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공사가 끝난 후 라기이스는 클로버랜드에 종종 방문해 거리를 다니며 오갈 데 없는 고아 아이들을 데려갔다. 사람들은 라기이스를 마법사가 아니라 자선가나 선생님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라기이스의 입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라기이스의 학교에 온 아이들은 가장 먼저 글자 읽기와 셈하기를 배웠다. 그다음엔 역사를 배운다. 라기이스는 모든 분야에 박식하진 않기에 아이들에게 많은 책을 사 주었다. 서고를 증축해야 했을 정도로 많이.
학교의 아이들 입장에서 라기이스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저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준다고 해도 감사했을 텐데 지낼 곳을 제공하고 공부까지 하게 해 주다니.
아이들은 대부분 라기이스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대부분.
∞ ∞ ∞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이 뛰어나가자 선생님이 다가왔다.
“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구나.”
그리 말하며 선생님은 다행이라는 듯 새틴의 어깨를 토닥였다. 새틴은 의례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사흘간 새틴은 원래 듣지 않았다는 오전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이 칠판에 적은 문구를 따라 읽고(예를 들면 ‘곰이 나무를 탑니다’라든지.), 옆자리 아이가 손가락을 접으며 계산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이런 수업을 더 들어야 할까, 고뇌하던 차에 선생님이 먼저 알아채 주어서 다행이었다.
“내일부터는 오전 수업에 들어오지 않아도 된단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하렴.”
“케인은 이 시간에 뭘 하는지 아세요?”
“케인?”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난 사흘간 케인은 한 번도 오전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후 수업 때는 들어오던 걸 보면 단순히 땡땡이를 쳐서는 아닐 테다.
“아마 서고에 있지 않을까 싶구나. 그러고 보니 너와 케인이 방을 함께 썼지. 좀 친해졌느냐?”
“전혀요.”
첫날 이후로 새틴은 케인과 말을 전혀 섞지 못했다. 일부러 친해지지 않으려고 새틴이 주의해서만은 아니었다. 케인이 덮어놓고 새틴을 싫어했다. 새틴이 기억 상실이라는 건 알까. 다른 아이들하고도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던데.
“원래 그 애는 낯가림이 심한가요?”
“그런 편이긴 했지.”
다크에이지에서 본 내용대로라면 케인은 악랄한 흑마법사를 알아보지 못하고 소매치기를 하려다 붙잡힌다.
‘열여섯 살쯤 되면 한창 비뚤어질 나이지.’
선생님이 정말 좋은 의도로 데려왔다 해도 케인으로서는 경계할 만했다. 하지만 여태 숙식을 제공하고 공부를 가르쳐 줬으니 슬슬 경계를 풀 때도 되지 않았나.
새틴과 달리 선생님은 케인의 태도에 별로 신경을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런데 말이다.”
“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잠깐 뜸을 들인 선생님이 돌연 손을 들었다. 선생님이 입술을 달싹이자 손끝이 희미하게 빛났다. 느리게 상승하는 빛을 새틴이 빤히 보고 있으니 선생님이 중얼거렸다.
“여전히 보이는구나.”
“아, 네. 안 좋은 건가요?”
“글쎄다. 지금껏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지만 새틴은 나쁠 게 뭐 있냐고 내심 생각했다.
아마도 원래의 새틴은 선생님의 제자였을 거다. 아니면 조수였거나. 둘 중 어느 쪽이었든 마력을 보는 능력이 도움이 되면 되었지 방해가 되진 않으리라고 장담했다.
“무얼 걱정하시는지 여쭤도 될까요.”
“걱정은 아니란다. 다만 나는…….”
잠시 턱을 문지르며 생각한 선생님이 인자하게 웃었다.
“그런 능력을 부여하는 마법이 있는지 궁금할 뿐이란다.”
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학구열이었나 보다.
이미 수업이 끝난 교실에 오래 뭉개고 있을 이유도 없어 새틴은 교실을 나왔다. 계단 쪽으로 가는 선생님과 헤어져 서고로 향했다. 부엌과 식당을 지나는데 마침 서고에서 나오던 로저스가 알은체를 했다.
“책 보러 왔어?”
로저스도 케인과 마찬가지로 오전 수업을 듣지 않는 아이다. 서고에 자주 있는 것을 보면 글자를 읽는 데는 능숙할 터. 굳이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으리라.
새틴은 물음에 답하는 대신 물었다.
“안에 누구 있어?”
“아까 케인을 봤어. 지금도 있는지는 몰라.”
서고는 넓은 편은 아니나 책꽂이가 높다 보니 사람이 있어도 서로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알겠다 대답하고 서고로 들어가려는데 로저스가 새틴의 팔을 붙잡았다. 왜 그러나 싶어 내려다보니 로저스가 눈을 굴리다 물었다.
“요즘은 선생님의 연구를 안 도와드려?”
“아, 뭐, 그렇지.”
기억도 없는 조수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부를까. 새틴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저스가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다른 데를 봤다.
“왜?”
“전부터 부러워하는 애들이 좀 있었잖아.”
“뭐를?”
“……기억이 없으니까 하나하나 다 설명해야 되네.”
로저스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주위를 둘러보고 소곤거렸다.
“다들 선생님께 감사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널 부러워하잖아.”
“왜 부러워하는데?”
“선생님의 연구실에 들어가니까.”
“아.”
대부분 판타지 소설에서 마법사는 높은 신분이다. 아무나 되지 못하고 타고난 자질이 필요했다. 아마 이곳에서도 그런 모양이라고 새틴은 짐작했다. 다크에이지에도 마법사가 여럿 등장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우리를 모두 제자라고 하시지만, 진짜 제자란 뜻이 아닌 건 다 알아.”
“마법사의 제자라는 의미가 아니란 말이지?”
“응. 난 여기 온 지 벌써 일 년이 넘었지만 선생님 연구실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어.”
약간 상심이 느껴지는 로저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새틴은 궁금해졌다.
“나는 언제 여기 왔는데?”
“잘은 몰라. 그래도 이 년은 안 됐을 거야. 선생님이 클로버랜드에 온 지 이제 이 년이 됐으니.”
“클로버랜드?”
다크에이지가 시작할 때 주인공이 있는 곳이 클로버랜드다. 당연히 새틴도 알고 있었는데 몰라서 물어보는 줄 알았는지 로저스가 설명했다.
“아, 여기서 제일 가까운 도시가 클로버랜드야.”
“그렇구나.”
“여기 있는 아이들은 다 클로버랜드 출신이야.”
“나도?”
“응.”
새틴은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히 모르는 체했다. 로저스가 이어 말했다.
“아이들은 어쩌면 자기가 선생님의 새 제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럼 어떻게 될까. 만약 새틴이 아니라 로저스나 다른 아이가 선생님의 제자가 된다면 나중에 케인과 동료들이 물리치는 상대도 그 아이로 바뀔까.
흥미롭지만 실험을 해 볼 수는 없었다. 나비 효과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새틴은 누나의 명작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꼴을 두고 볼 마음이 없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새틴의 물음에 로저스가 살짝 놀랐다가 웃었다.
“아니, 나한테 자질이 있었다면 선생님께서 진작 말씀해 주셨을 거야. 없으니 아무 말씀 없으신 거겠지.”
“확실하진 않은 거잖아. 내가 없어지면 그땐 말씀을 해 주실지도 모르지.”
“없어진다는 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없어진다면 말이야. 죽거나, 내 말은, 날 죽인다든지.”
“아, 아니, 그렇게까지 원하진 않아…….”
로저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서먹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곧 로저스가 먼저 가 보겠다며 몸을 돌렸다. 새틴은 손을 흔들고 서고로 들어섰다.
‘내 말이 이상했나?’
조금 전 로저스의 표정이 신경 쓰였으나 이내 다른 일이 주의를 끌었다.
공교롭게도 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케인이 서 있었다. 책꽂이에서 책을 고르는 중으로 보였다.
새틴은 무어라 말을 붙여 볼까 하다가 말았다. 떨어진 위치의 책꽂이를 목표 삼아 걸음을 떼는데 뒤에서 케인이 불쑥 물었다.
“기억이 없다는 게 사실이야?”
아무래도 문밖에서 로저스와 나눈 대화를 들은 모양이다.
케인에게만 감춰야 할 이유도 없어 새틴은 천천히 돌아보며 웃었다. 쑥스러운 기색을 담아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 혹시 내가 실수한 게 있다면 용서해 줘.”
무심코 말해 놓고서야 새틴은 후회했다. 좀 더 까칠하게 대응하는 편이 좋았을까. 하지만 케인도 미성년자인데 친절하게 대해야 하지 않을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케인은 새틴의 상냥한 말을 전혀 상냥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제정신이 아니군.”
난데없는 폭언에 당황해 새틴이 눈을 껌벅이고 있으니 케인이 다시 한번 폭언했다.
“얼빠진 얼굴을 보니 완전히 맛이 갔네.”
“왜 그런 식으로 말해?”
“그럼? 걱정이라도 해 줄 줄 알았어?”
“그건 아닌데.”
새틴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케인이 원래 새틴을 싫어했다면 기억 잃은 새틴이라고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야 원래 새틴을 싫어하지 않았으니 지금의 새틴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것이고.
“미친 늙은이가 정말로 너를 제자로 삼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빈정거리는 어조에도 새틴은 별로 불쾌하지 않았다. 그저 궁금했다.
“넌 왜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유 없이 아무에게나 친절한 사람은 세상에 없어.”
“그렇지 않아. 어떤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도 친절해.”
“기억도 없으면서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하네.”
그리 받아치니 할 말이 없어서 새틴은 뺨을 긁적였다.
지금 여기서 케인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누나는 분명히 존재했다. 누구보다 좋은 사람으로 살다가 죽었다.
누나는 기계적이지 않았다. 마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좋은 사람이었다. 좋고 싫음과 옳고 그름을 구분할 줄 알았다.
어떤 사람은 이유 없이 악하다. 그렇듯 어떤 사람은 이유 없이 선하다. 누구라도 부당한 일을 맞닥뜨릴 수 있고, 생각지 못한 친절을 받을 수 있다.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만 말이야. 언젠가…….”
“언젠가?”
“네가 깜깜한 어둠 속에 있을 때, 그때 누군가 널 발견하고 구해 줄지도 몰라. 아무 이유도 없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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