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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5화 (15/139)

15화

대화가 잠시 끊겼다. 케인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새틴은 천장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새틴은 남자끼리 몸을 보는 일이야 별일 아니라 생각하지만 케인이 싫어했다. 그간 별생각 없이 봤다가 몇 번 싫은 소리를 들었다.

케인이 잠옷을 입고 침대로 돌아왔다. 여태 두 사람은 각자의 침대에 앉아 이야기 중이었다. 방이 넓지 않다 보니 그렇게 있어도 대화가 어렵지 않았다.

“케인, 내가 아까 저녁을 먹으면서 생각했는데.”

“뭐.”

“루퍼스를 이용하면 어떨까? 루퍼스가 밖에 나갈 때를 노리는 거지.”

이 학교는 숲속에 있다. 마법으로 식재료며 생필품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고서야 주기적으로 마을이나 도시와 왕래해야 했다.

그런데 새틴이 여기에 온 후 한 번도 외부인이 온 적이 없다. 왕래하는 주기가 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한 번에 옮기는 물자의 양도 상당하겠지.

그 많은 양을 구입하는데 설마 아이들을 보낼 리는 없다. 선생님이나 루퍼스 중 한 사람이 직접 다녀올 거라고 새틴은 추측했다. 아이들만 남겨 둔 채 두 사람이 함께 나갈 가능성은 작다.

케인은 새틴이 긴 설명을 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털북숭이는 밖에 안 나가. 나가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새틴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외부와 교류가 전혀 없다면 이 학교는 어떻게 굴러가는 거지?

“그럼 식재료는 어디서 구하는 거야? 텃밭도 없잖아.”

“계약한 상인들이 주기적으로 가져와.”

“아, 사람이 오는구나. 그럼 그 사람들한테 부탁을 하면 어때?”

“글쎄, 그 사람들은 돈 받고 일하러 왔을 뿐이라 고아 새끼들한테는 별 관심 없을걸.”

케인은 선생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아이들에게도 시큰둥하고.

‘얘는 살면서 사람을 좋아한 적이 있긴 할까?’

새틴도 특별히 인류애가 넘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누나만은 좋아했다. 아마 누나만큼 좋은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하겠지.

어쨌든 새틴은 좋아하는 마음이 무언지 안다. 새틴이 아이들 앞에서 친절한 시늉을 할 수 있게 된 건 모두 누나의 덕이다.

케인에게는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까. 악당과 마왕과 마신의 손에서 세계를 구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어째 이런 일이.

‘아직 계기가 없어서 그런가?’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금세 퉁명스러운 물음이 돌아왔다.

“왜. 내 말이 틀린 거 같아?”

새틴은 품었던 호기심을 밀어내고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아냐, 생각 중이었어. 그 사람들이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게 이용할 방법.”

∞ ∞ ∞

새틴과 케인이 조용히 모의하는 동안 라기이스는 연구실에서 지난 실험의 기록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아주 오랜만에.

라기이스는 클로버랜드에서 아주 먼 도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거처를 옮기며 생활했기에 고향에 관해서는 별 향수가 없었다. 라기이스의 기억에 가장 뚜렷하게 남은 도시는 그의 스승이 죽은 곳이다.

스승은 당연히 마법사였는데 꽤 젊은 나이에 죽었다. 라기이스가 아직 이십 대이던 시절이니 벌써 사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때 스승의 나이는 아마 쉰 몇쯤 되었으리라. 대부분의 마법사가 잘 먹고 잘살며 천수를 누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특이한 일이다.

라기이스의 스승을 죽인 이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여럿이 몰려왔기에 실제로 목숨을 앗은 사람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라기이스는 그저 신전이 스승을 죽였다고만 기억하고 있다.

‘참 이상한 일이야.’

할 수 있어서 행하였고, 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시도했다. 그런데 어째서 죄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덕이니 규칙이니, 무엇이 그리 중요하다고.’

아무튼 라기이스는 천운으로 살았다. 신전 기사단이 스승의 연구실을 덮쳤을 때 라기이스는 마침 스승의 지시를 받아 다른 곳에서 볼일을 보는 중이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스승이 포박되어 있었다.

라기이스는 제자랍시고 나서는 대신 몸을 피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흑마법사가 처형됐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 후로 스승의 연구는 라기이스가 물려받았다. 스승의 연구 기록을 모두 가지고 올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고지식한 신전 놈들이 연구실에 불을 질렀다. 흑마법사의 말로란 이런 것이라고 대중에게 보여 주고 싶기라도 했는지.

‘꽉 막힌 인간들.’

밤중에 잔해를 뒤져 겨우 몇 개의 기록을 건졌다. 다행히 바닥의 비밀 공간이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때부터 라기이스는 여러 도시를 떠돌아다니며 연구를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지금에 이르렀다. 스승과 같은 죽음을 맞지 않으려고 라기이스는 여러 보호 장치를 마련했다.

대외적으로 스스로를 자선가라 포장했고, 언제든 이곳을 빠져나갈 비밀 통로를 마련해 두었다. 마침 저택에 오래된 수로가 있어 비밀 통로를 만들기도 어렵지 않았다.

덕분에 안심하고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공식을 찾다 보면 엉뚱한 결과가 나오는 일은 종종 있다. 그 엉뚱한 결과가 쓸 만하면 새로운 마법의 발견이 되고, 써먹지 못할 것이어도 자료가 남는다. 어느 쪽이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느니보단 나았다.

라기이스가 새틴에게 쓴 마법은 기억과는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아주 복잡하다. 기억 상실은 정신을 건드리다 보면 일어날 법한 부작용이었다.

반면 마력을 보게 된 것은 확실히 엉뚱한 결과다. 라기이스가 발견하고자 한 마법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웠다.

‘손보면 다시 쓸 수 있을 거야.’

쓸 만한 마법이었다. 아니, 쓸 만한 정도가 아니라 안전하다는 확신만 있다면 라기이스 스스로에게 쓰고 싶을 만큼 대단한 마법이다.

‘마력을 본다니. 얼마나 매력적이야.’

마력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이겠지. 신성 마법까지 감지할 수 있다면 신전 놈들의 습격을 걱정할 필요도 없을 테니 그야말로 축복이다. 연구자를 위한 축복.

‘문제는 성공 확률이지.’

새틴에게는 성공했고, 팀에게는 실패했다. 같은 공식을 사용했는데 팀은 새틴과 같은 결괏값을 내놓지 않았다. 기억이 아니라 이지를 잃었다. 마력을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마법으로 일으킨 시신처럼 행동했다.

왜 그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새틴과 팀이 같은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에 그랬다고 추측할 수 있다. 둘은 일단 나이가 다르고, 체격이 다르고, 또.

‘자질이 다르지.’

새틴은 마법사의 자질이 있고 팀에게는 없다. 그럼 자질이 있는 또 다른 아이에게 실험한다면 같은 결과가 나올까.

‘별. 파도. 푸른색. ○○, 열여덟. 하나. 사막. 꿈. ×××. 희미함. 어제. 기도. ○.’

라기이스는 새틴에게 사용했던 공식을 반복해 읊으며 생각에 잠겼다.

∞ ∞ ∞

커다란 솥을 벅벅 닦는 루퍼스의 팔뚝에서 힘줄이 불룩거렸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건 타고나나.’

ㅇㅇ의 체격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새틴 역시 그리 다르지 않았다. 키는 제법 크지만 팔이며 다리는 쭉정이처럼 길쭉하기만 했다.

‘아직 성장기니 두고 봐야겠지.’

딱히 루퍼스처럼 울룩불룩한 근육이 갖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어디서 약해 보이지 않을 만큼만 자라고 싶다. 위협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위협받지도 않을 만한 정도. 그 정도가 딱 좋다.

“할 말 있냐?”

솥을 내려놓으며 루퍼스가 이쪽을 보았다. 대뜸 찾아와 죽치고 앉아 있으니 신경이 쓰인 모양이다. 여태 아무 말이 없어 개의치 않는 줄 알았더니.

새틴은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 물었다.

“루퍼스는 선생님하고 어떻게 알게 됐어요?”

“영감탱이? 알고 자시고 할 게 있나. 난 그냥 고용됐을 뿐인데.”

“그럼 선생님이 학교를 세우기 전까진 모르는 사이였던 거예요?”

“그렇지.”

“그땐 뭘 했어요?”

“나?”

“여기 또 누가 있어요?”

새틴이 열없이 웃자 루퍼스도 픽 웃었다. 솥을 닦느라 어깨가 뻐근한지 오른쪽 어깨를 빙빙 돌리며 대답했다.

“그린필드라고, 클로버랜드에서 서쪽으로 가면 작은 도시가 하나 있어. 사실 도시라고 하긴 좀 그런데.”

“거기서 왔어요?”

“일자리가 없었거든. 클로버랜드에서 일자리를 찾다가 영감탱이에게 고용됐지.”

“그렇군요.”

새틴이 고개를 주억이자 이번엔 루퍼스가 물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냐?”

“그냥요.”

짧게 대꾸하니 루퍼스가 미심쩍은 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새틴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루퍼스라면 선생님에 관해 혹시 알까 해서요.”

아무 의도 없던 척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의도가 있기도 하고. 다만 어떤 의도인지 착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제가 다른 아이들보다 모르는 게 많잖아요. 지금은 말이에요.”

“그런데?”

“불리한 느낌이 들어요. 뭔가, 더 나은 상황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어린애들하고 무슨 경쟁을 하겠다고.”

루퍼스가 가볍게 웃으며 다른 솥을 집었다. 썩썩 솥 닦는 소리를 들으며 새틴은 잠자코 기다렸다. 곧 소리가 멈췄다.

“초조하냐?”

“모르겠어요. 원래 저는 어떤 사람이었죠? 이렇게 걱정이 많았어요?”

“보통이었던 거 같은데.”

건성으로 대꾸한 루퍼스가 다시 솥을 닦기 시작했지만 새틴은 그가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알았다. 간혹 손을 멈출 때마다 새틴을 쳐다보았다.

“좀 영악한 편이긴 했어.”

“제가요?”

“나빴단 소린 아니야. 애새끼들도 잘 보고, 영감탱이 비위도 잘 맞췄단 뜻이지.”

“지금은 반푼이네요.”

“나아지겠지. 영감탱이도 그 정도는 이해할걸. 그래도 둘이서 죽이 잘 맞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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