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Azulejo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하던가. 이 세상에 어느 하나 똑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에, 그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서 부딪히고, 섞이고, 깎여 나가는 과정을 거치면 결코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말이 제법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내 경우에는 예전과 다르게 유난히 한 가지 색깔이 나를 붙잡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색깔이 내 눈에서 떠나지 않아서 불안함에 치료로 시작했던 회화 수업은 일종의 업이 되어 버렸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자꾸만 아른 거리는 그 푸른빛을 하얀 세상에 채우는 날.
내 앞에 놓인 커다란 하얀 캔버스 위로 푸른 염료를 섞은 유화 물감이 두툼하게 발려 나갔다. 아직 붓질이 덜 된 하얀 부분을 제외하면 나머지 면은 서로 다른 푸른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도톰하게 붓 자국이 난 그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오묘하게 섞여드는 그 서로 다른 푸른 빛. 그를 생각나게 하는, 푸른빛. 나를 아프게 하면서도…… 또 사랑하게 만드는 그 색깔.
나는 미처 채우지 못한 곳을 칠해 보려고 염료를 찾다가 바닥난 물감 통을 확인했다.
“……이런, 물감 다 썼네.”
유화라는 것이 겹겹이 칠하고 바르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물감을 쓰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물감이 바닥이 날 때쯤 미리 화방에 가서 항상 모자람 없도록 구비해 두었는데, 오늘은 깜빡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삐걱대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허리를 폈다.
“으.”
한 번 앉아서 작업을 시작하면, 꼼짝도 하지 않는 편이라 이따금씩 일어날 때마다 몸이 제법 쑤시곤 했다. 대충 몸을 풀고 2층 작업실의 목조 발코니 쪽으로 다가가서 작업을 위해 가려진 미닫이문을 열고 바깥의 정원을 보았다.
“……날씨 좋다.”
그러자 컴컴했던 작업실로 봄바람이 살살 불어오고, 한낮의 볕이 봄기운으로 충만해 파릇한 새싹을 드러내고 있는 정원 위로 쏟아지는 모습에 눈이 부셨다. 봄 냄새가 만연하게 풍기는 정원에서는 이따금씩 참새 같은 것들이 가지 사이로 지지배배 울었다. 떨어진 물감을 사기 위해서 나가려던 것도 잠시, 기와가 깔려 있는 높다란 처마 너머로 그 따뜻한 볕이 기울여 들어오는 것을 즐겼다. 한없이 눈부신 볕에 적응해 보려 나는 연신 눈을 깜빡였다.
‘오늘 같은 날이 휴일이었으면 좋았겠다. 그럼 주현이도 옆에 같이 있을 텐데…….’
순간 마음속에서 치켜드는 아쉬움에 나는 하얀 구름더미가 둥둥 떠다니는 푸른 하늘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평범한 하루 중에 좋은 순간이 있다면, 그 애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
누군가에게는 조금 시시할 정도로 단순해 보이지만 그게 사랑이 아닐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얼굴에 스며드는 따뜻한 봄볕을 즐기면서, 주말에 날이 좋으면 같이 어디라도 가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행복한 생각도 잠시, 이러고 있다가 더 늦으면 화방이 문을 닫겠다 싶어서 얼른 외출준비를 했다. 잠시 나갔다 오는 것이니 그다지 외출 준비라고 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문자로 잠시 화방에 다녀오겠다고 연락을 남겨 두고 별채를 나섰다.
화방으로 가는 지하철을 갈아타는 와중에 주현이가 답장을 줬다.
[알겠어. 그럼, 가하 일 끝나고 점심 같이 먹자.]
‘점심…… 회사에서 같이 먹는 걸까.’
주현이네 회사랑 화방이 가까운 곳에 있긴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알겠다고 답장을 하면서도 문득 궁금해졌다. 그나저나 주현이는 어디서 밥을 먹을까.
‘……자기 사무실에서? 아니면 식당에서? 주현이 성격상 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곰곰이 상상했다. 원체 까다로운 녀석이라, 같이 있어도 제가 요리를 하거나 내가 해 준 것이 아니면 잘 먹지를 않았다. 그런 녀석이 직원들하고 생판 모르는 남이 해 준 밥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좀 어울리지도 않기도 하고. 까탈을 부리는 모습이 그려진다고 하나. 그렇게 상상하자니 직원들이 좀 불쌍했다. 개도 밥 먹을 때는 안 건드린다고 하지 않던가.
‘나야, 매일 같이 먹고 자고 하니 익숙해서 별 생각이 없다지만…….’
그렇게 내가 모르는 회사 속 주현이를 상상하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주현이를 가지고 잡생각을 하다 보니 화방이 금방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화방의 지하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눈에 익은 점장님이 인사했다.
“어, 왔네. 오랜만이에요? 그때 사간 물감, 그새 다 떨어졌어요?”
“네. 이번에는 좀, 큰 그림을 색칠하다 보니.”
“아 그래. 저번에 주문했던 캔버스 사이즈가 좀 됐지. 오늘도 파란색 사 갈 거죠? 안 그래도 이번에 새로 수입한 거 들어왔는데…….”
어쩌다 보니 파란색 물감만 사 가는 내가 특이하게 인식된 모양이었다. 그는 넉살좋게 웃으며 물감이 진열된 칸을 가리켰다.
“그래요?”
“예에. 미대 친구들이 쓸어 가는 거, 내가 우리 청년 좋아할 거 같아서 파란색만 하나 몰래 감춰 뒀지.”
“어……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그, 감사합니다.”
“뭘. 잘생긴 청년이 여기로 자주 오는 덕분에 우리 매출이……. 아무튼, 구경하고 있어요. 내가 창고에서 빨리 가져올게.”
그는 내가 자주 오는 게 기쁜 모양이었다. 그럴 법하지. 유화라는 게 덧칠하다 보면 쓰는 물감 양이 제법 되어서 한 번 올 때마다 꽤 많이 구매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반가운 손님이 되어 버린 건가?’
박 비서님이 여기가 제일 크고 좋은 화방이라고 해서 별다른 생각 없이 온 거였는데. 나는 물감이 진열된 매대로 들어가면서 파란 계통의 물감을 이것저것 구경했다.
‘이번에는……. 여기를 써 볼까.’
같은 푸른색이라고 해도 회사마다 농도, 채도, 명도 같은 게 조금씩 달라서, 그 미묘한 차이를 섞고, 칠하면서 드러내는 게 제법 재미있었다. 이런 걸 생각지도 못한 재능, 이라고 하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를 못해서 내가 만드는 그림들이 좋은지 나쁜지는 잘 몰랐다. 물론 주현이는 더 없이 좋아하고 칭찬하지만 그건 주현이니까.
‘신뢰가 없기 보다는……. 그냥, 다 좋아해서 탈이지.’
무엇보다도 나 또한 내 그림이 훌륭하고 말고를 떠나서 그냥 좋았다. 내가 사랑하는 그런, 빛깔이 물들어 가는 순간. 그 하얀 시간 속에서 멈춰 있는 게 좋았다, 그게 전부다.
그날 이후로 내가 어디 다치기라도 할까, 거친 일은 물론이고 단순한 일도 못하게 했던 것에 좀이 쑤셔서 이것저것 하다가 나름 괜찮은 일을 발견한 셈이었다. 그림이 하나하나 완성될 때마다 은근한 뿌듯함도 있고. 이럴 때에는 녀석의 까탈스러운 성격이 도움이 되었다고 해야 할지.
「안 돼. 가하는, 나 때문에 아직 많이 아픈걸.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우리 회사에서…….」
예전에 내가 일을 하겠다고 하자마자 주현이의 안절부절 하던 얼굴을 떠올리며 킥킥 웃었다. 몸이 상하면 어쩌냐며 일 하러 나가는 게 싫다고 말은 하고 싶은데, 또 내가 미워하는 게 무서워서 제대로 말을 못하던 녀석.
사실 주현이가 넘겨준 힘이 버거워서 가끔씩 내 몸이 며칠씩 앓는 것도 있었으니 주현이의 걱정이 영 쓸데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주현이 옆에서 일하는 건 좀…….’
그 옆에서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가지고 응당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우길 것 같아서 그다지 내키지가 않았다. 게다가 상사의 애인과 일하는 직원들은 도대체 무슨 죄일까.
‘상사보다 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아마…….’
나이를 먹어도 영 철이 없던 주현이의 제안을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우스운 생각에 푹 빠진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정신이 깼다.
‘점장님인가.’
“네. 가져 오셨…….”
내 생각과 달리 나를 부른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
“저, 저기요.”
한 대학생쯤일까. 제법 앳되어 보이는 여자 두 명이 내 앞에 있었다. 누구지.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한 명이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여기서 자주, 봤는데 정말 마음에 들어서요……. 그럼.”
그렇게 말하며 내 손에 종이쪽지를 쥐어 주고 토도독 뛰어갔다. 나는 살짝 구겨진 종이쪽지를 받고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게 뭐…….”
[혹시 만나는 사람 없으면 연락하고 지내요! 010-xxxx-xxxx]
‘번호?’
“……만나는 사람?”
갑자기 웬 연락처지. 마치 지하철 광고 찌라시처럼 쥐어 주고 간 여학생의 쪽지를 들고서 고민했다.
“……전도하는 건가.”
나는 무교인데. 이런, 사람을 잘못 봤다. 나는 그녀의 헛된 노력에 고개를 저으며 처치 곤란한 쪽지를 입고 있던 체크무늬 남방의 앞주머니에 버릇처럼 넣었다. 주변에 쓰레기통이 없던 탓이다. 그때 점장님이 살짝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내게 다가왔다.
“아이고. 너무 꽁꽁 숨겨 두는 바람에 찾느라 오래 걸렸어요. ……자, 여기.”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독일제예요. 비싸지만 색감이 좋아서, 들여오자마자 인기가 좋아요.”
“그런가요.”
그가 넘겨준 염료는 이제껏 처음 보는 회사의 염료긴 했다. 이건 무슨 푸른빛을 보여 줄까. 나는 마치 깜짝 선물을 받은 아이의 마음이 되어 살짝 들떴다. 그런 내게 점장님이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학생, 혹시 전시회 같은 거…… 했어요?”
“……전시회요?”
“졸업 전시회라든지? 요즘 슬슬 준비할 텐데. 어디 학교인지는 몰라도, 혹시 하면 알려 줘요. 우리가 홍보해 줄게요.”
“어…….”
챙겨 주는 마음은 참 고맙지만, 아쉽게도 학교를 다니는 게 아니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큰 화방이라서 손님을 살뜰히 챙겨 주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졸업 전시회라. 그런 것도 있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그, 학교를 안 다녀서요.”
“아, 그럼 휴학생? 졸업생?”
“아뇨……. 애초에 학교…… 안 들어갔는데요.”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전에 가연이 학교 갔을 때도 그렇고, 시내에 나오면 자꾸 나를 학생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한 트럭이었다. 진짜로 내가 그렇게 어려 보이는 건가.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나이 먹고 어려 보이는 거에 좋아하면 그건 진짜 늙은 거라고 하던데.’
미묘한 감정에 나는 뭐라 더 대답을 해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남들이 평범하게 생각하는 학교를 나오지 못한 게 살짝 부끄럽기도 했고. 내가 대답을 망설이는 틈에 점장님이 더 당황했다.
“아, 그럼 혹시, 바쁘지 않으면…… 우리 화방에서 알바 하는 건 어때요? 크게 어려운 일 없어요. 시간대도 학생 되는 시간에 잘 맞춰 줄 테니까. 다른 데보다 페이도 잘 쳐 줄게요. 일하면 물감이나 붓 같은 것들도 다 직원 할인 되는데.”
“……알바요?”
갑자기 들어온 알바 권유에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무엇보다도 직원 할인. 물론 돈이 넘치도록 많은 주현이랑 살면서 돈에 아쉬운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심 부담을 끼치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그림을 그릴 때 물감을 한두 개 쓰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화방이면…… 주현이도 괜찮다고 하지 않을까? 공사판처럼 큰 힘이 드는 것도 아닐 테고.’
“감사합니다. 좋은 거 같아요. 근데.”
“아유, 좋아요. 그럼 언제부터…….”
“아직은 결정을 못하겠어서……. 대답을 나중에 해도 괜찮을까요?”
그래도 한 번 말은 해 줘야 섭섭하지 않겠지. 나이를 먹을수록 은근히 잘 삐지는 주현이의 성격을 떠올리면서 점장님과 함께 계산대로 갔다. 그는 고개를 재빨리 끄덕이면서 다시 한 번 어필했다.
“물론이죠! 정말 페이는 섭섭하지 않게 쳐줄 테니까, 꼭 잘 생각해 봐요.”
“감사합니다.”
내가 아까 이것저것 집어든 물감들과 같이 합쳐서 계산을 마칠 참에 화방에 들어오는 고객들이 투덜거렸다.
“아, 비 때문에 가방 젖었어.”
“오늘 비 온다고 했던가?”
“몰라.”
쫄딱 젖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에,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아직, 비가 오는 날이 불편했다.
마음은 이어진다고 해도 몸은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여전히 안정을 찾지 못하고 파도쳤다. 그런 내게 점장님이 혀를 찼다.
“갑자기 비가 오는 모양이네. 학생 혹시 우산 있어요?”
“아…… 아뇨.”
“그럼 우산 챙겨 갈래요? 내가 빌려 줄게요.”
그때 마침 문자가 오는지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진동했고, 내가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점장님은 우산을 찾으러 갔다. 나를 지나치는 화방 손님들 사이에서 풍기는 비린 물 냄새를 맡으며 핸드폰을 꺼내자, 화면에는 박 비서의 문자가 남겨져 있었다.
[갑자기 비가 오니 화방 안에 기다리고 계세요. 곧 도착합니다.]
‘아, 다행이다.’
주현이도 비가 오는 것을 봤나 보다. 박 비서에게 알겠다고 답장을 해 놓고, 계산대를 피해서 있었다. 나 말고 다음 차례로 계산하는 사람들이 줄 서 있어서 가만히 있기도 좀 불편했다. 사람들이 비를 피하려고 겸사겸사 화방을 들리는지, 들어오는 사람마다 다들 몸 여기저기에 젖어든 빗방울을 털면서 들어왔다.
잠시 내리다 마는 소나기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제법 빗줄기가 굵은 모양이었다. 나는 오싹해지는 팔뚝을 다른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박 비서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회사가 가까운 덕분인지, 점장님이 우산과 함께 돌아오기도 전에 박 비서의 문자가 먼저 왔다.
[도착했습니다. 올라오세요.]
“학생, 우산!”
“괜찮아요. 친구가 우산 가지고 왔어요. 감사합니다.”
“아, 그래요? 다행이네.”
점장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고 화방을 나섰다. 그러자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 소리가 들리며 눈앞을 가득 채웠다. 다들 갑자기 만난 소나기에 당황한 듯, 건물 입구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추위인지 긴장인지 으슬으슬 떨려오는 차에 박 비서가 어디 있나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찾았다. 문자 내용과 달리 깔끔한 양복차림을 한 그의 모습을 곧 바로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싸늘해지는 손바닥의 온도를 느끼며 점점 안달 나는 심장 근처를 꾹, 눌렀다.
‘다시, 폭주……하는 건가.’
아직도 이 심장의 고통은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주현이가 넘겨준 힘은 비 오는 날 유독 심하게 요동치며 아프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장마철이 되는 여름이 오기 전에 한국을 잠시 동안 떠나서 메마른 날씨의 도시에 머무르곤 했다. 내가 괜찮다고 우겼다가 크게 앓아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탓이다.
그 이후로 여름을 제외하고 간간히 피하지 못하는 비가 오는 날은 꼭 일기예보를 확인하고서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편이었다. 나는 손으로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고동치는 가슴팍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빨리, 빨리 오면 좋겠는데…….’
먹먹해지는 귓가로 급하게 뛰는 구둣발소리가 처벅처벅 대는 빗소리에 섞여서 들어왔다.
“가하!”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목소리도.
“……주현, 아.”
저려 오는 고통으로 숙였던 고개를 들어서 보니, 수트 위로 걸친 코트 여기저기에 빗방울을 가득 매달고 있는 주현이가 우산을 들고 내 앞으로 급하게 달려왔다.
‘일, 하고 있을 텐데. 어떻게……’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 사이를 헤치고 다가오는 그의 다급한 표정을 보면서 나는 손을 뻗었다. 방금 계산을 마쳐서 물감이 들어 있던 봉투가 내 발치에 툭 떨어지며 허물어지는 내 몸을 주현이가 안았다. 그래도 그가 들고 있던 우산으로도 미처 막지 못한 차가운 빗방울이 내 뺨 위로 한 두 방울 떨어졌다.
‘따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받치고 있는 품이 제법 따뜻했다. 나는 고통으로 인해서 굳어 가는 몸을 그에게 온전히 맡기고 눈을 느리게 껌뻑였다. 폭주로 인한 열감 때문에 은근히 달아오른 내 뺨을 주현이의 차가운 손이 덜덜 떨면서 쓸어내렸다. 지금 이렇게 내리는 비와 같이 그 손도 차가운 온도인건 매한가지인데, 유독 주현이 손은 그냥…… 기분이 좋았다.
아니면, 생각지도 못하게 만난 그가 반가워서 그랬을까.
‘어차피 만날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주현이는 힘이 없는 나를 잘 받쳐서 안아 올렸다. 동시에 급하게 달려오는 박 비서가 보였다.
“가하 도련님! 괜찮으세요?”
“…….”
나는 괜찮다고 대답을 해 주고 싶었지만, 폭주로 인해서 요란하게 고동치는 심장에서 피어오르는 열기가 온 몸을 잠식해 가는 탓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내 머리를 주현이가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가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거 같아. 집에 가야겠어. 어서 운전해.”
“예.”
박 비서는 내가 떨어뜨린 물감을 서둘러 줍고 주현이를 안내했다. 차 안에 들어오니 빗소리도 덜하고, 특유의 축축한 촉감도 느껴지지 않아 심장이 살짝 진정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미안.”
“……뭐……가.”
뒷좌석에서 나를 무릎 위로 두고 꼭 안아 주는 그의 품이, 한없이 따뜻해서 더없는 위안이 되었다. 가이드의 힘을 내게 다 넘겨주는 바람에 나를 구속하고, 부여될 가이딩은 더 이상 없지만……. 내 심장에 고여 있는 그의 힘은, 이렇게 비 오는 날이면 주현이가 꼭 옆에 있어야만 함께 공명하며 진정이 됐다. 나는 잘 모르지만 각인의 상대라는 건, 가이딩을 해 주지 않아도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가하, 많이 추워?”
나는 추위인지, 아니면 아직 연약하게나마 들려오는 빗소리 때문인지 떨려오는 몸을 그에게 더욱 묻었다. 그러자 주현이가 어디서 났는지 담요를 내 몸 위로 덮어 주며 등을 토닥였다. 나는 손끝에 선연한 온기를 덧그리며 눈을 감았다.
“괜……찮아.”
“…….”
“네가 옆에 있잖아…….”
괜찮았다. 어찌 되었든 그가 이렇게 내 곁에 있으니, 괜찮아질 것이다. 아픔도 한 순간이었다. 그러면서도 문득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동안 나 때문에 많이 아파왔을 것이니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그때처럼, 혼자서 아픔에 겨워서 불행한 사랑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안해.”
주현이는 내 몸을 돌려서 열로 불긋한 내 눈을 내리 깔아 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푸른 눈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왜, 그래. 나 괜찮아…….”
그에게 안겨 있는 동안 하얀 셔츠의 매끄러운 면이 내 뺨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나는 그의 품을 껴안으면서 소원했다.
“점심……은, 다음에 같이 먹자.”
사랑으로 사람이 변화한다면. 우리 불행이 바뀔 수 있다면.
“……응.”
그저 행복했으면 좋겠다.
너와 나 마주보고 웃을 수 있는 매일이면 참 좋겠다. 내가 네 곁에서, 네가 내 옆에서 서로의 아픈 상처 같이 보듬어 주면서 행복하게 살면 했다. 열에 들뜬 입은 오늘 생각했던 것들을 살살 풀어 해쳐내었다.
“오늘 날이 좋아서 정원을 구경하다가…… 네 생각이 났어.”
“……그랬어?”
“응, 주현이 너랑 같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나 혼자서 행복하면 그게 사랑인가.
이번에는 그런 힘든 사랑은 하고 싶지 않다. 불행해지고 싶지 않다.
“……나도.”
너도, 나도 그러기를 바란다.
“나도, 가하 생각이 나서…… 연락했어.”
“그랬구나…….”
그 생각을 하는 게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나 보다. 내 등을 잔잔하게 토닥이는 손길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주현이는 키도 크고, 손도 참 크다. 그러다 보니 내 등에 얹힌 손도 은근히 무거웠다.
굳이 눈을 뜨고 보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그런 무게.
평생을 지고 가야하는 사람의 무게.
“사랑하면 서로 닮아 간다고 하던데…….”
혹은 사랑의 무게.
좋은 날에도, 나쁜 날에도 서로에게 기대어 가면 살아가는 그 당연한 하루. 나는 흐려져 오는 눈을 간신히 뜨고 고백했다.
“우리 벌써 닮아서…… 생각도 똑같이 하는 걸까…….”
그래서 내 하루에, 이토록 평범한 일상에, 매 순간 마다 온통 너로만 채워져 있나보다. 그러니 오직 네 생각만 하도록 변화된 이런 내가, 사랑을 하지 않는다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정말…… 너를 많이 사랑하나 봐.”
주현이는 조용히 나를 꼭 안았다. 그의 품에 깊숙이 빠져들수록 내리는 빗소리가 멀어져 갔다.
어쩌면, 그의 사랑도 매 순간마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것 같다.
좋은 날에는 푸른 하늘과도 같이 나를 포근하게 안아 주고, 이렇게 비오는 날에는 우산 같은 사랑이 되는 것처럼.
“나도…… 가하를 많이 사랑해.”
이런 날, 나를 아프게 하는 저 밖에 내리는 비로부터 막아주려고 애쓰는 그의 사랑. 그 안온한 그늘 아래에 있기만 한다면, 나는 아파도 아프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만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눈을 떴을 때에는, 주현이랑 같이 자는 침대 위에 곱게 눕혀져 있었다. 내 옆에 같이 누워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보다가 나는 뻣뻣한 손을 올려 감겨 있는 그의 눈가를 살살, 쓸었다. 그럼에도 촘촘한 갈색 속눈썹은 미동도 없는 게 나 때문에 급하게 달려오느라 제법 피곤한 모양이었다.
“……자?”
입고 있던 수트도 제대로 벗지 못한 모습이, 급했던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어차피, 주현이가 옆에 있을 테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텐데. 나는 일시적인 마비로 굳어진 손을 올려서 그의 목덜미에 꼭 잠겨 있는 하얀 셔츠의 단추를 서투르게나마 툭, 툭 풀어 주었다. 꼭 맞춘 옷이 살짝 풀려 가며 헐렁해지고 하얀 속살이 슬며시 보이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색, 색 들리는 숨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참 예쁘다.’
어디서 이렇게 예쁜 애가 왔을까. 그런 애가 어쩌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을까. 나는 편하게 베개에 누워서 주현이의 고운 얼굴을 구경했다.
‘어렸을 때도, 아니 어렸을 때보다 더 예쁜 것도 같고.’
바라만 보던 마음이 결국 참지를 못하고 몰래, 입술이 움직였다. 쪽,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입맞춤이었는데 눈을 뜨니 주현이의 깊은 파란 눈이 나를 가득 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나는 당황했다. 그러자 주현이의 붉은 입술이 휘어졌다.
“……가하.”
“으응.”
내가 한 짓이 순간 부끄러워서 좋아하는 그 눈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 시선을 피해 보려고 고개를 돌린다 한들, 같은 이불 안에 있는 지라 그것도 별달리 소용이 없었다. 그는 내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고 귓가에 속닥대었다.
“폭주는…… 괜찮아?”
“아마도, 그런 거 같아……잘, 모르……겠어.”
서늘한 손길이 닿은 아랫배에 긴장이 더해졌다. 그 반응에 그가 귓가에 대고 살짝 웃었다. 유난히 낮은 목소리가 울리는 소리는 제법 간지러워서, 머리카락을 쭈뼛 세우게 했다. 그는 침을 한 번 느리게 삼키고, 내 아랫배를 연신 쓰다듬으며 내 몸을 그에게 돌려세웠다. 그 손길에 어린 뜻이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말릴 수도 없는 게, 폭주를 가라앉히기에는 이 방법이 제격이었다.
“그럼…… 괜찮은지 한 번 볼까.”
“……으응.”
“심장은, 좀…… 괜찮아?”
파란 눈이 나를 향해서 기쁘게 웃었다. 동시에 내 아랫배를 쓰다듬다 말고 내 심장이 있는 가슴팍을 부드럽게 쥐었다. 보통의 체온보다 낮은 손의 온도에 가슴의 젖꼭지가 금방 딱딱해졌다.
“차, 가아. 으응. 괜, 괜…….”
“차가워? 열이 많이 나나 보네.”
그의 손이 지나치며 자극을 받은 젖꼭지가 공기를 만나면서 더욱 바짝 섰다. 그의 긴 손가락이 심장의 고동을 느끼는 듯, 정점이 있는 곳을 살며시 눌렀다.
“예쁘게 섰네.”
“지, 금…… 흐읏, 네, 으응.”
신음하던 나를 보던, 주현이가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내 티셔츠 자락을 올렸다. 제가 만든 내 몸의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살짝 웃다가 혀로 크게 핥아 올렸다. 그의 손과 다르게 따뜻한 혀가 지나간 젖꼭지가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주현이가 본격적으로 내 가슴을 빨아대면서 내 허리춤의 바지 버클을 투툭, 풀어내렸다. 나는 그의 머리를 팔로 감싸 안고 가슴이 자극 당하는 쾌감에 울었다.
“아응, 너무, 세게…… 빠아. 으응.”
“너무 세? 그럼, 살살 할까.”
“그흐, 으. 아, 하아.”
그는 가득 고인 침이 쩍쩍대는 소리가 나도록 천천히 빨았다. 느리게 빨아대는 건 아까보다 더 자극적이었다. 따뜻한 입안에서 굴려지는 움직임과 감촉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가슴이 좀 약한 부분이었는데 주현이가 섹스 할 때마다 자꾸 빨아대는 탓에 너무 예민한 성감대가 되어 버렸다. 겨울이 아니면 티셔츠를 입을 때마다 제법 신경이 쓰일 정도였다.
“하으, 흐, 시르…… 읏!”
그는 혀로 젖꼭지를 굴리면서 이로 살짝살짝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내 아랫배도 같이 경련했다. 그가 버릇처럼 잇자국을 가슴팍에 슬쩍 남길 때마다 뒷구멍이 움찔대고 내 앞섬마저 점점 축축해지는 감촉에 내가 애원했다. 이렇게 괴롭힐 바에는 그냥, 빨리 하는 게 낫다. 아니면 내가 쾌감에 안달이 나는 모습을 그가 즐기는 고약한 버릇이 있거나.
“그, 냥. 넣으…… 흣. 흐. 줘어. 빨리이……으응.”
“……타고 난 건가.”
“무슨, 응.”
주현이가 혀를 차면서 피식 웃었다. 내가 너무 몸이 예민하다는 건가. 그것도 다 주현이 네가 자극하는 것 때문에…… 내가 다른 생각을 하기 전에, 주현이는 내 이불 속에서 나오며 제 바지춤을 내리고 커다란 물건을 꺼냈다. 그래도 같이 살면서 자주 봐서 익숙할 법도 한데.
‘저 크기는 도저히…….’
나는 눈을 살짝 감았다. 아직도, 저게 어떻게 내 안에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그가 말하는 대로 몸이 길들여져서 괜찮은, 건지. 그는 앞선 전희로 인해 떨리는 둔부를 가르고 제 물건을 끼워서 슬쩍, 슬쩍 마찰 시켰다. 두툼한 귀두가 입구를 두드리는 감촉에 허리에 힘이 들어가면서 파득, 떨렸다.
“읏.”
“그래도 폭주할 때마다 자주 했는데, 왜 이렇게 처음같이 굴어. 응?”
그런 내 반응을 보았는지 그가 내 입술에 연신 입맞춤하면서 웃었다.
“내가, 흐으아. 응. 언제……. 읏!”
맞닿은 살결이 체액들로 찰싹대는 중에, 그가 비좁은 입구를 기어코 파고들었다. 즉시 묵직하게 채워지는 복부의 감각에 내가 고개를 돌리고 베개로 내 입의 신음을 막았다. 늘 삽입 때만 되면 적응 되지 않는 그 크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힘든 건 나뿐만이 아닌지, 주현이 또한 넣다 말고 깊은 숨을 토해냈다. 그에 다 삽입을 한 줄 알고 착각을 했다.
“……후우.”
“다, 들어…… 하으. 갔…….”
“아직이야. 윽.”
착각도 잠시. 그가 천천히, 하지만 끊임없이 내 다리 사이로 집어넣는 움직임에 허벅지가 경련하다 못해 벌어졌다. 갓 태어난 기린마냥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그가 자기 허리에 두르고 뭉근하게 허리를 놀렸다. 마치 묵직해서 턱턱 막히는 숨을 고를 기회를 주는 것처럼. 그 배려를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아읏! 잠, 잠시만. 움직…… 아흐, 흐응. 으!”
“안에서 오물오물 씹어대는데, 이걸 어떻게 가만히 있어. 하아.”
“그렇게, 아으응, 하으. 말……. 커, 천천히이. 흐으아.”
넣으라는 말을 잘 듣는 것을 칭찬해 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는 내 배의 긴장이 살짝 풀린 것을 느꼈는지 곧장 허리를 치대며 몸을 숙였다. 워낙에 덩치가 큰 녀석이라 몸으로 누르기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거친 움직임을 다 받아내야 했다.
“하으, 으응. 응! 거기, 이. 싫, 응, 어.”
그가 주는 쾌감으로 일렁이는 내벽을 사정없이 쳐대는 쾌감에 내 몸을 가둔 팔에 머리를 기대고 신음했다.
“싫어?”
그러자 그가 그 부분만을 집요하게 쳐올렸다. 그러자 배 안쪽이 바르르 경련했다.
“하으!”
“싫은데, 왜 나갈 때마다 꼭꼭 물어.”
“몰, 으응. 하아, 앙!”
그러다가 그가 가장 안쪽으로 꾸욱, 누르며 하체를 바짝 붙였다. 더 나아갈 곳도 없을 곳을 파고드는 고통에 내가 울었다. 왜, 그런…….
“참, 셔츠 주머니에 있던 전화번호. 그런 거 왜 받았어. 연락할 생각이야? 그 여자가 그렇게 예뻤어?”
“아으! 아, 아파. 하아. 그런, 적 없……. 으읏! 주현…….아.”
“물어보잖아. 나보다 예뻤냐고.”
그 고통에 눈가에 눈물이, 살며시 배어 나왔다. 고통으로 정신이 늘어지는 가운데 들리는 주현이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내가 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살짝 허리를 물리며 내 눈꼬리에 달린 눈물을 핥았다. 피부 위로 말캉한 감촉이 지나가면서 그제야 생각이 났다.
‘화방에서…… 받은 거, 말하는 건가.’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주현이가 피식 웃으면서 허리를 천천히 들썩이고 더운 숨을 내 머리 위로 내뱉었다.
“자꾸 거짓말하니까, 벌 받아야겠다 우리 가하.”
“내, 아으. 흐응, 앙. 언제…….”
나쁜 녀석, 주현이는 꼭 관계를 하면서 기어코 한두 번은 눈물 나게 만들었다. 그는 은근히 내가 우는 모습을 좋아했다. 어릴 때도, 커서도 그러했다. 이번에도 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등을 꼭 안고서 애원했다.
“시흐으. 예뻐해……. 응! 줘, 흐읍…….”
“……젠장.”
그는 나지막이 한탄하며 내 이마에 키스했다. 그리고 내 허리를 붙잡고 허리를 밀어붙였다. 그러자 내벽의 안쪽에 꼭 다물린 끝을 파고들면서 내 배를 불룩하게 팽창시켰다. 동시에 처음으로 느껴 보는 쾌감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이게, 무슨.
“하아, 앙, 아응! 하으아, 안, 돼…….”
주현이의 선단이 간신히 벌어진 곳을 짓누르며 내 눈앞이 번쩍거리게 했다. 알 수 없는 곳을 억지로 벌린 탓인지, 내벽이 그의 물건을 더욱 꼭 잡고 놓지 않았다. 그는 숨을 간신히 고르는 내 끝에다가 허릿짓을 계속하며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아으, 하아, 아앙, 조, 흐으아…….”
“같이 갈, 까.”
결국, 그의 물건이 더욱 팽창하며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그의 목을 껴안고 울었다.
“으응, 아!”
“하아.”
눈앞이 아득해지는 쾌감 속에서 그는 결국 제일 깊은 곳에 사정했고, 나도 부푼 배를 가지고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뜨끈한 그의 체액이 내 배의 안쪽에 고이는 감각을 느끼며 내가 뺨을 베개 위로 비볐다. 아직도 척추를 타고 흐르는 쾌감이 파도처럼 덮쳐들고 있었다.
“흐으, 으응, 으, 읏.”
“이렇게 보면, 임신한 거 같아.”
그런 내게 주현이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내 배 위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 손길로 복부를 찌를 듯이 파고들어 도드라지는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가하는, 어느 쪽일 거 같아?”
“무슨, 흐으. 소리…… 하으.”
방금 전 사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물건은 여전히 내 배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아마, 몇 번은 더 해야…… 풀릴까 말까 하겠지.
“우리 아기 말이야.”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에 내가 눈물이 고인 눈을 깜빡이는 동안, 주현이가 내 귀에 입을 맞추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동시에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내 얼굴위로 내려오면서 얼굴을 간지럽혔다.
“……여자애일까, 남자애일까.”
“……읏.”
내 귓바퀴와 골을 핥아 내리면서 연골 주위를 빨아대니,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신음에 무어라 대답할 기회도 없었다. 그의 그와 이어진 접합부로 새어나오는 체액을 느끼면서 나는, 그의 목을 껴안았다.
“몰, 라아. 하응, 하으.”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리고 다시 그가 나를 껴안고 자리를 잡았다. 이번에는 내 몸을 세워서 그의 품에 기대게 한 채로 서서 허리를 들썩이는 탓에 안 그래도 깊게 파고든 물건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불룩하게 부푼 아랫배가 더욱 도드라지는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몰라, 하아, 모르겠……으흐.”
“하다 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아.”
‘나랑, 주현이랑…… 아이……’
그는 내 눈가에, 뺨에 연신 키스하면서 내 허리가 뜨는 것을 연신 잡고 내리면서 쳐올렸다. 동시에 그가 내 가슴을 슬쩍 슬쩍 물었다. 그럴 때마다 아랫배가 더욱 진동하면서 허리 근처가 울렸다. 주현이는 땀이 배인 내 둔부를 콱 쥐면서 살짝 웃었다. 그 거친 손아귀에 구멍이 죽, 수축했다. 그러자 그는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읊조렸다. 쾌감이 터지는 부분을 찔러주다 마는 움직임에 발가락이 꼼질대며 그의 품에 나를 더욱 가까이 대었다.
“가하가, 아픈 거 같아서…… 조금만 하려고 했는데.”
“계, 소……해애…… 흐읏.”
“아프게 했다고 더 미워하면 어쩌지.”
“더, 흐으, 하으……응,”
그는 내 귓등을 살짝 살짝 물면서 잇자국을 내는지 찌릿한 쾌감이 뒷목을 타고 후벼 팠다.
“근데 어차피 이미 나를 많이 미워하니까……. 할까?”
“으응. 해, 해 줘…….”
그래도 모자라는 쾌감을 찾고 싶어 내 안에 있는 그의 물건을 타고 앞뒤로 문지르니 주현이가 자잘하게 입을 맞춰 주며 웃었다.
“욕심쟁이네, 우리 가하.”
어느 푸른 봄날에 비 내리는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