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61)

* * *

오늘은 이상하게 더 이상 정신이 잠들지 못했다. 오히려 더 선명하게 깨어 가고 있었다. 어쩐지 주변의 공기가 좀 따뜻해졌다고 생각될 때에 나를 안고 있던 그가 조금씩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는 내 옆에서 흐트러진 나를 다시 한 번 정리해 주고, 내 뺨에 짧게 입 맞췄다.

“……가하는 잘 잤어?”

그러고 한참 말이 없더니만 다시 한 번 내 가슴팍에 제 손을 올렸다.

‘또, 가이딩을 하려는 걸까.’

나는 그게 참 미련하다고 느꼈다.

“……이따가 또 올게.”

아까같이 어차피 안 될 텐데.

“잘 자, 가하.”

어차피 난…… 그의 마음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내게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하던 그가 한숨을 쉬면서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병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복도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을 무렵 조용하게 나 홀로 남은 병실에서 눈을 떴다.

“…….”

주현이가 연신 가이딩을 했던 탓일까. 잠들지 못하던 내 정신은 결국 깨어났다. 나는 누워 있는 상태로, 넓은 병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숨을 두어 번 몰아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조용하던 기계가 급격하게 삐, 삐 소리를 내며 화면에 연달아 그어지던 선이 위 아래로 요동쳤다. 나는 손등에 이것저것 꽂혀 있는 호스에 시선이 끌렸다. 알 수 없는 액체가 느리게 떨어지고, 이내 연결된 호스를 통해서 손목 아래로 주입되고 있었다. 그런 손목 주위로 점점이 찍혀 있는 바늘 자국이 제법 무성했다. 그걸 보다가 블라인드가 가려진 창문가로 시선을 옮겼다. 그 블라인드의 얇은 틈 사이로 잔잔하게 적셔오는 아침의 햇살이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참으로 눈이 부셨다.

“……아침이네.”

눈을 뜨고 싶지 않던 세상의 빛은 그저 평화롭게 나를 비추고, 감싸 안을 뿐이었다.

“…….”

아마 기억이 없던 나였다면, 오늘 참 좋은 날씨라고 한 번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알게 된 나에게는, 결국 다시 찾아온 어느 잔인한 하루였다.

그렇게 도망치고 도망쳤던 각인 상대에게, 이 질긴 생명이 끝날 때까지 서로에게 연결되고 귀속될 수밖에 없는 그런…….

수많은 하루 중에 또 다른 하루.

나는 적막한 병실 안에서 그저 눈을 끔뻑이며 다시 누워 있다가, 침대 위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걸까.

‘꽤, 잠들어 있었던 거 같은데.’

그저 상체를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땀으로 젖어 가고 지지대처럼 세운 두 팔이 후들후들 떨렸다. 제법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탓인가, 아니면 주현이가 주던 가이딩을 받지 않은 것 때문인가. 내 몸에는 별다른 힘이 없었다.

“……후아.”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폐부에 가득 찬 한숨을 툭 뱉었다.

‘고작 일어서는 거 가지고…….’

온 몸을 적시는 땀에 척척하니 감겨드는 입원복을 털어내면서 땀을 날려 보려 애썼다.

“……이래가지고는, 도망도 못 가겠네.”

나는 병실의 천장을 보면서 허망한 한숨을 쉬었다. 멀쩡한 몸 상태로도 남의 도움을 받아서야 겨우 도망칠 수 있었는데. 상태를 보아하니 이래서야 병원 바깥 공기를 맡는 것도 겨우 할까. 아무튼, 당장 이부자리를 박차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다. 나 같이 별다른 재주도 없는 낮은 등급의 에스퍼가 SS급 에스퍼의 공격을 직격으로 받았으니…….

‘……어쩔 수 없나.’

병원 신세를 지게 만든 원인을 떠올리며 주먹을 쥐고 멍청한 내 머리를 퍽퍽 쳤다.

왜 그랬을까, 이런 멍청이도 멍청이가 없다.

‘아무리 기억이 없어도 그렇지…….’

“……하아.”

잡아먹으려고 달려온 호랑이의 아가리를 향해 제 발로 걸어간 셈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그게 못내 답답한 점이었다.

대호는, 내 소원에 내 말에 모든 것을 다 걸고 도와줬는데. 그걸 보기 좋게 걷어찬 건 나였다.

‘내 앞에서 피 흘리는 게 불쌍하다고, 그 보석 같은 파란 눈에 끌려서…….’

그리고 꿈에서 봤던 그 사람과 닮았다는 기시감으로, 주현이를 집 안에 들여 놓은 건 누구도 아닌 나다. 그 결과로 이런 사고가 일어난 것이니, 그저 주먹 쥔 둔한 손으로 스스로를 때리며 원망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과거의 잘못된 선택이 빚어낸 현재의 결과에 한숨을 푹 쉬다가도, 대호를 다시 떠올리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대호는, 어떻게 된 거지.”

그때 분명……. 기억이 날라 가고 각인이 일시적으로 깨져 있는 탓에 가이딩이 먹히지 않아서 죽을 듯이 괴로워하는 내 기억을, 대호가 돌려 준 것은 기억이 났다. 그렇지만 간호사와 가연이. 그리고 주현이가 이 아침이 될 때까지 병실에 있는 동안에도, 대호의 목소리나 기척 따위는 찾기가 어려웠다.

‘설마…….’

주현이에게 분풀이 같은 걸 당한 걸까. 주현이는 다 커서도 어렸을 때와 같이, 성격도 안 좋고, 남의 약점을 쥐고 제 좋은 짓만 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녀석이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게 분명하다.

“…….”

‘어떡하지.’

나는 깨어난 현실에 대해 생각할 틈도 없이 대호의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이 꽉 찼다. 결국 터질 것 같은 걱정을 간신히 갈무리하고 우선 이 병실을 나가 볼 생각으로 두 발을 침대 너머로 내밀었다. 여기서 가만히 누워 있을게 아니다. 나가서 대호를 찾아야 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어야 할 텐데.’

대호 생각에 저려오는 마음이 지친 몸을 움직이게 했다. 주현이에게 괴로워하는 사람은 나 하나로도 족했다. 그 조급한 마음으로 다리를 움직이고 바닥에 발을 디뎠지만, 내 몸이 사고를 당해서 누워 있느라 꽤 약해져 있다는 것을 조금 간과했다.

“으윽.”

바로 서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몸이 지푸라기 인형처럼 파스스 무너졌다. 본능적으로 손을 바닥에 디뎌서, 얼굴이 바닥에 볼썽사납게 부딪히는 것은 막았지만, 둔한 감각을 뚫고 들어오는 통증이 제법 얼얼했다. 힘없이 풀렸던 팔 다리를 다시 모아서 엎어진 몸을 일으키고 보니 눈에 띄는 색이 있었다.

붉은 색.

천장과 마찬가지로 하얀 바닥에 유난히 선명한 색깔의 붉은 피가 바닥에 질게 뿌려져 있었다. 동시에 바닥을 짚은 내 손 바닥에 붉은 핏자국이 선연했다.

“아.”

어디서 피가 나온 것인지 살펴보니, 아까 침대에서 나오면서 바닥에 쓰러진 탓에 손목에 있던 바늘이 빠져서 침대에 걸쳐져 있는 것이 내 눈에 걸렸다. 손을 들어서 보니 손등에 꽂혀 있던 바늘 주위가 다 찢어져 있었다. 그 바늘이 빠진 손등에서부터 내 붉은 피가 방울 방울지다 못해 쉴 새 없이 팔꿈치로 쉴 새 없이 흐르며 바닥에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피가 멈출 기미 따위라고는 보이지 않는 손등을 가만히 보았다.

“…….”

둔한 감각은 재밌게도, 고통 또한 반절로 경감해 주고 있었다.

아니면 이미 충분히 많이 아픈 탓에 이깟 상처 따위는 아프다 느껴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 번이 아프지, 연이어진 두 번, 세 번은 그저 익숙해지다 못해서 무뎌져서 그다지 아프지 않은 것처럼.

‘그래도 조금은 아프네…….’

바닥에 떨어진 핏물은 바닥을 정복해 가는 것처럼 넓게 퍼져가다가 이내 손목에서 빠진 호스에서 나오는 투명한 액체와 섞이면서 물에 붉은 물감을 타 넣은 것처럼 묽게 번져 갔다. 무엇인지도 모를 액체와 피가 섞여서 내 입원복의 바짓단을 적셨다. 투명한 액체가 어디서 나오나 눈으로 쫓다가 침대 옆에 세워져 있던 높은 쇠막대에 걸린 투명한 약물 봉지를 보고서 수긍했다.

‘저거였구나.’

나는 병원 침대의 난간을 붙잡고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겨우 펴서 일어섰다. 이래서야, 주현이 원하는 대로 다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끝까지 포기하기 않고 일어서서 뭔가 지지할 것이 없는지 찾았다. 그런 내 눈 바로 옆에 애처롭게 호스만 달랑거리는 약물 봉지 거치대를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그 막대를 지지대 삼아 병실 문 앞으로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하아, 하아.”

정상인의 걸음이라면 금방 가로질러 갈 텐데. 갓 깨어난 몸은 답답할 정도로 느리고 둔했다. 갓난애가 기어가도 이러지는 않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는 동안 병실 문이 나를 인식하고 자동으로 열렸다.

‘됐다.’

병실을 나간다는 기쁨도 잠시. 연분홍빛 카디건을 걸치고 있는 하얀 유니폼 차림의 여성이 나타나서 거칠게 숨을 쉬는 나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간호사였다.

“응?”

“……후흐, 후으…….”

‘들켰다.’

멀리서 봐도 나 여기 환자요, 하고 알려 주는 차림새를 보고 간호사는 손에 쥐고 있던 차트 따위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탄성을 질렀다.

“어머, 어머. 여기 입원 환자시구나. 지금, 깨어나신…… 거예요?”

“……하아.”

“어머 손! 피. 이거 어떡해.”

연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꼼꼼히 살펴보던 간호사는 내 손등의 상처를 그제야 알아차렸는지 심각한 표정을 했다.

“세상에 어쩌다가 이렇게……. 우선 저한테 기대세요…….”

그녀는 지지대를 기대어 겨우 서 있는 나를 부축하며 병실에 들어갔다. 달아나려던 내 생각과는 다르게 몸은 우습게도, 이게 한계였는지 힘이 다 빠져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어머! 피가 완전……. 급하게 일어나시다가 그러셨구나.”

그 부축에 기대어 다시 침대로 돌아가다가 간호사는 이름 모를 액체와 내 핏물이 잔뜩 엉겨서 더렵혀진 바닥을 보고 경악했다.

그런 반응을 하든지 말든지 나는 그저, 이 방을 나가기도 전에 들켰다는 허탈함이 머릿속에가득 차 있었다. 이런 몸 상태를 하고서 빠져 나갈 거라 생각했던 게 너무 순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간호사는 허탈함에 힘이 쭉 빠진 나를 침대 위 까지 부축해서 앉혀 두고 대답이 없는 나를 두고 떠들기 시작했다.

“제가 좀 빨리 올걸.”

“…….”

“그동안 계속 누워 계시느라, 근육이 살짝 굳어서 그래요. 몸이 어디 잘못 되었나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점점 근육이 풀어지기 시작하면 이전처럼 잘 다니실 거예요.”

“…….”

그녀는 대충 알겠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병실 한쪽에 가서 철제 선반에 놓인 상비약품을 꺼내서 말라붙은 핏자국으로 엉망인 내 손목을 소독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간호사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누워 있어서 몸이 그랬다는 것도, 몸이 좋아질 거라는 말도 내게 그다지 달갑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누워 있던 것도 한 사람 덕이었고, 몸이 좋아도 그 상태에 기분이 좋을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그나저나 이 정도면 꽤 아프셨을 텐데……. 우선 지혈이랑 연고 발라 드릴게요. 다음에는 어디 불편하시면 여기, 벨 눌러 주시면 돼요.”

그녀는 조용하기 짝이 없는 나를 찬찬히 살피다가 침상에 달려 있는 주황색 버튼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몸이 굳어 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대답하는 내 입과 혀마저도 영, 걸리적거렸다. 서툰 내 감사 인사에 그녀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살짝 풀리며 미소 지었다.

“뭘요. 제 일인데요. 참, 몸은 좀 어떠세요? 지금 어디 불편하거나 아픈 곳 있으세요?”

“……그냥 좀, 둔해요. 말해 주신 대로 계속 누워 있어서…… 그런가 봐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쓰러운 눈길로 나를 보았다. 제법 베테랑인 것인지 그녀는 설명을 해 주는 것과 동시에 내 손목을 소독하며 약과 거즈를 올린 후에 가볍게 붕대로 고정하는 손놀림이 빠르고 정확했다.

“1년 동안 누워 계셨으니까요. 아 그렇지, 배고프지는 않으세요? 가볍게 죽이라도 우선 올려 드릴까요?”

“1년 동안…… 제가 누워 있었어요?”

‘1년이라니.’

적으면 며칠, 혹은 1, 2주 정도 누워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기간을 들은 내 정신이 멍해졌다. 그러자 손목에 감은 붕대가 풀리지 않도록 테이핑으로 고정한 간호사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작년 여름에 오셨으니. 어쩌면, 1년이 넘었겠네요. 벌써 가을이니까.”

“…….”

1년 동안 누워 있었다니……. 충격에 빠져 있는 나에게 그녀는 괜한 소리를 했다는 듯이 자책했다.

“아유 제가, 괜한 소리를 했나 보다. 우선 누워서 쉬고 계세요. 갈아입으실 새 입원복 가져다 드릴게요. 여기도 얼른 치울 테니까 침대에서 나오지 마셔요.”

“……네.”

그녀는 바닥의 핏물들을 치우러 오겠다며 병실을 나서다 말고, 나를 향해서 환하게 웃었다.

“아 그렇지. 부회장님이 기뻐하시겠어요. 그동안 환자분이 깨어나시기를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몰라요. 기쁜 소식 어서 전해 드려야…….”

부회장? 나는 그게 누구인가, 생각하다가 전날, 주현이가 내 병실에서 들어오기 전에 불렸던 호칭을 가까스로 떠올려 냈다. 주현이에게 내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려 준다는 말을 듣고서 나는 그녀를 불렀다.

“……잠시만요.”

“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그.”

내 부름에 그녀가 금방 돌아섰다.

“제가 일어났다고 말하지…….”

그냥, 내가 깨어났다는 걸 그에게 알리는 것이 싫었다. 그가 바라는 대로 되는 걸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알려 주지 말아 달라고 하려 했다. 하지만 병실 문이 열린 너머의 복도를 시끄럽게 울리는 급한 뜀박질 소리가 가까워졌다. 동시에 내 심장의 박동이 불안하게 뛰었다.

‘설마.’

그리고 가까워진 발소리의 주인은 문 앞에 서 있던 간호사를 밀치며 들어왔다.

“어머!”

“……가하!”

주현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언제 어디에 있든지 돌아오고 마는 그 애.

‘어떻게 알고 왔을까. 아, 각인이 이어져 있으니…… 알려 줬을까.’

돌아온 족쇄의 확실한 효과 떠올리자니 짜증이 일었다. 이건, 이 지긋지긋한 인생에서 지워지지 않을 그림자나 다름없었다. 푸른색을 띤, 그림자.

“헉, 허억. 가, 하.”

내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급하게 온 기색이 역력하도록 거친 숨을 내뱉으며 내 침대 맡에 서 있는 그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는 내가 반가운지 몰라도, 내가 그를 반겨 줄 정도로 내 마음은 넉넉하지가 않았다. 갑자기 주현이에게 밀쳐진 간호사는 불쾌하다는 기색 없이 한 번 웃고 말 따름이었다.

“어머, 어떻게 알고 오셨대.”

그런 그녀에게 주현이는 잘 빗어 내린 머리가 무색하도록 거친 숨과 함께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답지 않게, 부드러운 감사를 표했다.

“……그동안 수고했어요. 고마워요.”

“아니에요, 제가 뭘요. 그럼 두 분이서 편히 대화 하세요.”

간호사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병실을 빠져나갔고, 그녀가 통통 걷는 걸음이 멀어질 무렵에 병실의 자동문이 스르륵 닫혔다.

“…….”

“……하아, 미안. 하아…… 급하게 오느라.”

그리고 병실 침대에 누워서 가만히 창문가를 바라보는 내 옆에 서 있는 그가 미처 못 다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간호사가 말한 계절의 흐름이 거짓말은 아닌지, 그가 입은 옷에서 가을의 차가운 바람 내음이 풍겼다. 내가 잃어버린 1년이란 시간이 묻어 있는 계절의 향기.

“……다행이다.”

연신 숨을 고르기 바쁘던 주현이는 첫 말을 그렇게 끊었다. 다행이라고.

“…….”

기쁨과 그동안의 걱정, 불안, 슬픔, 고통이 섞여 있는 주현이의 오묘한 표정을 보자니, 누구에게 다행인지는 굳이 내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제야 도톰한 겉옷을 벗으며 믿기지 않는 듯, 나를 계속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가하가 무슨 이상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점점 들려오는 고동소리가 예전과 닮아 있어서 알았어.”

“…….”

“깨어났다는 거…….”

각인이 알려 준 모양이었다. 그는 똑 떨어지도록 옷태가 나는 양복을 입은 채로 내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한 걸음씩 올 때마다 뚜벅, 뚜벅 하고 울리는 구둣발 소리가 선명했다.

각인의 대상이 가까이 있을수록, 접촉이 잦을수록, 서로가 가진 능력과 신체능력이 향상되는 게 지금 상황에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이점이었다.

온몸의 감각이, 오롯이 그를 향해서 곤두세웠다.

“…….”

내가 원하지 않아도.

“……가하가 깨어나면, 말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의 열렬한 시선이 다시금 부담스러워서 나는 시선을 내렸다. 시선에 들어오는 그의 손이 병원 침대의 난간을 툭 잡았다. 그러다 이내 긴장이 되는 사람처럼,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난간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 움직임에 따라 그의 손등 위 핏줄이 시퍼렇게 굵은 줄기를 도드라지는 자태를 드러냈다.

“지금은 잘 생각이 안 나.”

“…….”

예전이라면 손이 참 예쁘다고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의 손끝 밑에 있는 흉터를 보며 불쌍하다고 눈물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알게 된 나에게 그런 연민 따위는 이제 생기지 않았다. 지친 마음에서 비롯한 입에서 나오는 말은 삐뚜름하기만 했다.

“……내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지.”

지금의 나에게 저 손은 나를 다시 그 지옥 같은 집으로 끌고 갈 손이었다.

예전처럼 나를 강제로 범하고, 나를…… 이 방에, 그 집에, 이 땅 위에 억지로 붙들어 놓을 그런 손.

“……그럴, 리가. 절대 그렇지 않아.”

내 비뚤어진 말에 주현이가 사뭇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손이 커다란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 1년 동안 누워 있느라 밥을 먹지 못해 말라 버린 것인지, 내 손이 그의 손 안에 맞춘 것처럼 꼭 찼다.

“지금이라도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그러게.”

내 대답에 주현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모습에 내 뱃속이 뒤틀리는 듯 했다.

“그렇…….”

“내가 일어나서. 네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되니까 다행이겠지.”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나는 왜 에스퍼로 태어나서. 하필 특별한 힘 하나 없는 에스퍼로 태어나서 가이드인 주현이와 엮일 수밖에 없는 걸까.

아무런 힘도 없는 일반인으로 태어났다면, 아빠의 사업이 그저 그랬더라면, 그래서 그 학교에 가지 못했더라면.

‘조금은 자유롭게 살았을까.’

내가 들어도 차가운 기색이 어린 대답에 주현이는 내 손을 놓치기 싫은 사람처럼 더욱 꼭 쥐었다.

“……왜 그런 말을 해?”

“내 말이 틀렸어?”

왜 그런 말을 하냐고 애처로운 눈빛을 내는 주현이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가증스러웠다.

‘나는 안 믿어. 네가, 나를 걱정하고, 내가 아픈 게 싫다는 거, 안 믿어.’

“가하.”

“각인된 내가 도망가는 바람에 너, 아팠던 거잖아. 왜, 아. 지금 당장 여기서 가이딩을 하고 싶어서 그래?”

‘네가 나를 그렇게 아프게 하면서 좋아했으니까…….’

그러니 너란 사람이 나를 진정으로 걱정하거나, 나 때문에 아파할 리가 없다.

네 사랑에 다른 의미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상체를 일으키고, 붕대가 감긴 손으로 입원복의 상의를 잡아 뜯어내듯이 풀어 내렸다. 그러자 얇은 입원복의 앞섬이 엉망으로 터졌다. 바지마저 내리려는 것을 주현이가 황급히 잡아서 막았다.

“가하 왜, 왜 그래. 응?”

“……해.”

단추 따위가 침대 위로 투두둑 떨어지고 벌려진 내 입원복 사이로 주현이의 옷자락에 묻어 있던 차가운 공기가 오싹하게 들어오며 맨살을 짓이겼다. 주현이는 그 붉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애써 웃으려고 했다.

“……지금 무슨, 말…… 하는 지 모르겠…….”

“가이딩.”

“…….”

“너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 어차피 그러려고 나 찾고, 잡으러 왔잖아.”

웃음이 나오다니. 아직도 이게 다 즐거운 놀이 같아 보였나 보다. 나는 내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서 내 가슴팍에 올렸다.

“너 피 흘리고 아픈 척 하는 거, 두 번 보기 싫으니까 얼른 가이딩 해.”

“……이러지마.”

쏘아붙이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주현이는 옷을 풀어헤치는 내 두 손을 잡고 이내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왜, 이제는 내가 싫어? 좋다는 말도 다 거짓말…….”

이러지 말라니.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이번에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기만할 셈인가. 나는 없는 힘을 간신히 끌어 모아서 그의 손을 잡았다. 네 사랑이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지 말고 그저 네 하고픈 대로 했으면.

그래서 내가 너를 마음껏 미워하게 했으면 좋겠다.

“왜, 나는 네 에스퍼잖아. 하나밖에 없는 네 에스퍼인데 왜. 얼른 해.”

“……감기 걸리겠다. 새 옷 갖다 줄게.”

그는 입고 있던 양복 재킷을 벗어서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휑한 공기가 찢어진 옷 사이로 들어오던 것을 주현이의 온기가 남아 있는 묵직한 재킷이 막아 주었다. 그게 우스웠다. 억지로 할 때는 언제고. 그의 언뜻 다정한 행동에 오히려 오기가 들어서 그가 걸쳐 준 양복 재킷을 거칠게 벗어서 바닥에 던졌다. 내가 던진 양복 재킷이 조용한 병실 바닥면에 날카롭게 떨어지는 소리만 쨍쨍하게 울렸다.

“필요 없어. 어차피 가이딩 하게 되면 멀쩡한 옷도 걸레짝이 될 텐데.”

주현이는 내가 바닥에 내팽개친 양복 재킷을 묵묵히 주웠다. 재킷이 사라진 어깨는 가벼워졌지만, 다시 피부 위로 휑하니 바람이 들어왔다.

“아, 아니면 가이딩 하는 기분 나도록 새 옷 입고 할까?”

“……가하.”

“그럴까?”

내가 기꺼이 그 가이딩 받겠다는데. 그동안 그토록 거부하고 싫다고 했던 가이딩을 이제는 받겠다는데. 주현이는 왜 이제 와서 하기 싫은 사람처럼 빼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아파도, 너는 했잖아.’

“넌 내가 아프면 더 흥분하잖아. 더 좋아하잖아. 잘 됐네.”

“……그만.”

‘더 좋아했잖아.’

“아니면 울어 줄까? 넌 내가…… 우는 것도 좋아하잖아.”

“그만해. 울지…… 마.”

그가 좋아하는 대로 울고 싶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내 눈에서 눈물이 났다. 그런 내 모습에 주현이가 어렵사리 대답했다. 울어달라고 그럴 때는 언제고, 이제는……. 주현이가 쥐고 있는 내 두 손목이 내 숨통처럼 죄여 들어갔다. 조금이라도 더 힘을 준다면 예전의 내 왼쪽 발목과 마찬가지로 뚝, 부러지며 그가 바라던 흉터가 족쇄처럼 지워지지 않고 새겨질 것이었다.

“왜, 이제는 팔도 부러뜨리게?”

“…….”

“해.

냉정함이 감도는 내 말에 내 두 손목을 잡은 그의 손이 달달 떨렸다. 그 모습에 울던 내게서 허탈한 웃음마저 나왔다. 고작 이런 말로 겁이 난다니, 주현이 답지 않았다.

나는, 그가 길들이고 싶었던 모습으로 결국 되고야 만 것인데. 왜 그만하라고 하는 걸까.

아니면 또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던 걸까.

“아.”

여전히 나는 병실 침대 헤드에 기대었던 몸을 무릎으로 일어서서 그의 앞으로 슬슬 기어갔다.

“내가 깜빡했네.”

그는 내가 졸라대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그런 내 움직임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의 숙였던 고개가 들렸다. 내가 기어가는 바람에 내 코앞까지 가까워진 물기 어린 파란 눈은, 비탄에 빠져 있었다.

‘거짓말.’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네게 속지 않을 테다. 저 예쁜 색깔 뒤에 숨겨진 것들에 속고, 흔들리고 싶지 않다. 기억이 없을 때마저도 나는 저 색깔에 홀려서 결국 이렇게 돌아오고 말았으니까. 멍하니 나를 담는 파란 눈에 대고 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파란 눈이 놀라움으로 환히 뜨였다. 곧바로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대었다. 서로의 마른 입술이 부닥치면서 달싹이다가 그의 열린 입으로 내 혀가 침범해 갔다.

“……가하, 무슨…… 읍.”

그의 혀가 들어온 내 혀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게 도리어 내 혀와 얽혀들면서 야살스럽게도 쪽쪽대는 소리를 만들었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만연한 그는 내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을 풀고 나를 밀쳐내려고 했다.

“하아, 그만, 그만해…….”

그 전에, 손이 자유로워진 내가 그의 품 안에 안겨 들어서 밀어내지 못하도록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덕분에 그와 주고받는 온기가 더욱 깊이 들어왔다. 그는 그런 나를 떼어 놓으려고 하는지, 제 목에 둘러진 내 팔을 풀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말과 행동이 얼마나 반대인지. 내가 어디 부서지기로 할까, 손에 힘을 제대로 넣지 않은 탓에 번번이 헛손질을 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나를 안고서 내가 주는 키스에 응했다.

‘……이럴 거면서. 결국에는 이럴 거면서.’

늘 반대로 행동하는 그의 행동을 비웃으며 나는 입 안으로 넘어오는 그의 가이딩을 어김없이 받았다. 나 또한 에스퍼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누워 있던 탓에 가이딩이 간절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그가 주는 가이딩의 맛이 제법 달았다. 아까만 해도 배고프다는 감각 따위는 없었는데, 그와 하는 키스가 좀 더 농밀해지며 질척해질수록 원인 모를 허기가 졌다.

오랫동안 굶은 사람 마냥 그의 키스에서 나오는 가이딩을 탐하고 나서야, 매달린 팔에 힘이 떨어지는 바람에 내 몸이 무너지는 것을 주현이가 재빨리 안아서 받았다.

“하아, 하아…….”

“…….”

그의 품에 안긴 채로 가쁘게 숨을 쉬는 나를, 그는 가만히 보다가 무언가 말하고 싶은지 붉게 부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제야 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나. 나는 피식 웃으면서 찢어진 입원복을 헤쳐서 맨 가슴을 드러내 보였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내 움직임을 따라 가슴팍에 닿았다. 의식되는 시선이 만들어지는 긴장감으로 인해서 가슴팍의 유두와 아랫배가 꼿꼿이 뭉쳐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되어 버렸어. 흥분되지 않아? 너, 내가…… 내가, 이렇게 반응하면 좋아하잖아. 내 몸이 너를 바라는 거, 좋아하잖아.”

“……그만.”

“아직 내 가슴이, 작아서 그래? 네가 자주 만져 주면 커질 텐데.”

“그 이상…… 말 하지 마.”

“아니면 지금 네 앞에서 할까. 젖 자위? 나 발랑 까져서…….”

“……제발.”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나를 병실 침대에 다시 조심스럽게 눕혔다.

‘참, 이상하네. 키스는 잘 해놓고, 왜일까.’

이제 와서 착한 척을 하기엔 주현이의 성격을 내가 너무 잘 알았다. 내 몸을 곱게 눕히고 떠나가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가 누운 내 위로 숙인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키스로 인해서 번들거리던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내가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사랑해 줘.”

“…….”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사랑해.”

거짓말.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이 웃으며 붙잡은 그의 손을 내 맨 가슴에 내려놓았다. 그가 몰고 온 가을의 공기와 언뜻 닮은 온도의 손마디 마디 사이에 흥분으로 단단해진 내 유두가 걸렸다.

“그럼, 나를 날게 해 줘.”

“……가하.”

“지금 내 아래에, 가득 해 줘.”

“…….”

“나, 날고 싶어. 응?”

결국, 나를 강간하라고 말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내게 잡힌 손을 빼지 못하고 떨던 그는 이내, 내 가슴팍에서 펼친 손을 구부려서 주먹 쥐었다.

“왜, 아니면 내가 먼저 네 거 빨아 줄까? 내 아래처럼 목구멍도 참 좁다고 너, 좋아 했잖아, 우리 같이 연습하자.”

그러자 매끈하게 굽어진 그의 손등이 도리어 내 가슴팍에 응어리진 것처럼 무겁게 꾹 얹혔다.

나는 그가 바라던 대로 되었는데, 왜 그는 웃지 못할까. 분명 그가 좋아하는 대로 가이딩을 예쁘게 졸라 대었는데.

“나, 네 좆 잘 반길 수 있어. 내 안에 가득 넣어 주면, 꼭 조여서 네가 넣어 준 거 한 방울도 안 흘릴 수 있어. 이번에는 잘할게. 약속해.”

침대에 누워서 웃는 나와 반대로 쓰러질 듯이 침대 난간에 기대어 소리 없이 숨죽여 우는 주현이가 이해되지 않았다. 숨죽임은 이내 흐느낌으로 번져 가며 내 귀에 스며왔다.

“잘못했어…….”

시간은 걷잡을 새 없이 흐르고, 이미 늦고 난 뒤에는 어찌 되었든 간에 되돌릴 수 없다.

사람 마음도 그런 모양이었다.

“……나, 정말 날고 싶어서 그래.”

이미 지나간 마음을 주워 담을 수 없는 노릇이니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한다 한들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길 가운데에 서 있는 나와 주현이를 이어 주는 각인이 그 잔인한 사실을 알려 왔다.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런 내 마음과 반대로 간절함이 가득한 주현이의 흐느낌이 내 가슴팍을 두드리며 결국에는 눈 주위를 흐르며 내가 베고 있는 베갯잇을 축축히 물들였다.

눈물도 전염이 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흘리는 눈물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언뜻 나는 것도 같았다. 나는 먹먹해지는 코에 가득 차는 그 비린 물 내음을 맡으면서 속으로 울부짖었다.

왜, 그랬어. 왜 나에게 그랬어. 사랑한다고 하면서, 결국에는 잘못했다고 할 거면서 왜 그랬어.

이런 게, 네가 말하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 내게는 참 지독하고 아프다.

“……그러니까 날 수 있게 해 줘. 부탁이야.”

‘그러니 네 아픈 사랑에서 나를 이만 날아가게 놓아주면, 안 될까.’

날개 끝이 잘린 새는 높이 날지도 못하고, 멀리 날지도 못한다. 날개를 펼치는 것이 불편하고 수고로운 만큼 비행에 대한 욕망을 절제하고 살아야 하는 수밖에는 없다.

“……주현아.”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하늘을 그리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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