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오래 지나지 않아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 의식하지 못했던 낮의 소음들이 사라진 숲은 상당히 스산했다. 코앞이 화장터이자 매장지라는 점을 의식하면 더 그렇게 느껴졌다.
“언제나 저희가 옳은 길을 가도록 굽어살피시고, 혹여 저희가 잘못한 일이 있다면 마땅히 벌 받게 하옵시고…….”
어느 순간부터 옆에서 에드워드가 조그맣게 기도문을 읊었다.
‘무섭나?’
새틴은 신을 믿지 않지만 아무튼 옆에서 기도를 하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천사를 만난 적이 있으면서 신은 안 믿는다는 게 좀 웃기네.’
신은 아직 만난 적이 없으니까 그럴 수 있지. 새틴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납득했다.
지루한 시간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더는 아는 기도문이 없는지 에드워드가 입을 다물고도 한참 지났을 무렵.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다. 포장도로가 아닌 흙바닥을 딛는 발소리가 커 봐야 얼마나 크겠는가. 그럼에도 주위가 고요한 탓인지 그 소리는 세 사람의 귀에 뚜렷이 닿았다.
어둠 속에서 리타가 손을 마구 움직였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새틴과 에드워드는 가만히 있었다. 리타는 입 모양으로도 무어라 말했지만 당연히 알아듣지 못했다.
그사이 발소리의 주인이 공터에 이르렀다.
‘남자 같은데.’
그나마 공터는 숲에 비해 달빛이 잘 들었으나 괴인의 얼굴은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실루엣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괴인은 상당히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에드워드가 입은 것과 비슷한 로브를 걸치고 있음에도 티가 났다. 대단히 기골이 장대한 여자일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그보다는 그냥 체격 좋은 남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새틴은 판단했다.
그리 판단하고 나니 약간 억울했다.
‘왜지?’
지난 4년간 새틴도 키가 좀 자랐다. 할아버지를 돌보고 텃밭을 가꾸느라 근육도 붙었다. 오두막에서 마을까지 다소 거리가 있다 보니 자연히 하체도 단련됐다. 예전 몸보다 확실히 볼만한 몸이라고 새틴은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에드워드도 그렇고 저 남자도 그렇고 왜들 저렇게 크냔 말이지. 새틴은 어둠 속에서 제 가슴과 어깨를 슬그머니 더듬었다.
‘내가 볼품없는 건 아니야. 확실해.’
새틴의 외모 점검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남자가 이곳에 온 목적을 드러냈다.
‘마력이다.’
마력을 보지 못하는 리타와 에드워드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틴은 분명히 보았다.
어둑한 공터에 누군가 반짝이는 잉크를 쏟은 듯 빛이 퍼져 나갔다. 스스로 발광할 뿐 사물을 비추지 않기에 그 가운데 선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알아볼 수 없었다.
새틴은 리타의 옆구리를 툭 쳤다. 리타의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손짓이나 입 모양만으로는 말을 전할 수 없어 새틴은 리타의 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속삭였다.
“저 남자 지금 마법을 쓰고 있어.”
“뭐?”
리타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그러나 지적할 새가 없었다. 리타가 공터로 뛰쳐나갔다.
“리타 씨!”
당황한 에드워드가 리타를 쫓아가고 새틴도 얼결에 그 뒤를 따랐다.
이 요란한 기척을 남자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공터에 넓게 퍼지던 마력이 그대로 멈췄다. 남자는 황급히 세 사람의 반대쪽으로 향했다.
“거기 서!”
리타의 외침이 어둠 속에서 울렸다. 그런다고 설 참이었다면 애초에 도망치지도 않았을 거다. 남자가 멈추지 않자 리타가 다시 외쳤다.
“화산재! 아홉! 귀리!”
갑자기 저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지.
그리 생각한 사람은 새틴뿐이었다. 돌연 에드워드가 리타의 뒤를 쫓아가기를 멈추고 새틴의 앞을 가로막았다. 새틴은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지만 이내 에드워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리타가 마법을 썼다.
리타의 주변으로 빛이 일고, 그와 거의 동시에 불길이 피어올랐다. 큰불은 아니었으나 그 형상이 화살처럼 날카로웠다. 리타의 얼굴을 일순간 주황빛으로 물들인 불꽃은 곧바로 남자에게로 향했다.
남자가 무어라 작게 중얼거렸다. 마법은 아니었다. 아마도 욕설 같았다.
가까스로 불화살을 피한 남자가 멈춰 서서 외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목표물에 적중하지 못한 불꽃은 이내 사그라졌지만 아주 잠깐이나마 남자의 얼굴을 환히 비췄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속으로 외쳤다.
‘케인이다, 케인이야!’
주인공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잘생겼을 턱이 없다. 그리고 눈동자 색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머리칼이 금발이었다. 다크에이지의 주인공 케인은 금발 미남이다. 저만한 미남이 또 있다면 그야말로 신의 실수일 테니 저 남자는 케인일 수밖에 없다.
왜 이렇게 됐을까. 새틴은 소리 없이 좌절했다. 저 자리에 자신이 있고, 이 자리에 케인이 있어야 했는데.
‘아니, 내 잘못은 아니잖아. 그냥 뭐가 좀, 꼬인 거지.’
변명을 하려 해도 찝찝한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런 느낌이었다. 지원한 회사의 임원 아들이 채용 점수 조작으로 합격했는데, 실수로 같이 조작돼 합격한 느낌.
굿도 안 봤는데 떡을 먹었다. 심지어 달라고 한 적도 없는 떡이다.
‘일단 다크에이지는 생각하지 말자.’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새틴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테지만.
리타가 앞으로 나섰다.
“무슨 마법을 쓴 거지? 저주? 망자 회생?”
케인이 쓴 마법이 절대 좋은 마법은 아닐 거라 확신하는 어조였다. 에드워드가 옆으로 다가가며 살짝 눈치를 줬지만 리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못 알아들은 체일 수도 있고.
“아래 묻힌 시신들로 무슨 짓을 했는지 듣고 싶은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케인은 미지근하게 반응했다. 반면 리타는 빠르게도 뜨거워졌다.
“한두 번이 아닌 거 알고 있어. 이 더러운 흑마법사!”
“리타 씨, 아직 이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잖습니까.”
“확실하지 않기는! 방금도 마법을 썼는데.”
“예?”
에드워드는 케인이 방금 마법을 썼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리타가 그저 수상한 남자를 보고 다짜고짜 의심하는 줄 알았다.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마법이라니?”
케인이 시치미를 뗐지만 리타는 당황하지 않았다. 두어 걸음 뒤에 서 있던 새틴을 가리키며 당당히 자랑했다.
“아닌 척해도 소용없어. 내 친구가 마력을 볼 줄 알아. 네가 조금 전에 여기서 아주 사악하고 거대한 마법을 쓰려 했다는 사실도 바로 알아차렸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케인이 피식 웃으며 새틴 쪽을 쳐다보았다. 새틴은 괜히 허리를 바짝 세웠다.
어두워서 표정이 드러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대낮이었더라면 새틴은 여럿이 보는 앞에서 세상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말았을 테니.
‘우리가 언제부터 친구였지? 사악하고 거대한 마법은 또 뭐야.’
화장터이자 매장지 위에서 쓰는 마법이 건전한 마법일 거란 생각은 조금도 안 든다. 규모가 제법 컸던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새틴은 그런 말을 직접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새틴은 얼떨떨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때마침 구름이 움직이며 공터에 달빛이 들었다. 모여 선 사람들의 얼굴이 면면히 드러났다.
그 틈을 타 케인이 눈썹 사이를 찡그리고서 리타와 에드워드의 얼굴을 살폈다. 마지막으로 새틴을 쳐다본 순간.
“……새틴?”
‘뭐야, 왜 알아봐.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한눈에 알아봐.’
“살아, 살아 있었어?”
‘뭐야, 왜 다가와.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이렇게 갑자기…….’
“살아 있었어, 어떻게.”
케인이 성큼 다가왔다. 리타와 에드워드가 당황해 막아서려 했지만 장애물이라도 치우듯 밀쳐 내고 순식간에 새틴의 앞에 섰다.
‘……너무 크지 않나?’
위압적인 체구 앞에서 새틴은 바짝 굳었다. 피하려는 시도도 못 해 보고 끌어안겼다. 아까 떨어진 데서 보았던 넓은 어깨와 단단한 팔이 가슴과 등을 압박했다. 숨이 막혀 헐떡이며 새틴은 머리를 핑핑 굴렸다.
‘사이가 좋으면 안 되는데?’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무리 전개가 꼬였어도 주인공이 악역을 보고 반가워서 오열을 하면 안 되지. 아직 오열은 하지 않지만 곧 할 기세였다.
“죽은 줄 알았어. 죽은 줄, 그래서 나는, 다 죽여 버리려고……!”
죽이긴 뭘 죽여. 설마 원래 새틴이 해야 했던 마왕 소환을 하려던 건 아니겠지.
새틴은 일단 케인을 밀었다. 이야기를 좀 해야 할 듯한데, 전혀 밀리지 않았다.
“미안한데, 잠깐 이야기를 좀.”
새틴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하고 나서야 케인은 포옹을 풀었다. 리타가 재빨리 둘 사이로 끼어들어 케인을 밀쳤다. 이번에도 역시 밀려나지 않았지만 의도는 전달되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너 내 친구 알아?”
“그쪽이야말로 뭐지? 왜 새틴을 친구라고 부르지?”
“친구니까 친구라고 부르지. 너 뭐냐고.”
“……나도 친구인데. 그쪽보다 훨씬 오래된 친구지.”
“참 나, 오래된 게 뭐가 중요하다고. 살아 있는지도 몰랐으면서. 너보다 내가 훨씬 가까운 친구야.”
“가까운 친구? 나와 새틴은 함께 위기를 겪었다. 그쪽은 상상도 하지 못할 위기.”
“그래 봤자 여태 연락도 안 한 거 아냐? 그게 무슨 친구야.”
다크에이지에서 케인과 리타는 동료다. 끝에 가면 결혼도 하는 사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두 사람은 누가 새틴과 더 친한 친구인지를 따지며 유치한 말다툼을 하고 있다. 심지어 둘 다 새틴의 친구도 아니면서.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서 주연 삼인방 중 한 명인 에드워드가 눈치를 보다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새틴은 대답할 기력이 없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망했어. 이건 다크에이지가 아니야, 다 크레이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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