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 이후로 동생은 빼먹지 않고 내 병실로 찾아 왔다. 동생이 자주 찾아 올 때쯤엔 나도 일반식을 먹었다. 그걸 본 동생은 우리 병실 밥이 참 맛있어 보인다는 특이한 이유로 점심 때 마다 나를 찾았다. 어떤 이유든지 나는 그저 동생과 같이 밥을 먹고, 나 혼자 있기에는 너무 커다란 병실이 즐거운 웃음소리로 채워지는 것이 좋았다.
“아하하, 그래서 말인데……. 밥 더 먹을 거야?”
“아니. 배불러.”
“나두. 커피 마실까? 여기 병원 카페 커피가 맛있더라구.”
“응, 내가 갈게.”
음식이 남은 식판을 침대 근처에 세워 둔 카트에 실었다. 그러자 동생이 만류했다.
“아냐. 쉬고 있어. 나 요즘 다이어트 하느라 움직여야 해.”
“네가 무슨 다이어트를 해…….”
“남자들은 모른다니까. 으휴, 나, 갔다 올게!”
날씬하기만 한데 무슨 다이어트를 한다는 건지. 동생의 티 나는 새하얀 거짓말에 나는 헛웃음이 나올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재빨리 병실을 나서는 동생의 발걸음이 내 말보다 더 빨랐다. 복도를 걸어가는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나는 침대 헤드에 세워진 베개 위로 툭, 몸을 기댔다.
하루하루 갈수록 몸은 좋아지다 못해 정상을 웃돌았다. 지금 퇴원해서 노가다를 뛴다고 해도 별달리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동생과 대호, 그리고 주현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내가 병원 밖을 나가기라도 하면 어디 쓰러질 사람처럼 하루만 더, 하루만 더 병실에 있으라고 매일 아침마다 밤마다 내 팔을 붙잡기 일쑤였다. 암만 봐도 멀쩡한 사람을 병원에다 가두고 있는 격이나 다름없었다.
“……진짜 괜찮은데.”
병실에만 콕 박혀서 있어서 그런가 이제는 물리다 못해, 좀이 쑤실 정도였다. 나는 카페라도 내려가서 동생을 만나서 같이 올라오기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침대를 박차고 병실 문을 열었다.
“……아.”
“…….”
그러자 막 문을 두드리려던 주현이가 나를 보고 표정을 환히 했다. 참 타이밍도 좋게 나가는 길목에서 주현이를 만났다. 매번 그랬다. 내가 가는 길에 언제나 그가 먼저 와서 나를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하곤 했다. 주현이는 나를 보다가 병실 안을 눈으로 훑었다.
“……가연이는?”
“카페 갔어.”
“가하도 가려고?”
“…….”
그렇다고, 나도 나갈 거라고 대답해도 되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고민도 하지 않을 말이지만 나와 주현이에겐 의미가 좀 달랐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단어에서 다른 의미를 찾았으니까.
가볍게 던져진 말에 대고 뭐라 대답을 하지 못하자 주현이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손길에 내가 먼저 손을 뺐다.
“……잡지 마.”
“안 가?”
내 대답에 주현이는 도리어 의아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디를.”
“밑에 카페 가는 거 아니었어?”
“…….”
‘맞긴 한데.’
간다는 말에 또 주현이가 반응할까 나는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말없이 보던 주현이가 다시 내 손을 잡고 복도로 이끌었다.
“가자.”
앞서서 가자고 말하는 그의 태도가 어색했다. 언제는 나를 가두어 두지 못해서 안달이던 녀석이 이제 와서 가자고 하는 게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내가 알던 주현이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이끌림에 복도를 가로질러 가다 말고 멈추어 섰다. 그러자 그 또한 멈춰 서서 나를 보았다. 이색의 눈은 맑은 탓인지 마치 거울처럼 나를 찬란하게 비추었다.
“……그러다 내가 도망가면 어쩌려고 그래.”
어쩌면 저 파란 눈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하늘과 같은 색깔이 자유를 가장해 나를 구속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그 환상 속에서 찾을 수 없는 자유를 헤매다가 이 삶이 어디 한 구석 펴질 기색 없이 구겨져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내 말에 그의 떨리는 얇은 눈꺼풀이 느리게 감겼다 뜨였다. 그에, 나는 멍청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나 같은 게 어디 도망간다 하면 뭐 대수겠는가.
다시 또 이렇게 잡아오면 그만일 것을.
그런 내 생각을 대변하는지 그의 손이 내 손을 더욱 꼭 쥐었다.
“……기다릴게.”
“…….”
하지만 그가 말한 내용은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대답하는 그의 붉은 입술이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가하가 가고 싶은 곳에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게.”
“……나는…….”
나만을 오롯이 바라보는 그 파란 눈을 보다가 결국 내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미 우리 둘 다 서로의 마음 길이 갈라지다 못해 돌아올 수 없는 갈래 길에 서 있었다. 봉합되지 못한 상처의 홈 사이 거리가 너무 깊었다. 그러면서도 작은 서러움이 들었다.
‘네가. 조금만 더 일찍 말해 줬다면.’
“나는, 너 안 기다릴 거야.”
‘우리 사이가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래.”
이루어지지 않을 미래를 상상하며 열기가 몰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그의 도톰한 손끝이 내 뺨을 섬세하니 쓸어내리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 주었다.
“내가 그럼 따라갈게.”
“지겨워.”
“미안해.”
“하지 마.”
순하게 대답하는 그가 또 미웠다.
미안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를 포기한다는 말 따위를 절대 하지 않았다. 내 몸 안에 연결된 그 감각과도 같이 그는 끈질겼다.
“……거짓말으로라도 나를 좀 놔 주겠다 말 해 주면 안 돼?”
결국 내 온 몸에 저미는 슬픔으로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가 다급히 잡아 준 덕에 부딪히지는 않았다.
“……가하!”
그가 나를 안아 들어서 품에 기대게 했다. 그가 입고 있는 양복의 까슬한 천이 내 손등 위로 스쳤다. 그는 나를 안아서 관자놀이에 연신 입 맞췄다. 그게 싫어서 고개를 돌려서 그걸 피하자 그가 나를 더욱 품에 꼭 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의 품에서 풍기는 포근한 향이 따뜻한 체온을 타고 내게 전달해 왔다.
내 가이드라서, 싫어도 편안하게 느껴지는 걸까. 싫은 사람이 편안하다니, 그것도 참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상한 일이 천지였다.
“……오늘 날씨가 좋은데.”
“…….”
“같이 바람이라도 쐬고 올까.”
예를 들면 오늘의 주현이가 그랬다. 병실로 나를 옮겨 줄 거라고 생각했건만, 오늘의 그는 내 생각 무엇 하나 들어맞지를 않았다. 마치 그가 말했던 것처럼.
“…….”
“우리 같이 가자.”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먼저 가서 나를 기다려 주는 것 같았다.
그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내려오니, 내가 있던 병실의 층이 이 병원의 꼭대기에 있었다는 걸 알았다.
‘어쩐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 때문에 병실이 제법 높은 곳에 있나 보다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맨 위층에 있는 줄은 몰랐다. 그 탓에 사람들도 별로 없었던 모양이었다. 노인들이나 애들에겐 높은 곳이 위험하니까.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하며 엘리베이터가 지상에 도착하자 문이 열리고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홀이 보였다. 이 병원에는 유독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품에 있는 나를 누구 볼 사람도 없는데 누가 볼 새라 팔로 꼭 껴안고 홀을 가로질러 갔다. 나는 품에 꼭 붙은 내 몸을 떼어내며 투덜댔다.
“……답답해.”
“답답했어? 미안. 바람이 좀 찬 거 같아서……. 춥지 않아?”
“별로……으.”
걱정 어린 말은 낯 간지럽기만 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다가 홀을 나서자마자 들이 닥치는 가을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그의 걱정처럼 내가 입고 있는 얇은 입원복으로 이겨내기엔 바깥에서 부는 바람이 꽤 시렸다. 잘 가꾸어진 유리 온실과 다름없는 병실 내부에선 경험할 수 없는 온도였다. 그런 내 반응에 그가 살짝 신음하며 한 손으로 나를 들고 남은 손으로 제 겉옷을 벗어서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입고 있던 옷에 배인 체온이 따뜻하게 나를 감싸 주었다.
“춥지.”
“……내려 줘도 돼. 무거우니까.”
“안 무거워. 밥은 제대로 먹는 거야?”
전과 같이 그의 웃옷을 던져 버리기에는 바깥의 공기가 시려운 만큼이나 싱그러웠다. 그의 옷이 아니면 금방 병원 안으로 들어가야 할 날씨였다. 그는 다시 나를 고쳐 안으며 홀 바깥에 조성된 정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점심이 막 지난 시간인데 사람 하나 없이 한산했다.
커다란 규모의 병원 치고는 사람이 유독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많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사람 넘치는 서울 시내에, 그것도 남산이 보이는 이런 시내 한가운데 있는 병원이 사람이 없다는 것도 신기했다. 그는 햇빛이 잘 드는 벤치에 앉아서 안고 있던 나를 제 무릎 위에 고쳐 앉혔다. 내가 애도 아니고 이게 무슨 낯 뜨거운 자세인가.
“내, 내려줘.”
나는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어쩌나 싶으면서도 이 병원에 사람이 없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황급히 그의 옆자리로 몸을 옮겼다. 그러자 주현이가 살짝 아쉬운 듯 혼잣말을 했다.
“……차가울 텐데.”
“됐어.”
그의 말대로 벤치 자리가 좀 시리긴 했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는 그의 무릎보다 훨씬 나았다. 내가 품이 넉넉한 그의 양복 재킷을 꽁꽁 두르고 다리를 웅크리자 주현이가 버튼을 채워서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
“…….”
잎사귀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소리 말고는 우리 사이에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이따금씩 흐르는 바람에 그와 나의 머리카락이 스치며 내 뺨을 가늘게 때렸다. 그렇지만 그 마저도 좋았다. 숨을 내쉴 때 마다 폐부 안쪽에서 진동하는 차가운 공기는 내가 비로소 바깥에 나온 것을 실감케 했다. 그게 믿기지 않아서 목을 쳐들고 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을 쳐다보다가 서늘한 그늘자락이 내 머리위로 드리울 때 느껴지는 한기에 등을 떨었다.
“거긴 추워.”
그러자 주현이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아서 나를 제 곁에 바싹 붙였다. 그의 품에 내 몸이 기울여지니 내가 있는 자리에 없는 볕이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여름의 날씨와도 견줄 정도로 따가운 햇살이 내 눈을 하얗게 태워 갔다. 동시에 내 등 뒤로 그의 가슴팍이 닿으며 심장의 자리가 겹쳐졌다. 처음에는 달리하던 두 맥박이, 우리 사이에 이어져 있는 감각을 마주하며 이내 고동을 같이 했다.
평온한 오후의 볕 아래 두개의 심장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뛰었다.
자장가같이 귀를 울리는 그 소리가 좋아서 가만히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있는 내게 주현이의 조그만 기쁨이 전달되어 왔다.
“……좋다.”
“……날씨?”
순간 응, 이라고 대답할 뻔한 입을 어색하게 움직이며 대답했다.
생각해 보면 언젠가, 어렸을 때 이런 적이 있었던 것도 같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와 주현이가 그저 좋아서 볕 아래 누워서 체온을 나누던 날.
외로운 날에 의지할 곳 없이 그저 그와 맞댄 온기로 하루를 보내던 밤.
“……그냥, 가하랑, 이렇게 있는 게…… 나는 좋아.”
내게 스미는 바람이 유난히 사무치도록 시린 날이라 그런지, 돌아갈 수 없는 그 따뜻한 날이 유독 그립다고 생각했다.
“……나는 싫어.”
“…….”
“나는 정말 싫어…….”
어쩌면 그리움이란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아서 생기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문득 아쉬움은 들어도 그립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막다른 골목길에 다다른 내가 돌아 갈 수 있는 곳은 없다.
나 자신도, 또 내게 계속 다가오는 주현이도 그걸 너무 잘 알아서 탈이었다. 지치다 못해 말라 버린 마음과도 같은 낙엽 하나가 내 발치에 살랑 살랑 떨어졌다. 그 낙엽에 서린 계절이 유독 메마르게 느껴졌다.
“네가 나를 좋아할수록 나는 너 싫어.”
“……미안해.”
“미안하다고 해도 싫어.”
“……내가 어떡하면, 가하는 좋겠어?”
내 대답을 들을수록 침울하게 변해 가는 주현이의 뻣뻣한 팔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칼로 찔러도 피 하나 나올 거 같지 않게 비정하고 잔인무도한 주현이가 아무런 힘도, 형태도 없는 말 하나에 이리 연약하게 구는 것이 참 아이러니 했다. 어떡하면 내가 좋겠냐고 물어보는 모습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우리를 보았더라면 언뜻 연인의 환심을 사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참 다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나는 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그에게 묶여 있을 것인지, 어떻게 하면 내가 죽을 때까지 상처 입으며 그와 함께 살아갈 것인지.
그건 다정한 질문과는 참 상반되는, 잔인한 요구였다.
“나를 싫어해 줘.”
“…….”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미워하고, 나 꼴도 보기 싫어해서 저 멀리 보내 줘.”
지금이라도 내 삶을 되찾고 싶었다. 그의 파란에 빠져서 갈피를 잃고 사라진 내 삶을 조금이라도 되찾고 싶었다. 내 말에 주현이는 무척 힘겨운 얼굴로 버겁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건……. 안 돼.”
“……그럼 왜 그런 질문을 해.”
내가 바라는 건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내 부모가 원한 돈이나 명예 따위도, 동생이 바라던 유복한 지원도 아니었다. 그저 홀로 내 삶을 지탱하면서 살고 싶다는 거였는데. 그게 뭐 어렵다, 안 된다 하는지 모를 일이였다.
넌 가진 것도 많으면서 내게 그 작은 것 하나 주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나 같은 사람 하나 없어도 넌 잘만 살아갈 수 있잖아.
‘넌 잃는 게 하나도 없는데, 왜 나만 모든 걸 잃고 살아가라 그러는지.’
“……나를 좋아한다고 해 놓고 왜 내 말은 하나도 들어주지를 않아.”
“…….”
“미워도 못하게 하고, 싫어도 안 된다 하고, 떼어 놓으면 매번 따라오고…….”
유치한 투정이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네가 버려 놓은 삶, 다시 버려 달라는 게 그렇게 어려울 일인가.’
나는 치미는 헛웃음을 가볍게 흘려보냈다. 이럴 거면 왜 말하라 하는 걸까. 정작 내가 바라는 것은 들어주지도 않고, 그저 나를 어떻게 하면 옆에 둘지. 내가 무엇에 이끌려서 다시 그의 옆에 남을 지를 생각하며 선택적으로 구는 게 참, 야속했다.
“너는 꼭 내 약점인 부분만 골라서 부탁 들어주더라. 치사하게.”
그 탓에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어린 동생을 도와준 것도, 어린 나를 욕심 많은 부모로부터 구해 주었던 것도 순전히 고맙다 말 할 수 없게 했다.
“네가 그러면, 내가 고마워서 네 곁에 있을 거 같아?”
“그런 거 바란 게 아니라…… 가하가 가연이를…….”
기대어 있는 그의 상판 너머로 두근대는 고동이 들려왔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이해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내 없는 자존심마저 무너질 것 같았다. 내 말에 잔뜩 당황한 듯, 변명처럼 황급히 말하는 주현이를 두고 나는 부러 밉게 말했다.
“너 그래도 난 싫어.”
“……가하.”
나 잠든 사이에 뭐 하나 나쁜 짓이라도 했다면, 오히려 거리낄 것 없이 마음껏 미워하고, 또 싫어할 텐데.
“나 고맙다고 안 할 거야. 넌 맨날 내 말 안 듣고……. 네 마음대로 하니까.”
“…….”
“난 해 달라고 한 적 없어.”
왜 쓸데없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괜한 마음의 짐을 얹는 걸까. 나는 눈을 감으면 더 선연하게 떠오르는 동생의 당차고 환한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떴다.
세상이 참 잔인한 게, 약한 사람에게는 사는 게 더 힘들고 강한 사람들에겐 살아가는 게 참 쉬웠다. 남자인 나도 살아가는 게 버거운 세상이라 아마 그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동생의 그런 얼굴은 전혀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평생 일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고.
“……가하가 슬퍼하는 게 싫어서 그랬어.”
한참을 감았다 눈을 뜨니, 하얗게 번져 오는 시야 사이로 보이는 가을 하늘이 맑았다.
물이 맑을수록 깊은 곳이라고들 하던데, 그 순간에 나는 그 말이 참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몸을 틀어서 그를 보았다. 그러자 자연히 그의 파란 눈이 나를 담았다.
하늘과도 같고, 바다와도 같은 그 파란 눈에 담긴 순간부터 어쩌면 나는.
“나는…… 가하가 소중해.”
평생 헤어 나올 수 없는 물길에 가두어진 셈이었다.
“그래서…… 가하가 소중히 여기는 걸 지켜 주고 싶었어. 그것뿐이야. 다른 의도는 없었어. 정말로.”
그의 말에 한 점의 거짓도 없다는 것은 알았다. 믿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거 하나에 내가 너와 함께하는 삶을 선뜻 같이 하기에는, 내 상처 받은 삶이 너무 길고 고단해서 쉽게 놓이지가 않았다. 얄팍한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다. 가진 것 없는 내게 남은 건 그거 하나밖에 없어서 그것만이라도 지키고 싶을 뿐이다.
“그래도……. 난 고맙다고 안 할 거야.”
“……응.”
그렇다고 모든 것을 덮고서 주현이를 품어 주기엔 내 상처 받은 마음이 가여웠다.
나라도 내 마음을 가엽게 여겨 주지 않으면, 아무도 내 마음을 생각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주현이에게 고맙다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나의 유치하고 정 없는 말에도 주현이는 그저 내 머리를 사르륵, 사르륵 쓸어내렸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그의 도톰한 손끝이 느껴졌다. 내가 없는 시간동안 쌓여 온 그의 상처. 나는 문득, 아직도 그게 주현이를 아프게 할까 싶어서 내 머리를 헤집는 손을 끌어당겼다.
“……가하?”
그러자 주현이가 문득, 당황한 듯, 손을 빼려고 당기다가 이내 내게 건네주었다. 그러다가 내가 유난히 그의 손끝을 내 손 마디로 더듬고 살피는 것을 보자 난색을 표했다.
“왜 그래, 가하. 보지 마.”
“그냥 손가지고 비싸게 굴기는.”
“…….”
하지만 내가 손을 꼭 잡고 있으니 결국엔 포기한 듯, 손을 내게 주고 말았다. 이미 볼 거 다 봐 놓고, 손 하나 본다고 이제 와서 부끄러움을 타는 게 웃길 따름이었다. 그런 내게 그는 궁색하게 변명했다.
“손 별로…… 안 예뻐.”
“안 예쁘긴 하다.”
“그니까 왜…….”
그 변명도 참 웃겼다. 예쁜 모습만 보여 주고 싶기엔, 우린 너무 못 볼꼴을 다 보지 않았나.
나는 볼록한 그의 손끝을 더듬었다. 어렸을 땐 손이 닳도록 피를 내고, 다 커서는 피를 토하고. 가까워질수록 피만 보는 인연이 참, 악연이다 싶었다.
“나 잠들어 있을 때도……. 너 아팠어?”
“…….”
너는 왜 하필 나와 각인을 해서, 나를 좋아해서 그렇게 힘들여 살까.
난 참 별 것도 없는 사람인데.
너 없어도 버거운 삶 하나 어렵게 겨우겨우 지탱해가며 살아갈 사람인데. 그런 하찮은 내 말 한마디에 그저 주인에게 예쁨 받고 싶은 강아지처럼 왜 끙끙 댈까. 네 손짓 하나면 따라올 사람이 천지에 깔렸는데 말이다. 좋은 길, 편한 길 내버려두고 나 하나로 굳이 저 아픈 길, 힘든 길 걷는 게 아집이다 싶었다.
“아닌가, 매일 가이딩 해서…… 괜찮았나.”
이런 게 사랑이라면, 너무 힘들고 아픈 사랑인 거 같다고.
그래서, 네가 주는 사랑이 내게는 참 힘들고 아픈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의 손을 잡고서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그의 다른 손이 내 손 위로 올라와 덮었다.
“괜찮아. 나는…….”
“그럼 됐어. 나 이렇게 힘들게 해 놓고 너 계속 힘들면, 그동안 내 고생이 억울하잖아.”
내가 부러 쌀쌀맞게 말하며 손을 빼려는데, 그러지 못하게 내 손을 잡아 둔 녀석이 떨리는 시선을 갈무리하지 못하며 천천히 말했다.
“……가하는…… 여기서 나가면 뭐하고 싶어.”
“……나?”
“응.”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입이 다물렸다. 글쎄. 애초에 그가 나를 놔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더 그랬을 것이다. 계속해서 그는 나를 옭아맬 빌미를 만들고 있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순간 나가면 무슨 일을 하고 싶냐 물으니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글쎄. 갑자기…… 물어봐서.”
“…….”
“왜, 나 내보내 주려고?”
바로 표정이 굳어가는 주현이의 모습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럴 마음도 없는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그런 내게 주현이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대호가 그랬어.”
“……대호?”
“응……. 가하가, 그때 나가서 어떻게 지냈는지. 뭐를 좋아했는지……. 어떻게 웃는지…….”
“아아…….”
내가 잠든 사이에 대호가 주현이에게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해 준 모양이었다.
‘잘 살았지. 행복했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는 것을 알아서 더 그리운.
나는 대충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둘이 그런 걸 말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던가 조금 의문이 들었다. 그 사이에 주현이가 나를 껴안고 제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
“뭐해. 하지 마.”
“가하가 내 옷 입고 있으니까 추워.”
“……그럼 이거 도로 줄 테니까 너 입어.”
내가 걸친 그의 재킷을 벗어서 주려고 하니 그가 내 팔이 움직이지 못하게 뒤에서 꼭 끌어안아서 막았다.
“싫어.”
“…….”
네가, 애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녀석이 언제까지 이렇게 굴 것이냐고 불만을 내보이려던 내 말은 그의 말에 녹아들어 버렸다.
“가하 보내 주면……. 이제 이럴 수 없잖아.”
“……뭐?”
‘그게 무슨 소리지? 나를……. 보내 준다고?’
내가 놀라서 그의 무릎에 앉은 채로 뒤 돌아보니 파란 눈이 희미하게 웃었다.
“……가하 말이 맞아. 그동안 가이딩 많이 해서…… 이제 안 해도 나 안 아파. 괜찮아.”
“…….”
“그러니까, 가하 회복 잘되고 나면. 가고 싶은 곳으로…….”
그는 나를 다시 제 품 안으로 꼬옥 끌어안고 내 등을 쓸어내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보내 줄게.”
“…….”
떨리는 목소리 때문인지 그 말이 유독, 크게 들렸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내가 죽는다고 해도 제 옆에다 영원히 둘 것만 같은 주현이가, 지금 무슨……. 그에게 안겨 있던 몸을 돌려서 보자 그의 희미한 미소가 얼굴에 번져 있었다. 가을바람이 사근하게 불어오자 그 미소가 점차 진해졌다. 그 모습에 내 입에서 절로 말이 나왔다.
“거짓말…… 말도 안 돼.”
“……그럼 약속할까.”
그가 손을 들어서 내게 새끼손가락을 보였다.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 치고는 그 얼굴에 어린 체념과 슬픈 미소가 거짓말이 아니라고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왜…….’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너……. 왜 그래?”
“……가하가 좋아서.”
“장난치지 말고.”
“장난 아닌데.”
은근히 섭섭함을 드러내는 그의 말투에 나는 맥이 풀렸다.
‘넌 참 인생이 간단하다.’
좋아서 나 이렇게 망쳐 놓고, 좋아서 놓아준다 하고. 오고 가는 게 무슨 바람처럼 종잡을 수가 없는지. 그러면서도 나는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고는 막 잡으러 올 거지.”
“안 그래.”
내 말을 들은 주현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본인이 한 짓이니 찔리겠지. 나는 다시 그를 추궁했다.
“그럼 너 아프다고 그러면서 또 데려갈 거지.”
“……나 이제 안 아파.”
“……그럼 대호나 가연이 가지고…….”
내가 계속해서 추궁하자 주현이가 웃던 낯에 결국 한숨을 쉬며 나를 꼭 안았다. 못 믿는 내가 영 답답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제껏 주현이에게 당한 게 한두 개여야지. 나는 아직도 그를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그런 마당에 좋다, 사랑한다 하니 그것 또한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럴게. 정말로.”
“……정말로?”
안겨 있는 내가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다시 한 번 물어보자, 그가 내 관자놀이 쪽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정말로.”
그리고 정말 약속을 하는 아이처럼, 내 손에 깍지를 꼈다.
그의 말대로, 나를 놓아주게 된다면. 다시는 잡지 못할 손이었다.
‘어쩌면 평생토록.’
“……대신.”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혼란스러울 무렵 주현이가 떨리는 목소리를 지우지 못하며 말을 건넸다. 그러면 그렇지, 결국 무슨 조건인가 싶을 때에 그가 말한 내용에 나는 그저 그의 눈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죽고 싶다는 말…… 하지 마.”
“…….”
“나는……. 가하가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 누구와 있어도 괜찮으니까. 행복하게…….”
그때에 주현이의 얼굴이 들어왔다. 늘 환하던 녀석의 얼굴, 그 중에 예쁜 파란 눈 밑이 제법 칙칙했다. 마치 몇날 며칠을 고민하고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가하를 만나러 갔을 때 알았어. 가하는 내 옆에서 그렇게 웃은 적이 없었어. 행복하다, 말해 준 적도, 무언가를 하고 싶은 것도…….”
“…….”
“나는 가하가 그때처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누구든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내가 그랬듯이, 대호가 그랬듯이.
“그것만…… 지켜 줘. 그러면 보내 줄게.”
“……내가 행복하게 살면. 너 평생 안 보고 사는 게 행복하다 하면.”
“…….”
“그럴 수…… 있어?”
그리고 이번에는 어쩌면 주현이의 차례가 온 것 같았다.
내 말에 내 손에 깍지를 낀 그의 손이 살짝 조여 들어왔다.
‘네가 말한 대로 산다면…….’
나는 너를 평생에 보지 않고 살 수도 있는데. 너를 보는 게 참 불행하니 평생을 숨어 산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런 가정 하나로도 이렇게 반응하는 걸 보면 나를 보내 준다고 말한 게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가하가……. 원한다면.”
그리고 마지막 기회였다.
“그럼…… 나 내일 퇴원시켜 줘.”
“……아직, 몸이.”
나를 꼭 끌어안고서 이 병원에 더 있으라 하는 말이 참 우스웠다.
걱정인지, 아니면 걱정을 빙자한 또 다른 구속일까. 나는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의사가 아픈데 없다고 했잖아. 멀쩡한데 계속 이제껏 있었으면 됐지.”
“그렇지만…….”
“보내 준다며.”
“…….”
제가 보내 준다 말해 두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지 망설이는 것에 내가 잘라 말했다. 그의 파란 눈이 섭섭함과 아쉬움 그리고 작은 후회로 얼룩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꺼낸 말 또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고집쟁이에, 욕심쟁이에,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애가 도대체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왔을까.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그가 다시 붙잡기 전에 나도 마음을 다 잡았다.
나도, 조금만 욕심을 내고 싶었다.
“그러면 나 보내 줘. 응?”
“……알겠어.”
내 부탁에,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은 했지만 들어줄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나는 연신 확인했다.
“정말?”
“……응.”
“그러면 올라가서 가연이한테 연락해야겠다. 옷도 가져오라 하고…….”
다시 나를 껴안는 그에게 나도 모르게 말이 술술 나왔다. 그렇게 말해 놓고 괜히 주현이 심기를 건드리는 건 아닌가, 아차 싶었다. 뒤늦게 입을 다물었지만 벌써부터 주현이가 반응했다.
“내가 연락할게.”
“……고마워.”
아까 전만 해도, 나는 절대로 고맙다고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의 대답으로 결국에는 하고 말았다. 그러자 주현이의 파란 눈이 놀란 듯이 뜨였다가 이내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 약속, 어기면 안 돼.”
나가서 행복하게 살아가라는 그 약속.
그 말이 왠지 참 슬프게 들렸다. 그는 웃고 있는데, 우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나 우뚝 서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그가 지금은 참 위태로운 절벽에서 바닥을 보는 것처럼, 비쳐졌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제 품에 안아 올리며 일어섰다. 바람도 점점 세지고, 내일 퇴원하려면 가서 일찍 쉬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이유였다.
다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사이에 나는 그에게 기대어 있다가 두근대는 고동 소리에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것을 마지막으로, 듣게 될 그의 소리일지도 몰랐다.
내 귀에 울리는 그 느리게 뛰는 심장이 슬픔으로 가득해서 문득 궁금했다.
나를 놓아주면 너는 자연히 불행할 텐데.
그럼에도 내 행복을 바라는 게 괜찮을까.
“……있잖아.”
“응.”
“……약속, 어기면 어떻게 돼?”
너도 불행해지고, 나도 행복하지 못한다면.
‘그땐 어떻게 될까.’
우린 언제나 엇갈리고 나쁜 선택지만 잡았기에 그와 나의 선택이 생각하는 바 그대로 이루어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
“내가 너 떠나도 안 행복하면……. 그땐 어떡해.”
내 질문에 주현이는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내가 그의 곁을 떠나면 행복할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보내 준다 말하며 웃고 있는 오늘의 주현이가 왠지 자꾸만 생각이 날 것 같아서 그런 말이 나왔다.
내가 기억이 없어도 늘 꿈에서 그를 만났던 것처럼.
그때 딱, 20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가 천천히 발걸음을 병실로 향하는 동안 침묵을 깼다.
“그럼, 내가…… 내일 선물을 줄게.”
긴 다리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금방 병실에 도착해서 나를 침대 위에 내려주는 손길이 제법 세심했다. 그러면서도 가기 싫은지 내 손을 꼭 붙잡는 손이 바깥바람을 맞아서 그런가 차가웠다.
“선물?”
“그게 있으면 가하는…… 언제나 행복할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 발걸음을 뗐다. 때 이른 크리스마스도 아닌 게 선물을 준다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홀로 병실에 남은 몸을 덜렁 뉘이며 중얼거렸다.
“……돈 많이 줘도 나는 별로 안 행복할 거 같은데…….”
그리고 수수께끼처럼 남긴 말도 여전히 이해불가였다.
‘뭐가 있으면 나는 언제나 행복하다는 걸까.’
주현이는 없는 것을 세는 게 빠를 정도로 가진 게 많은 애라 무엇을 줄 지 잘 짐작이 가지 않았다. 돈을 넘치게 준다 한들 내가 잘 관리나 할까, 자신이 없었다. 가진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한 순간이라는 걸 부모님을 통해서 알았고, 없는 능력치인 내가 나가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은 더 잘 알았다.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게는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할 수 있는 것을 세는 게 더 빨랐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그 남은 장점마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병실 바깥으로 저무는 노을에 물들어 가는 붉은 하늘을 곁눈질로 보다가 어서 내일이 되어 이 조용한 방을 나갈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품고서 일찍 잠을 청했다.
주현이와도, 병실과도 마지막 밤이었다.
그날 밤은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을 잘 잤다. 개운하게 잠을 청한 탓인가 일어나고서도 정신이 유독 또렷해서 지난날 뭘 잘못 먹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간호사가 가져다 준 아침밥을 먹는 동안 동생이 왔다. 주현이가 연락을 해 준다더니 진짜 그런 모양이었다. 진심이었던 걸까. 그가 말해 놓고서도 속으로는 의심을 지우지 못했기 때문에 쇼핑백을 들고 온 동생의 방문이 얼떨떨하기만 했다.
“오빠! 나 왔어. 오늘 퇴원한다며.”
“어어…… 응. 주현이가…… 연락했어?”
나는 밥을 먹다 말고 침대 옆에 있는 소파에 짐을 부산스럽게 꺼내드는 가연이를 살폈다. 그러자 가연이가 택이 달린 새 옷을 꺼내어 들며 내게 펼쳐 보였다.
“짠! 어때 마음에 들어? 응. 오빠 퇴원 날짜 나왔으니까 준비 좀 도와 달라 하던데. 그래서 옷 가져왔어. 급하게 백화점 가서 샀는데. 사이즈가 맞을지 모르겠다.”
“대충 입으면…… 되지. 고마워. 일하느라 바쁠 텐데…….”
“뭐가 바빠. 이제는 칼퇴하는 공무원인데. 한 마디로 철밥통. 음? 문자 왔네.”
동생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핸드폰을 보다가 이내 난감한 얼굴로 바닥을 가리켰다.
“아, 차 좀 빼 달라고 문자왔다. 급하게 주차했더니…….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나, 얼른 갔다 올게?”
“응. 천천히 갔다 와.”
병실을 나서는 가연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식사를 다 끝냈다. 간호사를 불러서 그릇을 내보내고, 가연이가 사온 옷을 호기심에 들어서 보았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를 감안한 것인지 얇은 니트와 빳빳한 면바지는 새 옷 특유의 반지르르함이 도드라졌다. 옷에 대해서는 잘 모르다 보니 그저 비싸 보인다는 생각밖에는 안 들었다.
“아무거나 사 오지.”
나중에 어디 일해서 월급 받으면 얼른 갚아 줘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샤워를 하고, 개운해진 몸에 새 속옷과 새 옷을 입었다. 동생이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사이즈가 잘 맞아서 동생도 눈썰미 좋은 것이 이럴 때 보면 천상 여자애이긴 하구나 싶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신발이 없네.”
나는 가연이가 가져온 쇼핑백 어디에도 신발이 보이지 않는 것에 어쩌나 싶었다.
‘이따 올라오면 물어봐야겠네.’
병실에서 신고 다니는 이 슬리퍼를 신고 가야 하나 싶다가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좀 민망했다. 옷은 멀쩡한데 정작 신발이 휑하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나.
‘에이, 그래도 뭐. 오늘만 참으면 되지.’
떨떠름한 기분으로 동생을 기다리는 와중에 병실 문이 열렸다. 가연인가 싶어서 침대에 걸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다 준비 됐어?”
“……응.”
내 예상과 달리 손님은 새 양복에 두툼한 코트를 입고 온 주현이었다.
내 대답을 듣던 주현이가 슬리퍼에 발을 꿰어 신는 나를 보고 표정을 미묘하게 구겼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 발가락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신발은.”
“가연이가 깜빡했나 봐. 그냥, 오늘은 이거 신고 가지 뭐.”
내 대답에 주현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들어서 누군가에게 통화를 걸었다.
“신발 좀 하나 사 와. 운동화…….응.”
“…….”
“곧. 알겠어.”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대충 박 비서인 거 같았다. 짧게 통화를 마치는 주현이를 보아하니 내 신발을 사오라 한 것 같았다.
‘주현이는 알까. 신발을 사 주면 도망가라고들 하는 뜻이라던데.’
어찌 보면 지금 상황에는 참 걸맞은 선물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주현이는 핸드폰을 양복 안주머니에 넣으면서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옷, 예쁘다. 잘 어울려.”
“……고마워.”
단순한 칭찬도, 고맙다는 말도 우리는 늘 어려웠다.
우리 인연이 풀리기 어려운, 꼬이고 꼬이다 못해 풀리지 않는 매듭인 것처럼. 서로에게는 언제나 말이 꼬여서 순순히 나오지 않았다. 나는 어색함이 감도는 단어를 말하고 나서도 머쓱하여 긴 머리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주현이가 내게 다가와서 내 머리카락을 제 손가락 사이로 넣고 사륵사륵 쓸었다. 따뜻한 피부에 그의 차가운 손이 뜨거운 불길에 데인 것처럼 도드라지게 느껴졌다.
그는 파란 눈으로 나를 꼼꼼히, 천천히, 그리고 다정히 살폈다.
“그새 머리 많이 길었다.”
“…….”
“한 번 자를까 했는데……. 가하 잠들어 있을 때 그냥, 칼 대는 게 싫어서, 내버려뒀더니 꽤 길었어.”
그 보석 같은 눈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자니,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살풋 웃으며 내 목덜미를 덮는 머리끝을 잡고서 한창 매만졌다. 그 손길이 목덜미 쪽, 각인이 서린 목덜미를 건드릴 때마다 가슴팍이 더 간지러웠다. 생각에 빠진 듯 내리깐 주현이의 눈에 황망한 회한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평소 같으면 그 손길이 소름끼친다, 싫다, 매몰차게 거부를 했을 텐데 왠지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나를 보내 주겠다, 그러니 행복하게 살아라 하는 사람의 눈빛이 정작 그러지 못해서 더 그랬다.
“나가면…… 머리부터 잘라야겠다.”
“……응.”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그는 또 웃음을 머금은 표정을 지었다. 내 목덜미 쪽 머리를 만지던 손이 움직이며 내 뺨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무언가 깨질 것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가연이는.”
“차 빼러…… 갔어. 좀 됐는데, 안 오네.”
“그래.”
그는 수긍하며 내 뺨을 쓸었다. 갈수록 짙어지는 파란 눈 사이에 작은 기쁨과 또 슬픔 그리고 긴 그리움과 후회가 보였다. 나를 그 눈 가득히 담고서 내려다보는 그 눈이 내 시선을 또 붙잡고 가지 말아달라고 무언의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그럼……. 지금 선물 주면 되겠다.”
눈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의 입은 가라고 하는 게 참 반칙이었다.
“괜찮아. 그런 거…….”
그게 유난히 걸려서, 굳이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는 사이에 그가 나를 다시 껴안았다. 안긴 가슴팍 너머로 들리는 심장소리가 어제와 달리 급하게 뛰었다. 그는 나를 놓아 주지 않을 것처럼 꼭 껴안고 말했다.
“내가 주고 싶어서 그래.”
“…….”
“이거라도 주면 좀 안심이 될 거 같아서……. 꼭 받아 줬으면 좋겠어. 부탁이야.”
“뭔데…… 그래.”
불안으로 급하게 뛰는 그의 마음도 그렇고, 안심이 될 거 같다는 소리에 그가 도대체 무엇을 주려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노잣돈이라도 챙겨 주려는 건가.’
그렇다면 더더욱 사양하고 싶을 뿐인데. 그가 부드럽게 내 머리를 매만지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들렸다. 그러고는 그의 눈이 내 코앞까지 다가오며 동시에 따뜻한 숨결이 내 코끝에 닿았다. 입술이 곧 닿을 것처럼 숨결이 얽혀들었다.
“……가하가 앞으로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 안 아파. 네가…… 나 잠들어 있는 동안 매일매일 가이딩 했다며.”
“……그랬지.”
내 대답에 그가 웃으면서 내 뺨을 쓸었다. 손끝이 떨리는 것을 숨길 수가 없는지 그 진동이 내 마음을 조금씩 두드렸다.
“그렇지만 이제 내가 없잖아.”
“…….”
“내가 없을 때……. 가하가 아프면 어떡하나 나는 자꾸 걱정이 돼.”
분명 내가 없으면 그도 아프다고 그랬는데. 그는 이상하게 나를 더 걱정했다.
나는 그가 없어도 아무런 영향 없는 낮은 등급의 에스퍼일 뿐인데.
“이러다가 나는 가하를 보내 주지 못 할 거 같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길가의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은 그런 에스퍼.
“내가 그러면 가하는 힘들잖아. 웃지 못하잖아.”
“…….”
“그건 싫어.”
그런 나를 언제나 귀한 보석과도 같이 아껴 주었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여기지 않았는데, 그는 늘 그랬다.
“나는……. 가하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웃어 줬으면 좋겠어.”
이내 그는 눈에 차오르는 눈물을 더 이상 가두지 못하고 흘려보냈다. 그러면서도 애써 웃어 보이는 게 내 마음을 더 아리게 했다. 이렇게 울면서, 슬퍼하면서 나를 보내 주고 싶다 말한 게 참 용할 지경이었다.
의 모습에 내 마음이 순간 흔들렸다. 그러면서도 애써 다잡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나를 속이고, 아프게 하고, 상처 입힌 사람을 눈물 하나로 믿기엔 내 마음에 공간이 없었다.
“내가 아프게 한 만큼…….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는 순간에 내 입술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당황스러울 참에, 그와 맞닿은 입술 사이로 따뜻한 무언가가 흘러 들어왔다.
가이딩이었다.
내가 그렇게 겁을 내고, 싫어하는 그의 가이딩. 나를 살렸지만 도리어 죽고 싶게 만드는 그런 힘. 에스퍼에겐 그보다 좋은 게 없다는 힘이 내게 계속해서 흘러들어왔다.
그게 선물이라면, 참 주현이답다고 생각했다.
가이드인 그가 에스퍼인 내게 줄 수 있는 마지막 가이딩.
어디 아픈 곳 하나 없이,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나는 입술을 떼지 않고 주현이와 계속해서 키스했다. 그러면서 다시 재회했을 때 눈앞에서 피를 토하던 주현이를 떠올리며 소원했다.
혹시라도 주현이가 나 때문에 아프거나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동안 그러고 서 있었을 때, 그의 차가운 손이 내 체온으로 덥혀진 것을 느끼며 입술을 뗐다.
“…….”
“…….”
천천히 입술이 떨어지니 주현이가 눈을 느리게 뜨면서 언뜻 아쉬운 표정을 했다. 그러면서도, 내게 가이딩을 주어서 그런가 내심 만족한 얼굴을 했다. 나는 그 모습에 마음이 조금 달았다.
‘내가 이렇게 떠나고 없으면, 주현이는 괜찮을까.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그때에, 주현이가 다시 다가와서 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야. 왜 그래, 너.”
“보려고.”
“뭐를……. 봐.”
“선물.”
깨문 곳이 홧홧한 게, 피가 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주현이에게 뒷걸음질 치면서 아픈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다. 그러자 붉은 핏방울이 살짝 묻어 나왔다. 그런 나를 보던 주현이가 문득 웃었다. 그게 얄미워서 나는 쏘아 붙였다. 말할 때마다 벌어지는 입술에 얼얼한 아픔이 계속 울렸다.
“이런 게 선물이면 주지 마. 나 필요 없어.”
“……선물은 이미 줬어.”
“……뭐?”
지금 주현이의 얼굴이 좀 허옇다, 싶을 때, 나는 입술에 전해지는 아픔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을 느꼈다.
‘……뭐지.’
방금 가이딩…… 받아서 그런가 싶어서 다시 손가락으로 상처 난 입술 부분을 훔치니 피는커녕 아무것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주현이가 준 가이딩이 참 강력하긴 하구나 생각할 즈음 내 가슴팍에 무언가 뜨거운 힘이 몰아치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주현이가 웃던 얼굴을 찡그리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소파를 붙잡은 채로 커다란 몸을 숙였다.
“하아, 하아…….”
“너는……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프면 병원…….”
여기가 병원이지. 나는 의사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으로 급하게 벨을 누르고 주현이를 부축했다.
“이리 누워. 갑자기 나도 심장이 이상해……. 뭘 준 거야 너?”
“……조금 있으면 괜찮아. 그냥…… 처음 해 봐서 그래.”
열에 들떠서 발간 얼굴로 더운 숨을 연신 토해내는 게, 아무리 봐도 몸이 안 좋아 보였다. 결국 내가 부축해서 침대에 주현이를 눕히고 나는 옆에 서서 채근했다.
“뭐를 해서 그래? 무슨 약, 같은 거 먹어야 하는 거야? 응?”
“……내 걱정 하지 마. 이제 가하는 가야지.”
“…….”
내 손을 잡았다가 이내 침대 밖으로 밀어내는 그는 계속해서 답답한지 숨을 몰아쉬었다.
“……가.”
아픈 척이라고 믿고 이 자리를 떠나고 싶은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필 내가 나가는 날 이렇게 와 가지고 마음을 쓰게 만들까. 정말 내가 가기를 바란다면, 이러지 말아야지. 너는 진짜 나쁜 사람이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
나는 그가 밀어낸 손을 다시 잡아서, 내 침대에 누워 있는 그에게 입술을 겹쳤다.
“가……. 읍.”
‘그때에도, 주현이가 피를 토할 때 이러면 괜찮았으니까…….’
이번에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 순간에 급한 발걸음이 복도 너머로 울려왔다. 여럿이 분명한 소리에 간호사들이 달려왔나 싶을 때, 병실 문이 열리며 여러 사람이 들어왔다.
“오빠!”
“부회장님!”
“어머.”
“……가이딩 중이신가요?”
간호사와 의사 말고도, 가연이와 박 비서가 함께 들어왔다. 놀라는 간호사의 반응과 의사의 질문에 나는 황급히 입술을 떼고 변명했다.
“그, 주현이가 갑자기 몸이 안 좋은 거 같아서…….”
“도련님!”
내 말에 박 비서가 주현이 곁에 다가갔다. 그의 손에는 아까 주현이가 말한 신발이 분명해 보이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주현이는 이제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연신 신음했다. 그의 셔츠 자락이 축축하게 젖어 가며 살결을 비쳤다.
“가하……. 데려가.”
“결국 주신 겁니까? 그건…… 정말 안 된다는 걸 잘 아시면서. 그렇게까지…….”
박 비서는 황망하게 나와 의사를 번갈아 보았다. 의사는 그 눈길에 간호사를 데리고 주현이의 옷을 벗겨서 나를 검사할 때 썼던 패치를 붙이며 급하게 조치를 취했다.
“우선 진정제부터 놓겠습니다. ‘능력 전이’가 쉬운 게 아닌데 이렇게 혼자서…….”
“오빠, 주현이 왜 이래?”
“……몰라, 모르겠어. 갑자기…….”
순식간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나는 끼어들지도 못하고 그들이 하는 것을 보다가 이내 약기운에 취해서 잠에 들은 주현이를 보았다. 그때와 같이, 고통이 심한지 자면서도 구겨진 미간이 여전했다. 가연이는 내 뒤에서 겁에 질린 듯, 딱 붙어서 살폈다.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는 것은 알겠지만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지는 나도 몰랐다. 무슨 짓을 해서, 아니 무슨 일이 있어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약으로 진정은 시켰습니다만, 안정되기 까지는 계속 발작을 일으키실 것 같아서…… 간호사를.”
“아뇨. 제가 있겠습니다.”
비로소 좀 정리가 되었는지 박 비서와 내게 설명하려는 의사에게 박 비서가 말을 자르고 대답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신다면야……. 정 반응이 안 좋으면 각인된 에스퍼가 있어 주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으니 같이…….”
“아뇨. 이분은……. 곧 가실 겁니다. 자요.”
그는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네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받지 않았다.
“이 운동화 받으시고, 이제 가세요.”
“……주현이 또 어디 아파요? 왜, 그런 거예요.”
아까까지만 해도, 방긋방긋 웃으며 건강하던 녀석이 쓰러져 가지고 눈도 못 뜨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올 것이 왔다는 듯이 말하던 박 비서도. 그는 내가 받지 않자 옆에 있던 가연이에게 쇼핑백을 건네면서 무뚝뚝하게 잘랐다.
“떠나실 분께서 괜히 번거롭게 설명을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내 놓고 다시 와야 하면 그게 더 번거로운 일일 텐데요.”
내 대답에 의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말씀하시는데 죄송합니다만. 부회장님이 말씀, 안 해 주셨습니까?”
“저는 아무 것도…… 못 들었는데요.”
내 대답에 의사가 난감하게 얼굴을 굳혔다.
“아니, 이걸 설명을 안 해 주실 줄이야. 부회장님이…… 환자분에게 능력 넘겨주신다고 말씀 안 하셨나요?”
“……예?”
‘능력을…… 넘겨준다고 했다고? 주현이의 능력을? 설마 그게 선물이라고…….’
내 얼빠진 반응에 의사는 박 비서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씀을…… 안 하신 모양인데. 아마 능력치가 확 늘어서 굉장히 강력해졌을 겁니다. 우선 가이드 센터에 가 보시는 게…….”
“됐습니다. 이제 우리와 상관없는 분이니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본인이 필요하다 생각하면 알아서 가겠죠. 여기서 이러시지 말고, 그만 가세요.”
다시 잘라 말하는 박 비서는 내게 턱짓했다. 그 말에 내가 결국 대답했다.
“안 갑니다.”
“오빠.”
가연이가 내 팔을 잡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셔츠를 풀어헤치고 산소마스크를 쓴 주현이를 보면서 다시 박 비서에게 대답했다.
“설명…… 해 주세요. 그러기 전에는 안 갑니다. 이런 상태로는, 안 가요.”
“…….”
“가연아, 잠시만…… 나가 있어.”
“으응…….”
결국 의사와 간호사, 가연이를 밖으로 보낸 내 병실에는 잠들어 있는 주현이와 박 비서 그리고 나만이 남았다.
“……말해 주세요. 나한테…… 대체 무슨 능력을 준 건지.”
“……어쩔 수 없군요.”
박 비서는 나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안색이 창백한 주현이를 보면서 어두운 얼굴을 했다.
“우리 도련님은 아시다시피 최고 등급의 가이드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요.”
“그리고 가이드들 중에는 간혹 자신의 능력을 에스퍼에게 넘겨주는 일이 있습니다.”
이윽고 그 연륜이 묻어나는 까만 눈이 나를 향했다. 그의 눈에 어린 연민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 몸에 흐르는 이 기묘한 힘이…….
‘주현이가 넘겨준 ‘선물’일까? 하지만 왜 나에게…….’
“왜……요?”
“보통은……. 가이드들이 죽기 전에 남은 에스퍼의 안녕을 위해서 넘겨줍니다. 한 번 각인한 상대가 죽어 버린 순간, 남은 에스퍼는 다른 가이드가 가이딩을 주어도 예전처럼 회복하긴 어려우니까요.”
“…….”
“게다가 당신은 우리 도련님을 워낙에 싫어해서 가이딩 흡수율도 떨어지고. 또 ‘그런’ 일이 있기라도 하면 그때는 진짜 죽어 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되셨던 거겠죠. 그런 것도 모르고 무지하기 짝이 없어서 그 능력치로 혼자 나가서 살아가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
냉랭하게 내리는 평가는 사실이라서 뭐라 말하기가 어려웠다. 내 능력은 스스로의 만족을 구하는 것 외에는 그다지 큰 효용이 없던 게 사실이었다.
“……나는, 몰랐어요. 그게 그런.”
“이제 좀 만족하십니까? 그렇게 죽고 싶다 말하시더니, 결국 멀쩡한 사람 하나 죽이셨습니다.”
나를 걱정하기에 제 능력을 넘겨줬다니.
박 비서는 전보다 나이 먹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나를 향한 원망을 숨기지 않았다. 뒤이어 나온 그의 한탄에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내 고집으로 인해 주현이를 죽였다는 말에 나는 입술이 떨렸다.
“죽였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지도 지나치면 독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참 답답하다는 듯이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가이드가 가진 능력은 오로지 에스퍼를 위한 겁니다. 그걸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는 가이드가 에스퍼에게 다 준다는 의미가 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
“앞으로 평생 동안 병원 가시거나 아프실 일은 없을 테니 나가서 잘 사시길 바랍니다.”
박 비서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알았다.
주현이가 가이드 특유의, 치유력을 내게 선물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모든 능력을 주어 버린 탓에 이렇게 누워 있다는 것 또한.
“이렇게 말해도 이해 하실 지는 모르지만.”
“…….”
그는 내가 가진 것을 다 빼앗아 가더니 결국, 내가 그토록 바라던 죽음마저 그가 가져가 버렸다.
“그럼. 안녕히.”
너는 이때마저도 욕심쟁이일 필요는 없는데, 너는 기어코 내 모든 것을 앗아 가 버리는구나.
생도, 사도 오롯이 너에게만 속하게 하는구나.
“잠시만요.”
나는 주현이의 침대 곁에 서서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의 나는 자유로웠다. 내 평생에 이보다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나를 감시하던 새장 같은 푸른 눈은 잠겨 있었고, 더 이상 예전과 같이 나를 구속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가 잠든 사이에 그저 떠나면, 바라던 대로 날아가면 되었다. 내 능력으로, 그가 준 능력으로 바라고 바라던 그저, 그저 사는 삶을 이어 가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발이 바닥에 박힌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하십니까. 곧 떠나가셔야 할 분이.”
“안 가요.”
박 비서가 사다 준 신발을 내팽개친 탓에 여전히 슬리퍼 차림인 발치 부근이 쓸쓸했다. 내 옷차림만 보면 금방이라도 바깥을 향해서 떠날 것 같은데 말인데 떠나지 못하는 건 아마, 신발까지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은 탓일지도 모른다.
“……예?”
“있을게요. 이게 다 저 때문이니까……. 제가 책임질게요. 아까 의사 선생님이 저 있으면 좋다고 하셨잖아요. 주현이랑 각인된 에스퍼니까.”
아니. 네가 이렇게 아파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을 보니.
누가 내게 아무리 좋은 신발을 신겨 준다 한들, 그 발이 닿는 곳은 행복하지 못할 것 같다.
“……동정입니까?”
“제가…… 주현이를 동정할 처지인가요.”
내가 누워서, 잠들어 있는 것을 보는 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너도 나와 같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더 이상 빚을 두는 것은 싫어서 그래요.”
“…….”
단순한 동정으로 그 고통스러운 사랑을 감당하고, 그 고달픈 인연의 굴레에 다시 엮이며 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박 비서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대체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완고했던 마음은 쓸쓸한 바람 하나에, 파란 한 번에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것인가 보다. 다들 그렇게 바라는 돈으로도, 혹은 그와 나 사이에 엮인 운명으로도 어찌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주현이에게…… 제가 다시 능력을 넘겨줄 수는 없나요?”
“……없습니다. 그런 능력 전이는…… 가이드가 정말 죽기 직전에 하는 거니까.”
박 비서는 침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나는 이제야 알고 말았다. 너무 잘 알아 버린 탓에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이 그저 그에게 끌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도.
그렇게 벗어나고 싶던 주현이 옆에 있겠다고 말을 하는 내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인연의 굴레를 다시 쓰고 마는 나 자신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도련님은 당신이 평안하게 떠나시길 바라셨습니다. 그러니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꼭……. 안녕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병실 밖을 나선 박 비서의 발걸음이 복도를 쟁쟁하게 울렸다.
“…….”
참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 사랑은 이해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언제나 맞춰질 수 없는 그 이해 사이에서 상처받고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왜 그랬어.”
그러니 왜 능력을 다 내게 주었냐고 물어본들 나도, 그도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대답 없는 주현이가 야속했다.
“나는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왜 물어보지도 않은 걱정을 하고 그래.”
나는 박 비서의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서 사라질 동안 누워 있는 주현이를 가만히 보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참 차가웠다. 언제나 그의 푸른 눈과 같이 차갑기 짝이 없었다.
“넌 늘 그래.”
잠이 들어 있어서 그의 평안한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쓰게 웃었다.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슨 마음으로 내게 이렇게 큰 힘을 넘겨줬을까.’
너는 어쩌려고.
너는 나 하나 괜찮으면 평생을 아프고, 누워 살아도 된다는 건가. 그런 무모함이라니, 넌 참 대책도 없지.
띠……. 띠……. 띠…….
가만히 뛰는 심장소리와 간헐적인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내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그래, 대책이 없어서, 내가 어떠한 대책을 세워도 늘 넘어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우면, 내가 어떻게 갈까. 너 죽는 거 보면서 옳다구나 기회다 하고 갈 줄 알았을까. 평생에 나를 보아 온 애가 나를 그렇게 모르나. 아니면 너무 잘 알아서 이러는 건가. 그의 차가운 손을 여전히 잡은 채로 허탈하게 웃었다.
‘너 참 미운 짓밖에 안한다. 내가 너를 얼마나 더 미워해야 만족해서 이래.’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내가 너를 사랑하게 만들어야지, 이러면 미워하는 마음만 더 만들어 버리잖아.
똑똑한 애가 왜 이런 것은 요령이 없나. 그렇게 나를 사랑한다고 해 놓고 정작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면 어쩌자는 걸까.
“……왜 이렇게 미울까. 정말…….”
내 말에도 주현이는 한 치의 미동도 없이, 그저 산소마스크를 쓴 채로 누워 있었다.
그러게, 눈 빼면 예쁜 구석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어.
그러니 너를 두고 어떻게 가겠어. 이토록 미운 너를 두고 내가 어떻게 혼자 행복하겠어.
나는 가만히 그의 침대 옆으로 기어 들어가 누웠다.
사랑해서, 너는 나를 붙잡아 두고.
나는 네가 미워서 떠나지 못한다는 이 양가적인 감정은 어딘가 닮아 있었다.
“지금이라도 일어나면…… 조금만 미워할게.”
그와 내가 가진 상처와 사랑 또한 붉은 색을 띄고 있는 게 참 닮았다.
나는 내 몸에 흐르는 힘을 빼어내 그와 맞닿은 손에 흘려보냈다. 그러자 그의 몸 안에 천천히 스미는 나의 붉고, 따뜻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우리가 평범하게 만나서 평범한 사이로 만났더라면. 어쩌다 운이 좋아 가이드 센터에서 내가 그를 만났더라면 그에게서 가이딩을 받을 때마다 느꼈을 그런 감각.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그게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랑이었다.
그렇게 깜빡 잠이 들었던 것도 같다. 갑작스러운 일에, 긴장이 확 꼬인 탓인지. 아니면 내 가이드의 옆에 있다 보니 자연스레 편안함을 느끼고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깨어 보니 새벽녘을 달리하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거릴 때,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언제 일어난 것인지 주현이가 작게 웃고 있었다.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그 웃음소리가 참 거짓말 같았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안도했다.
“……깼구나.”
“……응.”
주현이, 괜찮은 건가, 죽지 않아서.
‘깨어나서, 참 다행이다.’
나는 그때, 내가 일어났을 때 그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상상이 갔다. 그런 내 머리를 말이 없는 그가 연신 쓸어내렸다. 나를 무척 소중하게 다루는 그 손길은 여전했다.
“…….”
“…….”
부드러운 손길과 섬세한 손이 빚어내는 침묵이 달았다. 그러다가 결국 침묵을 이기지 못한 우리 둘이 동시에 말을 걸었다.
“저기.”
“있잖아.”
겹치는 말에 나와 그의 시선 또한 맞물렸다. 깨어나기를 몹시 바랐던 그 파란 눈이 나를 다시 담았다.
보통의 사람이 입은 상처 색깔은 붉은색이라고 떠올릴 텐데, 이때에는 나와 그 사이의 상처 입은 자리에 남은 색깔은 파란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갑기 짝이 없는 그 색깔에 남겨진 열화와 같은 그런 사랑.
그 사랑에 데여 화상 자욱이 남아 있는 파란 눈은 어슴푸레한 새벽녘을 받아서 유독 형형했다. 내가 그 상처투성이 눈길에 홀려 있는 동안 주현이가 선수를 쳤다.
“가하 먼저 말해.”
“…….”
치사하게.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막상 내게 말하라 하니,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손톱 밑에 돋아난 불그스레한 흉터들이 스칠 때마다 내 손마디를 긁어대었다.
내게 왜…… 네 능력을 다 준 건지.
이번에 너는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리고 왜 우린 매번 이럴까.
왜 누구 하나가 이렇게 상처받을 수밖에 없고. 왜 이렇게 꼬여서 풀어 보려 해도 방법을 모르겠는 걸까…….
엉킨 마음 사이로 이런 저런 말들이 엉켜서 나오지 못하자 그가 내 뺨을 쓸었다.
“왜 안 갔어.”
“……그러게.”
기회를 줘도 가지 못한 내가 참 바보 같은 걸 나도 안다.
떠났어야 하는데. 이렇게 있으면 평생 너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 붙잡힐 것을 아는데.
나는 언제나 마지막에 나쁜 선택을 하고, 뒤늦게 후회하고 마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랬다.
“……그러는 너는 왜 줬어. 늘 아팠으면서 이러다가 어디 더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래.”
그걸 다 알면서도 막상 네가 아픈 걸 보면, 내 마음도 마찬가지로 아프고.
상처 가득한 네 파란 눈을 보자니 내가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어떡할까.
우리는 각인으로 인해서 어떻게든 이어져 있다는 게 이런 때에 내 발목을 잡았다. 내 말을 듣던 주현이가 손을 꼭 맞잡았다.
“가하가……. 나 없는 곳에서 아프면 어떡해.”
그때에도, 지금도.
“가하는 내가 지켜 줘야 하는데……. 가하는 내가 싫잖아.”
“……싫어.”
내 짧은 대답에 주현이의 얼굴이 다시 시무룩하게 변했다. 내 마음이 바람 하나에 흔들리는 것처럼, 그도 내 작은 말 한마디에 흔들리고 무너지기를 반복한다. 너무나도 다른 우리가 얽힌 건 이런 점마저 닮아서인가 보다.
“너랑 있으면 아프고 힘들어서 싫어.”
그래, 그게 참 싫다. 비가 오는 건 참 당연한 일인데, 그게 싫어서 조금이라도 피해 보겠다고 지구 반 바퀴를 돌면서 까지 반대의 길로 도망치려 애쓴 내가 바보다.
그런 건, 내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걸어가는 길로, 다시 그 비가 멈추지 않고 내리는 길로 가려한다.
너 홀로 그 빗속에서, 추위에 떠는 것은 너무 외로울 것 같아서.
“……미안해.”
“언제까지 나 이렇게 힘들게 할래.”
그러기 위해서 너와 나 사이에, 우리 안에 갈린 길을 봉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너와 나의 붉고 푸른색의 상처와 사랑이 이어지려면 어떡해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 나 이렇게 마음 아프게 할 거야……. 네가 안 그래도 나 충분히 아프고 힘들어.”
“……가하.”
내 말에 주현이가 나를 꼭 안았다.
너는 늘 나를 너무 좋아해서 탈이었다. 그런 우리가 붉게 헤쳐진 속살을, 푸르게 멍든 마음을 드러내며 상처 입은 것은 어쩌면 서로를 너무 사랑한 것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너에게 상처 받아도, 네가 미워도, 아픈 너를 보는 순간 결국 곁에 남아 있겠다고 말을 하고 마는 게,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우리 위로 내리는 비를 너와 같이 맞고 싶은 마음이 어떻게 이해 될 수 있을까.
“너 아프면, 나도 이어져서 아픈 거 알면서……. 아주 가지 말라고 짐 달아 놓으면서 이제 가라 그러면 내가 어떻게 가.”
“나는…… 그냥. 걱정이 되어서…….”
그렇지 않고서야 이 붉고 붉은 상처 자리에 푸르게 번져 가는 네 사랑이 설명될 수가 없다.
“신발도 그렇고.”
“신발? 박 비서에게 분명…….”
내 말에 주현이가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안다. 말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이 감정은 어떠한 이유를 붙여 둔들,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
“좋은 신발이 아닌가 봐.”
“…….”
“결국 너한테 와 버렸으니까.”
“……나쁜 신발이네.”
은은하게 웃는 주현이를 두고 나도 웃음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게 사랑일까. 이렇게 하찮고, 고통스럽고, 아프고, 질긴 것이 네 사랑이라면.
“그러더라. 아주 나빠. 맨발로 걷는 게 나을 정도로.”
“……괜찮아. 내가 가하 안고 다니면 되니까.”
그건 분명 파란색을 띄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오로지 바라보는 너의 파란 눈과 같은 색깔.
평생에 내 삶을 채울 색깔.
“환자를 부려먹고 싶진 않아.”
“힘을 급하게 넘겨주느라 그런 거야. 나 튼튼해, 괜찮아.”
웃는 그의 얼굴에 신 새벽녘을 깨우는 빛이 가느다란 선을 만들었다.
“가하가…… 언제 어디서든, 아프지 않으면 됐어.”
“……난 네가 아픈 거 싫어.”
나는 몸에서 끓어오르는 힘을 모아서 주현이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동시에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힘을 느끼며 함께 눈을 뜨자, 창백하던 주현이의 낯빛이 장밋빛으로 화색을 띄었다. 그가 넘겨준 힘이 그를 낫게 해 주는 게 확연히 보였다.
그의 힘은, 그의 사랑은 언제나 나를 상처 입힌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달랐다.
“가하…….”
“이제 너 아플까 걱정 되어서 아무데도 못 가겠어.”
처음으로 그의 사랑이 내 상처를, 사랑을 그 파란 속에서 안전한 울타리처럼 감싸 주고 있었다. 그러니 다시 너와 내가 이 사랑 속에서 상처 받는다면 나는 네가 준 이 힘으로 다시 너의 사랑을, 너의 상처를 낫게 만들면 되겠구나.
그게 너와 나의 사랑인가 보다.
그래서 네가 그렇게 연신 바라고 말했을까. 도리어 비가 내리는 그 새장 속에 가두어진 네 곁에 있어라. 네 옆 자리에서 내 날개를 접고 잠시만 쉬어가라 하면서. 파랗게 번진 네 상처를 언젠가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그러면 내 옆에 있어.”
그와 나의 사랑이 번져 가는 푸른 새벽하늘이 붉은 아침녘을 만나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며 깨어지고 있었다. 돌아온 갈래 길 끝에서 마주한 하늘 아래의 햇빛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고 이룰 데 없이 따뜻했다.
아무리 거친 비가 우리 위로 내린다고 한들, 더 이상 아프거나 추울 일은 없을 것 같다.
“내가……. 가하 언제나 웃게 해 줄게. 약속해.”
이렇게 나를 품어 주는 그의 손도, 품도, 우리를 비추는 첫 햇살과 같이 따스하기에.
그리고 그 온도는 언제나 변함없이 함께 할 것을 알기에.
“……그래.”
그렇게 내가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할, 그 깊고 맑은 사랑이 푸르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