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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43화 (43/139)

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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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틴이 목가적 생활을 한껏 만끽하던 지난 4년 동안, 케인은 하루도 쉬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다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전부터 케인은 사람들에게 기대가 없었다. 기대나 믿음, 배려 같은 것들은 애초에 케인의 인생에 존재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스스로 얻어야 하고, 고난과 역경은 개인의 문제였다.

그리 생각하던 케인이 신전 기사단을 기다렸다. 왜 그런 막연한 계획이 이루어질 거라 생각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배가 안 고프니 넋이 빠졌던 건지.’

어른은 아이를 도와야 한다느니, 가장 어두운 순간 분명 누군가 구해 줄 거라느니. 그런 헛소리를 하던 새틴에게 물이 들었는지도 모르고.

치안청과 신전에서 나온 사람들이 학교에 도달했을 때 그들의 목표는 케인을 비롯한 아이들의 구조가 아니었다. 사악한 흑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기습해 처치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부랑아 몇과 시골뜨기 요리사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케인이 불길 속에서 의식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시간이 꽤 지난 후였다. 케인을 치료해 준 신관은 운이 좋았다고 했다. 허물어진 문 너머에 케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면 구하지 않았을 거라며.

실명은 일시적인 현상이었는지 케인은 신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주변의 풍경도. 낯선 막사 안에는 신관과 케인뿐이었다.

「다른 사람은…….」

「다들 조사 중이란다. 친구들이 걱정되니?」

「친구?」

케인은 한 번도 누군가를 친구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제 이름을 부르던 새틴이 떠올랐다. 젖은 옷을 케인에게 내주고 망설임 없이 둘러업던 소년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아이쿠, 얘야.」

케인은 나이 지긋한 신관을 밀치고 일어났다. 다급히 막사를 빠져나온 케인은 말을 잃었다. 학교는 이미 다 타 허물어졌고, 치안청 제복을 입은 경관들이 남은 재를 들쑤시며 무언가 찾고 있었다.

바로 뒤따라 나온 신관이 한쪽을 가리켰다.

「친구들은 저쪽 막사에 있단다.」

케인은 신관이 가리킨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그곳에 새틴은 없었다. 검댕 묻은 얼굴로 줄 선 아이들은 여덟 명뿐이었다. 아이들을 감시하던 경관이 케인을 보고 고압적으로 말했다.

「정신 차렸으면 너도 줄 서라. 조사 중이니까.」

전날까지 학교에는 열세 명이 살았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는 케인을 포함해도 아홉 명뿐이다. 네 명이 없다. 케인은 그 네 명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로빈, 털북숭이, 늙은이. 그리고 새틴.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죠?」

케인의 물음에 경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다른 사람?」

「아직 나오지 못한 사람이, 구해야 하는 사람이 있어요.」

늙은이든 털북숭이든 알 게 무언가. 하지만 새틴은 거기 없어서는 안 되었다. 애초에 외부에 도움을 청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새틴이었다. 새틴은 사람들이 오면 당연히 자신을 구해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귀찮은 듯 얼굴을 찌푸린 경관의 얼굴을 보니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아직 못 나온 사람이 있다고!」

「이 녀석이 감히 어딜 붙잡아? 지저분한 꼴을 하고서는.」

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여기에 없는 사람은 죽은 거다. 저들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케인은 아이들 사이에서 로저스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친 로저스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조사가 모두 끝난 후 아이들은 클로버랜드의 거리로 흩어졌다. 아이들에게 갈 곳이 있는지 없는지는 치안청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치안청의 성과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수십 년 만에 나타난 흑마법사를 처단했다는 머리글 아래에는 과장과 허언이 빽빽했다. 악랄한 흑마법사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아이들을 모두 구출하고, 흑마법사는 현장에서 사살했다는 내용은 웃기지도 않았다.

아이들은 모두 구출되지 않았다. 불길에 놀라 알아서 뛰쳐나온 아이들만이 살았다. 애초에 치안청에서는 아이들을 구출할 생각도 없었다. 새틴에 관해서는 흑마법사의 제자였다고 일축했고, 털북숭이와 로빈은 아예 거기 존재하지 않던 사람이 되었다.

학교는 시커먼 잿더미가 되었지만, 케인의 가슴에는 시퍼렇게 불이 붙었다.

‘이 도시에는 모두 쓰레기 같은 놈들뿐이야.’

원래도 케인은 인류애나 애향심 따위 없었는데 그 일 이후로는 클로버랜드와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이 더해졌다. 도시가 불타 모두 죽는 모습을 보아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실적을 채울 수만 있다면 아이들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치안청. 해야 할 일을 떠넘긴 채 두 손 놓고 방관하는 신전. 그전까지 자선가라며 존경하던 늙은이가 실은 흑마법사라는데 아무 의심도 하지 않는 나태한 시민들.

케인은 치안청에 경고를 보냈다. 타락한 인간들의 도시는 죄의 대가를 똑똑히 치르게 될 거라고.

‘무능한 자들.’

케인은 자유롭게 클로버랜드를 드나들었다. 얼굴을 내놓고 도시 안을 활보했다. 치안청은 협박 편지를 보낸 자를 찾겠다며 도시 내 순찰을 늘리고 불심 검문을 했지만 여태 케인을 붙잡지 못했다. 치안청의 대응은 그저 보여 주기에 불과했다.

다들 생각 없이 살고 있었다. 당장 눈앞의 이익만 좇으며 만족했다. 걱정도 후회도 반성도 없다. 이제 모두가 그렇게 산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학교를 불태운 마법사는 이미 죽였다. 마법사에게 동조한 나머지도 차례로 죽일 생각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고통스럽게 죽게 될 거다.

어제까지만 해도 케인의 결심이 그랬다. 그런데…….

“어, 음. 그러니까 우리가, 친구였어요?”

죽은 줄 알았던 새틴이 나타나는 바람에 굳은 결심이 와르르 허물어졌다.

“……나를 못 알아보는 거야, 지금?”

“어, 음.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하는 듯한 새틴의 표정을 보며 마음도 와르르 무너졌다.

∞ ∞ ∞

밤이 늦었기에 일단은 클로버랜드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주 쓸데없는 말다툼을 중재할 필요가 있었기에 새틴과 에드워드는 각자 케인과 리타를 맡아 앞뒤로 흩어졌다.

새틴은 말없이 걷는 케인을 흘끔 쳐다보고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뭐람.’

둘씩 짝지어 걷고 있자니 아직 어색한 동호회 뒤풀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같다. 근처에 가게라도 있다면 “저 잠깐 볼일이 있어서요. 먼저 가세요.” 하고 어색하게 뒷걸음질 쳤을 텐데 주변은 온통 어둡고 조용하기만 했다.

새틴은 고심해서 할 말을 만들어 봤다.

“아까 거기서 진짜 나쁜 마법을 쓰려고 했어?”

새틴의 입장에서는 초면인 데다 주인공인 케인에게 반말을 하기가 영 어색했다. 하지만 케인이 왜 재수 없게 존댓말을 쓰냐며 화를 내서 어쩔 수 없이 말을 내렸다.

“나쁜 마법이 뭔데?”

“……흑마법 말이야. 우리는 네가 혹시 흑마법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우리?”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차라리 달이 완전히 구름에 가려서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새틴이 뭐라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굴리고 있으니 케인이 혀를 차고 물었다.

“흑마법이 뭔지는 알아?”

“낮에 리타한테 들었어.”

“리타?”

또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케인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리타의 이름을 몰라서 되묻는 말은 분명 아니었다. 통성명은 아까 화장터에서 했으니.

새틴이 다시금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으니 케인이 시선을 진득이 마주쳐 왔다. 새틴은 눈 굴리기를 멈추며 동시에 발도 멈췄다.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그렇다니까.”

의심스러워서 자꾸 묻는 걸까.

‘기억난다고 했어야 했나?’

함께한 시간이 기억날 리 없다. 새틴은 케인을 오늘 처음 만났으니까. 그러나 케인을 처음 알았느냐고 하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새틴은 케인이라는 사람이 아닌 캐릭터에 관해 알고 있었다.

‘아니, 이제 안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는걸.’

원래의 새틴이라면 당연히 케인과 아는 사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반가워할 사이는 아닐 텐데.

‘아무래도 내 잘못이 아닌 거 같아.’

이제까지 새틴은 자신의 미필적 고의에 의해 전개가 어그러졌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케인의 반응을 보니 새틴이 이 세계에 오기 전부터 이미 무언가 꼬여 있었던 듯싶다.

케인이 새틴과 친구였다고 주장하는 시기는 새틴이 이곳에 오기도 전이다. 다크에이지에서라면 그 시절 두 사람이 친구로 지냈을 리 없건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네.’

그나마 추측하자면 이렇다. 미래가 고정되어 있던 소설이 실제 세계로 발현하며 무수한 불확실성이 태어났다는 거다.

그리 생각하니 복잡한 기분이다. 누나의 소설이라 들어왔는데 들어오고 나니 더는 누나의 소설이 아니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누나의 명작이 그냥 사람 사는 얘기가 되어 버리다니.’

따뜻한 사람 이야기가 싫은 게 아니다. 너무 극단적인 장르 변신이 껄끄러울 뿐이다. 다크에이지는 마왕도 무찌르고 마신도 무찌르고 아무튼 거창한 모험을 하는 이야기였는데.

‘누나는 자기 소설이 이 꼴이 된 걸 알면 뭐라고 할까? 나라도 이 꼴을 수습해야 하지 않을까?’

기억하기로 악역이 이야기를 수습하는 전개가 한동안 대세였다. 하지만 이 세계에 떨어진 지 벌써 4년이나 지났으니 유행도 바뀌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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