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로저스는 대답하기 전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았다.
“케인한테 혹시 무슨 말 못 들었어?”
“케인?”
새틴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일전에 케인과 함께 식사를 할 때 로저스가 유난히 쳐다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고 케인에게 물었지만 제대로 된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저 로저스가 어떤 애 같으냐는 질문만 받았다.
‘역시 무슨 일이 있었나 본데.’
로저스는 새틴의 표정을 살피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틴은 잠깐 뜸을 들이다 고개를 저었다.
“뭘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다른 말은 못 들었어.”
틈날 때마다 케인과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만 설마하니 로저스가 그걸 알 리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로저스가 선생님을 언급했다.
“선생님이 케인하고 얘기하는 걸 봤어.”
“아, 그래?”
케인은 선생님과 이야기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일부러 숨겼을까.
새틴은 잠깐 들었던 의문을 밀어냈다. 그냥 별거 아닌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다. 아이들 모두 복도나 계단에서 선생님을 만나면 한두 마디쯤은 나눈다.
새틴이 대수롭잖다는 듯 반응하자 로저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새틴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였는데 그래?”
“너는 케인을 얼마나 믿어?”
공교롭게도 로저스는 케인이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새틴은 웃으며 대꾸했다.
“특별히 믿는다는 말을 할 정도는 아니고. 다른 아이들이랑 똑같은 정도?”
“그럼 케인이 만약, 내 말은 정말 만약인데.”
“응, 천천히 얘기해.”
“케인이 선생님의 제자가 되면 어떨 거 같아?”
로저스는 몹시 어렵게 이야기했지만 새틴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미 새틴은 선생님이 자신을 믿지 않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선생님이 그를 대신할 사람으로 케인을 고르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새틴이 머리를 긁적일 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오히려 로저스가 당황했다.
“넌 케인하고 요즘 잘 지냈잖아. 그러니까 친하게 지내려고…….”
“그렇긴 한데, 알다시피 내가 기억이 없잖아.”
“으응.”
“선생님의 제자라는 게 그렇게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 나는 케인을 특별히 신뢰하지 않지만 선생님도 그건 마찬가지거든.”
왜인지 로저스의 얼굴이 하얘졌다.
“로저스, 왜 그래? 내 말이 이상했어?”
“넌, 선생님을 안 믿어?”
“특별히 믿지도 의심하지도 않는다는 소리지.”
말장난과 비슷했다. 새틴은 선생님과 유대가 없다. 선생님이 죽어도 상관없었다. 그렇기에 믿거나 믿지 않거나 그런 감정도 필요치 않았다.
그런데 로저스는 새틴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질린 얼굴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 돌연 주위를 한 번 더 확인하더니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나, 나는 사실 선생님이 수상하다고 생각해.”
“어떤 면에서?”
“팀도 매기도 정말 도망친 걸까?”
새틴이 바로 대꾸하지 않자 로저스는 빠르게 덧붙여 말했다.
“여긴 도망칠 곳이 없잖아. 어쩌면 그 애들이 도망친 게 아니라, 만약 정말 만약.”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새틴이 불쑥 끼어들자 로저스는 일순 당황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지껄였다.
“선생님이 정말 좋으신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상한 일이잖아. 무슨 이득이 있다고 우리를, 아무것도 없는 고아들을.”
“아이를 돕는 건 이득과 관계없이 어른이라면 해야 하는 일이지.”
새틴의 한마디에 로저스가 입을 다물었다. 물론 새틴은 로저스의 의견에 반박할 셈이 아니었기에 뒷말을 이었다.
“선생님은 좋은 어른은 아닌 모양이지만 말이야.”
“새틴도 의심하고 있었어?”
팀이 정말로 죽었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는 편이 나을 터다. 로저스는 겨우 열네 살, 현대 한국이었다면 기껏해야 중학생이다. 심증만 품고 있어도 충분히 불안할 텐데 확신을 줄 필요는 없었다.
새틴은 팔짱을 풀고 로저스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로저스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새틴은 차분히 일렀다.
“다른 아이들한테는 얘기하지 마. 평소처럼 행동하고.”
“으응, 알았어.”
“그런데 케인이 선생님하고 무슨 얘기를 했어?”
∞ ∞ ∞
새틴은 로저스의 이야기를 들은 후로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행동했다. 식사 시간마다 케인의 접시에 간섭하는 모습은 이제 다른 아이들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둘이 함께 있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새틴은 케인이 밤중에 방을 나서는 모습을 보았다. 새틴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발소리를 죽인 케인은 문도 조심스레 닫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새틴은 몸을 일으켰다.
‘어딜 가는 거지. 설마 선생님한테 가는 건가?’
기분이 너무나 이상했다. 이걸 배신감이라고 해도 될까.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라도 배신감을 느낄 수가 있나. ㅇㅇ는 지금껏 남과 깊은 관계를 맺어 본 적이 없어 다소 혼란스러웠다.
‘아니, 아직은 모르지.’
로저스에게 들은 정보대로라면 케인이 딴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르지만, 말 그대로 모르는 일이다. 그냥 화장실에 가는 길일 수도 있다. 저녁에 물을 많이 마셨다든지, 갑자기 배탈이 났다든지.
‘너무 낙관적인 생각인가?’
케인이 정말 딴마음을 먹어서, 그래서 여태 새틴에게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은 거라면.
‘의심할 만한 상황이 맞지?’
켕기는 짓을 한 적이 없고 엉뚱한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면 케인은 이리 비밀스레 움직여서는 안 됐다. 새틴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꼬치꼬치 캐물어 대지 않았던가. 새틴도 케인이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물어볼 권리가 있다.
‘일단 확인부터 하자. 의심은 다음이야.’
예전에 팀을 뒤쫓을 때처럼 새틴은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케인은 저 앞에 걸어가고 있었다. 돌아보지도 않는다. 뒤쫓는 사람이 없으리라 속단했을까.
계단에 이르러서도 케인은 방향을 바꾸지 않고 직진했다. 그리고 선생님의 연구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정말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거였네.’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게 배신감일까. 정말로? 그보다 복합적이지 않나.
누나가 쓴 이야기를 따르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누나가 쓴 주인공에게 거부당하는 상황은 생각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묘사되지 않은 상상 속의 악이라면 케인은 이야기의 주인공이고, 주제이며, 작가의 대변인이다.
케인이 새틴을 배신했다는 건 이 세계가 새틴을 배신했다는 것과 같다. 누나가 만들어 낸 세계가 졸지에 이상한 나라가 되었다. 그것도 나쁜 의미의. 어떻게 이런 일이.
‘……충격받을 때가 아니야.’
서러운 마음은 이불 속에서 헤아려도 된다. 일단 지금은 케인이 선생님과 무엇을 작당하는지 알아야 한다.
새틴은 어둠 속에 숨은 채 케인을 주시했다. 케인은 연구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못 들어갔는데.’
선생님은 가끔 새틴을 불러 자잘한 질문을 했다. 케인과 어떻게 지내냐느니, 기억은 그대로냐느니. 무언가 달라진 것은 없냐느니. 들을 얘기가 있어 하는 질문 같진 않았다.
‘페이크?’
그럴 수도 있다. 케인과 모의하고 있음을 새틴에게 들키지 않으려 수작을 부린 거다. 야비하게도.
곧 연구실 문이 열렸다. 케인은 고개를 꾸벅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새틴은 재빨리 쫓아가 연구실 문에 귀를 바짝 댔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안쪽의 이야기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마법…….’
겨우 들린 단어도 저번에 들은 것과 거의 비슷했다. 마법이, 마력을, 새틴은. 제 얘기를 하는데도 들을 수 없으니 답답했다.
‘선생님은 무슨 말로 케인을 끌어들였을까.’
행여 문틈으로 마력 비슷한 거라도 보일까 봐 새틴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런데 돌연 안에서 들리던 희미한 대화 소리가 끊겼다. 새틴은 황급히 옆으로 몸을 피했다. 간발의 차로 문이 열렸다.
“선생님은 아직 안 주무시나요.”
평소처럼 까칠하긴 해도 걱정이 담긴 말이었다. 케인이 선생님에게 저런 말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한 터라 새틴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한테는 저런 말 안 했으면서.’
정말로 선생님의 편에 붙기로 마음먹었을까. 그래서 저 악인의 비위를 맞춰 주는 중일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어떻게 케인이 그럴 수 있지.
선생님은 평소와 다른 케인의 태도가 마뜩한지 웃으며 대답했다.
“나이를 먹으니 잠이 줄어서 말이다. 그럼 내일 보자꾸나.”
“네.”
케인과 선생님은 짧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새틴은 문이 닫히자마자 케인과 눈이 마주쳐 흠칫 놀랐다. 반면 케인은 전혀 놀라지 않는다. 새틴이 거기 숨어 있단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사람처럼.
“케…….”
저도 모르게 입을 연 새틴은 얼른 도로 다물었다. 케인은 선생님의 연구실 앞임을 감안해서인지 소리 내 타박하지 않고 손짓했다. 방으로 돌아가 이야기하자는 뜻이었다.
두 사람은 살금살금 걸어 방으로 돌아왔다. 케인이 미처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새틴은 그의 등을 떠밀고 들어와 문을 닫았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케인이 인상을 쓰고 돌아보았다. 빠르게도 새틴의 옷깃을 움켜쥐고 밀어붙였다.
“뭐 하는 짓이야?”
새틴은 그 엉겁결에 나온 기백에 눌리지 않고 따졌다.
“무슨 얘길 한 거야? 나한테는 항상 꼬치꼬치 캐묻더니.”
“확실해지면 이야기하려고 했어.”
“뭐가 확실해지는데?”
“저 늙은이가 마법을 배울 생각이 없냐고 묻더라고.”
“그런데.”
새틴이 놀란 내색하지 않고 뚱하게 반문하자 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알고 있었어?”
“로저스한테 들었어.”
“입이 종잇장만큼이나 가볍네.”
“그래서 선생님하고 무슨 얘길 하고 온 거야? 연구실에 뭐가 있었어? 설마 나를 배신하고, 흡.”
케인이 새틴의 입을 막았다. 새틴은 제 목소리가 조금 컸음을 알고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케인은 손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고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늙은이의 꿍꿍이를 캐러 갔을 뿐이니까.”
“정말이야?”
“네가 뭐라고 내가 거짓말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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