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새틴은 케인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미 끝난 일에 그렇게 신경 쓰지 마.”
대꾸가 없다. 다른 때였다면 새틴도 굳이 말을 붙이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아직 할 일이 남았고, 또 선생님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다음에 할 일을 생각해야지.”
“다음?”
케인이 느리게 몸을 돌리며 되물었다. 이야기를 할 마음이 조금은 생긴 기색이다.
새틴은 빠르게 말했다.
“네가 적어 온 걸 어떻게 쓰레기에 넣을지 말이야. 저번처럼 루퍼스를 불러내면 수상하겠지?”
케인이 다시금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꼭 들어가서 넣을 필요 없지.”
“무슨 말이야?”
“털북숭이가 직접 넣게 만들면 되잖아.”
생각해 보니 그렇다. 쓰레기를 넣는 자루다. 루퍼스에게 쓰레기와 함께 준다면 알아서 거기에 넣을 것이다.
새틴이 고개를 끄덕이자 케인이 말을 이었다.
“굳이 헤집어 보지 않을 만한 쓰레기를 만들어서 그 안에 숨기는 거야.”
“냄새가 난다든지?”
“냄새가 나는 건 안 돼. 안에 보관하지 않을 테니까. 음식물 쓰레기하고 같이 태워 버릴 수도 있고.”
“으음.”
냄새가 나거나 부패하지 않는 쓰레기. 그런데 손은 잘 대지 않을 만한 쓰레기. 그런 게 뭐가 있지?
새틴은 곰곰이 생각하다 무심코 창문을 봤다.
“창문을 깰까? 유리 조각 밑에 편지를 숨기자.”
“바보 같기는. 손을 안 대도 내용이 보이겠지.”
“아, 그렇겠구나. 그럼 접시는?”
케인이 반문하지 않았다. 접시는 그가 생각하기에도 괜찮은 의견으로 들린 모양이다. 새틴은 좀 더 이야기했다.
“식당에서 깨뜨리면 루퍼스가 직접 나와서 치울 테니까, 접시를 가지고 나올 방법을 생각하자.”
“털북숭이는 식사 시간 외에는 음식을 안 만들어. 접시를 내주지도 않을걸.”
“그걸 내주게 해야지.”
선생님의 연구를 훔쳐 내고 나니 접시 한 장을 얻어 내는 일이야 그리 대수롭지도 않게 느껴졌다. 곰곰이 생각하던 새틴은 전에 케인이 샌드위치를 가져다줬을 때를 떠올렸다.
“전에 나한테 샌드위치를 만들어 줬잖아.”
“샌드위치? 아, 그때.”
케인도 기억이 났는지 눈이 약간 커졌다.
“그때는 왜 그런 거야?”
“네가 참회실에 있어서 아침을 못 먹었잖아. 루퍼스는 간식은 절대 안 만들어 주지만 하루 세 끼는 꼬박꼬박 내줘.”
“그럼 한 끼 거르면 되겠네.”
“일부러 거른 놈을 챙겨 주겠냐?”
“식당에 못 간다고 하면 되지. 마침 좋은 핑곗거리도 있고.”
“무슨 핑계…….”
케인의 말이 중간에 끊겼다. 새틴이 생각해 낸 핑곗거리가 무언지 듣지 않고도 알아차린 모양이다. 새틴은 씩 웃었다.
∞ ∞ ∞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일찍부터 식당에 와 기다리던 아이들은 이미 식사를 하고 있었다. 케인도 늘 내려가던 시간 즈음해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루퍼스가 접시에 음식을 담아 내밀며 물었다.
“새틴은?”
“새틴이 뭐요.”
케인은 일부러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자세히 묻기도 전에 사정을 떠들면 도리어 이상해 보일 테니.
“다친 데는 괜찮으냐고.”
“안 물어봐서요.”
“쌀쌀맞기는. 이제 좀 친하게 지내도 되지 않냐.”
“생각해 볼게요.”
케인은 접시를 받아 아무 자리에 앉았다. 건성으로 음식을 씹으며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루퍼스가 하는 말을 들어서인지 새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졸다가 떨어진 거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근데 왜 계단에서 졸았을까? 방에서 자지.”
“케인이 방에 있어서 그런 거 아냐? 싸운 거 같던데.”
아이들의 시선이 흘끔 케인에게 향했다. 눈치챘지만 케인은 반응하지 않고 식사를 이어 나갔다. 듣지 못한 줄 알았는지 아이들의 대화가 계속됐다.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을까?”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라 케인이 새틴을 싫어하는 거지.”
“새틴은 케인하고 친해지고 싶어 하잖아.”
“근데 왜 친해지고 싶어 하는 걸까?”
“같은 방 쓰는데 안 친하면 불편하잖아.”
“전엔 안 그랬으면서.”
“지금은 기억을 잃었으니까…….”
케인은 금방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랐는지 아이들이 말을 멈췄다. 아마 잠깐뿐일 터다. 케인이 식당을 나가고 나면 이야기를 계속하겠지.
방으로 돌아오니 새틴이 말을 맞춘 대로 아픈 척하고 있었다. 아픈 척이라 해도 그냥 침대에 다리를 뻗고 누워 있을 뿐이다.
“맛있게 먹었어?”
케인은 쓸데없는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왜 나였어?”
“응? 무슨 소리야?”
“늙은이가 수상하단 얘기를 꼭 나한테 할 필요는 없었잖아.”
맥락 없는 질문에 눈을 끔벅이던 새틴은 언제의 이야기인지 곧 알아차렸다. 처음 손을 잡기로 했을 때의 얘기다.
“그야 네가 선생님을 제일 싫어하니까?”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네가 선생님을 싫어한다고 헤더한테 들었어.”
“겨우 그 말 때문에 나를 골랐다고? 내가 널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
지금 아이들이 보는 데서 새틴이 케인과 친해지려 하는 건 늙은이가 그렇게 하라고 시켜서다. 그러나 처음엔 아니었다. 새틴에게는 케인 말고도 분명 다른 선택지가 많이 있었다.
물론 늙은이를 맹목적으로 믿고 좋아하는 아이들보다야 케인이 나아 보였을 수도 있다. 이성적으로 보였을 테니까.
그렇다 쳐도 이해가 안 된다. 케인이 늙은이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선뜻 선택하는 게 말이 되나. 행여 케인이 새틴에게 들은 비밀을 이용해 늙은이와 거래하면 어쩌려고.
새틴은 케인이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사실 케인 자신도 이해가 안 됐다. 두 사람은 이미 한배를 탔으니 이제 와 이유를 물을 필요 따위 없는데.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새틴이 어물쩍 대꾸했다.
“그냥, 네가 있으니까.”
“겨우 그거야?”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말꼬리를 흐리던 새틴은 팔뚝의 멍든 자리를 슬슬 문지르다 말을 이었다.
“너라면 괜찮을 거 같았어.”
“이해할 수가 없어.”
케인은 기가 막혀서 한 말인데 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그렇지? 근데 나는 정말 확신이 있었거든. 너라면 분명 선생님하고 같은 길을 가지 않을 거라는, 그런 건데.”
제대로 된 이유를 대지도 못하면서 새틴의 어조는 분명했다. 제 선택을 의심하지 않는다.
“네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란 그런 말이 아니야.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그런 믿음이 있겠어. 그저 너와 내 목표가 같을 거라고 믿었을 뿐이지.”
케인이 대꾸하지 않자 새틴은 멋쩍어하며 웃더니 물었다.
“내가 너 도와주려다 다쳤다고 생각해서 그래?”
케인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새틴이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도와준 데에 이유가 있기를 바랐다. 그런 게 없다면 새틴의 희생이 그저 순수한 선의가 되고 마니까.
‘그런 게 있을 리 없는데.’
새틴이 몸을 일으켰다. 웃음기 어린 시선이 왠지 불편해서 케인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감각이 예민해졌다. 어정쩡하게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우스워 보이진 않을까.
새틴은 케인 쪽으로 몸을 틀고 앉아서는 친절하게도 말했다.
“진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이런 말을 듣는다고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을까.
학교에 오기 전까지 케인은 각박하게 살았다.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함께 행동하다가도 위급한 상황이 오면 서로를 버렸다. 케인이 소매치기를 하다 붙잡혔을 때도 근처에 있던 누구 한 사람 쫓아오지 않았다.
서운한 마음은 없었다. 그편이 자연스러운 관계였다.
그래서 늙은이의 연구실에서 무언가 잘못됐다고 예상했을 때 케인은 혼자 살아날 방법을 생각했다. 계획을 망치더라도 케인을 먼저 구할 거라던 새틴의 말은 그 순간 기억나지도 않았다.
“잘 풀렸잖아? 너무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딱히 널 위해 그런 것도 아니고 우리 목표를 위한 건데.”
“미안한 게 아니라 나는.”
톡톡. 두 사람의 대화를 작은 노크 소리가 끊었다.
여태 서 있던 케인이 문을 열었다. 로저스가 빼꼼 고개를 디밀었다.
“저, 슬슬 식당에 다녀올까 하는데.”
로저스는 말을 하다 멈칫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케인이 공연히 민망해 인상을 쓰니 새틴이 대신 대응했다.
“응, 부탁해.”
로저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새틴이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양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럼 이제 편지를 적어 볼까?”
5
며칠 후 짐마차가 다녀갔다. 쓰레기 역시 수거해 갔다. 이제는 계획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다.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물론 편지가 신전에 당도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재시도할 때를 대비해 베낀 기록을 케인이 한 부 더 가지고 있었다. 방에 보관하긴 위험해 케인은 그것을 늘 품에 넣고 다녔다.
‘사직서 품은 직장인처럼.’
새틴이 속으로 농담을 하며 비실비실 웃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헤더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 선생님이 설명한 부분은 전혀 웃긴 부분이 아니었다.
새틴은 잠깐 딴생각을 했노라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동태눈을 한 아이들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선생님은 수업을 이어 나갔다.
“기근으로 살 곳을 잃은 사람들이 클로버랜드로 모여들었지. 서로 다른 마을의 주민들이 함께 살게 됐으니 처음엔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신관이 파견되었고 곧 신전이 생겼지.”
오늘의 과목은 역사였다. 역사라 해도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고 가까운 도시의 변천 과정 정도였다.
“신전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화합을 위해 해마다 축제를 열기 시작했어. 그게 바로 다들 알고 있는 평화의 밤 축제지. 요즘 사람들이 사랑의 터널이라고 부르는 구조물도 원래는…….”
별일 없이 수업이 끝난 후 새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우르르 뛰어나가는 아이들을 따라 교실을 나서지는 못했다.
“케인, 잠깐 따라오너라.”
선생님이 부른 사람은 제가 아닌데 멈칫하고 말았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케인을 쳐다봤지만 케인은 시선을 주지 않고 선생님의 뒤를 따라 나갔다.
로저스가 새틴의 옆을 지나며 손등을 툭 쳤다. 딱히 신호를 정한 적은 없지만 의미는 어렵잖게 유추했다. 이야기를 하자는 뜻이겠지.
새틴은 몇 초 뜸을 들인 후 교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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