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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4화 (4/139)

4화

“새로 온 아이들한테는 항상 새틴이 학교 안내를 해 줬는데.”

팀은 안타까워했지만 새틴은 그냥 말없이 웃었다.

팀의 설명에 따르면 2층 서쪽 복도의 방들은 모두 노인, 그러니까 선생님이 쓴다고 했다.

아까 그 방은 선생님이 사무를 보거나 아이들과 상담을 할 때 쓰고, 맞은편 방은 침실로, 계단 쪽 방 두 개는 각각 연구실과 서재로 쓴다고.

“선생님은 마법사거든. 마법사들은 원래 연구실이 필요하대. 새로운 마법을 발견하는 게 마법사들의 꿈이니까.”

“발명이 아니라 발견?”

“마법은 발명할 수 없어.”

“너도 마법사야?”

“아니, 그건 아닌데 그래도 그 정도는 알지.”

팀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제게 마법사의 자질이 있었으면 선생님의 수제자가 되었을지 모른다며 농담했다. 진심이 다분히 섞인 농담이었다.

판타지 소설마다 마법에 관한 설정은 조금씩 다른데 여기서는 그런 설정인 모양이다.

모든 마법의 공식은 이미 정해져 있고, 마법사는 그 공식을 찾아내는 것이 일생일대의 꿈. 그리고 마법사가 되려면 타고난 자질이 필요한데 마력을 보는 능력은 그 자질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럼 나는 뭐지.’

선생님이 놀라던 모습을 생각하면 원래는 없던 능력일 텐데. 감추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자니 아귀가 맞지 않는다.

원래의 새틴은 이 학교에 온 지 가장 오래됐고, 새로 오는 아이들을 안내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선생님과 가까운 관계였을 가능성이 크다.

‘친밀한 사이는 아니라도 반장처럼 일을 맡기는 존재였다든지.’

미성년자 집단을 이끌기에는 어른스러운 미성년자가 적임이다. 동질감이 있으면서도 믿음직스러우니까.

‘그럼 능력은 어쩌다 생겨났을까?’

천사는 그런 능력을 주겠다는 얘길 한 적이 없는데. 원래 이맘때 생겨나는 설정이었을까.

“이쪽은 우리 숙소야.”

짧은 상념이 팀의 목소리로 인해 깨졌다. 팀은 동쪽 복도로 들어서며 우쭐우쭐 소개했다.

“방은 여섯 개고, 한 방에서 두 명씩 지내.”

그렇다면 총 열두 명이 있다는 말이다. 학교라고 하기엔 확실히 너무 작은 규모다.

“다른 선생님은 안 계셔?”

“선생님은 한 분뿐이야.”

“다른 어른도 없고?”

“음, 부엌에 요리사 아저씨가 있어. 이름은 루퍼스인데 다들 털북숭이라고 불러. 빨래는 우리가 해야 해.”

요리사가 털이 아주 많은 모양이지.

아이들은 다소 직관적으로 별명을 붙이곤 한다. 새틴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인솔하는 교사가 한 명, 생활을 보조하는 직원이 한 명. 겨우 두 명이 하루 종일 아이들을 보살펴야 한다면 열두 명도 충분히 많다.

“털북숭이란 건 쟤가 붙인 별명이야.”

팀이 복도 끝 방에서 나오는 아이를 가리켰다.

“쟤는 늘 사람을 이름으로 안 부른다니까. 나는 생쥐라고 불러.”

앞니가 톡 튀어나온 팀이 툴툴거렸다. 그 소리를 흘려들으며 새틴은 멀찍이 선 소년을 관찰했다.

소년은 얼핏 보아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였다. 외모에 별 특색이 없는 팀과 달리 어느 모로 봐도 이 세계의, 이 소설의 주연 같아 보였다.

그늘진 데 서 있어도 눈에 띄는 옅은 금발, 흐린 하늘색이 아닌 사파이어처럼 새파란 눈동자, 앳된 티가 남아 있음에도 수려한 얼굴. 앞으로 10년. 아니, 5년만 지나도 대단한 미남이 될 것이 분명한 소년이었다.

“쟨 이름이 뭔데?”

“케인. 여기 온 지는 아직 석 달도 안 됐어. 따지자면 막내지.”

팀이 히히 웃으며 하는 소리는 새틴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팀이 말한 이름만 귓가를 맴돌았다.

“……케인?”

새틴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별생각이 안 들었다. 그런데 케인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불현듯 떠오르는 소설이 있었다.

<다크에이지>라는 소설이 있다. 2010년 전후에 유행한 판타지 소설로 얼마 전부터 개정판이 연재 중이다.

아무래도 처음 연재된 시기가 10년도 더 전이다 보니 요즘 독자가 보기엔 올드한 구석이 있는데 장르 소설 판에도 레트로 붐이 불었는지 보는 사람이 꽤 많았다. 누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내 취향은 아니었는데.’

새틴은 누나의 추천을 받아 읽은 다크에이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주인공은 케인, 금발에 눈이 푸른 스무 살 남자다. 기사단의 수습 단원인데 도입부에서 과거가 간단하게 서술된다.

열여섯 살이던 시절 케인은 악랄한 흑마법사에게 잡혀 실험체가 될 위기에 처한다. 그때 신전 기사단이 쳐들어오고 그 와중에 불이 난다.

아비규환 속에서 케인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그 일로 기사를 동경하게 된 케인은 신전 기사단에 들어가려 하지만 유감스럽게 신성 마법에 재능이 없어 다른 기사단에 들어간다.

그런 설정에서 시작하는 본편의 줄거리는 평범하다. 정석적인 모험 판타지처럼 진행된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케인이 지내는 도시에 어느 날 떠돌이 마법사가 나타나 “흑마법사의 흔적을 찾았어요.”라며 신전 기사단의 도움을 청한다. 리타라는 이름의 여자 마법사다.

신전 기사단은 이미 흑마법사를 처단한 적이 있기에 그때의 흔적일 거라 생각해 리타의 말을 흘려듣는다.

리타는 발을 동동 구르다 케인을 만나고, 케인의 친구이자 신관인 에드워드를 소개받는다. 세 사람은 의기투합해 흑마법사의 흔적을 쫓는다.

‘그러다 찾는 게 새틴이지.’

새틴은 케인을 해치려 했던 흑마법사의 제자로 죽은 스승의 복수를 꿈꾸고 있다. 도시 외곽의 작은 마을들을 습격하다 급기야 마왕을 소환하려 하는데, 그 시점에 주인공과 동료들이 그를 찾아낸다.

‘요약하자면 새틴이 1부 악당 보스란 말씀.’

주인공과 동료들이 새틴을 처치하며 1부가 끝난다. 2부는 새틴이 죽었으니 당연히 중단된 줄 알았던 마왕 소환이 여전히 진행 중이란 사실이 밝혀지며 벌어지는 일이다.

‘마왕도 물론 물리치지.’

누나의 추천으로 읽기는 했지만 취향이 아니어서 1부까지밖에 보지 않았다. 이후의 내용은 스포일러를 찾아봐서 대충만 안다.

리타는 알고 보니 가출한 공주였고, 마왕을 물리쳐 공을 세운 케인은 왕에게 리타와 결혼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지만 거절한다. 이때까지는 아직 친구 사이다.

3부는 마왕의 죽음을 알아차린 마신이 강림하는 내용이다. 그 과정에서 갖은 고난을 겪은 케인과 리타는 결국 친구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고, 마침내 3부 끝에서 결혼한다.

‘정석적인 모험물이긴 한데…….’

요즘 나온 소설이었다면 <악당을 물리쳤더니 크하하 그놈은 우리 중 최약체였지 라고 합니다.> 정도의 제목을 달고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새틴이 가만히 있으니 옆에서 팀이 팔을 흔들었다.

“왜 그래?”

방에서 나온 케인은 이미 두 사람의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새틴은 물론 팀과도 그리 친하지 않은지 알은체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 방은 어디야?”

“가장 안쪽 방.”

팀은 마주 본 두 개의 방 중 남쪽 방을 가리켰다. 아까 케인이 나온 방이다.

“……케인하고 같은 방?”

“응.”

∞ ∞ ∞

새틴은 결론을 내렸다.

여기는 다크에이지의 세계가 맞는다. 팀의 안내를 따라 세면실에 들어갔다가 거울을 보고 확신했다.

미역처럼 굽슬굽슬한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다소 인상이 흐린 얼굴은 다크에이지에 나온 새틴의 묘사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인상은 부드럽지만 어딘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랬지.’

검은 머리와 검은 눈 때문인지 ㅇㅇ의 생김새와 언뜻 닮은 느낌도 들지만 표정이 달랐다. 아마 얼굴 근육의 차이 때문일 터.

누나가 쓴 소설에 들어가게 해 달랬더니 다크에이지에 들어온 이유에 관해서는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누나가 다크에이지를 쓴 거지.’

ㅇㅇ와 누나는 열두 살의 나이 차가 있었다. 자라면서 향유한 문화도 그만큼 달랐다.

다크에이지가 처음 연재된 시기에 ㅇㅇ는 겨우 초등학생이었지만 누나는 이미 성인이었다. 판타지 소설을 연재하고 출간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 시절 판타지 소설의 작가들 중엔 대학생이 상당수에 고등학생 작가도 심심찮게 있었다고 들었다.

그 작가들 대부분이 지금은 다른 직업에 종사한다. 누나 또한 그렇다. 그동안 누나가 판타지 소설을 출간한 적이 있다고 알려 주지 않은 건 다크에이지 이후에 다른 글을 쓴 적이 없어서가 아닐까. 그러다 개정판을 내면서 오랜만에 추억을 떠올린 거지.

‘그래서 나한테도 보라고 했나.’

개정판이 연재될 때 누나는 정말 재미있다며 꼭 보라고 추천했다. 1부를 다 읽고서 별로 취향이 아니었다 하니 크게 실망했다.

‘재밌다고 했어야 했는데.’

누나가 쓴 소설인 줄 알았더라면 끝까지 봤을 텐데. 분명 명작이었을 소설을 겨우 1부만 보고 섣불리 판단해 버렸다.

쓰는 글을 보여 달라고 할 때마다 한사코 안 된다던 이유도 이제 짐작이 간다. 재미없다고 한 소설의 작가가 누나인 걸 알면 민망할까 봐 그랬겠지.

‘아니, 근데 다크에이지를 왜 그렇게 설명해?’

운명을 거스르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이야기라며. 1부밖에 안 봐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런 내용은 아니지 않았나?

‘항의할 때가 아니지, 참.’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 봤자 누나는 알지도 못할 텐데.

‘누나가 읽으라고 할 때 읽을걸. 너무너무 재밌다고 말해 줄걸.’

새틴은 깊게 후회하느라 팀이 학교를 안내하는 내내 집중하지 못했다.

세탁실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던 팀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직 어디가 아파?”

아까 선생님이 사정을 설명할 적에 머리를 부딪쳐 이리되었다 둘러댔는데 새틴이 멍하니 있으니 걱정이 된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이런 어린애들이랑 지낸 적이 없네.’

스무 살 ㅇㅇ는 열두어 살 먹은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일이 좀처럼 없었다. 어린이와 노약자는 지켜야 하는 대상이라고 늘 생각하면서도 마주칠 일이 없으니 그 생각을 실행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아이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새틴은 또 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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