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누가 아프거나 불이 나면 어떻게 하는 걸까. 이런 염려를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 리는 없다. 예상한 질문인지 로빈이 바로 대답했다.
“마차를 빌릴 수 있는 마을이 하나 있어. 거기 사람들은 선생님을 좋아해서 마차도 잘 빌려줘.”
“거기까지 가다가 길을 잃으면?”
“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갈림길이 없거든.”
유일한 길이 이어진 마을, 클로버랜드로 가려면 그 마을을 필시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새틴은 지레 걱정하는 시늉을 했다.
“숲을 지나서 다른 마을로 갈 수도 있을까? 실수로 길에서 벗어나 버리거나 한다면 말이야.”
“그럴 일은 없어.”
“왜 그럴 일이 없는데?”
“엄청 넓은 숲이야. 들어가면 헤매는 걸로 유명해. 두 번 다시 못 나올걸.”
예전에 루퍼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아무래도 숲이 위험하다는 건 기정사실인 듯하다. 로빈이 새틴을 보며 재차 경고했다.
“그러니까 절대 숲에 들어가지 마. 어쩌면 도망친 애들은 숲에서 죽었을지도 몰라.”
새틴은 몸을 움츠리며 겁먹은 체했다. 속으로는 물론 다른 생각을 했다.
‘숲은 위험하고, 유일하게 이어진 마을의 사람들은 선생님과 친분이 있다.’
케인이 이곳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여태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은 이유를 이제 알겠다. 사실상 이곳은 고립된 곳이나 마찬가지다.
‘다크에이지가 추리물이었다면 여기서 사람이 줄줄이 죽어 나갔을지도.’
그런 장르에서는 꼭 사람이 여럿 죽은 다음에야 범인이 밝혀지니 말이다. 물론 주인공의 동료는 대체로 안전하지만…….
‘나는 주인공의 동료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지.’
새틴은 슬쩍 2층을 올려다보았다. 케인은 다른 아이들처럼 마차를 보고 뛰어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관심을 아예 끊은 건 아니다. 2층 가장 구석의 창문에 언뜻 실루엣이 비쳤다.
‘내가 노닥거리는 줄 알겠네.’
로빈에게서 정보를 더 캐낼 수도 있지만 이쯤 하기로 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도 수상해 보일지 모르니.
“난 가서 뭐 도와줄 일이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나도 같이 갈까?”
“괜찮아. 다른 애들하고 놀아. 쟤네 뭐 먹는 거 같네.”
새틴이 마차 뒤쪽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가리키자 로빈이 허둥지둥 그리로 달려갔다. 이미 사탕을 물고 있으면서 다른 간식도 놓칠 수 없다는 양.
픽 웃은 후 새틴은 부엌 쪽문으로 향했다. 평소 닫혀 있던 문이 오늘은 물건을 들이느라 활짝 열려 있었다.
루퍼스는 그 앞에서 마부와 무언가 얘기 중이었다. 수첩 같은 걸 들고 있는데 마부가 가져온 품목과 수량을 확인하는 듯했다.
새틴은 일부러 기척을 내며 다가가 물었다.
“도와줄 거 있어요?”
흘끔 새틴을 본 루퍼스가 손을 내저었다.
“비리비리한 게 뭘 도와주겠다고.”
“혹시 필요하면 불러요.”
억지로 손을 보태겠다고 우겨도 모양새가 이상할 터라 새틴은 두 번 묻지 않았다.
새틴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쪽문 옆에 놓인 빈 궤짝에 올라앉았다.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기에 좋은 자리였다. 루퍼스는 구경까지 못 하게 하지는 않았다.
밀가루 포대며 채소가 든 궤짝, 달걀과 우둘투둘 못생긴 과일도 좀 있다. 과일도 채소도 큼지막하다. 판타지 세계라 품종 개량을 거치지 않고도 알이 잘 여무는 모양이다.
‘저대로 둬도 되나?’
식재료를 상온에 보관했다가 상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은 새틴뿐인지 루퍼스는 별말이 없다.
‘잠금장치가 있네.’
안으로 당겨서 여는 문, 안에 있는 잠금장치는 단순하나 바깥에서 조작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곁눈질로 잠금장치의 모양을 살피다 루퍼스와 눈이 마주쳤다. 마침 인부가 종이에 싼 고깃덩이를 옮길 때였다. 새틴은 잽싸게 물었다.
“상하지는 않아요?”
“염장이니까 괜찮아.”
“과일은요?”
“저장고에 넣어 두면 한참 먹어.”
“아, 저장고가 있구나.”
부엌 한구석에 문이 있기에 창고인가 했더니 저장고였나 보다. 새틴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퍼스가 건성으로 덧붙였다.
“지하라 선선해.”
“지하는 원래 선선한 거예요?”
“볕이 안 드니까. 그리고 그 자리가 옛날엔 수로였다더라고. 바람이 잘 통해.”
“신기하네요.”
“채소 보관하기엔 아주 좋지. 쥐만 안 나오면 더 좋을 텐데.”
짧게 투덜거린 루퍼스는 쓸데없는 얘기를 했다는 자각이 들었는지 돌연 새틴을 타박했다.
“거치적거리니까 이제 저리 가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루퍼스는 구태여 새틴을 쫓아내지 않았다. 새틴이 입을 다무니 존재를 잊어버린 듯 정리에 몰두했다.
짐마차가 빌 무렵이 되자 아이들은 모두 다른 데로 갔다. 그늘진 데서 놀이라도 하는지 간혹 웃음소리만 들려왔다.
새틴은 딴생각에 빠진 척하며 인부가 일하는 모양을 훔쳐봤다. 마지막 궤짝을 가지고 부엌으로 들어간 인부는 곧 꼬질꼬질한 자루를 가지고 나왔다. 밀가루 포대를 들 때처럼 두 팔로 안지 않고 몸에서 멀찍이 떨어뜨려 들었다.
‘쓰레기구나.’
한 번에 두 개씩 들고 세 번을 옮긴 인부는 새 자루를 루퍼스에게 꺼내 주었다. 새 자루라 해도 여러 번 사용한 흔적으로 꼬질꼬질해 다른 자루와 헷갈릴 일은 없을 성싶었다.
새틴은 더 구경하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 ∞ ∞
“뭐야.”
새틴이 접시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자 케인이 인상을 쓰고 짜증을 냈다. 매번 먼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던 새틴이 제 앞에 앉으니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다.
물론 진짜로 기분이 나쁠 리 없다.
‘그런 척이지.’
새틴은 일부러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같이 먹으려고. 우리 사이가 너무 서먹한 거 같아서.”
“말 같잖은 소리를…….”
케인이 코웃음을 쳤으나 새틴은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를 당겼다. 옆자리에서 헤더가 흘끔흘끔 눈치를 봤지만 모른 체했다.
무슨 말을 해야 친해지자는 사인으로 보일까. 여기 오기 전까지 한 번도 사교적이었던 적이 없는 새틴은 잠깐 고민하다 접시를 살짝 밀었다.
케인의 오른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뭐 어쩌라는 거냐고 묻는 듯하다.
새틴은 방긋 웃으며 물었다.
“케인, 내 시금치 먹을래?”
“돌았나. 너나 먹어.”
상냥한 제안에 퉁명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 새틴은 포기하지 않고 또 물었다.
“당근은?”
“너나 먹으라고.”
“채소를 많이 먹어야 건강하지.”
“아, 너나 건강하세요.”
아이들이 다른 때보다 식사를 허겁지겁했다. 새틴은 식당 안의 써늘한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척 식탁 위로 더 바짝 몸을 붙였다.
“내가 말 거는 게 싫어?”
이제 케인은 대답하기도 싫은지 접시의 음식을 먹는 데만 집중했다.
‘연기인 걸 알아도 좀 민망하네.’
새틴은 멋쩍어서 헤더를 보며 웃었다. 헤더의 눈빛이 무어라 했다. 케인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새틴은 못 알아들은 척 또 말했다.
“난 케인하고 친해지고 싶은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좀 간지러운 대사였다. 쑥스러운 표정을 가장하고 뺨을 문지르며 케인의 반응을 살폈다.
‘저것도 연기인가?’
케인의 뺨이 약간 붉었다.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그럴 새를 주지 않고 케인이 벌떡 일어났다.
“더럽게 맛없네.”
진심인지 그냥 하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케인이 식당을 나가 버렸다. 그제야 아이들이 한숨을 쉬었다. 케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헤더가 바로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뭐가?”
새틴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알면서 왜 묻냐며 헤더가 눈살을 찌푸렸다.
“케인한테 왜 친한 척하냐고. 전엔 안 그랬잖아.”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건데, 나를 싫어하나?”
“전에 말했잖아.”
전에 헤더는 케인이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으니 새틴도 안 좋아하는 거라고 했었다. 그 말을 여태 잊고 있었다는 양 새틴은 아, 하고 열없이 웃었다.
“그래도 앞으로도 같이 지낼 텐데 계속 나쁘게 지내긴 좀 그렇잖아.”
“저쪽은 그럴 마음 없어 보이는데?”
“뭐, 지금은 그렇지.”
새틴은 케인이 거절한 시금치와 당근을 한 번에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씹다가 별생각 없이 주위를 둘러보고 실수를 깨달았다. 시금치와 당근을 맛있게 먹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살구를 준다고 할 걸 그랬나.’
∞ ∞ ∞
“살구는 어때?”
새틴이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물었다. 침대에 누워 생각 중이던 케인은 즉각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아니, 시금치도 싫고 당근도 싫다며. 살구는 어떠냐고. 살구는 맛있잖아.”
“개소리하지 말고 알아낸 거나 얘기해 봐.”
“너무하네.”
새틴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침대에 앉았다. 케인의 침대였다.
“뭐야, 네 침대에 앉아.”
“친해져야지, 우리.”
“아무도 안 보는데 무슨 친한 척을 하겠다고…….”
타박을 하는데도 뭐가 좋은지 새틴은 지그시 웃을 뿐 일어나지 않았다. 케인도 더 말하기를 관뒀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며 기운 빼고 싶지 않았다. 목소리 높이기도 싫고.
케인은 그대로 누운 채 몸만 틀어 새틴을 쳐다보았다.
“아까 낮에 털북숭이랑 무슨 얘기 했어?”
“부엌 저장고가 지하에 있는 거 알고 있었어?”
“그래?”
“너도 몰랐구나. 옛날 수로하고 연결이 돼 있어서 바람이 잘 든대. 자연 냉장고 같은 거지.”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를 하는 새틴은 조금 즐거워 보였다.
‘이상한 놈.’
새틴의 태도는 사근사근하다. 웃는 인상은 확실히 부드러운 편이다. 하지만 여전히 눈만은 뱀처럼 차갑다. 지금껏 케인으로서는 새틴을 보며 속이 시커먼 놈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근엔 그런 감상이 약간 흐려졌다. 속내를 알아보기 힘들기는 매한가지인데 전처럼 기분 나쁘지 않았다. 어딘지 서투른 느낌이 들어서일까.
‘도덕 같은 소릴 지껄이니까.’
독 없는 뱀처럼 위협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이 마치 호의를 가진 증거 같아서 케인은 좀 짜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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