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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20화 (20/139)

20화

“새틴, 루퍼스한테 무슨 짓 했어?”

카렌이 조그맣게 속삭여 물었다. 새틴은 슬쩍 눈을 피하며 웃었다.

지난밤의 일에 관해 전혀 알지 못할 카렌이 왜 이런 의심을 하는지는 새틴도 이해했다. 새틴의 접시에만 완두콩이 잔뜩 쌓여 있었다. 다른 아이들의 접시엔 여러 가지 채소가 골고루 올라가 있는데.

‘어느 세계에서나 애들은 콩을 싫어하는 법인가?’

루퍼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새틴은 완두콩을 싫어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음식을 가린 적이 없었다. 그럴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접시를 가지고 빈자리를 찾았다. 케인의 맞은편이 비어 있었다. 사실 케인의 앞은 항상 비어 있긴 하다.

“안녕.”

같은 방에서 자고 일어나는데 이렇게 인사를 하자니 좀 우습다.

“뭐야.”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듯한 케인의 신경질적인 대꾸도 웃기다. 새틴은 어색하지 않도록 미소 지었다.

어젯밤 루퍼스가 도마뱀을 잡는 동안 케인은 부엌을 탐색했다. 걱정과 달리 쓰레기 관리는 그다지 철저하지 않은 듯했다. 케인은 루퍼스가 도마뱀을 쫓느라 한창 고군분투할 때 돌아왔다. 목욕하고 온 척 머리까지 적시고. 예상보다 훨씬 일렀다.

「무슨 재밌는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네.」

문간에 서서 케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민망했는지 루퍼스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리고 알아서 하라고 성질을 내며 나가 버렸다.

그 후 도마뱀은 새틴이 잡았다. 애초에 루퍼스를 불러들이려고 새틴이 밖에서 직접 잡아 온 도마뱀이었다.

부엌 안쪽에 뭐 특이한 게 있었냐고 새틴이 물으니 케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예상한 대로의 구조였다고 했다. 거 보라고 새틴이 웃으니 케인은 대꾸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새틴은 완두콩을 우물거리며 이제 어떻게 할지 생각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

날짜를 정확히 헤아리진 않았으나 짐마차는 대강 2주에서 3주 정도에 한 번씩 오는 듯했다. 루퍼스에게 물으면 답을 알 수 있겠지만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다. 외부에 관심이 있다는 내색을 해 좋을 것이 없으니.

‘뭐라고 써야 신전이 반응을 보일까.’

이곳에서 신전 기사단이 어느 정도 위명이 있는지는 모른다. 얼마나 성실한지도 모르고.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구해 달라고 하면 듣지 않을 거야.’

물론 일은 이미 일어났다. 하지만 사라진 아이들이 어떻게 됐는지 말한다고 믿을까. 거리의 천덕꾸러기들이 배은망덕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케인도 그렇게 말했고.

‘도둑이 들었을 땐 불이 났다고 외치라고 했지.’

개인의 문제보단 공동의 문제로 보여야 많은 사람이 반응한다. 흑마법사가 아이들을 죽이며 세상을 전복할 마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적으면 어떨까.

‘나 같아도 안 믿겠는데.’

너무 거창해도 어린애가 동화책을 읽고 적은 망상으로 치부할 가능성이 있다.

‘과장되지 않고 심각해 보이면서 간결한……. 그냥 증거를 하나 끼워 넣는 게 낫겠구나.’

케인이 굳이 선생님의 연구실에 들어갈 기회를 노리는 이유를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다.

‘하지만 연구실에 들어간다고 뚜렷한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새틴은 마법에 관해 아는 바가 쥐뿔만큼도 없다. 선생님이 연구 기록을 대문짝만하게 써 놔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마법에 관해서는 그야말로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무지렁이다.

새틴이 깊은 한숨을 쉬며 완두콩을 뒤적거리고 있으니 맞은편에서 케인이 흘끔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챈 새틴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봐?”

“왜는 왜야. 사람을 앞에 두고 기분 나쁜 한숨을 쉬니까 그렇지.”

계속 이런 식으로만 대꾸하는데 서서히 사이가 좋아지는 모습을 어떻게 연출할 셈이지.

새틴은 약간의 걱정을 담아 친한 체했다.

“케인, 완두콩 먹을래?”

“됐어.”

“서고에 재미있는 책이 있으면 이따 추천해 줄래?”

“알아서 봐.”

“오늘 저녁에 같이 산책할까?”

케인은 이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새틴이 뺨을 긁적이자 한 자리 건너에 앉아 있던 헤더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금세 식사를 마친 케인이 식당을 빠져나간 후 헤더가 옆자리로 옮겨 오며 물었다.

“케인은 친해질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계속할 거야?”

“그럼, 돈 드는 일도 아닌데. 헤더, 완두콩 먹을래?”

“……아니, 됐어.”

∞ ∞ ∞

비슷한 패턴을 사흘쯤 보니 아이들도 무뎌졌다. 새틴에게 퉁명스레 대꾸하는 케인의 모습을 보면서도 긴장하지 않고 저마다 할 일을 했다.

“빨래하러 가? 같이 갈까?”

빨래 바구니를 들고 세탁실로 향하는 케인의 뒤를 쫓는 새틴을 보고도 누구 한 사람 신경 쓰지 않았다.

새틴은 세탁실에 들어서기 전 흘끔 주위를 살폈다. 조금 전 한 무리의 아이들이 복도를 뛰어간 후 더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새틴은 세탁실로 들어가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까 선생님 서재에 갔었어.”

일찍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갔던 아이가 금세 돌아와 새틴에게 말을 전했다. 선생님이 찾으신다고.

예전에는 선생님이 새틴을 종종 불러 이런저런 일을 시켰던 모양이지만 요즘엔 그런 일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새틴이 기억을 잃은 후로는. 제자로 삼아 달라 청한 지도 제법 되었는데 이제 결정을 내렸을까.

생각을 갈무리하며 알겠노라 대답하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해서 보니 로저스였다. 떨어진 자리에서 식사를 하던 로저스가 새틴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담긴 의미를 새틴은 분명히 추측할 수 없었다. 부러움이었을까, 아니면 질시였을까. 무심코 보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새틴은 곧장 선생님의 서재로 향했다. 일전에도 선생님의 서재에 간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쪽의 꿍꿍이를 모르는 선생님이 제자를 들이는 데 급하게 굴 이유가 없었다.

“수업 때 쓸 자료 정리를 도와 달라고 하더라고.”

케인은 새틴의 이야기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처럼 묵묵히 빨래를 했다. 셔츠를 물에 푹 담그고 주물럭거리는 손이 제법 야무졌다. 하기야 내내 자기 옷을 자기가 빨았을 테니 서툴다면 그편이 더 이상하다.

새틴은 케인의 무관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해서 귀까지 막고 있는 건 아니니.

“그동안 의식을 못 했는데 자료가 아주 깔끔해서 놀랐어.”

컴퓨터로 문서 작업을 할 때는 수정이 쉽다. 틀린 문장을 지우고 문단의 위치를 바꿔도 흔적 따위 남지 않으니 결과물도 말끔하다.

반면 수기로 문서를 작성할 때는 수정이 어렵다. 그나마 연필이라면 지우고 쓸 수 있겠지만 선생님이 사용한 필기구는 펜이었다. 잉크를 찍어서 쓰는 펜. 틀린 글자가 있으면 고친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 흔적이 보기 싫다면 아예 처음부터 새로 써야 하고.

“손으로 쓰는데 어떻게 그렇게 깔끔할 수 있는지 감탄했다니까.”

고친 흔적 없이 깨끗한 문서를 보며 새틴은 정말로 감탄했다. 한 번에 작성했다면 정말로 대단한 일이고, 여러 번 종이를 버리며 작성했다면 그건 잘된 일이다.

“겨우 애들 수업 자료 만드는 데도 그렇게 공을 들이는 사람이 자기 연구 기록에 소홀할 리 없어.”

이제야 케인이 고개를 들고 새틴을 쳐다보았다. 새틴은 살짝 웃고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연구실에 가면 분명 선생님이 한 실험에 관한 기록이 있을 거야.”

“그렇겠지.”

“근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무슨 생각?”

“암호를 썼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

부질없는 걱정이 아니었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중요한 문서를 아무나 볼 수 있도록 적었을까.

케인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생각난 듯 말했다.

“마법사들만 쓰는 언어가 있다고 책에서 봤어. 미친 늙은이도 그걸 썼겠지.”

“우리가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있을까?”

“……못 알아보겠지.”

기껏 연구실에 숨어들어 평범한 불 마법에 관한 내용이나 훔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건 신전에 보내 봤자 아무 소용 없을 터.

새틴은 잠깐 침묵한 후 다시 입을 뗐다.

“그래서 말인데, 선생님하고 좀 더 가까워져야겠어.”

케인이 뭐라 하기 전에 새틴은 이유를 늘어놓았다.

“그럼 뭔가 힌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기록을 다 확인할 순 없어도 일단 확실한 거 하나만 훔치면.”

“어떻게 가까워지려고?”

“어? 아, 내가 생각한 건 선생님의 지시를 아주 잘 따르는 척하면서…….”

새틴이 흘끔흘끔 쳐다보자 케인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새틴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 구체적인 의견을 꺼내 놓았다.

“너에 대한 얘기를 선생님한테 하는 거야. 정보를 넘기는 거지. 네 성격이나, 취향이나 그냥 그런 거.”

말이 길어지는데 케인은 대꾸가 없었다. 새틴은 괜히 입이 말라서 입술을 여러 차례 축이며 변명했다.

“웃기지? 웃긴 거 알아. 네가 위험해질까 봐 걱정된다고 할 땐 언제고.”

“아니, 안 웃겨. 그렇게 해.”

“괜찮아?”

너무 선뜻하게 그러라 하니 도리어 새틴이 당황했다. 케인은 다시 빨랫감으로 눈을 돌리며 대답했다.

“애초에 늙은이한테 잘 보일 셈으로 나하고 친한 척하고 있었잖아.”

“그렇긴 하지만.”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필요한 건 얻어야지.”

짐마차가 다녀간 후 이미 며칠이 지났다. 짐마차가 다시 올 때까지 남은 날짜는 십여 일 정도.

그동안 두 사람은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증거를 훔쳐 루퍼스의 침실 앞에 있는 쓰레기 자루에 넣어야 한다.

무사히 그 일을 해내더라도 안심할 수는 없다. 선생님이 언제 케인이나 다른 아이를 실험에 이용할지 모르니.

“그러니까 잘해 봐. 나를 배신해서라도 네가 그 늙은이의 제자가 되고 싶은 것처럼 보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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