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아주 오래전의 일들이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ㅇㅇ는 수많은 실패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지하로 내려간 사람들. ㅇㅇ는 그들이 남긴 흔적을 보았다. 어떻게든 지상으로 올라가고자 했던 치열하고 필사적인 흔적들.
「ㅇㅇ야, 잘 기억해 둬라. 두 번째 기회라는 건 어지간해선 주어지지 않는 법이다.」
ㅇㅇ는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았지만 그 말만은 맞는다고 생각했다.
기회는 운과 비슷하다. 복권에 두 번 당첨될 확률, 떨어지는 번개를 두 번 맞을 확률. 좋은 운도 나쁜 운도 흔히 찾아오지 않는다. 기회 또한 그렇다.
누나와 살며 거의 잊고 지내던 아버지를 떠올리니 한기가 들었다. 새틴은 가볍게 몸을 떨고 애써 불안을 밀어냈다.
‘그래도 여긴 거기랑 달라.’
아버지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편리한 도구가 여럿 있었다. 모션을 감지하는 카메라와 간단한 트랩 몇 개만 있으면 누구라도 아르고스(Argos. 그리스 신화에서 백 개의 눈을 가진 괴물)가 될 수 있다.
반면 선생님은 마법사지만 전지전능하지 않다. 허공에 불길을 일으키는 능력만으로는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시할 수 없다. 동시에 두 곳에서 일을 벌이면 반드시 하나는 놓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새틴은 케인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선생님이 이 탈출 모의를 막지 못할 이유를 계속해서 헤아렸다.
그러던 중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긴장해 있지 않았더라면 놓쳤을 소리다.
‘케인이 나왔나?’
새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가다 황급히 멈췄다. 로저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긴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맙소사, 케인보다 로저스가 먼저 나와서는 안 된다. 새틴은 계단 쪽에 몸을 반 감춘 채 로저스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곁눈으로 이쪽의 움직임을 알아챈 로저스의 표정이 굳었다. 로저스는 문손잡이를 쥔 채 다급히 입을 뗐다.
“저, 그런데 선생님.”
“이제 연구실에 갈 참이니 중요치 않은 이야기라면 다음에 하자꾸나.”
“그, 네…….”
임기응변에 재능이 없는 로저스는 무기력하게 물러났다. 선생님이 복도로 나오기 직전 새틴은 몸을 감췄다. 다행히 선생님은 새틴을 보지 못했다.
곧 발소리가 들리고, 연이어 열쇠가 짤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계획은 실패구나.’
새틴이 미리 좌절하는데 선생님이 물었다.
“왜 거기 그러고 있느냐?”
새틴은 제게 말하는 줄 알고 흠칫 놀랐지만 아니었다. 슬쩍 목을 빼고 살피니 선생님이 연구실 문을 열려다 말고 로저스에게 묻는 말이었다.
“잠깐,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이제 가려고요.”
로저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쭈뼛쭈뼛 걸어왔다. 사무실이 연구실보다 안쪽에 있었기에 자연히 로저스는 선생님의 옆을 지나쳐야 했다. 새틴은 선생님의 눈길이 이쪽으로 향하기 전에 다시 몸을 감췄다.
케인은 바깥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을까. 연구실 안에서 나는 소리는 밖에서 들으면 명확히 분간되지 않는다. 그래도 누군가 말하고 있다는 건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알아차렸다고 해도 숨을 곳이 있을까.’
그리 넓지도 않은 방이다. 케인의 말에 따르면 가구라고는 책꽂이 몇 개와 커다란 책상이 전부라고 했다. 그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망했네.’
케인이 들킨다 해도 새틴과 로저스에겐 별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케인이 무얼 하려는지 전혀 몰랐다고 잡아떼면 선생님이 뭘 어쩌겠는가. 거짓말 탐지기도 없는데.
다만 다음이 없어질 거다. 선생님은 케인을 예의 주시할 테고, 어쩌면 케인을 슬쩍 처리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연구실의 보안은 더 철저해지겠지. 철사와 실만으로는 열 수 없는 잠금장치를 설치한다든지.
새틴은 두 번째 기회를 기대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 ∞ ∞
카펫을 들추자 드러난 바닥에는 별다른 표식이 없었다. 그러나 케인은 당황하지 않고 넓적한 타일을 여럿 건드려 보았다.
‘이거군.’
유심히 보니 타일 한 장이 다른 것들과 살짝 이격되어 있었다. 틈에 손가락을 넣으니 쉽게 들렸다.
그 아래는 예상대로 비밀 공간이었다. 아이 하나쯤 들어갈 수 있던 참회실의 비밀 공간에 비해 아주 작았다. 들어 있는 것도 별거 없다. 문서 몇 장이 전부였다. 단출한 정도를 넘어 초라해 보였다.
‘이게 다인가?’
저번 날과 마찬가지로 책상에는 한눈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종잇장이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정작 감춰 둔 것은 이뿐이라니.
아무튼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케인은 가져온 종이에 비밀문서의 내용을 서둘러 옮겨 적었다. 그 과정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음과 뜻을 알지 못하는 글자다 보니 한 번에 많이 옮길 수가 없었다. 글자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연필 끝이 느렸다.
‘이해 못 할 족속들.’
케인은 속으로 욕을 잔뜩 했다. 마법사들의 언어는 왜 이따위로 생겼는지.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페이지를 옮긴 순간, 밖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잘 들리지는 않으나 바로 근처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쪽 복도에서 아이들이 함부로 돌아다닐 리 없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나.’
케인은 황급히 자리를 정리했다. 그러나 곧바로 문을 열고 뛰쳐나갈 수는 없었다. 행여 바깥에 늙은이가 서 있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이지.
들어올 땐 별로 긴장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 팔다리가 저릿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곧바로 죽이진 않을 거야. 밤중에 처리하겠지.’
지금껏 잘 통제해 온 아이들에게 구태여 험악한 인상을 심어 주고 싶지 않을 테니.
‘아니지. 마법에 관한 문제니 일부러 더 험악하게 굴 수도 있어.’
마법사란 본디 배타적인 족속들이 아니던가. 연구 자료를 빼돌리려 한 도둑놈을 앞에 두고 침착하게 군다면 그편이 더 이상하다. 길길이 날뛰며 아이들에게 경고를 할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 처리할까. 일단 참회실에 가뒀다가 죽인 후 도망쳤다는 핑계를 대지 않을까.
아니면 직접 치안청에 신고를 하겠다며 데리고 나가 죽일 수도 있다. 그냥 죽이기는 아까우니 무언가 실험을 하는 데 써먹거나.
새틴이나 로저스가 구해 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계획이 틀어지면 둘은 바로 발을 뺄 거다. 케인이 그들의 입장이라도 그럴 테니 섭섭한 마음은 없었다.
‘팀을 불에 태웠다고 했지.’
불에 타 죽는다면 끔찍하게 고통스럽겠지.
재수 없는 상상을 하다 보니 도리어 침착해졌다. 문이 열리는 순간 공식을 읊을 틈도 주지 않고 늙은이의 턱을 후려갈기면 어떨까. 아예 대놓고 도망친다면 쫓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그다음엔 어쩔까. 가장 가까운 마을은 이미 늙은이에게 포섭됐으니 내키지 않더라도 숲으로 들어가야 한다.
‘헤매다 굶어 죽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여기 있어도 죽는다면…….’
톡톡.
조그만 소리가 케인을 무질서한 상념에서 깨웠다.
‘새틴인가?’
설마하니 늙은이가 빈방의 문을 저렇게 두드릴 리는 없다. 바깥의 상황이 어떻게든 정리가 된 모양이다.
케인은 서둘러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새틴이 아니라 로저스가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로저스는 케인을 보자마자 손가락을 제 입에 댔다. 그러지 않아도 케인은 쓸데없는 소리를 할 생각이 없었다.
빗장에 실을 걸고 문을 닫았다. 요령을 써서 끌어당기자 안쪽에서 철컥 잠기는 소리가 났다.
로저스가 앞장서고 케인은 그 뒤를 따랐다. 로저스는 발소리를 죽여 계단참까지 내려갔다. 그제야 케인은 무슨 상황인지 알았다.
새틴이 계단 아래 쓰러져 있었다. 늙은이는 그 옆에서 새틴의 다리를 만지고 있다. 밖에서 들어온 아이들 몇이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케인은 소리를 낮춰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새틴이 계단을 굴렀어. 아마 일부러.”
“왜.”
케인은 무심코 물었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유야 뻔했다.
로저스가 몹시도 상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내가 시간을 충분히 끌지 못했어.”
지금 반성한다고 누가 상을 주진 않는다. 로저스가 한 계단 내려가며 말했다.
“난 내려가 볼 테니까 넌 다시 올라가. 조금 있다가 방에서 나온 척해.”
“그래…….”
∞ ∞ ∞
새틴은 멍든 자리에 연고를 바르며 말했다.
“내가 생각보다 엄청 강골인가 봐. 어떻게 이렇게 멀쩡하지?”
일부러 계단으로 몸을 던지던 순간 새틴은 어디 한 군데 부러질 각오를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경상에 그쳤다. 모서리에 부딪힌 몇 군데에 멍이 들었을 뿐 뼈는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머리도 무사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근육통이 있을지 모르나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괜찮았다. 몇 군데 멍드는 대가로 케인이 무사히 연구실을 빠져나왔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기분이 좋은 새틴과 달리 케인은 아까부터 내내 말이 없었다.
‘미안해서 저러나.’
결과적으로 모두 무사했으니 저 정도로 상심해 있지 않아도 될 텐데.
새틴은 연고의 뚜껑을 닫으며 슬쩍 말했다.
“이제 루퍼스 모르게 자루에 넣기만 하면 되겠다.”
“……응.”
“뭐라고 편지도 적는 편이 좋을까? 발견한 사람이 뭔지 모르고 폐기할 수도 있잖아.”
“그편이 좋겠지.”
“케인, 나 진짜 안 아프다니까.”
“……누가 뭐래.”
신경 쓰지 않는 척하지만 어조가 여느 때와 달랐다. 평소처럼 쏘아붙이지 못하고 꼭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말꼬리에 물음표가 없네.’
달래야 할지 그냥 두어야 할지 몰라 새틴이 고민하는데 케인이 드디어 시선을 맞췄다. 늘 하던 대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으나 눈을 못 마주치고 계속 창문 쪽만 보고 있던 참이다.
이제 기분이 나아진 줄 알고 새틴은 실없이 웃었다. 그러자 케인이 복잡한 얼굴로 물었다.
“심하게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었어?”
“안 다쳤잖아. 이 정도는 뭐 금방 나을 거고.”
“얼마나 다칠지 몰랐잖아.”
“그렇긴 한데.”
새틴이 멋쩍게 웃기만 하자 케인은 한숨을 쉬더니 누워 버렸다. 벽 쪽으로 몸을 돌리고 이불까지 덮었다. 더 이야기하지 않겠단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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