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그 미친 늙은이가 사람 목숨을 귀히 여기지 않는 줄이야 진작 알았지만 대뜸 이런 말을 들으니 케인도 당황하고 말았다.
“……확실해?”
케인이 딴 아이들과 자신의 용도가 다를 거라 짐작했던 데는 여태 무사했다는 점도 근거가 되었다.
지금껏 케인은 아이들과 사이좋게 지내지 않았다. 학교에 대한 애정이나 선생님에 대한 존경도 표현하지 않았다. 케인이 사라져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터. 이곳이 싫어 달아날 만한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늙은이는 여태 케인을 그냥 두었다. 그래서 케인은 늙은이가 자신을 그저 아무렇게나 써먹을 셈으로 데려오진 않은 모양이라 짐작했는데 아니었을까.
새틴이 어색하게 웃었다. 마치 저를 안심시키려는 미소 같아서 케인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느냐고 따지려 했는데 바로 말이 안 나왔다.
그사이 새틴이 먼저 입을 떼 버렸다.
“내가 기억을 잃은 건 선생님의 연구 때문이었어. 예상했듯이.”
“그런데.”
“루퍼스나 아이들은 사고라고, 그러니까 마법 자체가 아니라 부수적인 여파로 내가 기억을 잃은 줄 알아. 머릴 부딪쳤다든지.”
그야 그럴 것이다. 늙은이가 흑마법사라고 의심하고 있지 않고서야 마법 때문에 기억이 사라진단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할 테니.
“그런데 그게 아니라 진짜 마법의 부작용이었던 거 같아.”
“늙은이가 그렇게 말했어?”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는데 부정하지도 않더라고.”
“그걸 굳이 알려 준 데는 이유가 있겠지.”
“맞아. 자기가 뭘 하는지 알면서도 따라오겠냐는 그런…….”
“시험이네.”
“응, 그거야.”
입이 마르는지 새틴이 혀로 입술을 한 번 축였다.
“아마도, 선생님은 나한테 쓴 마법을 다시 한번 실험해 보고 싶은 모양이야.”
다시 한번. 케인은 그 표현이 다소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팀에게 뜬금없이 다른 마법을 썼을 리는 없지 않나. 연구를 그렇게 중구난방으로 하진 않을 테니.
“생쥐는 그럼 뭐였는데.”
“생쥐는, 아니, 생쥐가 아니라 팀. 팀하고 나는 조건이 다르잖아.”
조건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며 새틴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죄책감이라도 느끼나?’
팀의 죽음이 아니라 팀과 자신이 다르다는 말을 하는 데에. 새틴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던 케인은 문득 깨달았다.
‘아니구나.’
애먼 데를 향했던 새틴의 시선이 슬쩍 케인을 스쳤다. 지금 새틴이 죄책감을 느끼는 대상은 바로 케인이었다.
팀과 다른 조건, 새틴과 케인의 공통점. 케인은 늙은이의 현재 목적이 무언지 알아차렸다. 저를 노린다는 말의 의미도.
“너하고 조건이 같은 대상한테 실험을 하려는 거구나. 같은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하려고. 생쥐는 실패했으니까.”
“으응.”
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과 새틴에게는 생물학적으로도 많은 공통점이 있겠지만 늙은이가 말한 조건은 아마 그 외의 부분일 테다. 마법사의 자질이 있다는 점이라든지.
팀에게 한 실험은 실패했다. 새틴은 부작용을 얻었지만 살아남았다. 공식을 개선했다면 새틴과 같은 조건의 대상에게 써 보는 편이 합리적으로 보였다. 케인이 생각하기에도.
새틴은 케인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선생님이, 너하고 가깝게 지내래.”
케인이 인상을 쓰고 쳐다보자 새틴이 눈썹 언저리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경계심을 풀어 보라더라고. 다른 아이들처럼 너도 나를 부러워하고 동경할 수 있게.”
“내가 널 싫어하는 걸 아는 모양이네.”
“응.”
“잘됐네. 그 늙은이는 우리가 손을 잡은 줄은 까맣게 모른단 뜻이니까.”
새틴은 죽상이지만 케인이 생각하기엔 괜찮은 상황이었다.
목표가 케인이라는 말은 다른 아이들이 안전하다는 뜻이다. 물론 케인은 다른 아이들보다 자신의 안위가 더 중요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이 죽어 나가도 괜찮은 건 아니다.
대뜸 케인을 끌고 오라 시키지 않고 경계를 풀어 보라고 지시했다는 점도 호조다. 마법 실험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일방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생각해 보면 팀도 그 늙은이하고 여러 차례 따로 만났지.’
마법에 혹시 친밀한 관계가 필요할 수도 있나. 정신에 관여하는 마법이라면 그럴 법도 한데 확신할 수가 없다. 케인은 마법에 관해서는 책에서 읽은 약간의 지식밖에 없어 그 이상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곰곰이 생각 중인 케인을 보며 새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아?”
“뭐가?”
“너도 팀처럼 죽을 수도 있어.”
“안 죽으려고 지금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 아냐. 네가 날 팔아먹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당장 걱정할 일은 아니잖아.”
케인이 가벼운 어조로 말했지만 새틴의 표정은 계속 어두운 채였다. 그냥 있자니 찝찝해서 케인은 퉁명스레 농담했다.
“왜. 날 팔아먹으려고?”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뭐가 그렇게 불안한데, 그럼?”
“경계를 모르잖아.”
“경계?”
새틴이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말을 고르는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혹시 위험한 상황이 되면 우리 계획을 포기해서라도 널 구해야 할 거 아냐.”
“그것참 안심되는 말이네.”
습관적으로 빈정거리는 어조가 나왔지만 내심은 달랐다. 좀 놀랐다.
늙은이를 신전에 고발하려는 이유는 여기서 무사히 살아 나가기 위해서다. 두 사람 다. 아이들까지 모두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가능성도 분명 있다.
케인은 만약의 상황이 온다면 새틴을 구할 생각이 없었다. 새틴이 죽더라도 케인은 살고 싶으니까. 두 사람은 의리며 유대감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새틴이 계획을 포기해서라도 구해 주겠다고 하니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진 적 없는 빚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기분이라고 할까.
새틴은 케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면서 걱정했다.
“속는 척하다 정말로 위험해질 수도 있어. 위험해질 만한 일은 최대한 피할 거지만, 그래도.”
경계라는 말은 늙은이의 수족이어야 하는 때와 케인의 동료여야 하는 때를 가르는 기준을 뜻하는 듯했다.
“네가 죽기라도 하면 나는.”
새틴이 문장을 제대로 끝마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 표정.’
케인은 새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정말로 이상한 표정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입술은 걱정을 말하는데 표정은 잘 모르겠다. 도통 속내가 짐작 가지 않는다.
잠시 침묵하던 케인은 가벼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개의치 마. 너하고 나 사이에 뭐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
“말했다시피 어른이라면 아이를.”
케인이 손을 들었다. 새틴이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누구한테 자꾸 아이라는 거야. 너나 나나 뭐 얼마나 차이 난다고.”
할 말이 없는지 새틴은 대꾸하지 않았다.
“일단은 그 늙은이 속셈에 맞춰 줘. 누가 됐든 연구실에 들어가야 하잖아.”
“그러다 정말.”
“위험하다 싶으면 알아서 빠져나올 테니까.”
4
루퍼스가 말한 날이 왔다.
말 두 마리가 끄는 짐마차가 학교 앞에 서자 아이들이 우르르 구경하러 나갔다. 새틴도 슬그머니 따라 나갔으나 마차 가까이는 가지 않고 현관 앞에 서서 일단 분위기를 살폈다.
가장 먼저 뛰어나간 로빈이 이내 희희낙락하며 돌아왔다. 볼록한 뺨을 보니 마부에게 뭐라도 얻어먹은 모양이다.
“뭐 먹어?”
“사탕. 별로 맛은 없어.”
입을 가리며 그리 말해 봤자 믿음은 가지 않았다. 먹던 사탕을 빼앗아 먹을 마음이야 당연히 없었기에 새틴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렇게 물건이 많이 와?”
예상보다 물건이 더 많은데 일하는 사람은 루퍼스와 마부를 빼면 인부 한 명이 전부다. 도착하자마자 인부는 척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자루며 상자를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새틴과 달리 처음 보는 풍경이 아니어서인지 로빈은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입이 많잖아.”
“저 사람들은 클로버랜드에서 온 거지?”
“응.”
“클로버랜드는 여기서 멀어?”
“그야…….”
대답을 하려던 로빈이 말을 멈추고 새틴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꿍꿍이가 있는 질문처럼 들렸을까.
새틴은 멋쩍게 웃으며 변명했다.
“궁금해서 그래. 나는 학교 밖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새틴이 기억 상실이란 사실이 생각났는지 로빈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밖에 나가 보고 싶어?”
“잘 모르겠어. 좀 무섭기도 하고…….”
진심은 아니지만 완전히 거짓도 아니다. 이곳에 온 후 내내 학교에서만 지낸 새틴은 바깥의 도시가 궁금하면서 궁금하지 않았다.
새틴과 케인의 계획이 성공하면 선생님은 아마 죽을 것이다. 소설에서도 그랬다.
만약 미래가 달라져 죽지 않더라도 지금처럼은 지낼 수 없겠지. 아이들을 데려다 선생님 흉내를 내며 악행을 저지른 흑마법사를 신전이 가만둘 리 없으니.
그때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갈 곳도 없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 새틴은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어떻게 소설 속에 들어가고 싶다고 선뜻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니까.’
새틴은 이제 와 약간 후회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괜히 쑥스럽기도 했다.
“복잡한 기분이야.”
새틴이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이니 로빈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은 몰라도 기분은 이해한 모양이다.
로빈이 사탕을 왼뺨에서 오른뺨으로 옮기며 말했다.
“아주 멀지는 않아.”
“걸어갈 수도 있어?”
“아니, 그 정도로 가깝진 않고……. 마차로 반나절쯤 걸리니까.”
마차는 자동차보다 느리지만 사람에 비할 바는 아니다.
“급하게 볼일이 생기면 어떡해? 나가야 할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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