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래서 그 사람이 그랬는데.”
한창 가연이가 어떻게 지냈는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병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가연이의 시선이 병실 문으로 향하는 순간에 내가 대답했다.
“네. 들어오세요.”
‘누구지.’
이번에는 주현인가. 많은 사람이 올 일이 없으니 막연하게 주현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동문이 열리면서 들어오는 사람은 이번에도 주현이가 아니었다.
“어, 대호 오빠. 오빠도 연락 받았어요?”
“응. 가연이 있었네.”
대호였다.
그는 가연이를 보면서 넌지시 웃었다가 이내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그의 얼굴에 내가 보지 못한 성숙함이 어려 있었다. 이미 어른이고도 남은 우리에게 무슨 성숙함이 더해질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랬다. 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살짝 미소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가하야.”
“난 카페 좀 갔다 올게요. 목이 말라서. 그럼…….”
“어디 가, 그냥 있어.”
가연이는 가방과 외투를 챙겨서 병실을 나섰다. 붙잡는 나를 두고 가연이가 고개를 저었다.
“금방 올게. 그동안 둘이 편하게 이야기 해.”
“가연 씨, 고마워요.”
“뭘요.”
가연이는 경쾌한 발걸음과 더불어 가벼운 대답으로 사라졌고, 병실에는 이제 대호와 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
“…….”
조용하게 남은 가운데, 우리가 있는 병실 침대 맡에 놓인 탁자 위로 뿜어져 나오는 가습기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대호였다.
“몸은 좀 괜찮고.”
“……응. 오래 잠든 것뿐이지 건강하대.”
나는 굳이 주현이와의 가이딩이 문제 있다는 말 같은 것은 꺼내지는 않았다. 내 대답에 대호는 안심을 하는 얼굴로 가연이가 앉았던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러면서도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이다. 송주현이 그렇게 가이딩을 퍼 부어도 계속 일어나지 못해서……. 무척 걱정했어.”
“그랬을 거 같다. 다들…… 놀랐겠어. 참, 너는. 너는 괜찮아?”
“나야 뭐. 늘 건강하지.”
내가 대호였어도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알기로도, 보통의 에스퍼는 가이드에게서 가이딩을 받는 순간 다 낫게 되니까.
하지만 가이딩을 받아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제법 심려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일어나지 않았던 것에는 내가 바란 것도 어느 정도 작용을 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1년이라는 기간 동안 잠들어 있다면 분명 나쁜 생각도 들었을 게 분명했다. 동생이 그랬던 것처럼, 대호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어렵사리 운을 뗐다.
“……늦었지만…… 미안해.”
“뭐가, 사고였는데.”
“그래도 나 때문에 네가, 그렇게…….”
그는 괴로운 얼굴로 자기 잘못이라고 고백했다. 찡그린 표정에는 죄책감이 깊숙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쩌면 평생에 지워지지 않을 그런 인생의 얼룩. 가벼워지지 않을 죄.
“내 욕심 때문에…… 네가 죽을 뻔 했어. 내가 만든 힘으로, 그렇게 아팠잖아.”
“……대호야.”
“내가, 송주현을 죽이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네가, 그렇게…… 아플 일은 없었을 텐데.”
나는 그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욕심 때문에 나를 아프게 했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가 욕심을 부려서 나를 데려가 준 덕분에, 비로소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짧은 시간동안 기억의 무거운 짐 하나 없이 행복할 수 있었다.
비록 다다른 끝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건강히 살아남았으니 좋은 게 아닐까. 나는 죽었으면 했던 목숨이 살아남아서 조금은 다행이라고 순간 생각했다. 나의 의미 없는 삶이 누군가에게는 작은 구원이 되었을 테니.
“내가…… 뛰어 들었잖아. 내가 자초했지. 그렇게 생각 안 했으면 좋겠어. 내가 네 말 안들은 건데, 네가 왜 미안해. 내가…….”
“…….”
“내가, 미안해야지.”
무엇보다도 이 상황에서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대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를 도와주었는데. 그는 내 곁에서 언제나 기다려 주었는데. 나는 한 번도 그 마음과 행동에 대해서 보답해 주지 못했다. 하다못해 기억이 없어 제대로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대호는 곁에서 감내했다. 나는 옆에 앉아 있는 대호의 손을 붙잡았다.
“네가…… 내 소원 들어줬잖아.”
“…….”
「비가 오지 않는 곳으로 가자.」
그건 어쩌면 내 심장이 아프지 않는 곳으로 가자고 했던 말이리라. 주현이에게 너무 깊숙하게 젖어 들어서 너덜대는 내 심장을 보듬어 주고픈 마음에서 비롯한 말.
“나, 대호 너랑 살면서 행복했어.”
늘 온난한 계절도, 어디든 곁에서 말없이 있어 준 그의 존재도, 무엇에도 구속 되지 않고 마음껏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그 모든 시간이 좋았다.
내 말에 대호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그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투박하지만 따뜻한 손이 내 손을 감쌌다. 가이딩과 비슷한 온도가 내 손을 타고 흘러왔다.
“나는, 또 그런 날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좋았어…….”
“……가하야.”
“……우리 같이 또 갈래?”
그의 작은 연민과, 한결같이 나를 소중하게 여겨 주는 그 마음. 그리고 주현이와 대적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진 그가 필요했다.
주현이가 예측 모를 소나기처럼 다가와서 다시 나를 그 비비람 속에서 흔들고 평생을 붙잡아 두기 전에.
그가 다시 이전과 같이 나를 욕심내 주었으면 했다. 그렇게라도 주현이와 멀어지고 싶었다. 다시 어디 먼 곳으로,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내 말을 듣던 대호는 고민하는 듯,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 있어? 주현이 때문에 어디 다치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왜…….’
그는 이전과 같이 나를 데려가겠다고 쉽게 말해 주지 않을까. 망설이는 대호의 태도에 나는 마음 한 구석이 다시 불안해졌다.
“그냥. 너 누워 있는 동안 많이 생각했어. 왜 이렇게 됐을까. 뭐가 문제였을까.”
“…….”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그는 내 손을 잡고 있었지만, 놓지 않을 것처럼 잡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놓으면 언제라도 놓아 줄 것처럼, 조심스럽게 받치고 있었다. 그는 물기가 찬 눈으로 나를 찬찬히 살폈다.
“내가 에스퍼인게……. 그토록 싫을 수가 없었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너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게.”
“…….”
“나는……. 너무 겁이 나.”
겁이 난다는 말과 함께 그가 쥔 내 손등 위로 따뜻한 물기가 툭, 떨어졌다. 내 손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이 떨리면서 내 손등 위에 맺힌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 그런 일이 있으면 나는…….”
“…….”
“너를 지켜 줄 수가 없어.”
우리는 선택할 수 없는 것들에서 종종 발견한다.
가끔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사람이라 욕심이 나고, 사람이기에 쉽사리 포기를 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상황은 나도, 대호도 그리고 주현이도 그렇게 서로를 버리지 못하고, 쉽게 포기 하지 못하는 바람에 만들어 낸 결과였다. 욕심으로 가려진 채로 제대로 바라보지 못해서 제 좋을 대로만 하다가 서로를 깨트리고 그 날카로운 조각으로 서로를 상처 입혔다.
“내 욕심으로 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게…… 나는 무서워.”
하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시 욕심의 조각을 주운 나를 때리는 말은 대호의 걱정 어린 말이었다.
“……잘, 살아 있잖아. 너무 자책하지 마.”
내가 다칠지도 모른다고 겁을 내는 그에게 다시 욕심을 내라고 부탁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러면서도 내가 어느 순간에도 살아있기를.
아프거나 어디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대호에게 미안해졌다.
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이용하는 내가 너무 비열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한탄했다.
내가 너무 약해서.
그의 마음을 알지 못했던 내가 이제 내가 알고 잡으려고 했을 때에는 이미 지나고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내가 무슨 생각까지 했는지 알아?”
내 서툰 위로는 대호에게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지 그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아니라. 송주현이 너를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
“송주현이 아니었더라면. 네가…….”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이어지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는 나도 알았다.
아마 죽었겠지.
대호의 말마따나 어떻게 손을 써 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었을 것이다. 나는 다시 떠오르는 아픔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살려낼 거야. 그런 일, 없도록.」
그 말에, 내가 어떤 상황에 있어도, 결국에는 돌아와서 나를 구해내는 주현이를 떠올렸다.
대호의 말대로 분명 그는 지금 내가 멀쩡하게 살아난 것처럼 내게 어떠한 어느 상황이 오든, 멀쩡히 살려낼 것이었다.
“……내가, 내가 가이드였다면 좋았을 걸.”
그 정도로 주현이의 능력은 강력했으니까. 그것을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주현이 곁에 있다가는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점점 죽어 가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 또한, 잘 알았다.
“그러면 너를 언제든지 지켜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나를 살린다고 했지만,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내 숨통을 죄여 들어갔다.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 나는.
“……대호야.”
하지만 내가 다시 욕심을 내면, 이미 나로 인해 상처 받은 사람을 다시 상처 입히게 된다. 그렇지만 나는 대호의 깊은 상처 자국을 헤집어 낼 만큼의 독한 마음도 없었다. 나 또한 주현이에게서 받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 아프고, 지쳤기 때문에…… 그의 상처가 더 잘 보였다.
나는 조용히 흐느끼는 대호의 손을 잡고 그가 슬픔을 거둘 때까지 위로했다.
상처 받은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상처가 더 잘 보이는 법이었다.
“또……올게.”
“……응.”
대호의 반듯한 얼굴은 평소답지 않게 울긋불긋하고 엉망이었다. 그게 우습기 보다는 안쓰러웠다. 이미 대호를 한 번 붙잡았다가 결국에는 내 무지로 그를 상처 입히고 말았기 때문일까. 그래서 나는 간다고 말하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다 못해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들었다. 안 그래도 제법 커다란 병실인데 나 혼자 남아 버린 탓에 더 커 보였다.
“……배고프다.”
사람이 빈자리에는 공허한 외로움과 쓸쓸함이 감돌았다. 나는 베개에 아무렇게나 기대어서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그때,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들어오라고 하니, 달가닥하는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렸다.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전에 보았던 익숙한 얼굴의 간호사가 카트를 돌돌 밀면서 다가왔다.
“아침 가져왔어요. 많이 배고프시죠? 죄송해요, 대화 나누시는데 방해될까 봐…….”
“아, 아니요. 감사합니다.”
“네에. 요 며칠간은 미음 드시고, 후에 속 괜찮다 싶으시면 일반식으로 바꿔 드릴게요.”
그녀는 카트에 싣고 온 식판을 내 병실 침대 발치에 있는 트레이 위에 올려 두고서 내게 밀어 주었다. 식판 위 그릇마다 뚜껑이 닫혀 있는 그릇들이 갓 나온 음식인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지 하나같이 다 따뜻했다. 그녀는 과일이나 주스 같은 것도 따로 접시나 컵에 따라 주고 내 트레이 위에 놓아 주었다.
“식사 끝나시면 벨로 불러 주세요. 치워 드릴게요.”
“……아뇨. 제가 갖다 드릴게요. 접수대로 가져가면 되나요?”
“아유, 그러다가 그릇 깨지면 제가 혼나요. 그러지 말고 편하게 불러 주세요. 그럼.”
내 말에 간호사가 싱그럽게 웃으며 병실을 나섰다. 내 몫의 식사가 없어진 카트는 바퀴 돌아가는 소리로 바닥을 요란하게 울렸다.
다시 혼자 남은 병실에서 뱃속을 울리는 요란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수저를 들었다. 묽은 죽과 간이 되지 않은 반찬들은 심심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허기진 배에는 그것도 맛이 좋았다. 금방 식사를 마치고 주스와 과일을 하나씩 먹으면서 간호사를 부르는 벨을 눌렀다. 그러자 요란한 카트 바퀴 소리가 사람 없는 복도에 울리면서 내게로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 유일한 소리에 나는 문득, 여기는 나만 있는 건가 싶었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이미 밥을 먹은 건가.’
누구 하나 걸어 다니지 않는 텅 빈 복도의 울림과 내가 부르자마자 바로 반응하는 간호사의 행동을 보아하니 많은 환자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예전에 같이 공사판 일을 하던 동료 아저씨가 하나 다쳐서 문병 갔을 때에는 분명 이만한 방에 대 여섯 명의 침대가 채워져 있었고, 복도에도 사람이 제법 많이 돌아다녔던 것 같은데.
심지어 많은 사람 중에 아저씨 닮은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지, 거의 전국적인 5일장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에 비에 여기는 참 한가하다는 생각과 함께 간호사들이나 의사들이 일하기에는 제법 편하겠다 싶었다. 그 순간 병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곧바로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네, 들어오세요.”
“식사 다 끝나셨어요?”
“네. 부탁……해요.”
“그럼요.”
그녀가 싹싹하게 웃으면서 내 침대 위 트레이를 치우는 동안, 그녀를 뒤따라 들어온 사람이 조용히 내 침대 맡에 섰다. 그는 간호사가 치우는 식판 위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내가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재빨리 나와 눈을 맞췄다.
“…….”
마주한 파란 눈에는 작은 기대감이 고여 있었다. 무엇인지는 모른다. 설령 안다고 해도 나는 모르고 싶었다.
기억이 없다는 것은 이럴 때에 참 편리하겠다.
그 사람을 모르니 그가 내게서 무엇을 원하는지, 바라는지.
혹은, 무엇을 했는지 모르니까.
트레이 위를 젖은 행주로 깔끔하게 닦아내기까지 한 간호사는 달각대는 카트를 끌고 가면서 병실을 나섰다. 그녀가 병실에서 나가자마자 나는 서 있는 그에게 말했다.
“……나가.”
“……가하.”
내 축객령에 그의 기대감이 이내 실망감으로 가라앉는 게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치 내가 나쁜 사람이고, 그가 이유 없이 당하는 사람같이 보일 법도 했다. 그보다 억울한 게 있을까.
“왜 왔어.”
“걱정……되어서. 식사는, 괜찮아? 속은 좀…….”
실망감을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덮어쓴 그는 다시 내게 한 발 가까이 와서 내 뺨을 잡을 듯이 손을 뻗었다. 그게 싫어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아직, 무섭지. 미안. 내 생각이 짧았……네.”
“잘 아네. 그럼 이제 나가 줘.”
그는 손을 물리고 멋쩍게 내게 말을 건네다가, 이내 입을 꼭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이 답답했다.
“…….”
“너 이렇게 보는 거, 불편해서 방금 먹은 음식 다 토해 낼 거 같거든.”
‘왜, 네가 한없이 상처 받은 얼굴을 할까.’
너 때문에 내가, 대호가, 동생이. 우리 모두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는데.
어째서 내 작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너는 도리어 죽을 것 같이 굴까.
나는 치미는 짜증을 결국 이기지 못하고 손에 집히는 대로 그가 서 있는 자리에 던졌다.
“가, 가라고. 제발! 나한테 그런 얼굴도, 걱정도 하지 말고 가!”
“가하, 진정해. 그러다 다쳐. 몸이 아직 안 좋은데…….”
주현이는 내가 던지는 것들을 팔을 올려서 막다가 이내 내게 다가와서 손을 꼭 잡았다. 여전히 차이가 나는 악력에 화풀이를 대신해서 아무것도 던지지 못하는 나는 악을 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갈 곳 없는 원망과 절규가 터졌다.
“나는 네가 미워…… 싫어.”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이 이렇게 가슴 아플 수가 있을까.
마치 비가 오는 날처럼, 내 심장이 저며 왔다.
나는 몸을 숙이고 울부짖었다. 침대를 감싸고 있는 두터운 이불 너머로 토해내는 슬픔이 젖어 들어가며 내 숨을 죽였다.
“……하지 마.”
“……가하.”
‘하지 마, 그런 말도 하지 마. 내게 용서도 무엇도 구하지마.’
나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파란 눈을 보면서 엉엉 울었다. 참 푸르다, 너는. 내가 아파도, 슬퍼도, 증오해도 넌 그대로 푸르다.
“……미안하다는 말도, 제발 하지 마.”
“…….”
“내 앞에서 그렇게 착한 척 하지 마. 네가 제일 나빠…….”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 다시는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리고 절대로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
내 힘 빠진 원망에 주현이가 나를 꼭 안았다. 차가운 손과 달리 품이 따뜻하게 나를 감싸 안았다.
“그래…….”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
네가 너무 밉다. 미워서 이렇게 유치한 화풀이라도 하고, 너란 사람 상처 조금이라도 받아보라 어떻게든 모진 말이라도 던지고 싶었다.
내게 그 정도 자격은 있다고 생각했다.
“가하 말이 맞아. 내가…… 나빠.
“그래도 나는 너 용서 안 해. 안 할 거야…….”
내게 주어진 그러한 마지막 기회마저도 뺏어가려고 용서를 구하는 주현이가 너무 미웠다.
“……내가 다…… 잘못했어.”
“하지 말라고 했잖아……. 왜 너는 내 말 하나도 안 들어……. 하지 말란 말이야…….”
미안하다고 할 거면서, 왜 그랬어. 왜 사랑한다는 말을 했어. 나를 네 사랑으로 나를 죽여 놓고 이제 와서 참 미안하다고 하면.
‘나는 대체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하면 좋지.’
차라리 예전과 늘 같아서 너에게 아무런 정도 붙이지 못하고 미워만 하고 싶은데. 주현이는 동생을 도와주고, 나를 살렸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죽기 전까지 나를 몰아세우던 그가 결국에는 나를 살려냈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기억이 없었다고 하지만 한없이 죽이고 싶었던 그를 결국에 살려낸 것도 나라는 것도.
“아무 말도 하지 마…….”
주현이에게 안겨 있던 나는 느슨하게 풀린 팔을 들어서 주현이의 상체를 때렸다. 이번에는 주현이가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래도 미안하다 하면서 내 원망에 큰 소리 내지 않고 묵묵히 받아 내는 게, 내게는 더 없는 불행이었다.
저 집요한 마음이 결국에는 나를 다시, 이 땅 위에 날아가지 못하도록 잡아 둘 테니까.
“그러다…… 손, 상하겠다.”
그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내 주먹질을 받다가 결국에는 내 주먹 쥔 손을 자기 손으로 감쌌다. 그러면서 차가운 손 아래로 뜨거운 기운이 모였다.
가이딩이었다.
나를 그, 아픈 관계에 길들이기 위해서 쓰던, 가이딩. 그 기운에 놀란 나는 내 손을 황급히 물렸다. 그러자 그가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 그래, 손 이리 줘. 부은 거 그냥 내버려두면 아파.”
“가이딩 안 해도 돼. 나 괜찮아…… 안 받을래.”
나는 그에게서 범해지던 기억을, 그 열기를 떠올리며 침대 구석으로 몸을 밀었다. 그와의 고통스러운 가이딩은, 그 손에 두 번 다시 잡히고 싶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지 말고, 가하 손 아플까 봐 그래. 응?”
“……주현아.”
“응, 가하.”
“너 다른 에스퍼랑, 가이딩 하면 안 돼?”
“뭐?”
내 말을 들은 주현이는 멀어지는 나를 붙잡지 못했다.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눈에다 대고 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나 가이딩 하면 너는……. 이상한 거, 할 거잖아. 나 그거 너무 아파서, 그래.”
“…….”
“부탁이야…….”
이미 동생과 대호의 상처를 보고 말아 버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현이와 거리를 두고 그의 일상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로만 아주 가끔씩 만나는 일일 테다. 하지만 나는 가이딩이 싫었다. 어떻게라도 피하고 싶었다. 끊을 수 없는 연결로 전달되는 그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내 심장 너머로 느끼며 다시 한 번 부탁했다.
“제발 다른 에스퍼 찾아서…… 가이딩 해 줘. 나는…… 그런 사랑, 안 받아도 괜찮으니까. 응?”
나 말고 다른 사람, 네 가이딩 기꺼이 받아 줄 수 있는 에스퍼 찾아가라고 하는 와중에 그가 나를 확 안았다. 저번에는 화풀이로 큰 소리를 쳤지만, 그게 무색하도록 그가 당장이라도 나를 눕히고 가이딩을 할까 덜컥 겁이 났다.
“하, 하지 마 제발. 하지 마……. 다른 거, 할게. 다른 거…….”
“……안 해. 가하 아픈 거, 안 할게. 약속해.”
그가 나를 꼭 안고서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 몸의 떨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아무리 그 품이 따뜻해도 몸은 언제나 반응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한테.”
“…….”
안겨 있는 그의 어깨 너머로 환히 보이는 병실 창문의 푸른 하늘이 드높았다. 내 마음도 하늘과 같이 푸르게 젖어 갔다.
“가라고 하지 마……. 아픈 거, 안 할게.”
상처가 나아도 흉터는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없는 기억에도 몸은 반응하고, 아무리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게 있었다.
“정말로…… 아프게 안 할게.”
그의 사랑이 남긴 상처가, 그 자리에 미처 아물지 못한 흉터가 너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