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선생님은 새틴에게 케인과 가깝게 지내라고 했다.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어떤 의미로 한 말이었을까. 새틴은 선생님이 마법을 실험해 볼 대상으로 케인을 낙점했다고 짐작했는데, 사실 선생님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생각이 길어지자 지겨웠는지 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일어나?”
“씻고 오려고.”
“아, 그래…….”
“더 할 얘기도 없고.”
냉정하게도 말한 케인이 갈아입을 옷을 챙겨 방을 나갔다. 새틴은 그대로 드러누웠다.
‘케인이 선생님하고 한편이 될 수도 있을까.’
다크에이지의 전개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런 상황이 되니 자연히 떠올리고 말았다.
소설에서 케인은 악랄한 흑마법사의 실험체가 될 위기에 처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그 흑마법사는 과거 회상에만 등장할 뿐 본편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름조차 언급된 적 없다.
‘2부나 3부에 나온단 얘기도 없었고.’
즉, 흑마법사는 배경과 다름없다. 주인공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근본적인 악, 다른 해석의 여지도 없고 변화의 가능성도 없는 정체된 존재다.
다른 인물에게는 몰라도 케인에게는 그렇다.
‘둘이 손을 잡으면 아예 인물 설정부터 달라지는 거잖아.’
이미 자신이 개입함으로써 원작은 틀어졌을 테지만…….
‘잘 상상이 안 되네.’
까칠하고 퉁명스러운 케인의 모습을 매일 보면서도 은연중에 믿고 있었을까. 나쁜 선택을 하는 케인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 ∞ ∞
로저스는 가끔 망상에 빠졌다. 그저 상상이라 해도 될 것을 구태여 망상이라 일컫는 이유는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 되어서다.
‘도망친 줄 알았던 아이들은 사실 도망친 게 아닐지도 몰라.’
이곳엔 처음부터 고아였던 아이들이 많지만 로저스는 열 살까지 가족과 살았다.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해야 할까.
그 시절 로저스는 너무 어리고 철이 없어 주변에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아버지가 친구에게 속았고, 그 일에 어머니와 친척들이 휘말려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는 거다.
로저스는 간신히 살아남았다. 거리에서 겨울을 한 번 보내고 두 번째 겨울을 맞으며 이번에야말로 죽겠구나 할 때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에게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분명 길에서 얼어 죽었겠지.’
처음엔 이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지금도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간혹 느껴지는 기이한 위화감을 지울 수 없었다.
‘정말 도망쳤을까.’
숲으로는 도망치지 못한다. 위험한 들짐승이 있단 얘기는 듣지 못했지만 들짐승이 없어도 저 숲은 위험하다. 클로버랜드와 그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저 숲에 대해 잘 안다. 사람이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숲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그걸 뻔히 아는 아이들이 숲으로 도망을 쳤을까. 그 정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알 텐데.
하지만 숲으로 가지 않았다면 분명히 거쳐야 할 마을. 선생님은 그곳에서 아이들의 자취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말이 안 되잖아.’
아이들은 선생님이 하는 말을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다. 어쩌면 의심하고 싶지 않아 믿는지도 모른다.
로저스 역시 의심하고 싶지 않지만, 자꾸만 망상이 피어올랐다.
혹시 아이들은 도망친 게 아니라.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느냐.”
로저스는 움찔 놀라 망상에서 빠져나왔다.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근처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주위가 조용해 먼 곳의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을 뿐이다.
“씻으러 가는 길이었나 보구나.”
“보시다시피.”
선생님의 목소리에 대꾸하는 목소리도 누구인지 바로 알았다. 케인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변성기가 지나지 않아 목소리가 잘 구분되지 않는데 케인의 목소리는 들으면 바로 알 수 있었다. 낮기도 낮지만 말투가 쌀쌀맞아서 몹시도 건조한 느낌이 들었다.
‘반대로 새틴은 좀 끈적끈적하지.’
어른스러운 목소리가 다정한 말투와 합쳐지니 묘하게도 그랬다. 말의 내용이 이상할 때면 목소리는 더 기묘하게 들린다.
여하튼 지금은 목소리에 대한 평을 할 때가 아니다.
로저스는 서고에서 돌아오는 길이었고, 선생님과 케인은 계단 위쪽에 있었다. 저쪽은 아마 로저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을 터다.
“생각은 해 보았느냐.”
지난번에도 로저스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마주친 모습을 목격했다. 아마도 그때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케인이 무어라 할지 궁금해 로저스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곧 케인이 대답 아닌 대꾸를 했다.
“의문이네요.”
“무엇이?”
“지금껏 저한테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서…….”
선생님의 도움으로 먹고 입고 생활하면서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니. 로저스는 새삼 케인의 인성에 감탄했다. 배짱이 있는 건지 은혜를 모르는 건지.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아주 관심이 없진 않은 모양이구나.”
“없다면 거짓말이죠.”
“그렇다면…….”
선생님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아래에선 보이지 않지만 함께 이동한 듯했다. 아래로 내려오진 않았으니 아마 그대로 복도로 들어갔을 것이다.
‘선생님의 서재로 갔을까.’
선생님은 아이들과 이야기할 일이 있으면 사무실을 쓰지만 새틴과는 서재에서 자주 이야기했다. 연구실은 이야기를 할 때보단 무언가 정말로 연구할 일이 있을 때 썼고.
케인도 곧 연구실에 들어가게 될까.
‘그럼 새틴은 어떻게 될까.’
혹시 도망친 아이들처럼, 새틴도 그렇게 되진 않을까.
‘이놈의 망상.’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면서.
∞ ∞ ∞
새틴은 처음으로 아이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이게 정상이지.’
그간 한 번도 싸우지 않던 것이 도리어 신기한 일이다. 하루 종일 함께 생활을 하다 보면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라도 다툼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내, 내 건데…….”
“누가 먹는 게 싫었으면 여기 두지 말았어야지.”
“내 자리잖아!”
“아닌데? 먼저 앉는 사람 자린데?”
“맨날 내가 앉았단 말이야.”
“몰라, 나는. 있어서 먹었어. 꺼내 가든지, 아아.”
울먹이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아이는 카렌이고, 입안의 사탕을 내보이며 얄밉게 구는 아이는 로빈이다. 둘은 그간 특별히 친한 사이도 나쁜 사이도 아니었다. 새틴이 관찰한 바로는.
이제부터는 나쁜 사이가 될 성싶다.
‘저번에 그 사탕인가.’
이 근처에는 사탕을 얻을 만한 곳이 없고, 루퍼스가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새틴이 이곳에서 사탕을 본 적은 딱 한 번뿐이다. 일전에 식료품을 가져다주러 온 마부가 로빈에게 사탕을 줬다.
그때 사탕을 받은 사람이 로빈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겨우 사탕. 여기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도시는 또 어떨지 모르나 적어도 이 학교 안에서 사탕은 귀한 것이 맞는다.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싸울 만큼이나.
‘그나저나 분위기가 희한하네.’
다른 아이들은 그렇다 쳐도 카렌과 친하던 헤더가 가만히 있으니 좀 이상하다. 보통 이럴 때는 친구의 편을 들지 않던가. 어느 쪽 말이 맞든지 간에 말이다.
‘다른 아이들도 너무 차분하고…….’
싸움을 부추기지도 말리지도 않고 다들 남의 일처럼 보고 있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새틴은 문득 케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케인은 아이들 싸움에 별 관심이 없는지 이내 하품을 하며 창밖을 보았다.
곧 선생님이 들어왔다. 카렌과 로빈은 싸움을 멈추고 저마다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은 교실 안의 묘한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수업을 시작했다. 오늘의 과목은 고전이었다.
‘눈치를 못 챈 게 아니라 모르는 척하는 건가?’
선생님이 칠판에 적는 오래된 영웅시의 구절을 보며 새틴은 턱을 괴었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동태눈이 되었지만 새틴은 고전 수업이 꽤 좋았다. 전혀 모르는 세계의 문학은 새틴에게 장르 소설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마왕이여, 이곳엔 그대의 자리가 없다. 약속한 이는 이미 죽어 사라졌으니 그대 또한 돌아갈지어다.”
선생님이 낭독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새틴은 픽 웃었다. 마왕이니, 그 계약자니. 판타지 단골 소재 아니던가.
‘양판소도 고전이지.’
다크에이지에도 저 이야기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새틴이 스승의 복수를 하려고 마왕을 소환했을 때, 케인이 새틴을 죽이지만 마왕 소환은 멈추지 않는다. 아마도 이 세계에서 마왕 소환은 한번 실행되면 취소가 안 되는 모양이다.
‘하긴 마왕이 오픈 마켓 상품도 아닌데 오라 가라 하면 안 되지.’
정 반품하고 싶다면 수수료를 내든지.
수업이 끝난 후 카렌과 로빈의 싸움은 이어지지 않았다. 일단락된 셈이지만 한동안 분위기는 냉랭할 듯했다.
새틴은 괜히 끼어들어 훈수 두지 않고 슬쩍 교실을 빠져나왔다.
먼저 나간 케인은 부엌 쪽으로 가고 있었다. 아마 목적지는 부엌이 아니라 서고일 테다. 새틴은 따라갈까 하다 말았다. 당장은 할 이야기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새틴.”
로저스였다. 새틴은 얼른 옆으로 비켜났다. 교실 문을 막고 있어 부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지 로저스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어?”
“이야기?”
굳이 이리 묻는 이유는 다른 아이들이 없는 데서 이야기하고 싶어서겠지. 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고로 갈까?”
평소 로저스가 서고에 자주 있으니 한 말인데 로저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밖으로 갈래.”
“그래, 그럼.”
새틴은 별 의심 없이 동의했다. 아까 케인이 서고로 가는 모습을 봤으니 비밀 이야기를 하기엔 다른 곳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은 마땅한 곳을 찾으며 학교를 빙 돌다 목욕탕 뒤편에서 멈췄다. 새틴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목욕탕과 화장실 근처라 그런지 물웅덩이 냄새가 났다. 아이들이 구태여 여기까지 찾아와 놀진 않을 성싶다.
“로저스, 여기면 될까?”
“으응.”
왠지 긴장한 기색의 로저스는 뒤늦게 주위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새틴은 벽에 기대려다 습기가 묻어날 것 같아 관뒀다. 가만히 서 있자니 자세가 애매해 팔짱을 꼈다.
“할 얘기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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