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32화 (32/139)

32화

겨우 이렇게 죽는다고?

억울해서 미칠 것 같다. 이렇게 죽으려고 여태 살아온 게 아니다.

로저스든 새틴이든 신경 쓰지 말았어야 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순간에 다리만 제대로 움직였으면, 그랬다면 다른 아이들처럼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새틴이 배신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케인!”

시커먼 어둠 속에서 악마의 손가락을 뿌리치고 누군가 나타났다.

“이 미친놈이…….”

케인은 반가움을 표하기에 앞서 저도 모르게 욕을 하고 말았다. 불길을 헤치고 계단을 뛰어 올라온 새틴은 순식간에 케인의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케인이 걱정의 말을 내뱉기도 전에 너스레를 떨었다.

“난 괜찮아. 목욕탕 들러서 물 뿌리고 왔어.”

케인의 얼굴과 팔을 더듬는 손은 뜨거웠다. 소매는 본인의 말마따나 축축하지만 이딴 것이 이 상황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겨우 젖은 옷 한 장을 믿고 불길을 지나왔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친 데는 없어?”

새틴은 걱정스레 묻는 동시에 케인의 손목을 묶은 끈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케인이 무어라 대답할 틈도 없이 빠르게 말했다.

“신전 기사단이 온 모양이야. 생각보다 무식하게 진입을 하네. 어서 나가야 해.”

새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지끈 소리가 들렸다. 케인은 반사적으로 천장을 보았다. 머리 위에서 악마의 손가락이 출렁거렸다. 금방이라도 두 사람의 목을 낚아채 끌고 올라갈 것 같았다. 마음이 약해졌다.

“무너질지도 모르겠는데, 이거.”

새틴의 얼빠진 목소리를 들으니 케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마음을 다잡았다.

“너 제정신이야? 여긴 왜 온 거야?”

“왜냐니, 금방 온다고 했잖아.”

“뭐?”

“내가 진짜 배신한 줄 알았어?”

케인이 아무 말 못 하자 새틴은 작게 웃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도리어 그 웃음의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저 웃음이었다. 불쾌하고 소름 끼치는 꿍꿍이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튼 빨리 나가자. 큰일 나겠어.”

말을 마친 새틴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하는 듯한데 케인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너 지금 뭐…….”

케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미지근하게 젖은 옷이 목과 어깨를 감쌌다.

“아직 축축하니까 이거라도 뒤집어써. 좀 나을 거야. 연기를 마시는 것도 위험하거든.”

새틴은 케인이 말을 할 새도 주지 않고 중얼거리며 젖은 옷을 케인의 코 아래까지 끌어 올렸다. 그리고 동의도 없이 케인을 둘러업었다.

“무서우면 눈 감아도 돼.”

갑자기 무슨 소리지.

케인이 눈살을 찌푸린 순간 새틴이 연구실을 뛰쳐나가 타오르는 계단으로 뛰어들었다. 케인은 경악해 속으로 외쳤다.

‘이 미친놈이!’

계단은 새틴이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소리를 냈다. 실제로 몇 군데는 내려앉았다.

용케도 넘어지지 않고 내려가는구나, 그리 생각한 순간. 결국 새틴은 무너지는 발판을 밟으며 균형을 잃고 추락했다. 업혀 있던 케인도 자연히 아래로 떨어졌다.

재와 파편으로 어수선한 바닥을 나뒹굴면서도 케인은 눈을 감지 않았다. 부릅뜬다고 뭔가 보이는 것도 아닌데 감을 수가 없었다.

‘새틴은 어디 있지?’

다행히 새틴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사실 다행이라 하기엔 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으…….”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기라도 했는지 새틴은 곧장 일어나지 못했다. 신음 소리가 낮은 데서 들렸다.

케인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바닥을 짚은 팔이 후들거렸다. 새틴이 있는 쪽으로 가고 싶은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 미친 늙은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가까스로 허리를 세우는 것이 케인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천만다행으로 새틴은 곧 정신을 차렸다. 제 상태는 알리지 않고 케인의 안부부터 물었다.

“케인, 괜찮아?”

“정신 차려! 빨리 나가야 해!”

“응, 그렇지…….”

머리가 어지러운지 새틴은 어눌한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인이 빨리 이쪽으로 오라고 외치려는 순간 악마가 내려앉았다. 얼굴로 확 열기가 끼쳤다. 케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물렸다.

“읏…….”

보이지 않아도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떨어진 천장의 잔해에서 거센 열기가 솟구쳤다. 두 사람은 불길을 가운데 둔 채 갈라졌다. 아마도 새틴은 안쪽에, 케인은 바깥쪽에.

“이건 좀 무서운데.”

새틴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간신히 케인의 귀에도 닿았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케인이 입술만 짓씹는데 새틴이 또 헛소리를 했다.

“케인, 일어날 수 있어? 뒤로 조금만 가면 밖이야.”

“너는, 넌 어쩔 셈이야?”

“돌아서 나갈 길을 찾아봐야지.”

“여기서 대체 어떻게…….”

“괜찮아. 나한테 생각이 있어.”

여기서 대체 무슨 생각이 날 수 있지. 케인이 따지기 전에 새틴이 침착히 얼렀다.

“케인, 얼른 나가.”

이제 불길 때문에 새틴의 인영이 보이지 않았다. 새틴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새틴!”

케인은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다 도로 고꾸라졌다.

‘안 돼, 정신 차려야 하는데…….’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정말 생각이 있었을까? 실은 아무 생각도 없으면서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럼 지금 새틴은.

의식이 점차 흐려졌다.

∞ ∞ ∞

‘운이 나쁘네, 정말.’

계단을 거의 내려갔을 때 발을 헛디뎠다. 조금만 더 갔으면 무사히 현관으로 나갔을 거라 생각하니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 봐야 지금의 상황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새틴은 그나마 불길이 덜한 부엌으로 향했다. 덜하다 뿐이지 이쪽 복도에도 이미 불이 번져 있었다. 셔츠를 벗어 버린 탓에 열기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누가 케인을 데리고 나가야 할 텐데.’

그래도 케인은 새틴보다 운이 좋았다. 현관 바로 앞이니 구조될 확률이 높았다. 설마하니 신전 기사단이 불길 속에 사람을 그대로 두진 않겠지.

‘그나저나 누가 불을 낸 거지?’

로저스와 헤어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음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불길이 치솟았다.

불 마법을 쓴 사람이 선생님인지 아니면 신전 기사단의 누군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신전의 방식이라기엔 상당히 무식하지만 선생님이 일부러 위험을 무릅썼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어쨌든 당장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새틴은 몸을 낮추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방염 소재가 개발되지 않은 세상이라 그런지 불이 빠르게도 번졌다. 식당은 거의 용광로처럼 타고 있었다.

식당에 비하면 부엌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설거지통에 남은 물이라도 뒤집어쓰면 잠깐은 불길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하다 보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부엌에 쪽문이 있지, 참.’

바깥에서는 열지 못하지만 안에서는 열 수 있다.

새틴은 반색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안쪽 문이 이미 열려 있어 의아했는데 곧 이유를 알았다.

“……이게 무슨 꼴이야.”

루퍼스가 쪽문을 막고 쓰러져 있었다. 그 위로는 아이가 하나 엎드려 있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아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주변에 금화와 은화, 동전 따위가 어수선하게 흩어진 꼴을 보니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대충 짐작이 된다. 불이 난 와중에 돈을 두고 몸싸움이라도 한 게 아닐까. 창작물에서는 으레 있는 일이다.

‘아니, 현실도 마찬가진가?’

슬슬 머리가 어지러웠다. 새틴은 휘청이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겨우 바닥을 짚은 손에 무언가 걸렸다.

“지하 수로…….”

지하 수로를 식재료 저장고로 쓰고 있다고 했지. 미로나 마찬가지니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도 했고.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였지?

어지러운 와중 새틴은 온 힘을 다해 지하 수로의 문을 열었다. 냉기가 확 밀려 나왔다. 새틴은 거의 구르듯 계단을 내려갔다. 쓰러진 포대에서 양파가 쏟아져 새틴과 함께 굴렀다.

‘양파, 아파…….’

겨우 바닥에 이른 새틴은 부딪친 곳들을 문지르며 주위를 살폈다. 컴컴한 통로는 벽도 바닥도 분간할 수 없었다. 가야 할 방향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데 저 앞에 빛이 일렁였다.

새틴은 필사적으로 빛을 향해 걸었다. 여러 번 발이 꼬였으나 연기가 아래까지 내려오지 않아서인지 머리는 점점 맑아졌다.

‘죽을 뻔했네, 정말.’

오래지 않아 새틴은 빛의 정체와 마주쳤다.

“……선생님?”

램프를 들고 절뚝이며 걸어가던 선생님이 새틴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어떻게 여길.”

새틴은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말할 새가 없었다. 선생님이 무어라 중얼거리려 해 황급히 달려들었다.

새틴은 마법에 관해 손톱만큼도 알지 못하나 선생님이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 한다는 건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이, 배은망덕한!”

선생님은 벌컥 소리를 질렀으나 기세와 달리 늙은 몸은 쉽사리 새틴을 떨어내지 못했다. 선생님이 놓친 램프가 기름을 쏟으며 바닥을 굴렀다. 기름 위로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불길을 피해 내려온 곳에 또 불이 붙다니.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 있나.

새틴은 속으로 한탄하며 선생님과 뒤엉켜 바닥을 굴렀다. 간신히 선생님의 양팔을 붙잡아 찍어 눌렀다.

“가암히!”

악에 받친 선생님이 새틴을 뿌리치려 애쓰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별. 바다. 군청색. ○○. 열여덟. 하나. 사막…….”

모여드는 빛이 위기 상황을 알렸다. 그러나 지금 새틴은 두 손을 모두 쓰는 중이라 선생님의 입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별수 없지.’

새틴은 선생님의 머리를 들이받았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