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TV에서 나오는 뉴스에서는 한창 미국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게 뭐 재밌는지는 몰라도 주현이가 저기 소파의 끝의 팔걸이에 팔을 기대고 손을 입가에 대고서 끔뻑끔뻑 눈을 깜빡이며 귀 기울여 듣는 모습이 보였다
―미국의 금리가 인상 될 것으로…….
우리는 서로의 움직임을 기민히 의식하면서도 말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주현이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긴 했지만, 나도 아침과 같이 말을 걸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탓이다. 그리고 전화로 들었던 대호의 격렬한 반응도 은근히, 꽤 신경 쓰였고.
“…….”
“…….”
―유럽 중앙은행도 곧 따라서 상반기 금리…….
게다가 내보내야 할 사람을, 들여 놓은 것은 정작 나였기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걸렸다.
나는 분명 무언가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없는 기억 가운데 그 답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물어본다면 주현이는 대답해 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대호는 주현이의 말을 듣지 말라 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없는 기억의 빈자리를 어찌어찌 캐내어 보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문득, 대호의 말이 떠올랐다.
나를 위해서 기억을 지웠다는 그 말.
왜 내가 기억이 없어야 했던 걸까.
‘내게 무언가, 기억 하면…… 안 될 것이라도 있었을까.’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에서는 무음으로 줄여 버린 알림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메세지의 화면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쫓아냈지?]
[나 한국항공 타고 바로 출발해. 파리에서 갈아 탈거야.]
[잘하면 늦은 저녁 즈음에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아.]
[지금 게이트 열렸어.]
[지금 탔어.]
[곧 봐.]
“…….”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밀려드는 메세지의 내용은 마치 벽에다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새 저물어가는 시간과 전등을 키지 않아서 침침해진 거실의 커튼 너머로 드리워지는 긴 그림자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저녁…… 식사 시간인데.’
소파의 맨 반대편에 앉은 주현이가 거실의 TV를 앞에 있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다시금 궁금해졌다. 배고프지도 않은지, 별 소리 안하는 게 은근히 신경 쓰였다. 아까 집밖을 나서면서 피 흘린 흔적이 불그죽죽하게 말라붙은 티셔츠도 그렇고……. 나는 슬쩍 부엌으로 향했다.
‘밥 해 두면, 알아서 먹지 않을까.’
그렇게 밥을 차리니 진짜, 주현이가 와 가지고 같이 식탁 준비를 하고, 말없이 반찬이랑 국 따위를 퍼서 정렬했다.
“…….”
“…….”
아침에는 정면으로 앉았던 것과 달리 서로를 대각선 방향에 두고서 조용한 식사를 시작했다. 부엌에는 이웃과 옆의 층 사람들이 주말을 맞아 친구를 데려왔는지, 열린 창문 사이로 간간히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밖에 우리의 식기가 균일하게 울리는 소리만 들렸다. 그렇게 조용히 밥을 먹고, 세수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번에는, 그는 소파에서 여전히 TV를 보고 나는 침실로 들어갔다는 게 또 다른 점이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서도 잠이 잘 오는 것은 아니었다. 대호는 아직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는지 메시지가 오지 않는 핸드폰의 텅 빈 알림 화면만 보면서 나는 꼬박 밤을 새웠다.
그 애의 눈과 비슷한 색깔을 가진 새벽하늘을 블라인드 사이로 보고 나서야 웅크리며 누워 있던 침대에서 비로소 나올 수 있었다. 화장실로 가던 중에 여전히 이 시간까지 켜져 있는 TV가 내 눈에 걸렸다. 주현이가 어젯밤 보다가 전원을 꺼놓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생각에 그가 있었던 소파 쪽으로 가니, 그의 키보다 짧은 소파 안에 찌그러져서 누운 채로 졸고 있는 주현이의 모습이 보였다.
“…….”
음소거 상태로 철지난 드라마 재방송이 나오던 TV 화면의 전원을 리모컨으로 껐다. 그러고 그가 누워 있는 소파 옆으로 다가갔다. 그가 깨지 않도록 발끝을 올리면서 가 보니 깊은 잠에 곤히 들어 있는 평온한 얼굴이 보였다. 다행히, 어제와 엊그제의 일처럼 갑자기 또 피가 나는 일은 간밤에 없는 모양이었다. 자는 얼굴에 감도는 발그레한 혈색이 보기 좋았다.
“…….”
하지만, 이국적인 얼굴과 함께 눈에 띄는 그 커다란 덩치는 소파 하나로 부족해 보였다. 팔걸이 경계를 넘는 긴 다리와, 카펫 바닥에 그 하얀 손끝이 닿을 정도로 길게 뻗은 팔. 분명 일어나면, 온 몸이 쑤실 게 뻔하다. 나는 그가 누워 있는 소파 맡으로 다가가서 흘러 내려온 담요를 다시 잘 덮어 주었다. 아무리 봐도 평온한 휴식을 취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그냥…… 침실에 와서 자도 괜찮은데. 자는 거가지고 뭐라 할 정도로 내가 성질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아니면 내가 그렇게 보였던 것일까. 말없이 소파에서 찌그러져서 자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았다. 아무리 대호의 말이 신경 쓰였다고 해도, 그는 아픈 사람인데. 이래저래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를 살살 흔들어 깨웠다.
“……주현아.”
“……응……. 가하? 벌써 아침……이야? 황대호 왔어?”
그는 평온했던 낯을 깨트리며 한 번 인상을 썼다가, 눈을 반짝 뜨며 몸을 황급히 일으켰다. 그의 소파 맡에 앉아서 고개를 살짝 수그리고 있던 나는, 엉겁결에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아…… 응.”
“……더 자도 돼.”
“으응. 가하도 더 자.”
그는 달게 자던 게 거짓은 아닌지, 제법 졸려 보이는 기색으로 다시 손등으로 눈을 비비다가 다시 소파에 몸을 눕히려 했다. 그런 그를 내가 붙잡았다.
그냥, 이왕 잘 거면…… 편히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괜히 내 마음만 더 불편해져서 주현이에게 권유했다.
“그, 주현아. 들어가서 잘래? 여기는 좀 불편해 보이는데.”
“……그래도…… 돼?”
그는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듯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침실 쪽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나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응. 들어가서 자. 일어나. 들어가.”
나는 일어서면서 붙잡았던 그의 팔을 당겼다. 그 힘으로 인해 졸음에 취해 있던 그가 스르륵 딸려 일어나면서 내가 당기는 방향으로 비틀비틀 걸었다. 우리가 막, 침실 앞으로 들어갈 무렵, 현관문의 걸쇠가 철컥철컥 대는 열쇠 특유의 잠금을 푸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나는 주현이를 끌던 손과 걸음을 멈췄다. 아직 대호가 오려면 조금 남았는데.
‘대호, 겠지?’
나는 짐작하면서 거칠게 탕, 소리를 내며 열리는 현관문을 보았다. 새벽을 깨우는 시간에, 아니 단 둘이서만 살던 집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가하야.”
그리고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방금까지 생각했던 대호가 피곤한 얼굴로 현관문을 뒤로 하고 내게 뛰어 왔다. 내 얼굴을 보고 그는 연속된 긴 비행으로 묻은 게 틀림없는 지친 기색을 지우고 특유의 포근한 얼굴을 하려다가, 내 뒤에 서 있는 주현이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송주현.”
“……이제야 왔네.”
주현이는 잡힌 팔을 빼서 내 뒤로 다가와 나를 안았다. 동시에 대호의 얼굴이 처음 보는, 험악한 형태로 찡그려졌다. 대호는 망설이는 것 하나 없이 나를 안고 있는 주현이의 팔을 거칠게 풀어내고 나를 붙잡았다.
“그 손 놔. 가하야, 이리 와.”
그런 주현이의 팔을 붙잡은 대호의 손등에 뼈와 핏줄이 툭툭 불거지는 게, 당장이라도 주현이의 팔을 꺾어 버릴 기세였다.
“대, 대호야. 그러지 말고 우리 앉아서.”
그 험악한 기세에 겁이 났다. 대호는 언제나 웃고, 부드러운 태도를 지니던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거친 행동은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내 말에 대호는 다시 다정한 기색으로 돌아와 나를 제 품에 한 번 안아 주고, 자기 등 뒤로 보내며 짧게 혀를 찼다.
“내가 송주현 내보내라 했는데 왜 말 안 들어. 어디 다친 곳은 없지. 저 새끼가 뭐 이상한 짓 한 건 없고?”
대호의 손에 여전히 세게 붙잡힌 주현이의 팔이 신경 쓰여서 나는 그 둘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없는데……. 있지, 우리 저기.”
‘주현이 아픈 애인데, 저러면 안 되는데.’
저러다 또 피를 토하고 쓰러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서 대호에게 말로 하자고 하려는 무렵 주현이가 대호에게 졸음으로 풀린 얼굴을 살짝 들이대며 이죽거렸다.
“왜 없어. 너 없는 사이에 가하에게 가이딩 하느라 키스를 얼마나 많이 해 줬는데.”
“……키스……했어, 가하야?”
“……그게.”
“가이딩, 했어?”
애써 웃는 낯을 유지하던 대호는 이내 한숨을 쉬고 추궁했다. 주현이가 말한 내용이 아니기를 바라는 목소리였다.
“아니지? 지금, 저 새끼가 맛이 가서 헛소리 하는 거지?”
“……그, 주현이가 내 가이드라며. 내가 에스퍼고……. 내가 없어서 주현이가 아팠다고 해서. 막 피 토하고 아파하길래, 그게 키스하면 낫는다고 그래서…….”
“……하아.”
“많이 하지는 않았는데…….”
말없이 낯을 찡그리는 대호에게 나는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스스로가 들어도 궁색한 변명 같은 대답에 주현이는 자신을 얻은 듯, 환하게 웃었다.
“맞아. 우리 가하 덕분에 잘, 나았지. 아, 황대호 너는 에스퍼라서, 서로를 채워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기분을 모르겠……. 윽.”
얼굴을 찡그리고서 몸을 부들부들 떨던 대호는 주현이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주먹을 날렸다.
“미친 새끼.”
“대호야!”
덕분에 주현이의 얼굴에 반짝반짝하게 서린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무척 화가 나 보이는 대호가 주현이의 멱살을 잡고 씨근덕대었다.
“……강제로 각인을 하고서, 서로를 위한다고?”
나는 대호의 팔을 붙잡고 말리려고 했다. 주현이 아픈 애니까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러지 말라고, 그러다가 정말 큰일 나겠다고.
강제로 각인을 했다는, 대호의 말만 아니었다면,
“강제로, 각인……?”
그게, 무슨 말이지. 대호의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주현이는 주먹질로 인해서 숙였던 고개를 슬쩍 올리면서 비죽 웃었다.
“그런 눈을 하고서 너는 다를 거라 생각하는 게 재밌네. 황대호, 네가 가이드였어도 나와 별다르지 않았을 텐데. 내 말이 달라?”
“……난, 그런. 그런…… 짓 안 해.”
그러자 주현이가 참 우스운 소리를 들은 것처럼, 크게 웃었다.
“착한 척은 이제 그만두고 솔직해져 봐. 그럼, 가하가 가이드였으면.”
“…….”
“넌 어땠을까, 난 조금 궁금해지는데. 안 그래?”
대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주현이의 멱살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입에서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완고한 대답을 내놓았다.
“……적어도, 송주현 네가……. 가하에게 각인 할 기회는 없었겠지.”
그리고, 그 흔들림 없는 대답은 대호가 이제껏 내게 한 번도 말해 주지 않은 깊은 속마음을 알게 했다.
“……그게 네 상상에서 그쳐야 한다는 거 참, 아쉬울 따름이야 그렇지?”
대호의 그 대답에 고통으로 숙이고 있던 주현이의 고개가 올라오며 흐트러진 밀 빛 머리카락 사이로 유난히 푸른 안광이 시퍼렇게 빛났다.
“……내가 아는 황대호 너라면, 분명 가이드 센터에 등록도 안 하고 혼자 싸고돌아…….”
“……닥쳐. 적어도 난 너처럼 순진한 애 속이고, 가족 볼모로 잡지는 않아.”
“그게 무슨 소리야?”
억누른 화를 참지 못하는 것처럼 다시 주먹질을 하려는 대호의 팔을 내가 잡았다. 눈빛 하나 만큼은 여유롭기 짝이 없는 주현이도 한계인지 곱게 휘어 있는 입술 너머로 피가 비죽비죽 흐르고 있었다.
“……이거 다, 내가 기억 잃어버린 거랑 관련 있는 거야?”
대호는 어딘가 상처받은 눈으로 나를 보다가, 내가 붙잡은 주먹 쥔 손을 풀었다. 그 태도에 더욱 확실해졌다. 그들이 말하는 내용이 다 나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
“……대호야.”
“……응, 가하야.”
그는 언제나 그렇듯, 내게 웃어 보이려 했다. 예전에는 그 미소가 참 다정하다고 느꼈는데 왜 지금에는 그게 왜 이렇게 슬퍼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말로…… 내 기억, 네가 지웠어?”
“…….”
“정말, 정말이야? ……왜, 왜…… 말 안했어?”
내 말을 들은 대호의 얼굴이 문득, 작은 후회로 젖었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말 안 해 줬어?”
마치 잔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 현실에 대한 뒤늦은, 후회.
주현이는 자신의 멱살을 잡은 대호의 팔을 붙잡고 피가 멎지 않는 입술로 슬며시 웃었다.
“멀쩡한 애 기억 다 지우고, 옆에서 좋은 사람인척 행세하는 너는.”
그런 우리 세 사람 주변으로 공기 중의 파동이 일렁였다. 특히, 주현이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묘한 공기의 진동이 주는 충격으로,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멀쩡하게 서 있던 내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영문도 모른 채로 쓰러진 몸을 겨우 일으키며 주현이와 대호를 찾았다. 서 있는 주현이와 다르게 거실 저 너머 벽에 메다 꽂힌 대호의 몸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주현이가 풀어진 멱살을 털털 털면서 여전히 이죽거렸다.
“그런 황대호 너는, 뭐가 달라서?”
대호는 다행히 벽에서 몸을 일으키고 다시 나와 주현이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멀쩡하게 움직이는 것과 달리 대호의 몸은 전혀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아까 전에 까맣게 보이던 것이 환각이 아닌 듯 대호의 팔부터 해서 목 밑까지 피부가 꺼멓게 썩어 들어가는 게 확연하게 보였다.
‘저게…… 뭐지? 뭐가 어떻게…….’
그 참상 가운데 대호가 어딘가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찡그렸다. 주현이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저벅 저벅 걸아 가며 말했다.
“네 덕분에 우리 새어머니. 아니, 이제 감옥 갔으니까 끝인가. 조아현 감옥 잘 들어갔어. 내가 어떻게 손쓰고 싶어도……. 구제할 방법이 없던데. 가하는 그거 알아?”
“…….”
“황대호, 너희 집이 가하 아버지에게 돈 빌려 줘서 사업 도산했고 너는 이렇게 착한 척 하면서 뒤로는 가하네 어머니 감옥에 넣고 왔다는 거.”
“…….”
“어때, 너는 나랑 다르다는 말,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어?”
우리 아버지가, 엄마가, 대호 때문에 사업이 망하고 감옥에 들어갔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는 둘의 대화 사이에서 조용하게 터지는 사실들을 주워 담으면서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지금까지 둘이서 말하는 가운데 아무리 들어봐도 내가 잃어버린 기억들 중에 좋은 것이 없었다.
누군가가 다치고, 아프고, 슬프고……. 나는 그런 기억들이 싫어서 자유롭고 싶었던 걸까.
왜 대호가 내 기억을 지웠는지 의문에 빠져 있는 가운데 아까 느꼈던 공기 중의 진동이 다시 느껴졌다.
“아, 아윽!”
“윽!”
“——!”
“——.”
나는 머릿속을 찌를 듯이 죄여 오는 고통에 간신히 일으켰던 상체를 다시 바닥에 숙였다.
내가 서 있는 장소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며 무너질 것처럼 천장이, 벽이 깨지고 금이 가면서 하얀 먼지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저녁마다 웃어대는 이웃 사람들의 목소리는 급박한 비명으로 바뀌어 갔다.
건물을, 이 방안을 가득 채운 꽝꽝대는 굉음에 내 머리도 같이 박살이 나는 기분이 들었다. 내 앞에서 산산 조각나는 유리창처럼 깨질 것 같은 고통이 너무 아파서 눈조차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대호와 주현이의 대화가 그저 웅웅 울리는 소리로 들릴 정도로 머리를 관통하다 못해 멍하게 만드는 통증에 시달리는 가운데,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주현 도련님, 여기……. 으윽!”
눈을 간신히 떠서 낯선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니, 거칠게 열린 현관문 사이로 맵시 좋은 검은 양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 또한 나와 같이 머리가 아픈지 거실에 들어오자마자 벽에 기대어 머리를 짚었다. 도련님은 누구인지, 저 사람은 또 누구인가 싶을 때 주현이의 대답이 간신히 돌아왔다. 그 또한 고통을 참고 있는지 작고, 미약한 대답 사이로 신음이 중간 중간 섞여 있었다.
“박, 비서……. 윽. 가하, 하아. 데려, 가. 아으. 당, 장…….”
“가하 도련님, 괜찮, 지금 이게 무슨……. 황 변호사님?”
그 말에 양복 차림의 남자가 내게 황급히 다가와서 부축을 하려했다. 하지만 나를 뒤에서 안은 사람 때문에 나는 박 비서라고 불린 양복 차림의 남자와 함께 할 수 없었다. 뒤에서 나를 안은 사람이 누구인가, 싶을 때 얼굴 옆에서 거친 숨을 급하게 몰아쉬는 남자의 대답으로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하아, 하아…….”
대호였다. 대호는 그 중년의 남자에게 짧게 대답하고는 나를 꼭 안고서 속삭였다.
“가하야 조금만, 조금만 참아 줘. 미안해, 아프게 해서…….”
“……왜, 왜. 그러는…… 거야?”
‘이게……. 에스퍼인 대호의 능력인건가.’
고통에 절어서 혼미한 정신 가운데에서 나를 안고 있는 대호의 팔을 간신히 붙잡고 물어보았다. 대호는 대답 대신 내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짧게 덧붙였다.
“……이번에는 꼭. 내가 너, 자유롭게 해 줄게.”
대호는 거실 소파를 방패로 삼아서 그 뒤에 나를 잘 눕혀 두고 다시 저기 벽에 기대어 앉은 사람에게 다가갔다. 소파 너머로 아까 양복 차림의 박 비서라 불린 사람이, 놀란 얼굴로 기대어 앉은 사람을 흔드는 게 보였다. 박 비서라는 사람에 살짝 가려져 있는 그 사람이, 순간 누군가 싶었다.
박 비서가 몸을 옆으로 틀면서 가려진 사람이 드러났다. 아까 대호와 같이. 아니, 어쩌면 훨씬 더 큰 폭발로 인한 충격을 받아서 벽 전체에 움푹한 충격파를 만든 그 구덩이 가운데에 있는 사람. 부서진 벽이 만들어낸 매캐한 먼지를 반짝이는 머리 위로 뒤집어쓰는 바람에 메마르게 변하고, 충격으로 인해 얼굴 전체가 피가 터지다 못해 범벅이 된 그 얼굴은…….
‘……주현이. 아픈, 데.’
“주현 도련님, 정신 차리세요. 저 알아 보시겠습니까?”
“……가하, 여기서…… 데리고 나가…….”
피가 말라붙은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대답하는 사람은 주현이었다. 박 비서라 불린 사람은 점점 다가오는 대호를 질린 듯이 바라보며 주현이를 우선 부축해서 일으켰다.
“도련님, 지금. 가이딩 수치도 낮은데 이렇게……. 황 변호사님, 윽.”
“비켜요.”
대호의 가벼운 손짓이 공중을 한 번 휙, 갈랐다. 그러자 박 비서라 불린 사내는 무형의 힘에 얻어맞기라도 한듯이 마른 나뭇잎처럼 풀썩 쓰러졌다. 부축해 주던 사람이 없어진 주현이도 자연스레 힘없이 바닥으로 툭, 쓰러졌다. 아, 저 애는 아픈 애인데. 내가 없어서 힘들여 사는 것을 꾹꾹 참고, 시도 때도 없이 피를 쏟던 애인데. 그것도 참 아파 보였는데 그걸 넘어서 저리 한 없이 피 범벅을 하고 있으니…….
“……왜 이게 카르마 시스템인지도 알 것 같다.”
‘안 돼.’
“정말 지긋지긋해.”
주현이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방금 경험해서 아직도 여파가 남아 있는 대호의 능력을 보아하니…….
한 번만 더 맞으면, 분명 죽고도 남을 것이다.
직접 당하지 않은 나도 이러한데. 주현이를 향해서 다가가는 대호의 까맣게 썩어든 손에서 일그러지는 기묘한 파동을 느끼며 나는 소파 뒤에 누워 있던 몸을 바닥 위로 질질 기었다. 그런 나를 아직 모르는 것인지 대호는 손에 제 초능력을,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래도, 각인이 끊기면 가이드도 약해진다는 말은 맞나 보네. 그렇게 강하던 네가 이런 모습을 할 줄이야.”
주현이는 그 이후로 기절했는지 여전히, 피범벅이 된 채로 눈을 감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마치 아까 새벽에 소파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얼굴 같기도 했다.
“이제……. 이걸로 가하 자유롭게 해 줘.”
대호의 등 뒤 가까이 갔을 무렵, 그의 손 안에서 집안 전체를 휘몰아 칠 만큼의 파동이 넘실거렸다. 집 안의 모든 쓰러진 가구들, 파괴된 벽과 유리창의 잔해가 거칠게 진동하는 것을 두고 대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잘 가라.”
주현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니, 힘이 없는 몸이 절로 일으켜졌다.
아픈 애인데. 쟤는 나를 기다리다가 아파진 애인데. 나랑 조금만 멀어져도 피가 울컥울컥 나오는 그런 애인데…….
‘나는 에스퍼니까, 조금 아파도 주현이가 가이딩 해 주면 나을 수 있다고 했어. 그러면 주현이는…….’
내 옆에서 언제나 있어 주던 대호가, 착한 대호가 누군가를 죽이는 것도, 싫었다. 그게 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싫다.
‘……주현이는?’
어떡하지.
결국 그 생각이 내 몸을 일으키고 주현이의 목 밑에 손을 대는 대호의 뒤에 간신히 섰다. 그리고 막, 대호의 손이 주현이의 목을 쥐는 순간 주현이의 감긴 눈이 살며시 뜨였다. 그 파란에 내가 막, 담기며 피에 젖은 입술이 마르게 달싹였다.
“……가하?”
고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대호의 손에 잡혀 있던 주현이를 밀쳤다. 주현이의 몸이 침실 쪽으로 밀리고 대신 힘을 잃은 몸이 무게에 밀려서 내 팔이 대호의 손에 쥐여졌다.
“……가하, 지금.”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대호의 목소리가 귓가에 차고,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그래도, 주현이 보다는 내가 좀 더 건강하니까 덜, 아프지 않을까.’
대호의 손에서 부터 내 팔에 전달되는 파동의 흐름을 느끼며 눈을 꼭 감았다.
‘조금만, 참으면 될 거야.’
내가 받게 될 힘의 여파를, 고통을 느끼지 않아 보려고 노력하면서.
“가하!”
대호가 주현이의 목 대신 붙잡은 내 팔 위로, 저릿저릿한 감각이 휘몰아쳤다. 대호가 황급히 내 팔을 내던졌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윽!”
팔에서 시작된 고통은 순식간에 온 몸의 신경을 파고들면서 내 머릿속을 가득하게 채웠으니까. 머리를 사정없이 두드리는 격통을 느끼며 뒤에 있는 벽에다가 내 몸을 간신히 기대었다.
“흐으, 윽!”
짐작은 했지만, 참 아프다. 대호가 등급이 높은 에스퍼라는 게, 우습지만 참 처절하게 느껴졌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픈 애가 이런 걸, 겪었더라면.
“아, 아윽…….”
“네가 왜……! 안 돼……. 정신 차려.”
“가……하? 왜…….”
“송주현, 당장 일어나, 가이딩 해!”
대호가 연신 내 몸을 흔들고 믿기지 않는 듯 소리쳤다. 그러다가 옆에 밀쳐진 주현이를 데리고 와서 윽박질렀다.
‘그러지, 말라니까. 걔 아프단 말이야…….’
대신 맞은 보람이 없는 모습에 내가 손을 뻗어서 잔뜩 흥분한 대호를 말려 보려 했지만 고통 속에 저며 가는 내 팔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찡그린 좁은 시야 사이로 내 곁에 와서 믿기지 않은 얼굴로 내 어깨를 붙잡고 울먹거리는 주현이의 얼굴을 보았다.
다행히, 무사했다.
나의 파란색은.
“가하, 어디, 어디 아파?”
“대신, 맞았어…….”
“……뭐라, 고?”
내 하늘은 여전히 맑고 푸르다.
“내 힘, 너 대신 맞았다고! 그러니까 얼른 가이딩 해.”
“하윽, 우욱…….”
“제발. 제발 가하……. 살려 줘.”
명치 아래로부터 참을 수 없을 만큼 거북한 무언가가 뿜어져 나왔다. 반사적으로 입을 막았지만 거대한 액체는 결국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오고 말았다. 흔들리는 시야에도 그 선혈의 색깔이 선명했다. 내 손바닥을 적시다 못해 바닥으로 넘치는 붉은 핏줄기에 주현이와 대호가 양 옆에서 소리쳤다.
“가하! 지, 지금…… 가이딩 해 줄게. 조금만, 조금만 참아…….”
“미안, 미안해. 가하…….”
“하아, 하아……. 우욱.”
나는 한 번 더 피를 울컥 쏟아내고 점점 힘이 풀려 가는 눈을 가까스로 껌뻑이며 둘을 바라보았다. 머릿속과 오장 육부를 갈기갈기 찢어 놓는 혼미한 정신 가운데에도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안 그래도 아픈 애가, 이런 고통을 겪는다면 얼마나 더 아팠을까. 그리고 내 옆에서 착하게 있어 주던 애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아픈 사람을 해친다면.
그것도 참 나쁜 일이다.
이제는 몸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저릿저릿해지는 가운데 내 몸을 껴안았는지, 귓가에 주문처럼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죽, 죽으면 안 돼.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제발, 제발…….”
그리고 가슴팍에 따뜻하게 들어오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전에 주현이가 가이딩이라고 말했던…… ‘그 힘.’
비가 오는 날 추위와 공포에 떨던 나를 감싸 주는 하늘의, 그 포근한 힘.
고통이 온 몸을 잠식하고 멀어지는 감각들 사이에서도 그 힘은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몸 안에서 날뛰는 날카로운 힘을 포근하게, 부드럽게 감싸 안는 기분이라고 하나. 순간 몸에 퍼진 힘의 세력이 약해졌나 싶을 때, 단전에서 치고 올라오는 핏물이 전혀 괜찮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커헉, 우으, 우욱…….”
가이딩에도 갈무리 될 수 없는 힘은 내 안에서 다시 날뛰며 온 몸의 줄기를 날카롭게 찢고 휘저었다. 대호의 힘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한 모양이었다. 나는 침침해지는 시야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푸른 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 아…….”
살색의 덩어리진 실루엣이 붉게 젖어 있는 채로 덜덜 떨면서 내 뺨을 쥐었다. 그게 손이구나 싶었다.
차갑지만, 기분 좋은 손.
마음이 따뜻한 사람의 손.
내 이름을 불러 주던 그 목소리도, 나를 안아 주던 그 차가운 손도, 그와 다르게 따뜻한 품도.
꿈속의 그 사람과 같았다.
다치거나 달라진 것 없이 여전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흐, 흐으…….”
나는 숨을 쉴 때마다 역한 핏물이 기도 너머로 진하게 풍겨드는 냄새를 맡았다. 죽기 전의 사람들이 다 이럴까 싶을 정도로, 온 몸의 감각들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것들이 먹먹하게 느껴졌다. 그런 내 귓가로 다급한 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 빨리, 빨리 가이딩……!”
“안 돼…….”
“……뭐?”
“가이딩이…… 안 돼.”
그리고 어딘가 절망적인 주현이의 목소리도. 그는 연신 내 가슴팍에 그 따뜻한 힘을 불어 넣었지만 내 몸 전체에 무슨 막이 한꺼풀 씌워진 것 마냥 피부 위로 가이딩이 겉돌았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죽지 마, 제발. 잘못했어. 내 옆에 있지 않아도 돼. 응?”
“……그게 무슨.”
”나랑 각인, 다시 안 해도 되니까…….”
‘가이딩이…… 안 되는구나. 그건 좀, 아쉽……네.’
그래도 죽기 전에 꿈속의 사람을 만나서, 다행인가. 나는 꿈속에서 나를 어루만져 주던 그 신비한 힘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나는 주현이가 있어서 조금은 아파도 주현이가 괜찮게 해 주지 않을까, 싶어서 이 도박 같은 선택을 했건만.
역시나 나는 운이 없었다.
그래도 주현이는 아픈 애인데, 만약 이런 고통을 받았더라면…….
‘얼마나 더 아팠을까.’
나는 차라리 내가 받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예상치 못한 내 삶의 마지막이 지금인 것 같았다.
“……젠장.”
그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순간, 차가운 손길과 좀 다른 따뜻한 손길이, 안 그래도 반복된 고통으로 점점 차갑게 식어 가는 내 머리 위에 닿았다. 귓가에 짓씹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릿속으로 또 다른 힘이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격통 하는 머릿속으로, 감은 눈 사이로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여기는 내 친구, 주현이야.」
「눈이 파랗네.」
「주현.」
꿈속의 그 파란 눈을 가진 남자애가 맑은 물 가운데에서 나를 향해 예쁘게 웃었다. 어눌한 말투로 저 자신을 가리키는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작은 애는, 전날 밤 꿈속에서 어두운 집에서 혼자 산다고 했던 그 애니까.
어른도, 없이 그 집에서 혼자서 기다리던 그 애.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나도 에스퍼래. 그리고, 가하 네가 가이드면 좋겠다.」
「응. 그러면 내가 너랑 계속 짝꿍 할 수 있거든.」
[황대호]
그리고, 쑥스러운 표정을 하는 감색의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의 재킷 가슴팍에 수놓아진 이름도. 그러다가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 나이 또래의 애들이 나를 둘러싸고 한마디씩 던졌다. 그들 또한 대호가 입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진짜로? 그게 다 거짓말이야?」
「아파서 갑자기 들어 온 거라고 했는데, 그런 거 아니더라.」
「엄마가 그러는데 완전 근본 없는 집이라고 했어.」
「졸부래.」
「근데 쟤네 엄마, 남들한테는 외국에서 살다 온 것처럼 얘기한대.」
「다 거짓말이야.」
「그러니까 등급이 저렇지.」
그게 누구를 향하는 말인지는 몰랐다. 그렇지만 곧 이어진 장면에 이게, 누구의 시야인지 알 수밖에 없었다. 주현이가 앞서서 보았던 그 감색의 교복을 입고 책걸상에 앉아서 환하게 웃었으니까.
「가하.」
「가하. 나, 한국어 배워. 오늘.」
어눌한 말투로 내 이름을 부르면서.
그래서 알았다.
이게, 내가 잃어버린 기억이구나.
내가 그렇게 찾고 찾아도 결국 찾지 못하던 그 옛날의 기억이구나.
사람은 죽기 전에 생의 모든 인생이 눈앞에 펼쳐진다던데. 진짜로 그럴 줄이야. 죽는 바람에 이 신비로운 사실을 말해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조금 아쉬워졌다. 그러면서도 어린 주현이의 웃는 얼굴과 함께 어눌한 말이 하나둘 씩 장면을 달리하면서 떠올랐다.
동시에 그때에 느꼈던 감정들이 하나씩 풀려나오며 나에게 얽혀들었다.
「나, 가이드. 가하, 에스퍼. 카르마. 같이.」
「가자. 우리 집.」
「밥, 먹자. 게임, 놀자. 응?」
「착해. 가하.」
그리움.
「뭐 해? 가하?」
「나도……. 심심해. 가하. 가하 없어.」
「그래. 가하, 내꺼야. 이제부터.」
「다른 가이드 안 돼. 알았어?」
가을 하늘의 푸른 하늘과 닮은 눈이 나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좋아했다. 텅 비어 있던 내 옆을 채워 주던 애가 항상 함께했기에 나 또한 쓸쓸하지 않아 더 없이 좋았다. 그 애와 함께 하던 그 모든 순간순간 중에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고, 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애는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가장 귀하고 예쁜, 파란 보석과도 같은 애였다.
「아니야, 가하 날아가. 내 가이딩, 가하 가 버려.」
「기다려. 나 어른 가이드 돼. 그때 해, 각인.」
「못 날아가, 가하. 내꺼야…….」
「나. 외로워. 가족…… 없어. 아빠, 할아버지 모두 바빠. 어른들…… 바빠…….」
「하지만 가하, 좋아. 재밌어.」
「난 가하 가이드야. 나, 가하는, 모든 거 다 알아.」
「내가, 지켜 줄게. 가하.」
시시각각으로 주현이의 조급해진 얼굴과, 울먹이는 표정, 쓸쓸한 표정, 이내 굳은 표정이 펼쳐졌다. 내 눈앞에서 흘러 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커다란 집에 홀로 기다리던, 그 애가 눈에 밟혔다. 좋아하는 새를 놓아 주고서 외로워하며 기다리던 그 애.
그렇다면, 그 새는. 나를 말하던 거였을까.
눈앞에서 내 어린 기억이 흘러가는 동안 어린 시절의 대호가 아닌, 굵직한 목소리를 가진 대호의 말이 들렸다.
“다시 가이딩 해. 가하 기억……. 내가 되돌렸으니까.”
“……뭐?”
그러고 보니, 대호가 내 기억을 지웠다고 하던가.
‘그러면 이게 다……. 돌아오는 거구나.’
내가 정말 죽어 가는 것인지, 아니면 대호의 능력 때문인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다시 격동하는 고통으로 인해 둘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더 이상 듣지 못했다. 계속 이어지는 기억의 장면을 감아대는 머릿속을 그저 관망할 뿐. 아까 전 봤던 어린 주현이는 없고 지금의 다 큰 주현이 보다 살짝 앳된 느낌의 얼굴이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찾았다. 숨바꼭질, 이제 끝이야.」
「가하, 갔어. 말도 없이. 나 버리고 갔어.」
「그래서 기다렸어. 착하지, 나?」
「다른 냄새랑 섞였어. 내 건데.」
「응, 맞아. 가하, 내 에스퍼야. 내꺼. 나만 가질 거야.」
「우리 각인, 언제 해?」
그렇지만 커진 몸과 달리 말투는 어린 시절 그대로 어눌하기만 했다. 나는 그 괴리에 의아해졌다.
‘지금은…… 말 잘 하는 거 같았는데.’
그러다가 이어지는 장면은 전혀 다르게, 또박또박한 말투로 잘 말하고 있었다.
「그게 가이드의 역할이야.」
「우리 귀여운 에스퍼가 다른 새끼랑 붙어먹지 않도록 하는 거.」
「이걸 기다렸어. 이제 내 곁에 있어.」
「영원히.」
「우리 어른 되면 각인하기로 했잖아.」
「사랑해.」
「이걸 왜 카르마 시스템이라고들 하는지 알아? 한 번 엮이면, 죽을 때까지 서로 이어져 있어서 그래.」
「아무리 등급이 높다지만 가이딩을 못하면 미쳐 죽지. 그러니까, 난 너에게 미쳐 있다니까.」
하지만 멀쩡하게 말을 하는 것과 달리, 내용은 어딘가 살벌했고……. 또 그 말은 듣는 나는 발가벗겨진 채로 싫다고 울부짖으며 상기된 얼굴을 한 그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게, 뭐……지. 이런 게, 각인이라고?’
키스를 넘어선 질척한 관계를 가지는 장면은 짐짓 충격적이라 기억을 되감고 있던 내 사고가 정지할 무렵, 주현이의 상처받은 표정이 이어졌다.
「내가 미워도, 싫어도 좋으니까. 그냥 내 옆에만 있어.」
「도망가지 마.」
「그때처럼……. 날 두고 가지마.」
「이제 점점 좋아질 거야. 여보랑, 자주 가이딩 하고 있으니까.」
「걱정했어?」
「나에 대해서, 알아 가려는 게…… 기분 좋아.」
「미안해. 화나서 그랬어.」
「나 말고, 다른 사람 손대게 하지 마.」
그의 표정은 더 없이 절절한데……. 앞선 장면이 너무 타격이 컸던 것일까. 그의 말들이 어느 하나 내게 와닿지 않았다. 그 순간의 나는 분명하게 느꼈다.
도망가고 싶다고.
이 끝나지 않을 미련과 집착을 두고 어딘가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전달되어 왔다. 하지만, 나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왜냐하면…….
「……도망가고 싶었어?」
「네가, 나갈 수 있을 줄 알아? 내가, 너를 어떻게 찾았는데. 눈앞에서 다시 날아가는 걸 두고 볼 줄 알아?」
「너는 왜…… 왜, 에스퍼인거야.」
「나는 왜, 가이드야? 왜, 왜 나만 이렇게…… 불안해야 해?」
「내 곁에 있어. 제발…….」
「이럴 수밖에 없었어. 너를 잃을 거 같아서 무서웠어.」
「네가 또,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이 떠나 버릴 거 같았어…….」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조급해진 그는 다시 무섭게 나를 몰아치면서 범하고……. 또 스쳐 가는 가운데 보이는 엄마와 동생으로 인한 걱정이 나를 그 집에 머무르게 했다. 다시금 절규하는 그를 두고 어찌해야하는지, 애써 끌어 모은 작은 정이 피어나기도 무섭게 대호가 비에 젖은 모습으로 내 앞에 나왔다. 그 꿈속의 집처럼, 비가 오던 그 날씨를 배경으로 하고서.
내 심장이 아파하는, 비 오는 날에.
「너, 어렸을 때 너희 집안 사업 망하게 한 거, 송주현이 한 짓인 거 알아?」
「송주현이, 가하 너를……. 자기 옆에 두려고, 너희 아버지 사업 무너뜨렸어.」
「이상한 소리라고 생각할 건 알아. 그렇지만……. 그 애는 그런 애야.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이걸 알게 된 건……. 우리 집이 송주현 밑에서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서 알게 된 거야. 내가 나중에 알고 막아 보려 했을 때는 이미…… 네가 사라져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송주현 옆에 있으면 걱정 돼. 너 또 상처 입는 거, 나 가만히 보고 싶지 않아.」
「미안해. 나도, 나도…….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여기 있으면서 네가, 아무 것도 모르고 다시 아파할까 걱정 돼.」
“가이딩 다시, 해 봐. 각인…… 돌아왔을 테니까.”
“……응.”
주현이의 대답과 함께, 내 가슴팍에 따뜻한 온기가 스며들어왔다.
가이딩이었다.
기억이 없을 때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힘.
하지만 기억이 있을 때에는 그토록 받고 싶지 않던, 그 힘.
나를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게, 이 지상에 묶어 두는 그 족쇄와도 같은 연결고리. 기억과 육신의 고통이 조금 완화되어 가는 느낌에 나는 눈을 감았다.
잊고 있던 모든 기억이 결국 내게로 돌아오고, 주현이 또한 돌고 돌아 내게 돌아오고 말았다.
마치 원형을 달리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결국 같은 자리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이드와 에스퍼라는 카르마, 그 지독한 인연에 묶여서.
‘제발, 나를 여기서 나가게 해 줘. 나를 자유롭게 해 줘. 그 어떤 속박도, 굴레도, 책임도 없는 곳으로…….’
나는 마지막으로 대호에게 말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나를 감싸 안는 가이딩을 속절없이 받아들였다.
‘아, 차라리 기억이 되돌아오기 전에 죽었더라면, 참 좋았을 것을.’
가이딩이 돌기 전에, 그와 나의 각인이 끊겨 있을 때에…… 자유롭게 죽어 버릴 것을.
사람 목숨 줄이 참 얼마나 질긴지, 놓으려고 하면 이어지고, 끊으려 하면 이어지고 하면서 기어코 다시 이어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이제껏 묻어 둔 것들이 터져 나오며 나는,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병원에, 어서…….
“으으…… 황 변호사님…….”
“박 비서님, 정신 차리세요.”
“가하 도련님은 왜 이렇게…….”
“밑에 차 가져왔지. 가하 내가 들고 갈 테니까 어서 운전해.”
비 오는 날처럼 머릿속에 가득 찬 구름으로 정신이 흐려져 갔다. 그 와중에 내 몸이 공중으로 들리면서 들썩이고, 멀어져 가는 세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주파수가 약한 라디오처럼 언뜻 언뜻 들려왔다. 여러 사람들이 바닥을 달리는 소리도 그랬고, 내 몸이 어딘가로 계속 왔다 갔다 하는 움직임도 느낄 수 있었다. 어딘가로 향하는 중간 중간 싸늘한 레몬의 향기와 함께 느껴지는 따뜻한 가이딩, 그리고 이따금씩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는 조금 슬퍼졌다.
결국 그 끊임없는 운명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며 돌고 돌아…….
“제발, 제발. 살아만 줘…….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나 때문에…….”
결국 그에게 돌아왔다는 사실이 나를 더 없이 슬프게 했다.
다시, 도망친 곳의 종착점이 그의 품이라니.
그리고 그의 품에서 가이딩을 받는 그 현실이 참 잔혹해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눈을 떴다가는 그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무거운 두려움이 나를 짓눌렀다.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거기서 죽었더라면. 혹은 그가 나를 찾지 못했더라면. 나는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았을 텐데.’
그저 이루어질 수 없는 후회만을 반복하며 눈을 감고 있었다. 꿈과 현실의 그 중간 즈음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도 같다. 왜냐하면 눈을 감고 있는 내게 몸의 감각은 느리고 둔하게 느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