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30화 (30/139)

30화

자정이 지나 아이들이 모두 방에 들어갔을 때 케인은 조용히 지하로 향했다.

밤눈이 좋은 케인이라도 한밤중에 지하를 걷기는 쉽지 않았다. 벽을 더듬으며 낮게 읊조렸다.

“로저스.”

“……케인?”

두 번째 방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케인은 그 앞으로 가 문고리를 만졌다. 당연하게도 잠겨 있었다.

“열쇠가 없어서 지금은 못 꺼내 줘.”

“어쩔 수 없지……. 바깥에 무슨 일은 없어?”

“늙은이가 새틴을 불렀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어.”

로빈이 새틴을 부르러 온 시간은 저녁 식사 시간쯤이었다. 새틴은 벌써 다섯 시간 넘게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건 배식구인가?’

케인은 문을 더듬다 손에 걸리는 것을 옆으로 밀었다. 문 가운데에 가로로 길쭉한 틈이 생겼다. 로저스는 그리로 손을 내밀어 보더니 중얼거렸다.

“갓난아기도 여기로는 못 나가겠는데…….”

“일단은 여기에 있어.”

“너는 어쩌려고?”

“늙은이한테 가 봐야지. 우리가 한 패인 걸 눈치챈 모양이니까.”

“그치만, 위험하지 않을까? 너까지 붙잡히면…….”

로저스는 선뜻 그러라 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새틴은 케인을 위기에서 빼내려고 계단에서 몸을 던졌다. 다치지 않을 거란 확신도 없으면서 한 짓이다. 케인은 이대로 빚을 지고 있을 수 없었다.

케인의 침묵에서 속내를 알아챘는지 로저스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나저나 선생님이 어떻게 알았을까?”

그야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떻게든 알았으리라.

누군가 문밖에서 이야기를 엿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했을 수도 있다. 셋이 무언가 획책하고 있음을 알게 된 사람이 그 사실을 이용해 늙은이의 환심을 사는 모습은 쉬이 상상 가능했다.

‘자기 안위를 위해서라면 뭔들 못 팔겠어.’

아무튼 로저스가 무사하니 여기에 더 있을 이유는 없다. 바로 돌아 나가려던 케인은 망설이다 한마디 남겼다.

“별일이 없으면 다시 알려 주러 올게.”

“으응, 조심해.”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면서 로저스가 걱정의 말을 했다. 케인은 대꾸하지 않고 지하를 빠져나왔다.

‘인질이 둘.’

늙은이의 목적은 케인이다. 새틴도 로저스도 실험을 하기에 적절한 대상이 아니다. 그러니 붙잡고 있어 봐야 아무 쓸모도 없는데 일부러 보여 주듯 데리고 갔다.

‘내가 제 발로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겠지.’

늙은이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 따르는 건 현명치 못한 처사다.

‘현명치 못한 정도가 아니라 멍청한 거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케인은 복도를 가로지르고 계단을 올랐다. 무거운 발을 옮기며 애써 낙천적인 관망을 해 봤다.

‘혹시 모르잖아.’

곧 신전 기사단이 올지도 모른다. 편지가 무사히 신전에 도달해 늙은이의 실체가 낱낱이 밝혀졌다면. 어쩌면 이미 신전 기사단이 학교의 코앞에 와 있을지도.

헛된 희망이다. 그렇게 시기적절하게 도움의 손길이 나타날 리 없다. 케인은 지금껏 그리 운이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당장 멍청한 선택을 할 당위성을 찾고 있을 뿐이다.

혼자 도망치면 어떻게 될까.

좋은 생각은 아니다. 화가 난 늙은이는 로저스를 불태워 죽이고 다른 아이들에겐 도망쳤다고 둘러댈 수도 있다.

늙은이가 새틴이라고 그냥 둘까. 이전에 그랬듯 좋을 대로 써먹지 않을까. 이미 한 번 실험체로 써먹었는데 두 번이라고 못 할 이유가 없으니. 다른 마법의 실험체가 되겠지.

하나 케인이 간다고 해서 둘을 곱게 놓아준다는 보장도 없다. 이미 자신을 거스른 아이들을 어떻게 믿고 놔주겠는가. 흑마법사라고 밀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어차피 어느 쪽도 안전하지 못하다면 케인은 그나마 나은 쪽을 선택해야 한다. 제 한 몸이라도 건사할 방법 말이다.

그러나 케인의 발은 어느새 연구실 앞에 다다랐다. 고요한 복도에 서서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는 밀실에 머리를 디밀려 한다.

똑똑, 노크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렸다. 그리고 문이 열리기까지의 시간이 기이할 정도로 길었다.

“일찍 왔구나. 오늘은 아무도 방해하지 않더냐?”

늙은이가 사람 좋게 웃으며 케인을 맞이했다. 비웃음이 여실히 느껴지는 물음에 케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보다 새틴이 여기에 있을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다. 설마 벌써.

“들어오너라.”

늙은이는 등을 보이기가 무섭지도 않은지 태연히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케인은 등 뒤에서 늙은이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하며 연구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 순간 누군가 문 뒤에서 나타나 케인의 두 팔을 잡아챘다.

“무슨!”

크게 놀라 돌아본 케인은 재차 놀랐다. 그의 몸을 붙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새틴이었다.

설마하니 반가움의 표현일 리는 없고. 아마 늙은이의 지시를 받았을 테다. 새틴이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미안.”

이게 무슨 의미일까. 길게 생각할 틈도 없이 새틴이 케인의 몸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이거 놔!”

케인은 새틴의 구속을 떨쳐 내려 몸부림쳤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새틴이 그보다 키가 큰 데다, 등 뒤에서 제압하니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았다. 손목에 가슬가슬한 끈이 닿았다.

“놓으라고!”

새틴은 들은 체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케인을 짓누른 채 손목에 끈을 감았다. 양 손목을 칭칭 감은 끈이 점차 팽팽히 조여 왔다. 끝내 매듭을 지으며 새틴이 중얼거렸다.

“선생님이 말을 듣지 않으면 로저스를 죽일 거래.”

“나는, 난 죽어도 되고?”

“넌 죽지 않을 거야. 나도 살았잖아. 그러니까 아마, 너도 무사할 거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새틴이 물러났지만 케인은 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발버둥 치던 케인은 균형을 잃고 옆으로 넘어졌다. 카펫 덕에 다치진 않았으나 움직이기는 더 어려워졌다.

“너 이 개자식!”

새틴은 케인의 욕설을 못 들은 체하고 늙은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선생님, 약속하셨잖아요.”

“물론이지.”

늙은이가 열쇠를 내밀자 새틴은 그것을 받아 꾹 쥐고 방을 나갔다. 문을 닫기 전 새틴이 케인의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소리 없이 입술이 움직였다. 금방 올게.

올 리가 없다. 알량한 죄책감에 남긴 말이라고 케인은 확신했다. 역시 뱀 같은 자식이다. 결국 이렇게 배신할 줄 예상했어야 했다.

‘내가 여길 왜 왔는데.’

소리를 질러 봐야 지칠 뿐이다. 케인은 씩씩거리던 숨을 삼키며 침착해지려 애썼다.

이제 어떻게 될까. 여기로 오면서 케인은 새틴과 로저스를 풀어 주는 대가로 제가 잡히는 상상을 했다. 비록 예상치 못한 과정을 겪긴 했으나 지금 상황은 그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는 남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홀로 빠져나가는 방법만 찾으면 된다.

‘그런 방법이 어디 있어.’

케인은 다시 가빠지려는 숨을 겨우 가다듬었다. 늙은이는 그런 케인을 내려다보며 지그시 웃었다.

“어느 때든 침착하다는 건 장점이지.”

조롱일까. 케인은 눈만 굴려 늙은이를 노려보았다.

“새틴의 말을 믿지 그러냐. 난 너를 죽이려고 불러낸 것이 아니다.”

그야 그렇겠지. 사람을 죽이는 마법이라면 이미 많이 있다. 지금껏 늙은이가 죽인 아이들은 그저 실험에 실패한 결과일 뿐, 애당초 늙은이는 아이들을 죽일 생각이 아니었을 거다.

“널 제자로 삼으려고도 생각했지. 그런데 이제 보니 안 되겠구나.”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 케인은 눈살만 찌푸렸다. 늙은이가 혀를 찼다.

“남을 구하려고 일부러 위험에 뛰어드는 사람은, 나와 잘 맞을 것 같지 않거든.”

“날 어쩔 셈이지?”

“마음을 편안하게 먹어라. 네게 깃드는 마법을 거부하려 해 보았자 너의 손해다. 여유를 가지고 마법을 받아들여야 성공 확률이 높다. 마법의 성공 확률이 높다는 건, 네가 살 확률도 높단 뜻이지.”

늙은이의 말을 듣고 있자니 케인은 양가감정이 들었다. 한껏 거부해 실험을 실패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과 차라리 늙은이의 말을 따라서라도 살아남고 싶다는 마음.

“이번에야말로 확실해. 성공할 거야. 나는 성공할 거라고.”

늙은이가 기도처럼 중얼거리며 케인의 몸을 질질 끌고 가더니 연구실 한가운데에 놓았다. 구겨진 카펫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문을 외웠다.

“별. 파도. 푸른색. ○○. 열여덟. 하나. 사막. 꿈. ×××. 희미함. 시간. 기도. ○.”

규칙을 알 수 없는 단어의 나열. 그중엔 발음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도 있었다. 마법사들의 공식이었다.

‘이게 마법.’

그리 생각한 순간 케인은 정신을 잃었다. 눈 감기 전 얼핏 창밖에서 빛을 본 듯도 했다.

∞ ∞ ∞

새틴은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며 로저스를 불렀다.

“로저스!”

“……새틴?”

두 번째 참회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새틴은 선생님에게 받은 열쇠로 문을 열었다. 너무 어두워서 몇 번이나 엉뚱한 데를 긁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로저스가 안도한 듯 외쳤다.

“무사했구나!”

“나는 그렇지. 대신 케인이 붙잡혀 있어.”

“아니, 어쩌다?”

새틴은 설명하지 않고 일단 로저스를 잡아끌었다. 계단을 오르며 로저스에게 일렀다.

“방으로 가지 말고 밖으로 나가.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해.”

“사람들?”

“신전 기사단이 근처에 와 있어.”

“어, 어떻게 알아?”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로저스의 놀란 기색은 알 수 있었다. 새틴은 멋쩍게 웃고 얼버무렸다.

“그냥 알아.”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