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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35화 (35/139)

35화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같이 산 지 벌써 4년째다. 제대로 대화는 못 해도 매일 함께 밥을 먹고 한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면 정이 들기 마련이다. 처음엔 노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할아버지를 보살폈다.

뿌리가 상하지 않게 조심해서 산삼을 캐며 새틴은 점심 메뉴를 생각했다.

‘산나물 튀김을 할까.’

아니면 산나물 무침을 해서 국수와 먹어도 괜찮을 거다.

‘밥이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이 근방에서는 쌀농사를 짓지 않았다. 쌀이 뭔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식재료를 잘 아는 사람에게 듣자 하니 남쪽 나라에 가면 쌀을 구할 수 있다는데 그나마도 한국에서 먹는 쌀은 아니었다. 길쭉하고 찰기 없는 쌀은 볶음밥에나 어울릴 테다.

‘볶음밥이라도 먹었으면 좋겠네.’

아무튼 쌀이 없는 관계로 새틴은 밀가루로 하는 요리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본디 누나와 함께 살 적에도 살림을 도맡아 한 터라 그리 어렵진 않았다. 기성품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좀 번거로울 뿐.

그러나 빵도 하루 이틀이지. 한식이 생각날 때마다 칼국수와 수제비를 먹다 보니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다. 더 다양한 조리법이 필요했다.

오두막에 정착하고 두어 달쯤 됐을 때 마을 사람에게 부탁해 이 지역 방식으로 국수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파스타 생면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했다. 파스타 생면 만들기는 동영상으로 한 번 본 적이 있을 뿐 직접 해 보기는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이제 새틴은 눈을 감고도 반죽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뭘 만들든 일단은 밀가루를 주물러야 하다 보니 팔에 근육도 붙었다.

‘성장기 덕일 수도 있고.’

새틴은 자신이 대충 스물서너 살쯤 되었으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 나이보다 어린 건 분명한데 외모가 다소 이질적이다 보니 나이를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어차피 정확히 알 방법이 없으니 엉뚱하게 추측했다 해서 무어라 할 사람도 없긴 했다.

‘기왕 판타지 세계로 왔으니 금발이나 빨간 머리여도 괜찮았을 텐데.’

미역처럼 굽슬굽슬한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나쁘진 않으나 좀 심심했다. 마을 사람들 반 이상이 갈색 머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곳에선 검은 머리도 꽤 드문 편에 속하는 모양이지만.

판타지 소설 중엔 등장인물의 머리가 분홍색이나 파란색인 경우도 심심찮았다. 누나는 그 정도까지 상상력이 자유롭진 않았던지 이곳 사람들은 다들 평범한 머리 색이었다.

갈색 머리를 필두로 가끔 빨간 머리, 드물게 금발과 흑발. 나열해 말하면 몇 가지 안 되는 듯하지만 저마다 명도와 채도에 차이가 있어 조금씩 달랐다.

‘오, 꽤 큰데?’

딴생각을 하다 보니 금세 작업이 끝났다.

새틴은 제법 큼직한 뿌리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이만한 크기면 못해도 1억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여기 사람들도 산삼 좋아하려나?’

아마 아닐 거다.

다른 산나물을 뜯어 가면서 이렇게 눈에 띄는 산삼은 그냥 뒀다. 여기 사람들은 산삼에 별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새틴은 바구니에 산삼을 잘 담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점심 준비할 시간이다.

‘점심은 아주 중요한 이벤트지.’

자급자족을 다루는 소설에서 식사는 농사와 채집 못지않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소재다. 특히 계절감이 살아 있는 식단이라면 더더욱.

새틴은 이제 이 소설에 완전히 적응했다.

∞ ∞ ∞

밀가루와 전분에 소금 간을 해 묽게 만든 반죽에 산나물을 슬쩍 적셨다. 적당히 달아오른 기름에 넣으니 바글바글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건질 타이밍을 기다리는데 소리를 듣고 나온 할아버지가 부엌 근처를 기웃거려 얼른 방으로 돌려보냈다. 기름에 데면 큰일이다.

“여기 있으면 다쳐요, 다쳐.”

끼니를 챙기고 잠자리를 살피는 일이야 새틴도 그럭저럭 잘하고 있지만 상처 치료까지는 자신이 없었다.

산나물을 넉넉하게 튀겨 배가 부르도록 먹은 후 밀린 집안일을 시작했다. 그간 귀찮아 미뤄 둔 빨래가 산더미였다.

세상을 바꾼 발명 중 하나가 세탁기라고 누가 그랬더라. 나무통에 하나 가득 들어찬 빨래를 찰박찰박 밟으며 새틴은 먼 곳의 기술을 그리워하였다.

“새애, 틴…….”

“네, 날이 너무 좋죠.”

날이 좋은 김에 묵은 빨래를 해치우며 할아버지도 일광욕을 좀 하라고 텃밭 옆에 앉혀 두었다. 눈은 흐리멍덩해도 포근한 날씨는 느껴지는지 할아버지는 입을 헤 벌린 채 구름을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으…….”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새애…….”

“보통 이런 인물 설정이면 전개 방식이 둘로 나뉘거든요.”

새틴은 할아버지가 자신의 이야기에 전혀 귀 기울이고 있지 않음을 안다. 애초에 귀 기울여 듣는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테고. 그냥 혼잣말을 하느니보단 나아서 할아버지에게 말하는 체하고 있다.

“할아버지를 열심히 보살피다 지쳐서 달아나는 거예요.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후회하고 돌아오는 거죠. 할아버지와 낡은 오두막이 그대로인 걸 보면서 속세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비슷한 전개의 소설 몇 편이 머릿속을 휙 지나갔다.

“다른 전개는요. 그냥 계속 할아버지를 보살피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날 외지인이 와요. 외지인은 왜 이러고 사는지 이해를 못 하는데, 결국 떠날 사람이에요. 소나기가 그치고 나면 호수는 다시 잔잔해지는 법이죠.”

누나는 어떤 쪽을 생각했을까. 어차피 이제 와 누나의 의도를 알 방도는 없으니 새틴은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갈 거다. 하지만 내내 궁금하기는 하겠지.

“저는 사실 이런 삶도 괜찮거든요. 할아버지는 뭔 소리냐 하겠지만 영화 같은 삶은 벌써 살아 봤어요. 그게 멜로나 드라마면 좋았을 텐데 사이코 스릴러였거든요.”

날이 포근한 정도를 넘어 약간 후텁지근한데도 발만은 서늘했다. 새틴은 가만히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빨래를 한참이나 밟은 터라 발목이 창백했다. 한기가 등허리를 타고 정수리까지 올라왔다.

누나를 만나기 전의 삶. ㅇㅇ라는 사람의 인격을 형성한 시간들. ㅇㅇ는 두려운 것과 끔찍한 것에 익숙해지고, 질렸다가, 다시 두려워하고, 끔찍하다 느끼게 되었다.

“아무 일 없는 삶도 괜찮잖아요. 할아버지는 그냥 그렇게 살고, 저도 그냥 이렇게 사는 거예요. 빨래하고, 나물 뜯고, 햇볕도 쬐고…….”

아무 일도 없는 일상. 어제와 같은 오늘. 평화와 권태가 동의어로 느껴지고, 안정이 정지처럼 느껴진다. 빈말로도 즐겁다 할 수는 없는 삶. 그래도 새틴은 지금 이런 삶이 정말로 괜찮았다.

“근데 이런 말 하면 꼭 평화가 깨지거든요.”

“새, 틴.”

“할아버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플래그란 거예요. 할아버지하고 이렇게 계속 살고 싶다고 하면, 꼭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할아버지가…….”

별생각 없이 말을 하다 보니 별로 좋은 얘기가 아니었다. 말이 씨가 된다던 속담을 떠올리며 새틴은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는 침을 주르륵 흘릴 뿐 새틴의 움직임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새틴은 할아버지의 옆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뭐, 설마 그럴 리야 있겠어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4년이나 이렇게 지냈다. 이제 와 일상에 변화가 생길 거란 예감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예정된 사건이 있었다면 진작 일어났겠지.

느긋하게 생각하며 새틴은 빨래를 마저 했다.

빨래를 마친 후 집안일을 얼마간 하다 보니 금세 해 질 녘이 되었다.

‘점심 먹고 돌아서면 저녁 먹을 시간이라더니.’

낮에 튀김을 해 먹고 남은 나물을 기름에 볶다가 국수를 넣었다. 마무리로 향신료를 조금 뿌리면 먹을 만한 맛이 난다.

창문에 붙어 앉아 숲 그림자 움직이는 모습만 보고 있는 할아버지를 식탁 앞으로 데려왔다.

“간장 담그는 법을 배워서 올 걸 그랬어요.”

간장만 넣어도 훨씬 더 맛있을 텐데. 새틴은 할아버지의 입에 국수를 넣어 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고춧가루와 젓갈은 어렵잖게 구했다. 젓갈이 과연 있을까 했는데 비슷한 것이 있었다. 하기야 염장은 가장 기본적인 보존법이다. 이 세계에도 당연히 널리 퍼져 있었다.

새틴이 알던 젓갈과의 차이는 들어가는 재료 정도다. 내륙이라 민물 새우를 염장해 젓갈을 만드는데 뭐가 더 들어가는지 그냥 먹기엔 냄새도 맛도 고약했다. 그래도 김치를 담그며 조금 넣으면 감칠맛이 확 살았다. 지난겨울엔 칼국수와 김치를 이틀에 한 번씩 먹었다.

“연구를 하다 보면 비슷한 걸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무튼 콩과 소금으로 만드는 건 분명하니 시행착오를 거치다 보면 언젠가는 비슷한 결과물이 나오겠지.

새틴은 후루룩 국수를 삼키며 희망을 담아 말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요.”

∞ ∞ ∞

날이 슬슬 더워져 산나물 뜯는 사람들의 행렬도 잦아들 무렵이었다. 마을에 일손을 도우러 갔더니 올해는 여름이 빨리 오려는 모양이라고 누가 그랬다. 한국처럼 절기를 세세하게 나누진 않아도 농경 문화권이라면 기후에 민감한 법이다.

농사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시피 한 새틴은 올해 작황을 예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자코 있었다. 그러던 중에 누가 말했다.

“할아버지 좀 신경 써.”

나름대로 열심히 할아버지를 보살피고 있던 터라 새틴은 약간 당황했다. 마을 사람은 딱히 핀잔을 주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이렇게 갑자기 더워지면 노인네들 픽픽 쓰러지고 그러잖아.”

“아…….”

“물도 자주자주 드려야 돼.”

알겠노라고 대답하고 좀 더 있다 보니 일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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