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다른 무슨 이유가 있겠느냐.”
“하지만 아직, 케인은 선생님을 믿지 않는데…….”
“사람 마음을 하루아침에 돌리기가 쉽겠느냐. 내가 직접 설득을 해 보려 했지.”
라기이스는 새틴에게 딱히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새틴은 거짓말까지 해 가며 속일 만한 대상이 못 되었다.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새틴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제가 선생님 연구를 방해한 건가요? 지금이라도 가서 케인을 데려오면.”
“관두어라. 갑자기 네 태도가 바뀌면 이상하다 생각하겠지.”
“정말 죄송해요…….”
연신 사과하는 새틴을 돌려보내고 라기이스는 문을 닫았다.
공식은 충분히 가다듬었다. 성공하리란 확신이 있는데 자꾸만 실험이 지연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새틴을 계속 옆에 둘 필요가 있을까.’
여기서야 새틴이 아이들 보모 노릇을 해 준다지만 밖에선 아무 필요 없는 손이다. 기억을 잃고부터는 그나마 보모 노릇도 제대로 못 하고 있고.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휘둘려 여기까지 찾아온 꼴을 보라지.
이번 실험이 성공하면 라기이스는 이 외진 숲에서 지낼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무능한 보모도 쓸 데가 없다.
‘마력을 볼 줄 아니 조수로 써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 새틴일 필요가 없다. 실험이 성공하면 케인은 마력을 볼 줄 알면서 기억도 온전할 테니까. 차라리 케인을 제자로 삼는 편이 낫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쪽도 처리해 버리면 되고.
이번 실험에 성공하기만 하면 라기이스는 제자든 뭐든 얼마든지 새로 얻을 수 있다. 더는 돈도 사람도 아까워하지 않아도 된다.
‘일단 오늘은 글렀군.’
침실로 돌아가려고 자리를 정리하는데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새틴일까. 라기이스는 눈살을 찌푸린 채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 앞에 있는 아이는 새틴도 케인도 아니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
“……선생님께서 아셔야 할 일이 있어요.”
∞ ∞ ∞
별일 없이 하루가 다 갔다. 케인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 계단 위에서 누군가 내려왔다.
‘인자한 척하기는.’
속 시커먼 늙은이가 자애로운 체하며 웃을 때면 케인은 속이 메스꺼웠다. 물론 그런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늙은이와 마찬가지로 거짓 표정을 뒤집어썼다.
늙은이는 케인의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오늘 새벽에 연구실로 오너라.”
“……네.”
“이번에야말로 방해가 없었으면 좋겠구나.”
“네, 선생님.”
케인이 순순히 답하자 늙은이는 살짝 미소 지은 후 식당 쪽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기 전 케인이 흘끔 보니 무언가 쥐고 있다.
‘뭐지? 돈주머니?’
아무래도 지금 늙은이는 식당이 아니라 부엌에 가는 모양이다.
‘오늘이 급료 주는 날인가 보군.’
털북숭이는 늘 부엌 근처에 있었다. 사람이니 볼일도 보고 목욕도 해야 할 텐데 아이들이 주위에 있을 땐 부엌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아마도 모아 둔 급료 때문일 거라고 케인은 짐작했다.
설마하니 푼돈 때문에 이런 외진 데서 일을 할 리는 없다. 늙은이가 짭짤한 보수를 약속했으니 여기까지 따라왔겠지. 2년이나 그 돈을 모았다면 적지 않을 테다.
‘분명 틈만 생기면 누군가 털어 갈걸.’
일이 잘 풀려 신전 기사단이 온다면 늙은이뿐 아니라 털북숭이도 조사를 받게 될 거다. 늙은이가 흑마법 연구를 하는 줄 알면서 도왔는지, 모르고 도왔는지 확인해야 할 테니까.
털북숭이가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이미 누군가 급료를 탈탈 털어 갔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 있는 아이들은 다들 양심이 없으니. 망연자실한 털북숭이의 표정을 상상하니 픽 웃음이 났다.
‘웃기겠네.’
2층으로 올라가니 마침 로빈이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케인과 새틴의 맞은편 방에서 지내는 로빈은 팀이 죽은 후로 혼자 방을 썼다.
딱히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이는 아니어서 케인은 굳이 인사하지 않고 지나쳤다.
방으로 들어가자 새틴이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며 쳐다보았다. 케인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늙은이가 연구실로 오래.”
새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아니, 새벽에. 방해가 없었으면 좋겠다는데 그냥 한 말은 아니겠지.”
두 번까지는 핑계가 먹혔지만 세 번째는 어떨까. 일부러 피하고 있는 걸 눈치채지 않을까.
“이번엔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할지 모르겠군.”
새틴이 잠깐 눈을 굴리다 제안했다.
“숲에 숨어 있는 건 어때.”
“언제까지?”
“……신전 기사단이 올 때까지?”
스스로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는지 새틴이 열없이 웃었다. 익숙해진 웃는 얼굴은 이제 뱀처럼 보이지 않았다.
‘도마뱀 정도라고 해 둘까.’
신전 기사단이 언제 들이닥칠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막연한 어느 날을 기다리며 숲에서 나무 열매나 따 먹고 지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땅한 다른 대안도 없다. 케인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깊은 데까지 들어가지 않는다면 며칠은 숨어 있을 수 있겠지.”
케인은 굶는 데에는 이골이 났다. 학교에 오기 전엔 세끼를 챙기는 날이 없다시피 했으니 숲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굶는다고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테다.
계획 같지도 않은 계획을 세우고 나니 더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새틴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방문객의 얼굴을 보고 케인은 슬쩍 인상을 썼다.
‘로빈이 여긴 무슨 일이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아까 어딜 가는 모습을 봤는데, 무슨 볼일 때문이었을까.
“무슨 일이야?”
새틴이 묻자 로빈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선생님이 부르셔.”
“나를?”
“응. 지금 바로 오라고 하셨어.”
“무슨 일이지? 알겠어.”
새틴이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알겠다고 대답하자 로빈은 곧바로 물러났다.
그 순간 케인은 불길함을 느꼈다. 로빈의 시선이 찰나 간 케인에게 향했다. 무심코 보았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로빈이 떠나고 문을 닫은 새틴이 케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갑자기 부르는 이유가 뭘까?”
“어쩔 거야?”
“가 봐야지.”
새틴은 선생님의 총애를 잃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다. 그런 설정이다. 선생님의 부름을 거부하는 행위는 설정에 어긋난다.
“예감이 안 좋은데.”
케인이 찜찜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지만 새틴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이른 시간이잖아. 아이들이 다 깨어 있는데 무슨 짓을 하진 않을 거야. 애초에 선생님이 이용하려는 건 내가 아니기도 하고…….”
일단 다녀오겠다며 새틴이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케인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로저스하고 얘기를 해 봐야겠어.’
평소 케인은 로저스가 의지할 만한 상대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 불안감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방을 나선 케인이 로저스의 방으로 향하는데 누군가 계단을 올라왔다. 로저스와 함께 방을 쓰는 재크였다. 왜인지 얼굴이 어둡다. 케인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바닥을 보며 걸었다.
“야.”
케인이 부르자 재크가 움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왜, 왜?”
“너 표정이 왜 그래?”
재크는 제 표정이 어때서 그러냐며 되묻는 대신 코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로저스가 도둑질을 했대.”
“뭐?”
“루퍼스의 돈을 훔쳤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케인은 황당해 입을 벌렸다. 그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재크가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여기서 돈 쓸 일이 뭐가 있다고.”
“언제 일어난 일이야?”
“조금 전에. 루퍼스가 돈이 없어졌다고 해서 선생님이 식당에 있던 애들 몸수색을 했는데, 로저스한테 돈이 있었어.”
“……혹시 이 정도 되는 주머니에 들어 있었어?”
케인이 손으로 사과만 한 크기를 만들자 재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알 거 없어. 그래서 로저스는 어떻게 됐어?”
“선생님이 참회실에 가뒀어. 내일까지 못 나올 거야.”
재크는 무어라 더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케인은 더 듣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노골적인 속임수였다. 아까 늙은이가 부엌으로 가는 모습을 케인은 봤다. 돈주머니를 들고 있던 것도 똑똑히 봤다. 케인이 돈주머니를 보지 못하도록 숨기는 척도 하지 않았다.
‘늙은이가 수작을 부렸군.’
1층으로 내려가니 아이들 몇이 식당에서 나오고 있었다. 재크와 함께 소동을 목격한 탓인지 다들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케인은 아이들에게 말을 붙이지 않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어쩐 일이냐? 간식을 달라고 하면 가만 안 둔다.”
막 뒷정리를 시작하려던 루퍼스가 태연히 웃으며 물었다.
“누가 돈을 훔쳤다던데요.”
“아, 그 맹랑한 녀석.”
루퍼스가 얼굴을 구겼다. 정말로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죠?”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영감탱이한테 돈을 받아서 여기 뒀는데 없어졌기에 아이들을 털어 보니 나왔어.”
루퍼스가 조리대 한쪽을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아이들이 들어와 손댈 만한 자리가 아니다.
“돈을 왜 여기 뒀는데요?”
“두면 안 되냐? 일하는 중이라 이따 챙기려고 뒀지.”
지금까진 그런 적 없으면서. 케인이 미심쩍게 쳐다봤지만 루퍼스는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내며 그릇과 솥을 설거지통에 담그고 한껏 바쁘다는 시늉을 했다.
케인은 입술을 깨물고 부엌을 나왔다.
평소 루퍼스가 아이들을 귀찮아하긴 했지만 일부러 모함을 하면서까지 괴롭힐 이유는 없었다. 아마 늙은이에게 지시를 받고 한 일일 거다. 대가가 있으면 억울한 꼬마를 하나 만드는 일 정도는 어렵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늙은이가 다른 아이도 아닌 로저스를 범인으로 몰아간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어디서 이야기가 샌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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