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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21화 (21/139)

21화

“배신 안 해.”

“누가 진짜 배신하래? 그렇게 보여야 믿을 거 아냐.”

“그렇긴 한데…….”

새틴이 입을 다물고 어물거리는 사이 케인은 물을 버리고 빨래를 쥐어짰다. 날이 후텁지근한데도 손이 창백했다. 여태 찬물에 손을 담그고 있던 탓이다.

새틴은 그 창백한 손을 물끄러미 보면서 선생님에게 들은 말을 생각했다. 오늘이 아니라 며칠 전에.

「뭐든 말씀만 하세요.」

「네게 위험한 일도 감수하겠단 뜻이냐?」

「위험이 클수록 보상도 크지 않을까요.」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위험하다면?」

「……제가 위험한 것보단 낫겠죠.」

그 상황에 어울리는 대답이었다. 그렇게 생각한다.

‘다른 생각은 정말 안 했을까.’

케인은 배신이란 말을 그저 농담으로 했을 테지만 새틴은 울적해졌다. 사람은 신념만으로 살지 않고, 원래도 ㅇㅇ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케인하고 가깝게 지내거라.」

「어째서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않느냐. 네가 나서서 나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 보란 얘기다.」

생각에 빠진 새틴을 잠깐 지켜보던 케인이 자리를 정리했다.

“먼저 간다.”

구깃구깃한 빨래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케인이 세탁실을 나갔다. 새틴은 조금 더 머무르다가 나왔다.

∞ ∞ ∞

뜰 한쪽의 빨랫줄에 빨래를 널고 돌아선 케인은 움찔 놀랐다. 언제 왔는지 로저스가 서 있었다. 제 빨래를 걷으러 왔는지 빈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서고에서 종종 얼굴을 보지만 그다지 친한 편은 아니라 케인은 굳이 말 붙이지 않고 지나쳤다.

그런데 로저스의 목소리가 케인의 발목을 붙잡았다.

“저번에, 밤에 선생님하고 하는 얘기 들었어.”

귀찮게 되었다 생각하며 케인은 몸을 돌리고 삐딱하게 섰다.

“저번이 언제야.”

“사흘 전에.”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케인은 모른 척했다. 물론 로저스가 믿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처음부터 무슨 소리냐고 물었어야 했는데 대꾸를 잘못했다. 그러나 허둥대는 기색을 보이느니 뻔뻔하게 구는 편이 낫다.

로저스는 바구니 가장자리를 꾹 쥔 채 말했다.

“넌 목욕탕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어. 선생님은 잠깐 이야기를 하자고 했고.”

케인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열 명 넘는 사람이 먹고 자며 생활하다 보니 이런 일이 발생하고 만다.

팀이 늙은이를 만나러 가던 것을 케인이 알아챘듯, 케인이 늙은이와 마주친 모습을 로저스가 목격해 버렸다.

“그래서 어쩌자고.”

더 모른 체하지 않고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로저스가 어물거렸다. 바구니를 쥔 손등에 뼈가 불거졌다.

“내가 선생님하고 얘기한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케인이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아이가 없으나 그뿐이다.

케인은 속으로만 미친 늙은이라 욕했지 대놓고 반항한 적은 없었다. 얌전히 수업을 듣고, 학교 안의 사소한 규칙들을 지켰다. 선생님을 싫어하는 티를 내면서도 딱히 험담은 하지 않았다. 험담을 할 만큼 친한 상대가 없기도 했지만.

“더 할 얘기 있어?”

눈썹 사이를 살짝 찌푸린 채 케인이 묻자 로저스가 입을 벌렸다. 일단 입은 뗐는데 바로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잠깐 머뭇거리다 물었다.

“새틴은 알아?”

“뭘.”

“선생님이, 너한테 마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 거.”

정확히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

‘마법을 배울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지.’

케인이 바로 대꾸하지 않자 로저스가 주위를 둘러보고 다가왔다. 성장기가 시작됐는지 로저스의 키가 전에 비해 자란 듯했다. 그래 봤자 아직 케인보다는 작았다. 케인은 학교의 아이들 중 두 번째로 키가 컸다.

로저스는 불안한 눈으로 케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새틴은 정말로 너하고 친해지고 싶은 것처럼 보였어. 성격이 좀 변하긴 했지만……. 그런데 만약 네가.”

“그래서 뭐. 양심이 있으면 자리를 빼앗지 말라고?”

“그 말이 아니야. 그냥, 알려는 줘야 하지 않을지…….”

“너는 어때?”

“어?”

케인이 고개를 가까이 들이대자 로저스가 흠칫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선생님이 내가 아니라 너한테 그런 제안을 했다면 말이야.”

“나는 자질이 없어서…….”

“그딴 거 생각하지 말고. 너한테 기회가 생긴다면 어쩔 거냐고.”

로저스는 우물쭈물할 뿐 뭐라 말하지 못했다.

“누가 누굴 불쌍하게 생각하는 거야. 네 거나 잘 챙겨.”

케인의 조롱에도 로저스는 발끈하지 않았다. 천성이 심약하다. 케인은 픽 웃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새틴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몸을 씻은 후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골똘히 생각에 잠긴 케인은 새틴이 들어오는데도 아무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별거 아냐.”

과연 그럴까. 새틴은 다소 미심쩍다 생각했지만 캐묻지 않았다. 케인에게 묻고 싶은 다른 얘기가 있었다.

“아까 저녁 먹으면서 로저스가 계속 우리 쪽을 보던데.”

“그랬나?”

“로저스하고 무슨 일 있었어?”

케인은 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대답 대신 질문을 되돌렸다.

“네가 보기엔 로저스는 어떤 애 같아?”

어떤 애?

무슨 의미로 묻는지 알 수 없어 새틴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케인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착한 앤지, 영악한 앤지, 뭐 그런 식으로 말이야.”

새틴은 잠깐 생각하고 대답했다.

“얌전한 애? 늘 서고에 있고.”

다른 아이들에 비해 로저스는 조용한 편이었다. 새틴은 가끔 로저스와 대화를 나눴지만 속은 잘 알 수 없었다. 대범한 성격은 아니리라고 대강 짐작할 뿐이다.

“딱히 욕심도 없는 거 같고…….”

카렌이나 로빈은 종종 먹을 것을 얻으러 부엌에 기웃거리는데 로저스는 그런 적도 없다.

확실히 넉살이 좋은 편은 아니다. 새틴이 기억을 잃었다고 밝혔을 때 섭섭해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좀 심약한 편일지도.

‘혹시 내가 말실수한 걸 담아 두진 않았겠지?’

최근 이야기를 나눌 땐 실수하지 않고 잘했다.

새틴의 두루뭉술한 감상을 들은 케인은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묘한 반응이다.

“왜 그런 반응이야?”

“그냥. 넌 애들을 좋아하잖아.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야.”

“좋아한다기보다는 애들이니까 챙겨 주는 거지.”

애들을 좋아한다는 말은 칭찬이라기엔 애매했다. 그럼에도 괜히 멋쩍어서 새틴은 뺨을 훔쳤다. 덜 마른 머리에서 자꾸만 물방울이 떨어졌다.

사실 챙겨 준다는 말도 과하다. 선생님은 제법 친절하지만 아이들을 세심하게 돌보는 편은 아니었다. 공부를 가르쳐 줄 때가 아니면 아이들과 별 교류가 없었다. 새틴은 선생님이 해야 할 일을 조금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부탁받은 일은 아니지만.’

아이들을 돌보는 건 어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까.

케인은 로저스에 관해서는 더 얘기하지 않고 고갯짓했다. 앉으라는 뜻 같아 새틴은 침대에 앉았다. 매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렇게 마주 앉아 있어도 이제 어색하지 않았다.

“넌 나를 얼마나 믿어?”

새틴은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인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니었다. 오래 안 사이는 아니어도 대충은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딴 식으로 놀라라고 한 말은 아닌데.”

그렇지. 이게 케인이지.

케인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새틴은 도리어 안도했다. 어울리잖게 믿음 테스트 같은 말을 하니 놀라 버렸다.

즉답을 하라고 채근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 새틴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새틴은 케인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의심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서로를 믿지 않더라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만 지킨다면 문제는 생기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철석같이 믿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이유 없이 날 해치진 않을 거라고 믿어.”

“이유가 있으면 해칠 수도 있을 거라고?”

“뭐, 이유라는 게 워낙 다양하니까. 날 해치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든지…….”

그런 경우를 두고 배신이라고 할 순 없다. 그런 경우엔 배신이 아니라 선택, 혹은 생존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런 상황이 오지 않으면 좋겠지만 앞날은 알 수 없는 법.

“지금으로서는 그냥 우리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어.”

“목표가 바뀔 수도 있잖아.”

케인의 어조는 가벼웠다. 그래도 농담일 리는 없었다. 이렇게 불안을 조장하는 농담은 발화자에게도 청취자에게도 즐겁지 않으니까.

“케인,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미친 늙은이가 나를 포섭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 해 봤어?”

“선생님이 널 포섭하려고 했어?”

“아니,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지금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가능성은 있다. 새틴은 옷깃을 적시는 물방울을 건성으로 훔치며 가정했다.

‘선생님이 케인을 포섭하면 뭐가 이득일까.’

그저 실험을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정말로 곁에 두려는 생각이라면.

새틴과 케인을 둘 다 곁에 두고 부릴 이유는 없다. 새틴이 쓸모없어져서 다른 조수가 필요해졌다면 모를까. 그렇다면 새틴이 쓸모없어질 이유는 뭐가 있을까.

‘나를 신용할 수 없을 때?’

전에 케인은 선생님이 새틴을 이전과 비슷하게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야비한 기회주의자로.

그때 새틴은 잘됐다고 생각했다. 아등바등 애쓰지 않아도 선생님의 신뢰를 살 수 있으면 좋은 일 아닌가.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지.’

새틴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일부 전과 같은 모습을 보이더라도 정말로 같은 사고를 할 리 없다. 선생님도 그리 생각했을지 모른다.

‘미지의 존재보다는, 이미 파악한 인물이 부리기에 낫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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