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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6화 (16/139)

16화

대화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루퍼스는 새틴의 고민 상담과 작업을 병행했다. 솥을 모두 닦은 다음엔 씻은 그릇의 물기를 닦고, 저녁에 쓸 채소를 미리 손질했다.

“그건 어쩌려고 모으는 거예요?”

손질하고 남은 채소 자투리들을 보고 새틴이 묻자 루퍼스는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모아서 태우려고.”

“쓰레기는 다 태워요?

“다는 아니고. 안 썩는 것들은 모아 놓으면 식재료 가져다주는 놈들이 받아 가.”

“쓰레기를요? 왜요?”

“써먹을 데가 있으니까.”

루퍼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난 농담인 줄 알았다니까. 돈을 줄 테니 쓰레기를 달래서.”

폐지나 고철이 돈이 된단 얘기를 전에 들은 적이 있다. 이 세계의 재활용 방식은 어떤지 모르나 여기도 넝마주이는 있겠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새틴은 까맣게 모르는 척 물었다.

“신기하네요. 쓰레기로 어떻게 돈을 버는 걸까요?”

“쓰레기 중에서 쓸 만한 건 골라내서 팔고, 나머지는 다시 쓸 수 있게 가공하는 거지.”

“생각도 못 했네요. 쓰레기를 팔아서 돈을 벌 수 있다니.”

“다들 돈 되는 일은 잘도 찾아낸다니까. 그에 비하면 영감탱이는 정말 희한하지. 이딴 돈도 안 되는 일을…….”

루퍼스는 몇 마디인가 더 하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눈을 부라렸다.

“너 계속 여기 있을 거냐?”

“아, 이제 가 보려고요.”

새틴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을 나왔다.

알게 된 정보를 케인에게도 알려 주고 싶어 새틴은 서고로 향했다. 부엌에서 서고는 아주 금방이었다.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 새틴을 불렀다.

“새틴.”

이 학교 안에서 어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새틴은 재빨리 돌아보았다.

“네, 선생님.”

“서고에 가느냐?”

“아, 네. 아무래도 공부를 해야 할 거 같아서요. 상식 부분에서…….”

실없이 웃으며 새틴은 선생님의 눈치를 보았다. 설마하니 선생님이 부엌에 간식이나 얻어먹겠다고 오진 않았을 텐데.

“시키실 일이 있으세요?”

“케인은 서고에 있느냐?”

“……글쎄요. 확인해 볼까요?”

구태여 케인의 위치를 제게 묻는 이유가 뭘까. 케인을 견제해야 하는 입장이니 일부러 자극하려고?

새틴이 눈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리자 선생님이 살짝 웃었다.

“따라오너라.”

대답을 듣지 않고 선생님이 몸을 돌렸다. 새틴은 케인에게 새로 알게 된 정보를 알려 주려던 계획을 저녁으로 미뤘다.

복도를 빠져나와 계단을 오르며 새틴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니 불안해할 필요 없다.”

“네…….”

주변에 아무도 없지만 여기서는 얘기할 수 없단 뜻인가. 새틴은 입을 다물고 선생님의 뒤를 쫓았다.

혹시 연구실로 들어갈까 했더니 선생님은 서재로 들어갔다. 아쉬웠지만 선생님의 서재도 처음이다. 새틴은 낯선 곳에 들어와 어리숙하게 구는 사람처럼 보이기를 바라며 슬쩍 주위를 살폈다.

의외로 책은 별로 많지 않았다. 하기야 마법사가 되기 어려운 세계다. 마법사의 서고에 둘 책이 넘쳐날 리 없다.

“두 번째 칸에 있는 책을 가지고 오너라. 붉은색.”

새틴은 옆의 책꽂이를 확인했다. 아래쪽에서 두 번째 칸은 비어 있으니 위에서 두 번째 칸이겠지. 붉은 표지의 책을 찾아 뽑았다.

그사이 선생님은 창가의 책상에 앉았다. 사무실과 달리 책상이 창문의 수직 방향으로 놓여 있었다.

새틴은 잠깐 머뭇거리다 선생님의 맞은편에 앉았다. 흑백 사진 같은 노인의 얼굴은 한쪽 면만 빛을 받으니 빛바랜 영정 사진처럼 보였다.

“세 번째 장을 펼치고, 천천히 넘겨 보거라.”

목차를 확인하고 세 번째 장을 펼쳤다. 한 장씩 넘기다 보니 밑줄이 그어진 부분이 나왔다.

“표시된 부분이 있지?”

“네.”

<같은 공식은 언제나 같은 결괏값을 내놓는다. 그러나 환경의 영향을 받기에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네가 보기엔 무슨 말 같으냐.”

같은 공식, 같은 결과, 다른 조건.

마법은 신비롭다. 뜨겁게 태우고, 강하게 불어 낸다. 격렬하게 씻어 내리며, 크게 흔든다.

그런데 조금 생각하면 다르게 보인다. 주체가 사람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마법의 결과물은 기술과 같다. 새틴은 마법이 없지만 마법보다 편리한 기술이 얼마든지 존재하는 세계에서 왔다.

기술은 필요한 곳에서 빛을 발하는 법.

‘한겨울의 가습기는 실내를 쾌적하게 만들지만 장마철에 틀면 불쾌지수가 올라갈 뿐이지.’

마법도 같지 않을까. 환경에 따라 유용할 수도 불용할 수도 있다. 혹은 덜 유용할 수도 있고.

“맑은 날 불길을 일으키면 잘 타지만, 비 오는 날 불길을 일으키면 꺼질 수도 있단 뜻이 아닌가요?”

“그렇지. 비 오는 날 불이 번지지 않는다고 공식을 의심해선 안 되지.”

너무 당연한 얘기를 굳이 줄까지 쳐 둔 이유가 뭘까.

눈치를 보다 새틴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중요한 내용인가요? 그냥 당연하게 느껴지는데…….”

“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단다.”

“그럼 왜 굳이.”

“불길이 아니라고 생각해 보자. 그래, 애초에 마법이 아니라고 생각해 보자꾸나.”

선생님이 웃으며 책상 위로 양팔을 괴었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바짝 붙였다.

선생님이 물었다.

“네 기억 상실의 원인이 무어라고 생각하느냐?”

“……사고가 아닌지.”

“사고도 여러 가지가 있지. 그중 무엇이라 생각하느냔 말이다.”

무어라 대답하는 편이 자연스러울까.

루퍼스는 기억 상실에 관해 듣자마자 마법 연구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니냐고 말했다. 그 말은 마법에 직접적으로 당했냐는 의미가 아니었다. 연구를 하던 중 일어난 부수적인 사고였냐는 뜻이다. 이를테면 머리를 부딪쳤다든지.

마법사들의 규칙 두 번째, 마법사는 사람에게 마법을 실험해서는 안 된다. 선생님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당연히 루퍼스처럼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하나 새틴은 루퍼스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선생님은 선량하고 순진한 제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도덕을 알면서도 부도덕을 행할 수 있는, 혹은 부도덕과 도덕을 구태여 구분하지 않는 그런 제자를 원한다.

“선생님의 마법 연구 중에 일어난 사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실험 중에요.”

새틴은 슬쩍 선생님의 눈치를 보는 시늉을 했다.

“제가 도와드리려다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닌지……. 제가 혹시 실수를 했나요? 고칠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선생님이 도덕적이지 못한 행위를 했음을 안다. 그러나 그걸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시 전처럼 그 행위에 동참하고 싶다. 대강 이런 의미다.

선생님이 웃었다. 맞는 답을 말했는지 저 표정만 봐서는 알 수 없다. 새틴은 초조한 기색을 모두 감추지 못하고 선생님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선생님이 입을 뗐다.

“지금 내가 너에게 어려운 명령을 한다면 따르겠느냐.”

“어려운 명령이라면…….”

혹시 어떤 명령인지 예시를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새틴이 운을 띄웠지만 선생님은 그에 반응하지 않았다.

“내 연구를 돕다가 기억 상실이 되었는데 또 나를 믿고 따를지 궁금하구나.”

조금 전의 이야기들이 괜히 나왔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선생님의 말뜻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선생님은 전에도 했던 명령을 할 것이다. 본래 새틴이 잠자코 따르던 명령이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기억을 잃은 새틴은 선생님의 명령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 명령에 가치 판단이 필요하다면.

‘시험이구나.’

지그시 바라보는 선생님을 새틴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기서 할 대답이야 어차피 정해져 있다.

“뭐든 말씀만 하세요.”

∞ ∞ ∞

늙은이를 만나고 온 새틴이 말했다.

“아마 예전의 나는 선생님한테 아이들을 데려간 적이 있을 거야.”

“죽을 걸 알면서 말이지.”

“그건 확실치 않아. 하지만 위험한 건 분명 알고 있었겠지.”

케인은 전부터 새틴이 왜 그리 아이들에게 상냥한 체하는지 궁금했다. 아니, 이유야 뻔했다. 미친 늙은이에게 잘 보이려는 수작이었을 터다.

다만 보모 능력이 어째서 가산점이 되는지 이해가 안 됐다. 마법 연구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런데 지금 새틴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알겠다.

“그 늙은이가 너를 방패로 쓴 거네.”

아이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방법은 없다. 절대 말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차례 경고해도 아이들은 꼭 어딘가에 말해 버리고 만다. 통제가 가능했다면 아이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늙은이가 직접 아이들을 꾀어 데려가면 누군가는 의심했을지 모른다. 어느 아이가 의심을 품었는지 말하지 않으면 알 방도도 없겠지.

그러나 새틴을 통해 데리고 가면 누군가 의심하더라도 1차적으로는 새틴에게 의심이 향한다. 아이들은 새틴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자신들과 입장이 다르다고 생각하니까.

이곳에서는 모두 여유로운 생활을 하며 사이좋은 친구들 흉내를 내지만 케인은 아이들의 본성을 안다. 그 자신도 분명 그들과 닮은 곳이 있기에 모를 수 없다.

불길한 예감이 들 때 아이들은 선생님보다 새틴을 의심할 거다. 늙은이의 신임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새틴이 무슨 짓을 했다든지.

‘나라도 그럴걸.’

그편이 편하지 않은가. 선생님을 의심하면 나은 삶을 살 기회가 사라지지만 새틴을 의심하면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무의식중에는 새틴이 사라져서 그 자리를 대신하고 싶다는 욕망도 있으리라 확신한다.

차라리 새틴이 늙은이의 자식이라거나 오래된 제자였다면 그런 마음을 품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새틴은 그저 몇 살 나이가 많을 뿐 딴 아이들과 출발점이 다르지 않다. 충분히 질시의 대상이 될 만했다.

“선생님은 이번에도 내가 같은 충성을 보여 주길 바라는 것 같아.”

새틴은 바닥을 보며 말했다. 각자의 침대에 앉아 마주 보고 있던 터라 새틴의 시선은 자연히 케인의 발치로 향했다. 케인은 저도 모르게 발을 뒤로 뺐다. 슬리퍼를 신은 발은 그리 곱지 않았다.

‘아니, 여기 발이 고운 사람이 누가 있겠어.’

딱히 부끄러울 일도 아니다. 케인이 다시 자세를 원래대로 고치는 사이 새틴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당장 아이들을 해칠 계획은 없어 보였어.”

“그렇겠지. 애가 연달아 사라지면 누가 봐도 이상하니까.”

“근데 뭔가 생각하는 건 있어.”

“뭐.”

새틴이 케인을 물끄러미 보았다.

“왜 그렇게 봐.”

“너.”

“내가 뭐.”

“선생님이 널 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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