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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3화 (3/139)

3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새틴이 묻자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새틴은 슬그머니 시선을 떨어뜨렸다.

노인이 중얼거렸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혼잣말 같아서 새틴은 대꾸하지 않고 눈치를 봤다.

‘믿는 건가?’

믿으라고 한 거짓말이긴 하나 너무 쉽지 않나.

새틴은 의아했지만 일단은 잠자코 있었다. 제가 기억 상실이라 해 놓고 그 말을 왜 믿냐고 할 수는 없으니.

“일단 나오거라.”

노인이 등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새틴은 얼른 그 뒤를 쫓아갔다.

여태 새틴이 갇혀 있던 반성실 옆으로 문이 두 개 더 있었다. 문의 간격을 보아하니 모두 같은 용도의 방 같았다.

‘반성실이 여러 개 있다는 건…….’

한 번에 여러 명을 반성실에 가둘 수 있다는 뜻인데. 사람의 수가 한둘은 아니란 거지.

짧은 복도의 끝에 계단이 있었다. 어두운 계단을 모두 올라가니 새로운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의 풍경을 보며 새틴은 소리 없이 감탄했다.

그림이 걸린 벽과 물방울 모양 램프가 놓인 콘솔. 꼭 외국 드라마에 나오는 고택 같다. ㅇㅇ는 시대물 드라마를 몇 편 본 적 있는데 딱 이런 느낌이었다.

‘카펫이 깔려 있었으면 더 그럴듯했을 텐데.’

복도를 잠시 걷다 보니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어디에선가 열두어 살쯤 먹어 보이는 아이들이 뛰어왔다. 하마터면 부딪칠 뻔해 새틴이 옆으로 물러나자 노인이 아이들을 꾸중했다. 가벼운 어조였다.

“복도에서는 소란스레 뛰지 말거라.”

“네, 선생님!”

아이들은 재잘대는 새처럼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열렸다 닫힌 문으로 싱그러운 숲과 환한 햇빛이 일순간 보였다 사라졌다.

새틴은 이 상황에 딱 맞는 추측을 했다.

‘여기는 학교구나.’

일자형 건물은 끝에서 끝이 보였다. 그리 큰 건물은 아니라는 의미다. 물론 몇 층이냐에 따라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마침 아이들이 나간 현관 반대편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빛이 드는 방향으로 보건대 아마도 남향 건물이다. 동쪽과 서쪽으로 복도가 뻗어 있는.

“뭐 하니. 올라가자꾸나.”

새틴이 건물의 구조를 파악하느라 정신을 빼놓고 있으니 노인이 한마디 하고 먼저 계단을 올랐다. 새틴은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역시 그리 큰 건물은 아니었다. 2층까지밖에 없었다.

새틴은 노인의 뒤를 따라 2층 서쪽 복도로 들어섰다. 중복도 형식이라 방과 방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문의 개수는…….’

각 벽에 두 개씩, 총 네 개의 문이 있다. 반대편 복도를 슬쩍 보니 저편은 양쪽에 세 개씩 총 여섯 개다. 그렇다면 단순히 계산했을 때 2층에만 열 개의 방이 있다.

1층에 있는 방은 그보다 수가 적겠지. 다른 건물이 더 있는 게 아니라면 1층에 식당과 부엌, 위생 시설 따위가 있을 테니.

‘아주 작은 학교네.’

감옥 같은 방에서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시련과 역경을 겪어야 할까 봐 우려했는데 이제 그 생각은 옅어졌다.

노인은 마주 본 두 개의 문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남쪽 문을 열었다. 새틴은 맞은편 문을 흘끔 본 후 노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사무실? 교무실?’

창이 없어 어둡던 복도와 달리 사무실은 아주 환했다. 창문 밖으로 우거진 숲이 보였다.

숲속의 조그만 학교. 아주 목가적인 느낌이 드는 문장이다.

노인이 손짓하는 대로 티 테이블 앞 소파에 앉았다. 제법 좋은 의자였다. 의식하지 않았을 뿐 여태 좀 긴장해 있었는지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허리가 뻐근했다.

노인은 맞은편에 바로 앉지 않고 분주히 움직이며 무언가 했다. 슬쩍 보니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새틴은 그 틈을 타 주위를 살폈다.

꽤 아늑한 공간이었다. 일부러 공을 들여 꾸민 티가 났다. 새틴이 앉은 소파는 학생과 상담을 할 일이 있을 때 쓰는 모양이고, 창가 쪽에는 커다란 업무용 책상이 있었다. 창을 등지는 자리라 역광이 심했다.

“기억나는 게 전혀 없느냐?”

노인이 새틴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빈 찻잔이었다. 아직 준비가 덜 끝났는지 주전자와 찻잎을 가지고 수납장 앞에서 계속 달그락거렸다.

“네…….”

“처음엔 어떻더냐.”

“무슨 말인지.”

“깨어나서 바로 알았느냐?”

“깨어나서, 여기가 어딘지 생각하다가 알았어요. 어딘지 모르겠는데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하다 보니까…….”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실제로 새틴은 처음 눈을 떴을 때 그런 생각들을 했다.

“흠…….”

노인이 침음하다 맞은편에 와 앉았다. 그리고 무어라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찻주전자를 쥔 손 주변이 반짝거렸다. 새틴은 무심코 물었다.

“그건 뭔가요?”

“홍차란다. 예전에도 마신 적이 있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는가 보구나.”

“아니, 차가 아니라 그 반짝거리는 거요.”

게임을 하다 보면 아무것도 없는 자리가 반짝일 때가 있다. 그 부분을 조사하면 보통 진행에 필요한 실마리가 나온다. 게임 장르에 따라서는 그냥 잡템이 나올 때도 있지만.

게임과 달리 현실에서는 발밑에 무엇이 숨겨져 있다고 해서 빛이 나지 않는다. 사물에는 의도가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 노인이 쥔 주전자가 빛난다. 그저 소재 때문에 그리 보이는 게 아니었다. 희미한 빛의 입자가 노인의 손에서 주전자 쪽으로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반짝인다고?”

“아주 예쁘네요. 마법 같아요.”

노인이 주전자를 내려놓고 또 한 번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노인의 손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빛의 입자들이 느리게 회오리쳤다. 연약한 회오리는 금세 천장까지 닿았다.

새틴이 천장을 보고 있으니 노인이 “정말이구나.” 하며 손을 내렸다. 그 순간 빛의 회오리도 사라졌다.

“정말로 마력이 보이는구나.”

“마력?”

마력이 뭔지 몰라서 되물은 것이 아니다. 새틴은 이 몸에 들어오기 전 누나를 따라 웹소설을 아주 많이 봤다. 마력이나 마나 같은 현실에서 쓸 일 없는 단어들도 상식처럼 알고 있다.

그러나 새틴이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노인은 새틴이 마력이 무언지 몰라 되물었다고 착각했다.

“마력이란 마법을 구성하는 힘이지. 이것이 마력이고…….”

노인의 손에서 다시 빛이 피어올랐다. 새틴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마력 굉장하네.’

노인이 이어 말했다.

“이것이 마법.”

빛의 한가운데 불꽃이 나타났다. 작은 벽 모양이다. 새틴은 또 한 번 감탄했다.

‘마법도 굉장하네.’

노인이 손을 거두자 불꽃이 꺼졌다. 빛도 서서히 흐려졌다. 새틴이 쳐다보자 노인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중얼거렸다.

“마력은 본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인데 어찌 네가 그것을 보는지 모르겠구나.”

“……보면 안 되는 건가요?”

“안 되는 게 아니라 그럴 수 없다는 말이다. 마법을 쓰는 나조차 보지 못하는데.”

노인이 손을 뻗었다. 새틴의 얼굴을 만진 손이 목을 지나 어깨를 짚고, 이내 팔뚝을 쓰다듬었다. 뭘 하는 건지 몰라 새틴은 그냥 눈만 굴리고 있었다.

“뭐가 달라진 건지…….”

고개를 갸우뚱한 노인이 손을 떼고 찻주전자를 들었다. 새틴의 앞에 놓인 찻잔으로 기울이자 붉은 찻물이 쏟아졌다. 마법으로 데운 물에 그사이 차가 우러나 있었다.

“기억을 잃은 것과 관계가 있을까?”

“글쎄요…….”

새틴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라 별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다.

노인은 차를 마시며 몇 번이나 새틴의 어깨를 다시 만졌고, 그때마다 “이상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는 동안 새틴도 속으로 생각했다.

‘마법사라면 이 사람은 그저 노약자라고는 할 수 없겠구나.’

노약자와 아닌 사람을 구분 짓는 기준은 중요하다.

∞ ∞ ∞

새틴은 차를 다 마신 후에야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모르는 것이 있다며 질문하러 온 아이가 있었는데 노인은 그 아이에게 새틴의 거처를 안내해 주라고 지시했다.

“정말 다 잊어버렸어?”

새틴은 알지 못하는 아이지만 그 아이는 새틴이 누구인지 당연히 아는 눈치였다. 기억 상실이란 말이 믿기지 않는지 연신 새틴을 흘끔거렸다.

“정말이야.”

최대한 다정한 어조로 말하며 새틴은 아이를 살폈다.

아이의 이름은 팀. 아까 노인이 그렇게 불렀다. 남자아이로 나이는 아직 모른다. 어림잡아 열두어 살쯤 되어 보인다. 키가 새틴의 어깨에도 미치지 않았다.

참된 어른이라면 아이에게 다정하게 대해야 한다. 새틴이 벙긋 웃자 팀이 걱정스레 물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글쎄, 그것도 기억나지 않는 게 기억 상실 아닐까…….”

새틴이 외국 정치인처럼 중얼거리자 아이가 금세 수긍했다.

“그렇겠네. 정말 불편하겠다.”

아이답게 표정이 솔직했다. 팀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으며 새틴은 멋쩍게 웃었다. 사실 아직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게임의 튜토리얼을 진행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여기는 뭐 하는 곳이야?”

“여긴 학교야.”

거기까지는 새틴의 예상이 맞았다. 팀의 말이 이어졌다.

“진짜 학교는 아니고, 우리처럼 갈 곳 없는 애들을 데려다 가르쳐 주는 곳이야. 선생님은 아주 좋은 분이셔.”

사설 고아원에서 기본적인 교육을 해 주는 셈이라고 봐도 될까.

새틴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팀이 히히 웃었다.

“내가 처음 여기 왔을 때는 새틴이 가르쳐 줬는데 이제 내가 가르쳐 주니까 신기하다.”

“그래? 넌 언제 왔는데?”

“나는, 다섯 달 정도 됐어.”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날짜를 헤아린 후 대답한다. 그렇다면 새틴은 다섯 달보다 전에 이곳에 왔다는 뜻이다. 혹시 팀이 더 아는 게 있을지 몰라 슬쩍 덧붙여 물었다.

“내가 언제 왔는지도 알아?”

“그건 몰라.”

“그렇구나.”

아쉽게 되었다. 새틴은 약간 실망했다. 그러나 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장 오래됐다는 얘기는 들었어. 여기서 새틴이 가장 나이도 많아.”

“내가 몇 살인데?”

“열여덟 살.”

지하에서 예상한 대로다.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사이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열여덟이면 그 예상에 걸친다. 원래 나이보다 두 살 어려졌다.

‘그래도 난 어른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지.’

몸이 아이가 되었다고 생각까지 아이가 될 수는 없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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