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새장 후일담 외전 Olaf
“옆으로 조금만.”
“응.”
‘아, 조금만 가면 걸릴 거 같은데…….’
천장의 도리가 촘촘하게 맞물린 경계 사이에 전나무 가지로 만들어진 기다란 가랜드가 걸릴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나를 어깨에 태운 주현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면서 부탁했다.
“으음……. 조금만 더.”
“이렇게?”
그러자 주현이가 자기 어깨에 얹힌 내 허벅지를 꼭 붙잡고 게걸음을 했다. 그제야 딱, 복도의 덧문 경계의 천장에 가랜드 걸이가 걸릴 수 있었다. 복도의 덧문을 따라 죽, 걸린 까실까실한 전나무 가지 가랜드의 행렬에 뿌듯해졌다. 중간 중간 마다 커다랗게 매인 붉은 리본, 자잘하게 박혀 있는 붉은 열매, 금빛 종을 줄줄이 매달고 있는 모습은 제법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났다. 나는 주현이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됐다. 내려 줘, 주현아.”
“응.”
“고마워.”
주현이는 몸을 찬찬히 낮춰서 마룻바닥에 내 발을 디디게 도와주었다.
주현이의 어깨에 앉아 저 긴 복도를 따라서 가랜드를 걸어 놓느라 발끝이 뻐근했지만 참을 만은 했다. 그래도 살짝 저리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는지 주현이 어깨에서 내려오다가 살짝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그런 나를 주현이가 재빠르게 붙잡았다.
“가하, 괜찮아? 힘들면 앉아 있어. 내가 할게.”
“아니야. 다리 저려서 그런 거야. 장식 거의 다 했는데 뭐.”
“그래도…….”
주현이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내 팔을 쥔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 나는 주현이의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나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위해서 준비할 게 무척 많았으니까.
“가은이 얼마나 컸을지, 기대된다. 마지막에 봤을 때는 아직 말 많이 못했는데…….”
“응.”
무엇보다도 삼촌으로써 어린 조카와 함께 하는 첫 크리스마스 파티였다.
‘내가 삼촌이라니.’
책임감이 느껴지지 않는 다면 거짓말이었다. 오랜만에 보게 될 조카에게 어떻게든, 즐겁고 재밌는 시간을 보내게 해 주고 싶었다.
동생 가연이는 재밌게도 내가 병원에서 잠들어 있는 동안, 그녀가 아플 때 잔소리를 퍼부으며 시시콜콜한 갈등을 빚던 의사와 결혼했다. 참 사람 인연이라는 게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치면 주현이와 나도 잘 지내다가도 자주 다투고 하니, 어쩌면 사랑은 싸움과 한 끝 차이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일찍 결혼한 동생이 해외 오케스트라에 영입되면서 타향살이를 한 지가 벌써 4년이 넘었다. 그 사이에 조카가 태어났지만, 갓 태어난 얼굴을 한 번 본 게 다였다. 동생 부부도 그렇지만 주현이도 일이 바쁘고 직접 보기는 어렵다 보니 메신저로 보내 주는 사진과 영상통화로 인사하는 게 전부였다. 나는 주현이의 스웨터 자락을 잡아서 거실 쪽에 아직 미완성인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로 이끌었다.
“금방 크더라, 애들은. 저번에 영상통화로 삼촌, 삼촌 하고 부르던데. 귀여워 가지고 혼났어.”
“봤어. 가은이는 점점 크면서 가하를 닮아 가는 거 같아. 가하 어릴 때랑 똑같아.”
주현이는 나를 뒤에서 껴안으며 내 관자놀이에 제 뺨을 비볐다. 내 어릴 때라. 나는 곰곰이 생각하며 나를 안고 있는 주현이의 품에 기대어서 살짝 걱정했다.
“그런가……. 근데, 나보다는 가연이 닮아야 인기가 많을 텐데.”
나는 창고에서 꺼내온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담긴 박스를 풀어내면서 내 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 주현이에게 색색의 유리로 만들어진 오너먼트를 조심조심히 건넸다. 그러자 주현이의 하얀 손이 하나씩 받아들면서 전나무 가지 아래부터 보기 좋게 걸어 주었다. 그는 내 말에 피식 웃었다.
“이미 인기 많을 거 같은데.”
“아, 저번에 가연이가 그러는데. 가은이 가이드라서 에스퍼인 애들이 그렇게 졸졸 따라다닌다고는 하더라. 걱정이야. 외국 애들 사이에 있어서 그러다가 괴롭힘 당하는 건 아닌지…….”
“가하, 그렇게 걱정 되면 내가 좀 훈련을…….”
주현이가 자신 있게 방긋방긋 웃으면서 스스로를 가리키는 모습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대호면 몰라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주현이 너는…… 괜찮아.”
“……왜? 나 그래도 가이드였어. 에스퍼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주현이가 오너먼트를 트리에 걸다 말고 살짝 불만이 어린 눈빛으로 항의했다. 그는 내게 능력을 넘겨주는 바람에 가이드 특유의 힘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래도 태생이 가이드였던지라 가끔, 내가 그에게서 받은 힘이 버거워 끙끙 앓으면 와서 각인된 가이드로써 진정을 시켜주고는 했다. 물론, 깊은 접촉으로 인한 정신적 진정 효과는 좋았지만 대신 몸은 두 배로 더 앓아야 했다. 만약 그런 방식을 가르쳐 줄 거라면 진심으로 사양이었다.
“아니. 아직 애니까 굳이…….”
“아직 애니까 조기에 교육을 시켜야지.”
주현이는 일어서서 전나무 가지에 오너먼트를 걸다 말고 내게 다가왔다. 오너먼트를 꺼내던 박스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내가 고개를 들자 내 시야에 부드러운 이삭의 색깔을 가진 머리카락이 간지럼을 피웠다. 그와 함께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입맞춤이 슬며시 내려왔다. 황금빛의 크리스마스 조명이 비치는 거실 한가운데 쪽, 하고 울리는 소리로 내 얼굴은 삽시간에 열이 올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키스에 당황할 무렵 나를 보는 파란 눈이 사르르 웃으며, 그가 나를 덮치듯이 내 앞에 앉아서 커다란 몸을 바짝 기울였다.
“예쁜 에스퍼 찾는 방법 같은 거.”
“……너.”
덕분에 피하려고 카펫 뒤로 민 손 위로 그의 차가운 손이 덮였다. 내가 지금 뭐하냐고 하기도 전에 그는 당당하게 반문했다.
“안 그래?”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능청스럽게 쳐다보는 파란 눈빛이 제법 강렬했다. 눈치가 별로 없는 나도, 그의 눈에 서린 감정이 무엇이 모르지는 않았다. 나이도 제법 먹은 녀석이 어째 갈수록 진득해져만 간다고 생각하며, 나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부드러운 카펫 바닥에 겹친 두 손의 온도가 서로에게 옮고 있었다.
“애한테 이상한 말 하지 마.”
“……음, 예를 들면?”
그는 내 콧등에 입술을 내렸다가, 살짝 물었다. 그러고는 뺨에 자잘하게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서 은근한 열감이 퍼져 올랐다. 그의 머리카락이 귓가를 간지럽히며 스웨터 안에 숨겨진 살결을 떨리게 했다. 그러다 그가 나를 부드러운 카펫 바닥에 눕혔다. 예를 들면…… 그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으음.”
“너무해, 가하.”
그는 은근히 섭섭함을 내비치며 다시 몸을 숙여서 키스했다. 그러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고 스웨터 안으로 들어와서 배를 쓸었다. 워낙에 차가운 손이라, 그 손길에 아랫배가 흠칫 떨리며 긴장되었다. 그걸 그도 느꼈는지 픽 웃으며 내 뺨에 다시 키스했다.
“이런 거, 인사라고…… 가르치는 거.”
어렸을 때의 추억을 되짚던 나는 살짝 가빠져 오는 숨을 내쉬며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기억하는구나.”
“……트리, 장식 오늘까지 해야……해.”
그러니 적당히 하라는 말에 주현이가 웃으며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응. 조금만 할게.”
* * *
‘……조금만 하기는 개뿔이.’
결국 신이 나서 내 진이 빠지도록 박아대는 탓에 온 몸에 힘이 없어졌다. 이런 지친 상태로 유리로 만들어진 오너먼트를 걸다가 아차 하는 순간, 깨질 수도 있으니 나는 카펫 바닥에 베개를 두고 엎드렸다. 넘어가면 안 됐는데.
지쳐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나를 주현이가 말끔히 씻겨 준 다음, 허리에 얹어 주기 위한 뜨거운 물주머니를 만들고 있었다. 뜨거운 샤워로 노곤해진 머리를 베개에 기대며 꼭 닫혀 있는 유리 덧문 너머의 까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제법 추운 날이라, 눈이 내릴 법도 한데 덧문의 유리를 두어 번 흔드는 거센 바람 말고는 아직 까맣기만 했다.
“으…… 내 허리.”
아무리 그의 힘을 넘겨받았다고 해도, 내 가이드가 상처를 내면 평소보다 훨씬 더디게 회복이 되곤 했다. 마치, 그가 남긴 것을 잊지 말라는 것처럼. 그래도 가벼운 상처 따위는 금방 형체도 찾을 수 없도록 금방 나았다. 복도의 코너에서 끽끽 대는 마룻바닥 소리와 함께 갈아입은 옷차림의 주현이가 물주머니와 담요를 들고 왔다.
“추워? 히터 더 틀까?”
“됐어. 물주머니나 빨리 줘. 으으.”
“응.”
그는 언뜻 미안한 표정으로 내 허리 위에 따끈한 물주머니를 올려 주고 담요를 바람 들어오지 못하게 꼭꼭 여며서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내 옆에 털썩 앉았다.
“하으으……. 따뜻해…….”
“온도 괜찮아?”
뜨끈하게 풀어지는 허리 통증에 감탄이 터졌다. 그런 나를 두고 주현이가 흐뭇한 표정으로 내 머리를 슥슥, 빗어서 쓸어 주었다. 그런 그의 손에 처음 보는 흔적이 있었다.
“으응……. 응?”
나는 베개에서 기대었던 팔을 꺼내서 그의 손을 잡았다.
“너 손……. 다쳤어?”
“아, 그냥. 서류 보다가 살짝 베였나 봐.”
주현이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손을 빼려 했다. 나는 그 손을 놓지 않고 불만스럽게 그 상처를 살폈다. 붉은 실선이 가느다랗게 새겨진 손등을 보고 있자니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능력전이를 통해서 내게 힘을 넘겨준 그의 결정이 속상하기만 했다.
“……말을 하지.”
“별 거 아냐.”
‘내게 그 힘을 주지 않았더라면, 이런 자잘한 상처 따위는…… 금방 흔적도 없이 나았을 텐데.’
나는 심장에 넘실대는 그의 힘을 느끼며 그의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동시에 입 안의 혀끝이 그의 상처를 가볍게 스쳐지나갔다. 나는 입술을 천천히 떼면서 고개를 올렸다.
“다음부터는, 다치면……. 너 왜 그래?”
“……가하.”
주현이가 어딘가 심각한 표정으로 제 손을 잡은 내 손가락을 만지작대었다. 화났나? 근데 화날 일이 딱히…… 없는데. 설마 그가 준 힘을 이런 데에 썼다고 화를 낸다면, 그건 내가 화내야 할 일이다. 고민에 빠진 내 생각을 풀어 주는 것은 주현이의 작은 한숨이었다.
“……유혹하지 마. 아까도 나 많이 참은 건데.”
“……뭐? 내가 언제 너를 유혹했어?”
“…….”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주현이는 진심이었나 보다. 고개를 내리다가 마주친 그의 앞섬이 살짝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주현이의 입술도 살짝 벌어졌다. 나는 그 입에서 나올 말을 대충 예상되었다.
“……짐승.”
“……가은이 있는 동안은 못하잖아.”
그는 애교 있게 웃어 보이며 나를 안아서 방으로 데려갔다. 조카가 와 있는 동안 못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싶다가도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가 이런 놈이랑…….’
“조금만…… 할게.”
뻔한 거짓말에도 넘어갈 수밖에 없는 건 왜일까. 사랑이 뭐라고. 나는 얄미운 주현이의 뺨을 쭉, 쭉 늘여서 대신 화풀이를 했다. 그러자 주현이는 가볍게 내 손가락을 물었다. 그렇게 또 다른 밤이 지나갔다.
* * *
다음 날,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서 주현이와 함께 현관 앞에 서서 서성였다. 아까 공항에 도착해서 출발했다는 전화로 들었던 도착 시간이 가까워지자 괜히 긴장이 되었다.
“곧 오겠지. 눈 많이 오는 것 같은데 괜찮을까.”
“차는 별로 안 막히는 모양이야. 아까 박 비서가 10분 안에 도착한다고 했어.”
“그렇구나……. 주현아, 이 옷 어때? 정말 괜찮아? 크리스마스 분위기 낸다고 입었는데 별로인가?”
현관 앞에서 스웨터 밑단을 죽죽 늘여 놓으면서 어디 부족한 점은 없나 연신 살폈다. 그런 내 옆에서 잠자코 서 있던 주현이가 피식 웃으면서 어깨에 내려앉은 머리카락 하나를 툭, 집고 털어 주었다.
“예뻐.”
“……믿을 수가 있어야지.”
“진짜인데.”
주현이는 내가 밀가루 포대자루를 입고 있어도 좋다고 할 녀석이라 칭찬을 받아도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입은 것과 똑같은 디자인에 색깔만 다른 스웨터를 입은 녀석을 보면서 그래도 안심했다. 주현이가 입은 모습이 제법 괜찮으니, 나도 괜찮아 보이지 않을까 싶은 짐작이 언뜻 들었다. 무엇보다도 주현이랑 열심히 꾸민 집안을 보고 하나밖에 없는 어린 조카, 가은이가 좋아해 주면 정말 기쁠 것 같은데. 혹시나 해서 현관의 미니 트리에 걸린 장식을 다시 한 번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동안 내 등 뒤로부터 큭큭 대는 주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웃어.”
“귀여워서. 긴장했어?”
“긴장……은 무슨. 그냥, 처음 만나는 거니까 좋은 모습 보여 주고 싶은 거지. 애잖아. 좋은 추억으로만 있었으면 좋겠어서 그래.”
‘내가 그런 적이 없으니까…….’
소중한 가족의 어린 자식이었다. 좋은 것만으로 채워 주기에도 모자르기만 한.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가 가질 수 없었던 평안한 추억, 그걸 앞으로 채워 갈 시간이 많은 조카에게 주고 싶었다. 내 투덜거림에 주현이가 나를 뒤에서 껴안았다. 보이는 덩치 값만큼이나 체감되는 무게는 제법 나갔다.
‘윽. 무거운 녀석.’
사랑으로 받쳐 주기엔 너무 무거운 녀석의 덩치에 내 허리가 뚝, 굽혀졌다. 동시에 주현이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 지금, 좀 질투 나.”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간신히 몸을 돌려서 주현이를 떼어 놓자, 그가 다리 사이에 앉아 있는 나를 꼭 껴안고서 내 뺨에 제 머리를 비비적대었다.
“나도 5살로 돌아가서 가하를 보고 싶어졌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갑자기 왜 그래.”
“그럼 가하도 나한테 좋은 추억 남겨 주려고 노력할 것 같아서.”
“…….”
그 말에 나는 조금 마음이 욱씬, 하는 통증을 느꼈다. 내가 없어진 시간동안 그가 외로워했을 모습이 문득 상상이 되어서. 예전에 꾼 꿈처럼, 홀로 이 집에 남겨진 그가 보냈을 수십 번의 크리스마스가…….
그 생각이 미친 나는, 주현이를 밀어내지 않고, 잠자코 안아 주었다. 그의 넓은 등판을 토닥거리는 손바닥에 보들보들한 스웨터의 촉감이 느껴졌다.
“……주현아.”
“응, 가하.”
나지막이 울리는 그의 고동소리가 그 부드러운 촉감을 타고 이어진다. 그 고요한 요동에 나는 입을 달싹이며 할 수 있는 말을 고르고 또 고르는 중에, 때 마침 동생 부부가 박 비서와 함께 별채 현관에 들어왔다.
“오빠! 우리 왔어!”
“형님, 오랜만이에요.”
“도련님, 동생 내외분들 모시고 왔습니다.”
“……웅.”
이런, 나는 주현이의 품에서 얼른 일어나서 그들을 맞이했다. 주현이도 느지막이 일어나서 매제와 악수하며 인사했다.
“왔어. 밖에 춥지는 않아?”
“오랜만이에요, 아뇨. 덕분에 보내 주신 차를 타고 편히 와서. 감사합니다.”
“주현이랑 박 비서님이 하셨죠. 저는 뭐.”
그런 우리에게 동생이 윙크를 하면서 장난스러운 말투로 살살 찔러대었다.
“뭐야, 둘이 안고 있는 거 다 봤어. 좋은 시간 보내고 있는데 우리가 방해했나?”
“무슨, 아니야.”
내가 손을 흔들며 부정하자 주현이가 내 어깨를 잡고 서서 내 정수리 위에 제 턱을 쿡쿡, 누르면서 항의했다.
“잘 알면 방금 자리 좀 피해 주지 그랬어. 감동적인 고백 받을 수 있었는데.”
그러자 가연이가 보란 듯이 짓궂은 표정을 하며 맞섰다.
“주현이 너, 평생 우리 오빠 독점하면서 너무 욕심쟁이 아니야? 매일 같이 들을 거면서. 나도 오랜만에 우리 오빠 보고 싶단 말이야.”
“가하는 부끄러움이 많아서 가끔씩 얘기해 준단 말이야. 그리고 그걸 이제 알았다면 너무 늦은 거 같은데.”
“둘 다 그만해. 오랜만에 봤는데 뭐 하는 거야.”
팔짱을 끼고서 응답하는 주현이의 등짝을 때리면서 나는 말렸다. 오랜만에 만나서 둘 다 무슨 짓인지, 그런 내 말은 듣지도 않는지 둘이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 대었다.
“주현이 너 때문에 오빠한테 혼났잖아.”
“그게 왜 나 때문이야? 가연이 너 때문이지.”
“둘 다 그만 하랬다. 나이 먹고 가은이 앞에서 이럴 거야?”
‘다섯 살 먹은 애도 이러지는 않겠…….’
그 생각이 미친 나는 눈으로 가은이를 찾았다. 그러자 박 비서의 손을 잡고 그의 다리 뒤에 숨어 있던 조카가 눈만 살그머니 내밀고 중얼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하 삼쫀……?”
‘삼촌.’
짧은 그 단어에 내 마음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주현이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보다 더.
‘가은이가, 내 이름을 불러 줬어.’
나는 가은이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무릎을 꿇고서 스스로를 가리켰다.
“맞아, 가은아. 삼촌이야. 우리 종종 영상으로 전화했잖아. 기억나요?”
“아가씨, 삼촌에게 인사하셔야죠.”
동생을 닮아 크고 까만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리던 가은이는 박 비서의 부드러운 권유에 숨어 있던 몸을 꺼내서 내게 팔을 벌리고 도도도 달려왔다.
“삼쫀……!”
“우리 가은이!”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팔을 벌려서 안아 주었다. 조그마한 몸이 바깥에 잠시 있었다고 겨울바람을 묻혀와 서늘했다. 나는 조카를 꼭 껴안아서 둥기둥기 흔들어 주었다. 참 작고 가볍다.
“가은이 밖에 춥지. 안에 들어가서 우리 따뜻한 핫초코 마실까?”
‘이렇게 귀여울 수가.’
다람쥐 마냥 먹을 걸 숨겨 둔 것처럼 통통한 뺨은 바깥 추위로 인한 것인지 가장자리가 발그레했다. 그 모습에 괜히 더 흐뭇해졌다.
“웅.”
“가은이 너. 삼촌에게 그러면 안 돼. 공손하게 네, 해야지.”
아직 어려서 말이 짧은 조카에게 가연이가 짐짓 엄하게 말했다. 그 말에 시무룩해지는 뺨이 가여워서 나는 동생을 말렸다.
“아직 애잖아. 그렇지. 가은이는, 몇 살?”
“다섯쌀.”
“애도 다 알아. 그러면 버릇 나빠진다구. 자, 삼촌 힘들게 하지 말구 내려와.”
“시러……. 삼쫀 조아.”
애는 애라고, 둥기둥기 해 주던 게 좋았나 보다. 살짝 낯을 가리던 아까도 잠시, 내 품에 안겨오는 가은이의 모습을 얼러주었다.
“괜찮아. 너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나한테 맡기고 좀 쉬어.”
“그래두…… 오빠 몸 아직…….”
“나 괜찮아. 주현이가 쉬는 날이라고 옆에 자주 있어서. 거뜬하다니까.”
그날 이후로 몸 상태가 가끔씩 불안정한 것을 아는 가연이가 우려를 지우지 못하는 듯, 안절부절 하는 표정을 했다. 그러자 주현이가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다가 내심 어필했다.
“그럼, 가은이 내가 안고 있을까.”
그 말에 동생이 단박에 찬성했다.
“그래, 주현이가 안으라고 해. 오빠보다는 뭐, 몸도 튼튼하고 체력도 더 좋으니까.”
“나 괜찮다니까. 그리고 주현이……는.”
나는 아까 전, 주현이가 가은이에게 그릇된 조기교육을 시켜 주겠다는 말이 생각나서 영,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가은이는 문득 주현이를 가만히 고개를 죽, 올려보았다. 그걸 주현이도 느꼈는지, 특유의 방글방글 웃는 낯으로 내 품에 안겨 있는 가은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안녕, 가은아. 난 주현이 삼촌이야. 반가워.”
“…….”
“우리 악수할래?”
친밀하게 인사를 하는 주현이가 손을 건네도 가만히 말없이 있는 가은이의 모습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냥 가은이 안고…….”
애가 외국에 산다고 하지만 그래도 주현이 같은 얼굴이 좀 낯선 모양인가, 싶을 때 갑자기 가은이가 외쳤다.
“……엘싸?”
‘응? 엘싸가 뭐지.’
“엘싸다!”
“……가연아, 엘싸가 뭐야.”
내 말에 가연이가 문득 웃음을 참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얼굴을 찌그러뜨렸다. 더불어 매제도 주현이를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내 품에 안겨 있던 가은이가 주현이에게 팔을 뻗쳤다.
“엘싸! 엘싸!”
그리고 주현이는 묵묵히 가은이를 안아서 이마를 맞대고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맞아. 삼촌은 눈이 많이 오는 곳에서 자랐어.”
“눈? 진짜 엘싸……!”
“눈은 또 뭔데…….”
나와 같이 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가은이의 폭발적인 반응에 어리둥절해졌다.
‘아니면 애초에 날 때부터 가은이가 외국에 살아서, 주현이 같은 외모가 더 낯에 익고 호감이었던 건가.’
“가은아, 삼촌이랑 같이 가자.”
“시러. 엘싸 더 조아. 삼촌 아니야.”
“……뭐?”
순식간에 거품이 꺼진 나의 호감도에 서운해질 무렵 가은이가 주현이의 금빛 머리를 잡고 물어보고 있었다.
“엘싸…… 머리 짧아……”
“왜 그런지 알려 줄까?”
“웅.”
“…….”
당연히 남자니까 머리가 짧은 것을. 뭐 저렇게 뜸을 들이나 싶은데 주현이는 잔뜩 흥분해 있는 가은이를 안은 자세를 고치며 진정시켰다.
“그럼 우리 같이 맛있는 저녁을 먹어야 해. 그럴 수 있겠어?”
“웅!”
“좋아. 그러면 우선 우리 집에 초대할게. 말썽 피우지 않고 얌전히 들어왔으면 좋겠어.”
“웅!”
“뭐야…….”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모습에 왠지 모를 소외감이 들었다. 그런 나를 보고 동생 부부가 킥킥 웃으면서 신발을 벗었다. 박 비서도 외투를 벗으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다들 내가 조카에게 버림받은 모습이 좋은 건가. 나는 동생 부부의 짐을 받아 주며 중얼거렸다.
“엘싸가 그래서 뭔데…….”
“아, 가은이가 비행기 타고 오면서 ‘겨울 왕국’ 봤거든.”
겨울 왕국? 나는 종종 화방을 가는 길에서 보았던 광고판을 기억해냈다. 딱 봐도 애들용 애니메이션이었지. 추운 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벽난로에 불을 때어 훈훈하게 데워 놓은 거실로 가면서 가연이가 연신 설명했다.
“거기 나오는 여왕이랑 주현이랑 닮아서 그런가 봐.”
“뭐가? 얼굴이?”
“금발에 파란 눈. 뭐, 주현이가 얼굴도 좀 예쁘긴 하잖아.”
“음. 형님이 많이 닮으셨죠.”
“아무래도, 애들은 그런 면을 좋아하죠.”
가연이의 말에 매제도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던 박 비서님도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나는 살짝 서러워졌다.
“그래도……. 내가 진짜 삼촌인데…….”
핏줄이 만화 캐릭터 닮은 사람을 못 쫓아간다니. 이건 좀 불공평한데. 억울함을 무릅쓰고 동생 내외의 짐정리를 도와주고 나서 나는 거실로 돌아갔다. 그러자 주현이가 품에 가은이를 안고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 마냥 거실 벽난로 앞의 소파 위로 앉아 있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엘싸…… 불쌍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 엘싸는 가하 삼촌을 사랑하니까.”
“흐흑…… 가하 삼쫀……. 엘싸……!”
“……왜 그래. 너네.”
카펫 바닥을 넘어서 가니 가은이가 도대체 주현이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주현이의 스웨터 가슴팍을 꼭 붙잡고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엘싸를 부르짖는 것을 보아하니 주현이와 가은이의 ‘겨울 왕국’ 놀이는 한층 심도 깊은 차원으로 진화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멀쩡한 애한테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저리 섧게 우나 싶은데 주현이는 가은이 몰래 나만 볼 수 있는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그게 뭔가…….
“가하, 왔어?”
“어어…….”
‘마치 사랑을 독차지한 여왕 같은 미소인데…….’
말도 안 되는 비유인 걸 알지만 그랬다. 주현이 얼굴이 예뻐서 그런가 보다, 못생긴 삼촌인 게 죄다. 나는 대충 넘기면서 주현이 가슴팍에 대고 우는 가은이를 안았다.
“가은이, 왜 울어. 엘싸가 뭐라 했어? 삼촌이 엘싸 혼내 줄까?”
“흐끄흑…… 혼내지 마……. 엘싸 너무 불쌍해…….”
“……불쌍해? 왜, 무슨 일이야.”
“엘싸가 탑에 갇혀서 가하 삼쫀 돌아오기를 기다렸대…… 하지만 가하 삼쫀이 엘싸 기억도 못하고……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다고 해써…… 그러다가 삼쫀 살리기 위해서 힘도 주고 머리도 잘라 버리고…… 불쌍해, 엘싸 혼내지 마.”
“……송주현.”
길고 긴 스토리를 읊고서 꺽꺽대는 가은이의 모습에 주현이를 째려보자 주현이는 피식 웃으면서 슬픈 표정을 흉내 냈다.
“가은이는…… 나랑 가하의 아픈 사랑 이야기를 듣고 지금 감동해서 그래. 가은이는 가하를 닮아서 감수성이 풍부한 거 같아.”
“……너 진짜. 애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랬지. 너 때문에 가은이 울잖아. 이거 어떡할 거야.”
“어렸을 때는 동화를 많이 읽어 줘야 상상력에 좋댔어. 감동을 누릴 시간을 좀 주지 그래.”
“그건 동화가 아니라 거짓말이고. 너 자꾸 그러면 나 진짜 화낸다,”
내가 가은이를 둥기둥기 흔들어 주면서 달래는 동안, 주현이와 나와의 은근한 말다툼이 오고갔다. 그러자 가은이가 나와 주현이의 스웨터 멱살을 잡고 눈을 부릅떴다.
“가하 삼쫀.”
“어어…… 가은이 왜.”
“엘싸.”
“응.”
“싸우지 마…… 슬퍼.”
가은이는 나와 주현이를 번갈아 보더니 까만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다시 울먹였다. 나는 물론이고 주현이도 당황해서 진정시키려고 했다.
“어어, 미안해. 삼촌 안 싸워. 우리 그냥 노는 거야.”
“맞아. 엘싸는 삼촌을 사랑해. 싸우는 거 아니야.”
“……야.”
송주현, 너 또. 뻔뻔한 소리를 애 앞에서 자꾸 늘어놓는 게 거슬려서 부르니까 가은이가 주현이와 눈을 맞추고 옹알대었다.
“사랑해?”
그러자 주현이가 살풋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삼쫀도 엘싸를 사랑해?”
“어? 어어…….”
갑자기 돌아온 질문에 나는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무슨,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도 아니고. 그래도 곤란한 질문마저도 귀여워 보인다니. 정말 조카는 조카인 모양이었다.
“삼촌도…… 사랑, 하지.”
“그럼 둘이 화해해. 사랑하잖아.”
내 대답을 들은 가은이가 통통했던 뺨을 씰룩이며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와 주현이의 손을 잡았다. 우리가 싸운 걸로 단단히 오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나이에서 보이는 천진함을 이기지 못하고 픽, 웃었다.
“그래. 알았어. 삼촌이 잘못했어.”
“맞아. 엘싸도 잘못했어. 가하 삼촌을 너무 좋아해…….”
내가 가은이를 안고 남은 손으로 주현이의 옆구리를 꼬집자, 그제야 주현이의 입이 다물렸다. 그러면서도 뭐라 말하고 싶은지 붉은 입술을 연신 달싹였다. 하지 마.
진짜 화낼 거야. 내가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있는 동안, 가은이가 우리 둘을 향해서 말했다.
“그럼 눈싸람 만들어!”
“응?”
“눈사람?”
웬 눈사람. 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권유에 다시 멍해졌다. 그건 주현이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영문을 모르는 우리에게 가은이가 짧은 말로 열심히 설명했다.
“엘싸랑 싸우고 나서 화해하려면 같이 눈싸람 만들어야 해. 아니면 화해 아니야.”
“아…… 그래?”
“그렇구나.”
애니메이션의 힘이 생각보다 막강하구나, 싶으면서도 나는 화해하는 행동이 같이 눈사람을 만드는 것이라는 말에 그게 제법 귀엽다고 생각했다. 주현이도 별다르지 않은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우리에게 가은이가 재촉했다.
“얼른, 눈싸람!”
“지금? 가은이 배 안 고파? 이따가 밥 먹고 하면 안 될까?”
“안 고파. 지금!”
잔뜩 흥분한 가은이의 모습에 나는 잠시, 정말 우리를 화해시키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눈사람이 목적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어느 쪽이든 뭐, 아무렴 어때. 귀여우니 됐다.
“……알겠어.”
박 비서님도 저녁 식사 하려면 아직 준비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얼른 눈사람을 만들고 올 생각으로 우리 셋은 패딩과 목도리, 털모자 따위로 무장한 채, 크리스마스 장식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복도의 덧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섰다. 곧게 다듬어진 짙은 색의 상록수들 위로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정원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더하기 위해서 일부러 눈을 치우지 않아 눈사람을 만들기는 참 제격이었다.
나와 주현이는 가은이의 팔을 한 짝씩 잡고서 어린 조카가 눈밭에 너무 푹 빠지지 않게 동시에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눈밭을 걸었다. 그 행동에 가은이가 좋아서 꺄르르 웃었다.
“눈! 눈! 엘싸!”
“그러게…… 엘싸 고향이다. 와아아…….”
“가하, 성의가 없어.”
“……조용히 해, 송주현.”
나름 최선을 다한 거였는데. 실실 웃으면서 찌르는 주현이의 얼굴에 살짝 울컥했다. 엘싸가 뭐라고 내가 이렇게 서러워야 하는지. 아무튼, 우리는 더 추워지기 전에, 식사 시간이 되기 전에 눈사람 만들기를 시작했다. 눈을 대충 뭉쳐서 가은이랑 같이 눈밭에 돌돌돌, 굴리고 있는데 가은이가 주현이가 있는 쪽을 보고 식겁했다.
“엘싸……! 완전 커…….”
“……그러게.”
“역씨 엘싸!”
주현이는 덩치 값을 여기서 하는 것인지, 저 자신처럼 거대한 눈사람을 굴리고 있었다. 그의 허리쯤 오는 눈덩이 크기를 보고서 나는 질겁했다.
‘……그만한 게 굴려진다니.’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주현이가 흐트러진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푸른 눈을 빛내며 웃었다.
“왜?”
“눈사람 완전 큰데.”
“완전 커!”
그러자 주현이가 뿌듯한 얼굴로 왜 눈사람이 그렇게 거대한지 대답했다.
“엘싸가 가하 삼촌을 사랑하는 만큼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서 그래. 많이 사랑해서 큰 눈사람으로 화해하고 싶거든.”
“와아…… 엘싸…… 멋있어……. 하지만 가하 삼쫀은…… 작은데…….”
“가, 가은아. 울지 마. 삼촌도 힘내서 크게 만들 거야. 이거 봐.”
주현이의 말에 너무 감동을 한 것인지 가은이는 우리가 만든 조그마한 눈덩이를 보고 다시 까만 눈을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글썽였다. 나는 가은이를 애써 다독여 주고 다시 야심차게 눈덩이를 굴렸다.
‘젠장 송주현, 이상한 애정론 여기서 펼치지 말란 말이다.’
그러자 우리 둘의 눈사람 크기가 비등비등해졌다. 추위를 막으려고 걸친 패딩 안에서 땀이 주륵주륵 흐를 정도로 눈사람을 굴렸다.
추운 공기 사이로 하얀 숨을 훅훅, 불면서 쉬고 있는 동안 주현이와 가은이는 눈사람 팔을 가져오겠다고 정원 구석에 쌓인 나뭇가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삼쫀……. 엘싸…… 눈싸람 옷 업써…… 추워…….”
“으음…….”
그렇게 찾아온 나뭇가지를 눈사람 옆구리에 꽂아 주니 영 허전했다. 정말 구색만 맞춘 격이랄까. 주현이는 자기 목도리를 풀어서 눈사람에게 둘러 주었다.
“자. 어때?”
“조아! 역씨 엘싸야!”
“그걸 이제 알았어?”
나를 뿌듯하게 바라보는 주현이의 얼굴이 좀 얄밉다. 저 예쁜 얼굴에게 이렇게 질 수는 없어.
‘난 삼촌이니까!’
“…….”
나는 참된 삼촌으로써, 내 목도리를 다른 눈사람에게 걸어 주었다. 그러고는 가은이의 팔을 잡고서 채근했다.
“가은아 봐봐. 삼촌 눈사람도 목도리 했다.”
“웅…… 근데 얼굴 업써. 눈, 코, 입.”
“그래도, 점점 추워져서 가은이 여기 있으면 감기 걸려. 그건 내일 하고 오늘은 가자.”
“시러! 눈싸람 얼굴 업써!”
이런. 얼굴이 없구나. 나는 고민하는 와중에 주현이가 가은이를 번쩍 들어서 집으로 걸었다. 그러자 가은이가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엘싸…… 눈싸람…….”
“응. 삼촌이랑 엘싸가 눈사람 완성 시켜 줄게. 대신, 가은이가 감기 걸리지 않고 집에 얌전히 있어 주면 할게.”
“정말?”
“엘싸는 거짓말 안 해.”
“…….”
“웅…… 알게써.”
주현이가 생각지도 못하게 애를 잘 돌본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거짓말의 도사인지. 나는 그 둘을 쫓아가면서 엘싸보다 못한 삼촌의 위치를 뼈저리게 자각했다.
다시 도착한 집의 복도 덧문 너머로 숄을 두른 가연이가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동생은 덧문을 열어 주면서 가은이를 받고 살짝 타박했다.
“가은이 너, 삼촌들 고생시키고.”
“왜 그래 우리 재밌었어.”
“맞아. 오랜만에 가하랑 옛날로 돌아간 거 같아서 재밌었어.”
우리의 두둔에 가연이가 못 말린다는 듯, 픽 웃었다.
“애랑 놀아 준다고 애가 되어 버리면 어떡해. 하여간 둘 다 똑같기는…… 얼른 들어와. 감기 걸리겠다.”
“흐엣취!”
아까 열심히 흘렸던 땀이 식어서 그런가, 피부 위로 평소보다 서늘한 기분이 헤쳐 들었다. 내가 재채기를 하자마자 주현이가 혀를 찼다.
“가하는 거실에 먼저 가 있어. 눈사람 내가 완성하고 올게.”
“같이 가. 나만 거실에 있으면 가은이가 화해 안 한다고 또 뭐라 한다.”
분명 화해 안 한다고 대성통곡 하겠지. 나는 그려지는 상상에 다시 패딩을 껴입었다. 그러자 주현이가 피식 웃었다.
“그럼, 다락에서 단추 좀 가져와 줘.”
“단추? 얼마나?”
“4개. 두 쌍. 눈사람 눈 하게.”
“아…… 알겠어.”
나는 2층 다락으로 올라가서, 반짇고리를 열고 뒤적거렸다. 눈사람의 눈이 될 단추가 모여 있는 함에는 서로 다른 크기의 색색의 단추가 있었다.
‘눈사람 크기가 꽤 되니, 너무 작아서도 안 될 텐데.’
대충 커다란 크기의 까만 단추 한 쌍을 집어 들었다. 그러다가 유난히 커다랗고 고운 색깔의 단추를 포착했다.
투명한 보석 같은 게 달려 있는 왕 단추 한 쌍.
나는 홀린 듯이 그 단추를 마저 집어 들었다. 다른 색도 아닌, 푸른빛이 감도는 그 투명한 보석 단추의 모습에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주현이…… 눈 같네.”
내가 사랑하는, 그래서 한없이 약해지고 마는 그 눈. 그 생각에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그것도 잠시, 1층 계단참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얼른 일어섰다.
“가하, 다 찾았어?”
“어어. 갈게.”
손에 쥔 단추와 함께 얼른 복도 쪽으로 내려가니, 주현이가 씩 웃고 있었다. 그는 두 손에 당근 두 개와 집 안의 화단에서 주워 온 것인지 조약돌 따위를 한 움큼 쥐고 있었다.
“찾았어?”
“응.”
“가자. 곧 저녁 준비 거의 다 됐대.”
“어어, 그래.”
나는 그와 함께 허전한 얼굴을 하고 있는 눈사람이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바람은 다행히 조금 멈춰 있어서 추위는 아까보다 덜했다. 그가 눈사람의 얼굴 중앙에 당근을 푹 꽂고 조약돌로 입을 만들어 주는 동안 나는, 주머니에 넣어 둔 그 푸른 보석으로 만들어진 왕 단추를 꺼내서 조심스럽게 눈을 만들어 주었다. 아직 코랑, 입은 없지만……
‘주현이 같다.’
그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내게 주현이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뭐해, 가하…….”
“눈 만들어 줬다. 이러니까 눈사람 주현이 너 같지 않아? 키도 크고.”
“…….”
“아, 나머지도 달아 줘야지. 너도 얼른 코랑 입 만들어 줘.”
그가 가만히 내가 만든 눈사람의 눈을 보는 동안 나는 그가 만든 눈사람에게 까만 단추를 툭, 툭, 붙였다. 나는 그렇게 완성시킨 눈사람을 뒤로 하고 가만히 서 있는 주현이에게 갔다.
“다 했어?”
“……응.”
“그래, 그러면 돌아가자. 다들 우리 기다리겠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가는 발걸음을 옮기자 주현이가 내 팔을 잡았다. 정원에 구석구석에 켜져 있는 등불이 그의 얼굴 뒤에서 빛을 밝히며 그 진지한 얼굴에 깊이를 더했다. 싱글벙글 웃던 것은 어디로 가고 갑자기 드리워진 그의 분위기에 의아해졌다.
“왜?”
“좋아서.”
주현이가 나를 천천히 안고서 낮게 웃었다. 뭐가 또 좋을까. 진짜 삼촌을 물리치고 내 조카의 사랑을 받아서 좋을까? 이 얄미운 녀석.
“뭐가? 가은이랑 친해져서?”
“눈사람.”
“뭐야…….”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분위기 잡기는. 나는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주현이를 마주 안았다. 너른 품은 여전히 넉넉해서 나를 안아 주자마자 주변의 추운 공기를 훅, 막아 주었다.
“그냥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도 나고.”
“…….”
“생각해 보니까 우리, 오늘 처음 눈사람 같이 만들어서…… 기분 좋아.”
“그런가.”
예전. 우리가 돌아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날이 그렇게 다시 한 번 찾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품에 기대어서 살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인가. 우리는 겨울을 같이 맞이하기 전에 헤어지고 말았으니. 그는 나를 꼭 껴안고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가하가 있어서 행복해. 예전에도, 지금도…….”
이미 지나간 과거를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지만, 앞으로 우리에게는 나아갈 날이 많았다.
그 나날들 동안, 우리가 미처 누리지 못했던 행복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바랄 것도 없다. 너를 사랑하는 내가 그토록 바라는 건 그거 하나뿐인데.
“나, 아까 동생 와서 미처 말 못했는데…….”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고 보면서 속삭였다. 말에 깃들은 열기는 숨어 있을 수가 없는지 한 마디 한 마디 나올 때마다 하얀 김이 서렸다.
“내가 어렸을 때…… 아무리 힘든 날이 있어도, 그래도 네가 있어서 행복했어.”
“…….”
“그냥, 네 생각만 해도 좋았거든.”
내 어린 날의 행복이자 사랑이었다. 그로 인해서 한없이 슬픈 날들 가운데 웃음 짓게 하던 날들. 그게 다 너로 비롯했는데.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계속 행복할 거 같아.”
“가하.”
“나만 그러지 말고……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의 엷은 색의 머리칼에 툭, 툭 떨어지는 고운 눈송이를 보면서 나는 입을 맞췄다. 우리만 남은 정원에 눈이 우리에게 축복하듯이 고요하게 내려왔다.
“……주현아.”
달싹대는 부드러운 입술 사이로 조그마한 눈이 닿았다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어쩌면 사랑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스며들어 있나 보다.
나는 그의 품에서 부드러운 입맞춤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그의 푸른 눈이 반짝이며 웃었다. 눈사람을 만들면, 화해하는 거라던 가은이의 말은, 한끝차이로 우리를 다시 사랑하게 했다. 아픈 기억도, 그런 날들도, 다. 그를 더 없이 사랑했기에 비롯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플 일도, 슬플 일도 없었을 테니.
‘그러니 앞으로는 우리에게 행복한 날이 더 많기를.’
나는 아직 풀어 보지 않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그렇게 소원했다.
『뻐꾸기 새장』완결
판권
뻐꾸기 새장 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