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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39화 (39/139)

39화

새틴이 의문을 곱씹고 있으니 리타가 어깨를 으쓱이며 부연했다.

“전쟁이 없으니까 말이야. 마법사들이 공을 세울 일이 없잖아.”

웬 전쟁?

새틴은 의아했지만 일단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서 마법사들이 여기저기 나서서 잘난 척을 해. 흑마법사 잡는 일에도 재빨리 나섰겠지.”

“그렇구나…….”

쉽게 얘기하자면 마법사들이 밥그릇을 챙기느라 남의 일까지 다 해치우고 다닌다는 소리다. 사람들에게 듣기로 마법사는 모두가 동경하는 존재라던데 그런 사람들도 밥그릇을 챙긴다니 묘한 느낌이 든다.

‘다들 열심히 사는구나.’

마을에 돌아가면 텃밭을 조금 확장해 볼까.

새틴이 소소한 다짐을 하는 동안 리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후로 신전이 흑마법사를 적발하는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뗀 모양이야.”

새틴은 아까 리타와 신관이 실랑이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아까는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가 싶었는데 이제 알겠다.

“예전 같았으면 흑마법사란 말만 꺼내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을 텐데, 시큰둥하잖아. 치안청에나 가라고 하고.”

“그냥 치안청에 말하면 안 돼?”

흑마법사를 신전이 잡든 치안청이 잡든 무엇이 그리 다른지 새틴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리타는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새틴은 얼른 절인 무를 먹는 시늉을 했다.

“치안청 놈들은 항상 실적 채우는 데만 신경을 쓴단 말이야. 일 처리를 제대로 하는 꼴을 본 적이 없어.”

이곳의 치안청은 따지자면 경찰청과 비슷하다. 한국에 경찰을 신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듯 여기서도 그런 모양이다. 리타는 치안청 놈들을 한참 욕하다 더 할 이야기가 없어지자 신전으로 화살을 돌렸다.

“신전도 그래. 원래 자기들이 하던 일인데 그렇게 냉큼 넘겨주는 게 말이 돼?”

“그러게.”

“치안청하고 신전하고 서로를 견제하고, 어? 그러면서 시민들을 지킬 궁리를 해야지. 우두커니 눌러앉아서 돈벌이나 하고 말이야. 생각해 보면 치안청보다 신전 놈들이 더 나빠.”

“음, 그러게.”

새틴은 절인 무를 우적우적 씹으며 대충 호응하는 체했다. 잘 모르는 일에 긴말을 보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이웃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새틴과 리타는 반사적으로 그쪽을 쳐다보았다.

덥지도 않은지 검은 로브를 걸친 남자는 새틴과 리타의 또래쯤 되어 보였다.

‘덩치 크네.’

새틴은 슬그머니 엉덩이를 움직여 남자와 거리를 두었다. 설마하니 남자가 다짜고짜 덤벼 오진 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남자는 리타를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문을 뗐다.

“이봐요.”

“뭐요.”

리타는 퉁명스레 대응했다. 헌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얼굴이다.

“신전이라고 나서기 싫어서 나서지 않는 게 아닙니다.”

“그쪽이 신전 대변인이라도 돼요? 아니, 그리고 이유가 있든 없든 내가 알 게 뭐예요?”

“대변인은 아니지만, 신전의 입장도 생각해 보시란 말입니다.”

“무슨 입장이요?”

“무슨 일 좀 하려고 하면 신전의 권력이 너무 세지 않느냐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압니까? 치안청이고 관청이고, 죄다 달려들어서 못 하게 하는 일투성이예요. 그 와중에 가만히 있는다고 비난하다니, 너무하지 않습니까?”

남자가 열변을 토했다. 리타는 뱁새눈을 뜨고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잘은 모르겠지만 정치적인 얘긴가?’

새틴은 식사를 마저 했다. 내내 칠면조 고기를 먹느라 곁들여 나온 감자에 손을 안 대고 있었다. 감자는 그사이 식어서인지 좀 짰지만 품종이 좋아 아주 맛있었다. 포슬포슬 부서지는 분질 감자다.

‘역시 탄수화물은 단백질 다음에 먹어야지.’

그 후로도 리타와 남자는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분위기는 계속 뾰족했다. 어느 순간 리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틴이 감자를 다 먹고 마지막 남은 절인 무로 입가심을 할 때였다.

“이제 보니 신관님이시네. 신전 욕하는 거 듣기 싫어서 그래요?”

빈정거리는 리타의 말을 듣고 보니 남자의 로브 아래로 흰 옷자락이 비집고 나와 있었다. 드레스일 가능성은 적다. 아무리 판타지 세계라도 흰 드레스 입은 남자가 흔하진 않다.

아까 신전에서 본 신관들 모두 길고 하얀 옷을 입었던데. 새틴은 리타의 눈썰미에 감탄하며 절인 무를 우적우적 씹었다.

“욕먹는 게 싫으면 할 일을 제대로 하면 되지 않나? 흑마법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데 치안청에나 가 보라고 하는 게 제대로 된 대처는 아니잖아. 안 그래요?”

리타는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썼다. 남자는 그 부분은 지적하지 않았다. 이미 다른 부분 때문에 잔뜩 열이 올라 있었다.

“신전의 입장도 난처합니다. 귀찮아서 못 본 체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다들 발 벗고 나서고 싶어요. 당장에라도 흑마법사 놈들을 깡그리 잡고 싶은데.”

“나서시면 되겠네요.”

“……무슨 말입니까?”

“아니, 지금 행색을 보니까 순례라도 가시는 모양인데 잠깐 도와주고 가면 되잖아요. 오래 안 걸려요.”

∞ ∞ ∞

리타는 싱글벙글했다. 생각지 못하게 신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어 기분이 좋은 듯했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가 좋으니 만족스러워 보였다.

반면 새틴은 속이 복잡했다.

‘에드워드, 에드워드였구나.’

도통 떠오르지 않던 등장인물의 이름이 이제 기억났다. 리타가 섭외한 남자 신관의 이름을 들은 순간에 말이다.

「제 이름은 에드워드입니다. 얼마 전 정식 신관이 되어 순례의 의무를 시작했습니다.」

답은 나왔다. 누나의 소설은 조손의 잔잔한 일상을 다룬 힐링물이 아니었다. 다크에이지에서 지명과 인명을 따온 것도 아니었다. 그냥 다크에이지였다.

‘내가 재미없다고 해서 말을 못 했나.’

전에 누나의 추천을 받아 다크에이지를 1부까지 봤지만 별로 취향이 아니었다. ㅇㅇ는 더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웹소설을 좋아했다. 주인공이 세계관 최강자거나, 힘을 숨긴 최강자거나, 회귀한 최강자거나……. 아무튼 그런 거.

누나가 쓰던 글을 절대 보여 주지 않으려 한 이유를 이제 알겠다. 재미없다고 했던 소설이 사실 누나가 쓴 소설인 걸 알면 민망할까 봐 그랬겠지.

‘하여간 물러 가지고.’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읽어 볼 것을 그랬다. 1부만 보고 뭘 안다고 재미없단 말을 입에 담았을까. 3부까지 읽었으면 명작이라면서 입을 틀어막고 울었을지도 모르는데.

새틴은 뒤늦은 후회를 잠깐 하다가 현실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큰일이네.’

이 세계가 다크에이지를 기반으로 한 세상이라면 지금의 상황에는 큰 문제가 있다. 리타가 흑마법사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것은 1부의 도입부다. 주인공 케인과 마법사 리타, 신관 에드워드가 친구가 되어 모험을 시작하는 부분.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는 리타와 에드워드만 있고 케인이 없다. 주연 삼인방 중 한 명이 없이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심지어 없는 한 사람이 주인공이라니.

‘이래도 되나?’

게다가 케인 대신 이 자리에 있는 새틴은 원래 세 사람이 찾아야 하는 대상이다.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

새틴은 이제 자신이 그저 우연히 새틴이란 이름을 쓰고 있을 뿐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연히 새틴이란 이름을 얻었는데 우연히 주연들을 만나 우연히 사건에 휘말렸을 가능성보다는 뭐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나 이야기가 꼬였을 가능성이 더 컸다.

‘내가 뭘 했어야 했나?’

지금껏 새틴은 원작, 그러니까 누나의 소설이 어떻게 진행될지 생각하며 행동한 적이 없다. 애초에 어떤 소설인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알았다 해도 신경 쓰진 않았을 거다.

‘난 내가 주인공일 줄 알았지.’

주인공이라면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사건이 찾아오게 되어 있다. 케인만 해도 그저 기사가 되려고 열심히 수련하며 살고 있는데 리타가 나타나지 않았던가.

‘누나는 왜 주인공이 아니라 악역을 제일 아꼈을까?’

독자들이야 주인공이 아무리 멋져도 다른 인물을 좋아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애당초 좋아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쓸 텐데 왜 주인공도 아닌 인물을 가장 좋아했는지 의문이다.

누나에게 직접 물어 답을 들을 방도가 없으니 길게 고민해 봐야 기력의 낭비다. 새틴은 한숨을 한 번 쉬고 발을 내디뎠다.

지금 새틴과 리타, 그리고 에드워드는 도보로 이동 중이다. 클로버랜드 서문에서 출발하는 마차를 타고 10분 남짓 달리다가 내렸다. 리타가 흑마법사의 흔적을 발견한 장소가 이 근처라고 했다.

내내 클로버랜드에서 살았다는 에드워드는 이 근방의 지리도 잘 아는지 앞장서서 걸었다.

“이쪽으로는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데 용케도 확인을 했군요.”

“이 근처에 흑마법사가 살던 숲이 있대서 거길 보러 가는 길이었어.”

에드워드는 스물두 살로 리타보다 한 살이 어렸다. 리타는 편하게 말해도 된다고 했지만 에드워드는 기어이 존댓말을 고수했다. 나이보다는 직업 탓이리라고 새틴은 짐작했다.

‘아니면 설정값?’

실존 인물을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은 너무 무례하지.

새틴은 빠르게 반성했다.

“흑마법사가 살던 숲은 이쪽이 아니라 남문 쪽입니다. 국경까지 이어지는 아주 넓은 숲이 있는데 그 안에서 아이들에게 못된 짓을 했죠.”

“아, 남문. 어쩐지 숲이 생각보다 변변찮더라.”

“그때 일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관심이 있다기보단 궁금하잖아. 다들 그렇지 않나?”

“그때 얘기를 해 드릴까요?”

“뭐 좀 알아?”

“4년 전 치안청이 흑마법사를 처단하러 나섰을 때 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리타가 재빨리 에드워드를 쫓아가 옆에 섰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예상한 얼굴이었다. 새틴도 슬쩍 걸음을 재촉했다. 새틴도 그 이야기에는 흥미가 있다.

얼마 전이었다면 흑마법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도 옛날이야기 듣듯 했을 텐데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4년 전에 신전 기사단이 구했을 주인공이 대체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다. 속이 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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