 지금이나 케인은 밤눈이 밝았다. 닫힌 눈꺼풀과 살짝 벌어진 입술, 느리게 오르내리는 가슴이 분명히 보였다.

‘살아 있는 거지?’

케인은 손을 뻗었지만 새틴을 만지지는 못했다. 뺨에 닿기 직전에 도로 물리기를 반복했다.

‘살아 있어.’

들리지 않도록 조그맣게 공식을 읊으니 선명히 피어오르는 마력이 보였다. 늙은이가 케인에게 남긴 선물이다. 원한 적 없지만 버릴 방법도 없어 이제 케인도 익숙해졌다.

마력은 케인의 의지를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불의 굴곡을 타고 올라가 새틴의 목덜미에 닿았다. 조금 전 만지지 못한 뺨을 스치고 눈꺼풀을 지나 귓불로 흘러내렸다.

이윽고 케인은 새틴의 뺨을 만졌다. 손가락 끝에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진짜였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4)============================================================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