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61)

* * *

까무룩한 정신 가운데 시원하게 비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심장이 놀란 것처럼 쿵쿵, 뛰었다. 나는 심장의 반응과 꿈결 가운데 들은 그 소리 때문에 지금 비가 오나 싶다가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는 겨울을 빼면 비가 오는 날이 별로 없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막 봄 내음을 벗어난 초여름의 계절이었다. 어제는 일기 예보를 주의 깊게 봤던지라 그날 비가 올 것을 알았지만, 그 다음 날 부터는 비가 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따라서 이런 날에 비가 오는 일은 아주 드물고…… 또 희한한 일이었다.

나는 비가 싫은 대신 비가 오지 않는 날들을 사랑하고, 또 좋은 날씨가 주는 기분 아래 빨래 말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날씨에 빨랫감을 매달다 바람이 한 번 스치면 하얀 빨랫감들 사이로 비치는 푸른 하늘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널어 둔 빨래, 걷어야 하는데. 발코니 쪽 빨랫줄에 세탁물을 걸어 두던 것들이 생각나서 나는 눈을 떴다.

“……어.”

언제나 자고 일어나던 익숙한 넓은 침대 위의 광경은 없고, 내 눈앞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누군가의 서 있는 뒷모습이.

‘누구지.’

나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다가 내가 보고 있는 곳을 살폈다.

“……어디지, 여기.”

난생 처음 보는, 그런 장소였다.

하지만……. 낯설지 않은 그런.

옛 고택에 온 것 마냥, 보기만 해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그런 공간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잠들었던 그 방과 집이 아니라는 것.

‘내가 왜…… 이런 곳에 있지.’

황망함 그 가운데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이 공간의 모든 것들이 다 칙칙한 목재로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천장도, 내가 서 있는 이 마룻바닥도. 어디 모난 곳 없이 모든 것이 잘 짜 맞춘 듯 길게 뻗어 있었다. 다만 오래된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인지 옛 집과 같이 격자로 찬찬히 배열된 천장에 전등을 길게 빼달아 매달고도, 침침하기만 했다. 그런 마룻바닥의 공간의 양 옆으로 미닫이문이 주르륵 이어져 있는 게 복도같이 보였다. 그 복도의 오른쪽 문들은 노란빛이 감도는 한지 위로 금박이 언뜻 언뜻 도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반면에 왼쪽은……. 네모반듯한 격자 사이에 유리창이 끼워진 유리문 너머로, 넓고 파릇한 정원이 보였다.

아니 보였을 것이다.

“……비……오네.”

이렇게 거세게 내리는 비만 아니었더라면.

‘아까 들리던 빗소리가, 이 소리였구나.’

나는 비 오는 거 싫은데. 나는 요상하게 느끼던 빗소리의 정체를 깨닫고 투덜거렸다. 정원 뒤로 거뭇한 비구름과 유리창을 사정없이 때리는 빗줄기만 아니면 제법 괜찮은 정원이라고 생각도 했을 것 같다.

이래서 비가 오는 날은 싫다.

꿈에서는 그 사람을 만나지만, 심장이 아프다. 그리고 날씨가 좋지 않아 그저 집에만 있고 싶고, 그러면 바깥으로…….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는데.’

그런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왜? 왜…….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지.’

나는 똑, 똑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이 스며든 생각에 굳게 닫힌 유리문을 계속 보았다. 그 너머로 어두운 비바람에 맞추어 잔디밭의 결이 이리 저리 다른 방향으로 몰아치는 정원 풍경을 보면서 스스로를 쫓았다. 나, 왜 그런 생각을 했지…….

‘이상하네.’

정말 이상한 생각이었다.

왜 내가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정원과 집을 분리하는 복도 덧문 바깥에 빗방울이 점점 굵게 맺히고, 또 더해져서 흘러내리는 유리창 표면으로 흐려진 내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하지만 그게 어딘가…… 당연했다.

“……이상해.”

그 희미한 얼굴의 잔상이 이 문의 격자 사이로 끼워져 있어서 그런가, 내가 어디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다시 여전히 서 있는 사람의 뒷모습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미동 없이 서 있었다.

그것 또한 참 이상했다.

“저기요.”

“…….”

‘왜 대답이 없지. 못 들었나?’

빗줄기가 제법 거세긴 했지만 부르는 걸 못 들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다시 그 뒷모습을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불렀다. 분명 나는 자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그래. 주현이랑 한 침대에서 자고 있었는데.’

그 생각과 함께 눈을 한 번 깜빡이니, 귀신이 곡할 노릇인 게.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사람이 온데간데없어졌다. 어?

“……뭐야. 분명…… 있었는데.”

어디, 어디 갔지? 아무리 살펴도 복도 끝의 유리 격자문만 덩그러니 보여서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자, 아까 그 사람이 서 있던 자리에 앉아 있는 작은 애 하나가 있었다.

‘누구……지?’

있던 사람은 없어지고, 갑자기 나타난 애의 모습에, 나는 지금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 건가 싶었다. 지금 이상한 것에 홀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는데, 무릎을 세워서 안고 마룻바닥에 앉아 있는 애의 머리가 제법 작고 동그란 것이 참 귀여웠다.

“저기.”

“…….”

하지만 이 애도, 아까 그 사람과 마찬가지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뭐지, 내 목소리가 안 들리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 건가?’

여전히 빗줄기가 한창인 밖을 한 번 보다가, 바깥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유리문의 격자무늬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복도 바닥에 앉아 있는 애에게 다가갔다.

“저기, 있잖아.”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보기 위해 그 애의 정면으로 돌아서 걸어갔다. 얼굴을 마주보면 무시하지는 못하겠지 싶었다.

기묘한 집에서 독특한 사람을 마주한 나는, 기분이 또 이상해졌다.

“어…….”

덧문의 격자무늬가 만들어낸 그림자를 얼굴에 드리운 채로, 제 앞에 돌아온 나를 바라보는 커다란 눈이 참 파랬다.

누구처럼.

“…….”

그 애는 하늘처럼 크고 파란 눈으로 가만히 나를 보다가, 이내 끌어안은 무릎 위에 턱을 기대고 시선을 돌려서 정원 쪽을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사람이 와도 밀랍 인형 같은 얼굴로 무시하다시피 하는 태도가, 내 기분을 동하게 했다.

‘주현이가, 동생이 있나?’

있으면 왠지 이렇게 생겼을 것도 같고. 하지만 자기 전까지 동생이 있다든지, 그런 소리는 안 했던 것 같은데……. 나는 주현이와 유난히 닮은, 이국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아이의 얼굴과 마주친 순간 느낀 기시감으로 뒷전이 된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 얘.”

“…….”

아까는 보는 시늉이라도 하더니만, 이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거 되게…….

‘아니, 애다. 애야.’

나는 주현이나 이 닮은 동생이나 둘 다 독특한 성격이 어디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리를 굽혀서 앉았다.

“혹시 여기 어딘지 알아? 나 지금…….”

“……내 집.”

대답을 하지 않을 것 같던 애가, 냉큼 대답한 것도 참 의외였다. 나는 다시 얼떨떨해져서 이내 말을 이었다.

‘여기가……. 이 애 집이라고?’

그럼 난 왜 여기 있지. 영문을 모르는 나는 우선 이 애가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말을 걸어 보려고 애들에게 흔히 하는 너스레를 떨었다.

“우와, 멋진 집에 사네.”

“…….”

아, 이건 아닌가. 다시 아까 전과 같이 시선을 거두고 싸가지가……. 아니, 무심하게 돌아간 표정에 나는 웃는 얼굴을 하려고 노력했다.

“일어나 보니 내가 갑자기 여기 있길래 물어봤어. 근데 너네 집이구나. 어른 안 계셔?”

“……그런 거 없어. 여기 내 집이야.”

“……아, 그렇구나……. 그럼 지금 뭐 해?”

“기다리고 있어.”

‘아 그래. 어른은 없구나.’

가만 들어 보니 애가 침 바른 칭찬은 무참히 씹고, 본론인 질문에 대해서는 꼬박꼬박 대답하는 게 참 의외였다. 이 애에게는 단순한 질문을 하는 게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나는 그 애의 시선을 따라 비 오는 바깥의 정원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을 기다리나?’

누가 오면 여기가 어디냐고, 나가는 길 좀 알려 달라고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도 호응했다.

“누구를 기다려?”

“……내 작은 새.”

그리고 그 애가 기다리는 것은 부모님도, 어른도, 사람도 아니었다.

“……새?”

“……비가 오면 날개가 젖을 거야. 그럼 감기에 걸리겠지. 가이딩을 해 주면 금방 낫지만, 그래도 새가 아픈 건 싫어서 그러기 전에 오라고 했는데. 오지를 않아.”

눈 한 번 깜빡임 없이 바깥 정원을 바라보는 눈길이 제법 진했다.

‘새를 기르나? 이런 궂은 날씨에 새가 바깥에 있다면…….’

나도 모르게 같이 바깥의 흔들리는 정원수를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닌데.’

나는 어딘가 갈피를 잃은 애의 대답에 점점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렇구나. 나도 찾고 있어.”

“……새를?”

여태껏 바깥을 보던 파란 눈이 나를 담았다.

주현이도 그랬지만, 이 애의 눈도…… 참 예쁘고, 어딘가 깊었다.

어린 애가 가지기엔, 너무 이른 눈이었다.

나는 그 눈에 시선을 고정하고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 해 주었다.

“아니. 사람.”

“……이름이 뭔데?”

“이름? —.”

주현이의 이름을 말해도 이 애가 알까, 싶은데. 말해 주려는 순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그 이름을 발음하는 혀의 부분만 도려낸 것처럼. 그러자 내 대답을 들은 아이의 무심한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며 깨졌다.

“……몰라. 그런 사람.”

“어……. 왜, 이름이 안 나……오지. —.”

나는 연신 주현이의 이름을 다시 반복했지만, 나오지가 않았다. 미친 사람처럼 나오지 않는 이름을 반복하던 것을 두고 아이는 흥미가 떨어졌는지 계속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풀에 지친 나는 바깥으로 나갈까 싶다가도, 아까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다시 떠오르며 망설였다.

‘그냥, 나가면…… 되는데.’

왜지.

나는 일어날까, 말까 하다가 바깥에 들이차는 비바람의 모습에 우선 다시 앉았다. 마룻바닥이 끼이이 소리를 내면서 다시 나를 받았다.

뭔가 이상했다. 예전에 비가 오면 꾸던 꿈처럼, 아주 이상한 꿈에 갇힌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이곳에 혼자 있었더라면 더 섬뜩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다시 내 앞에 앉아 있는 애에게 말을 걸었다. 낯선 사람인 내가 좀 무섭거나, 어딘가 피하고 싶을 법도 한데 애는 그런 기색은커녕, 여전히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기다린다는 그 새가 무척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끼는 새였구나?”

“응.”

“……너 내가 안 무서워?”

“……내가? 왜?”

뭐 당연한 것을 물어보냐는 듯이, 애는 태연하기만 했다. 아니, 태연함을 넘어선 그 태도는 어딘가 오만하기도 했다. 애가 낯선 사람을 가리지 않는 건가, 싶다가도 아까 선택적인 반응과 대답을 보면 딱히 그런 성격 같지도 않았다. 나는 보통의 사람들이 만들 수 있는 정상적인 대화를 잠시 포기했다. 그리고는 그 새에만 신경이 온통 가 있는 이 애의 반응이 좀 궁금해져서 일부러 약을 올렸다.

“아…… 그래. 근데, 이 날씨에 바깥에 새를 날려 두면 어떡해. 아낀다고 해 놓고, 새 돌아오면 감기 단단히 걸리겠다.”

“……어쩔 수 없었어.”

그러자 당당하게 왜, 내가 너를 무서워하냐 하고 외치던 애의 얼굴이 바로 시무룩하게 변했다.

‘앗…….’

막상 또 그렇게 반응을 보이니까 다 큰 어른으로서의 마지막 양심이 찔렸다. 이런, 다 커서 내가 뭐하는 짓이지.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아이는 커다랗고 파란 눈을 반쯤 내려 깐 채로 입을 열었다.

“새는 날아다녀야 행복하니까……. 호기심이 많은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오랫동안 안 돌아 올 줄은 몰랐어.”

“……그래. 나중에라도 돌아오면 따뜻하게 해 주면 되겠다. 그럼 괜찮을 거야.”

괜한 애를 금방 울 것처럼 만들어 놓은 내 스스로가 무척 찔려서 나는 애의 머리를 무심코 쓱쓱 쓰다듬었다. 아, 이러면 싫어하려나. 하고 손을 물렸지만 다행히 그 애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여전히 나를 향해서 눈을 치뜨고 있었다.

“아니.”

“응?”

“새가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건 싫어. 나만 불안해하잖아.”

“……그렇긴 하겠네.”

그렇지만 뭐 어쩌겠는가. 애도 스스로 말했지만 그게 새의 습성인 것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들을 날지 말라고 어디 가둬 둘 수도 없고.’

앞에 있는 애에게 공감을 하면서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내 앞의 애는 어느새 말을 술술 털어내고 있었다.

“불공평해. 그때도 나만 이 땅 위에서 불안해하면서 기다렸어. 내가 돌아오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계속 돌아오지 않았을 거야. 그 애는 날아다니는 걸 무척 좋아했으니까…….”

“새가 다 그렇지……. 어쩔 수 없잖아.”

“그래서 더 이상 못 날아다녔으면 좋겠어. 매일 매일, 언제나 내 옆에서만 걸어 다니면 좋겠어. 그러면 난 정말 잘 해 줄 수 있는데…….”

“…….”

애는 새가 자기를 두고 날아다니는 게 그야말로 억울한 듯, 분에 못 이겨 울먹이는 목소리로 세워 올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그 모양새에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내가 있잖아, 너랑 비슷한 애를 하나 보고 왔거든.’

너랑 생긴 것도 비슷한데, 어째 말하는 것도 좀 비슷하다. 나는 늦은 저녁 식사 시간에 주현이가 웃는 낯으로 말하던 살벌한 내용을 떠올리며, 속상한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애에게 내가 앉은 자리를 가까이 당겼다. 진짜, 둘이 알고 보니 형제 아닐까.

“어떻게 잘 해 줄 건데.”

애는 고개를 여전히 무릎 위로 파묻은 채로 어물어물 대답했다.

“매일 매일 맛있는 것도 먹여 줄 거고, 예쁜 옷도 입혀 줄 거고, 사 달라는 것도 다 사 줄 거고, 괴롭히는 것들 다 처리해 주고…….”

“……대단한데.”

대단하긴 한데, 먹는 거 빼면 뭔가 새가 원할 것 같은 선택지는 없었다. 애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게 다 그렇지만, 자기 방식대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자기가 좋은 거면, 남도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거.

게다가 무슨 놈의 새한테 예쁜 옷을 입힌단 말인가. 하다못해 개도 아니고. 무슨 실크 스카프라도 새 목에다가 둘러주려는 셈인가? 그리고 새가 뭘 사 달라고 하는지 어떻게 알아. 또 집에서 기르는 새가 나가서 패싸움이라도 한단 말인가, 이런 날씨를 빼면 새를 괴롭히는 게 뭐가 있다고.

‘그래도 발상은 좀 깜찍하네.’

나는 애 다운 생각에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따끈따끈한 체온을 가진 애의 등을 살살 쓸어 주었다.

“근데…… 진짜 새가 좋아할까, 그런 거?”

“……왜 안 좋아해?”

“너도 그랬잖아. 새는 날아다녀야 행복하다고. 내가 생각해도 그런 거 같아서.”

“…….”

애는 무릎에 묻고 있던 얼굴을 천천히 올려서 바로 옆에 앉아서 등을 쓸어 주는 나를 보았다. 눈물 자국은 없지만 벌겋게 부은 눈가와 코끝이 제법 애처롭게 보였다. 여기에 피눈물만 흘리면 진짜 둘이 형제 같을 텐데. 나는 스스로 CG를 상상해서 붙여 보고는 웃었다.

“아끼는 새라며. 그럼 소중하게 대해 줘야지.”

“……소중해.”

애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돼?”

“……어?”

“알려 줘. 어떻게 하면 소중하다고 느끼는지.”

“음…….”

그건 네 새니까,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라는 원론적인 대답은 나오지가 않았다. 물론 말이야 바른 말이겠지만 이런 질문을 구하는 건, 정말 도움이 필요해서 물어 보는 것 아니겠는가. 아까 애를 울린 나쁜 어른의 표본으로서 제 몫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이런 거에는 머리 별로 안 좋은데……. 큰일 났네.’

나는 조급한 마음을 채찍질하며 애써 답을 짜냈다.

“우선은……. 새도 좋으면 좋다고 반응을 하는 게 있을 거 아냐. 보통 사람들은 좋으면 막, 웃잖아, 이렇게……. 너도 웃어 봐.”

“……이렇게?”

나는 씩 웃어 보이다가 빤히 나를 바라보는 애의 시선이 좀 부담스러워서 괜히 애의 반응을 유도했다. 그러자 애가 환하게 웃었다.

‘앗, 예쁘다.’

주현이도 그렇고 이 동생 같은 애도 그렇고 둘 다 연예인인가? 아니, 외국인이니까 헐리우드 스타? 나는 잡생각을 하면서 크게 호응했다.

“그래, 그렇게. 예쁘다.”

“알아. 새도 좋아해, 내가 웃는 거.”

“아…… 그래? 그럼 많이 웃어 줘야겠네.”

근데 그렇게 말하면서 너무 당당한 거 아니냐. 예쁘다고 그러면 조금은 부끄러운 기색도 보일 법도 한데.

‘요즘 애들이란.’

아니면 얘도 주현이처럼, 외국인이라서 그런 건가. 나는 겸손은 집어치운 신세대의 차이를 느끼면서 애써 대답했다. 그러자 애가 살짝 미소를 걸고 다시 반문했다.

“그럼 이렇게 매일 매일 웃으면서 날지 말라고 하면 좋아할까?”

“……아니.”

‘좋아하겠냐고.’

나는 삐딱하게 나오려던 대답을 꾹꾹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심각하네, 요즘 애들. 아무리 동물이라지만 이렇게 이기적이고 공감대가 없어서야…….

‘커서 뭐가 되려고…….’

이 애에게는, 정말 직설적으로 말해 줘야겠다 싶었다. 얼굴은 예쁜데, 어딘가 비뚤어져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애라서 다행이지. 이런 성격의 어른이라면…… 옆에 있는 사람이 골치 아플 타입이었다.

“날기 위해서 태어난 애를 그렇게 두면 살고 싶지가 않을 거 같은데.”

“……그러면?”

“그러면? 으음…… 그래. 그럼 내가 지금 네가 아끼는 새라고 생각을 해 보자.”

“…….”

“아니, 생각만. 진짜 그렇다는 게 아니고.”

냉정하게 변해 가는 애의 얼굴에 나는 민망해서 헛기침을 했다. 녀석, 사내자식이 더럽게 까탈스럽네.

‘나도 어렸을 때 저랬나?’

나는 없는 기억을 헤집으며 대답을 준비했다.

“근데?”

“내가 그랬잖아. 새가 좋다고 반응하는 거 하라고. 나도, 기분 좋으면 막 웃거든.”

내 웃는 모습에 애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리다가 이내 평평하게 돌아오며 냉정하게 요구했다.

“그래서? 새가 좋아하는 게 뭔지 어떻게 알아?”

“……미리 말해 두는데, 네가 좋아하는 거를, 그 새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알지? 새랑 너랑 다르잖아. 그건 이해하지?”

“……응.”

다행이다. 그건 알고 있구나.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나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러니까……. 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보고, 그걸 해 줘야지. 네가 생각하는 대로 무작정 하지 말고.”

“……그러면…… 다시 올까?”

내 말을 들은 애는 냉정했던 표정을 무너뜨리며, 다시 울상을 지었다. 울상이라고 해 봤자, 무심한 표정에서 붉은 입술 깨무는 것밖엔 없지만. 저 애에게는 그게 최대의 반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지만 애는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무릎에 얼굴을 비스듬히 기대고 나를 보면서 후회가 되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난 이미 내가 좋아하는 걸로 해 줬는데. 그래서 돌아오지 않는 거면…… 어떡하지.”

“아니야. 이런 날씨라 아마 길을 잃고 어디 잠시 쉬어 가고 있을 거야. 잠시 좀…… 시간이 걸리는 거야.”

나는 등을 토닥여 주면서 비가 몰아치는 바깥을 향해 턱짓했다. 확실히 부는 바람의 세기하며, 이런 궂은 날씨에 집에서 기르는 새가 날아다녔다가는 어디 벽에 메다 꽂히고도 남을 것이다.

“돌아올 거야. 그래도, 네가 잘 해 주려고 했잖아. 새가 그걸 엄청 좋아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마음은 알았을 거야.”

“……그렇겠지?”

“그럼. 대신, 새가 돌아오면 너도 이제는 잘 해 줘야 해. 안 그러면 또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

나는 진지하게 말하면서도, 속에는 살짝 장난을 섞었다. 그러자 애는 한결 마음이 편해진 얼굴로 내게 연신 확인했다. 짜식, 애는 애다.

“……웃어 주고…… 새도, 웃게 해 주면 돼?”

“응. 그러면 돼.”

물론 새가 진짜로 웃지는 않겠지만, 나는 애의 눈높이에 이 정도로 말하면 되겠다 싶어서 마무리 지었다. 그러자 애가 웃으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알겠어. 대신…… 나도 오랫동안 기다렸으니까…….”

“응?”

애는 앉아 있는 내게 와락, 안겼다. 나는 안겨드는 애를 안아 주다시피 받아서 뭐하는 거냐고, 갑작스러운 레슬링 결투 신청은 거절하지 않는다고 말하려 했다. 그 애의 마지막 말만 아니면.

“가하도 내게로 꼭 돌아와야 해.”

‘그게 무슨…… 소리지. 그나저나, 내 이름은 어떻게 안 거야.’

내가 이 애한테 내 이름을 말했던가, 싶을 때 눈앞에서 웃는 얼굴이 까맣게 번져 가며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시야에 허우적대며 몸을 일으키니, 잠들어 있었던 침실의 창문 블라인드 사이로 쨍쨍한 한낮의 열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어?”

그리고 들어오는 방 안은, 내가 잠들었던 그 방, 그대로였다. 둘이 자도 괜찮은 커다란 침대에서 내가 늘 자고 있는 오른편. 그리고 그 옆의…….

“……으응, 가하…….”

달게 잠을 자는 주현이도, 그대로였다.

‘꿈이었구나.’

나는 하얀 침대 시트 위로 잔잔히 떨어지는 햇볕의 물결 사이에 상체를 일으키며, 혼몽한 머리를 털었다. 꿈을 꾸고 나서도 더 자고 싶을 만큼 졸리다던지, 혹은 사나운 꿈자리를 겪은 후의 피로 같은 건 없었다. 그저 깔끔하게 꾸고 딱, 깨어 버린 덕분에 오히려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라 나는 지금이 진짜 내가 아는 현실인지, 아니면 또 다른 꿈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내 옆에서 곤히 잠을 자는 주현이를 내려다보다가 나는 아까 꿈에서 본 그 애를 다시 겹쳐 보았다.

“……닮았네.”

이상한 꿈속에서 본, 묘한 아이는 마치 주현이의 축소판처럼 빼닮아 있었다.

‘뭔가, 입꼬리가 죽상으로 내려오고, 머리 가르마를 이쪽으로 하면 정말, 닮아 보일 거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깨어날 기미가 없어 보이는 주현이의 이마 위로 부스스하게 내려온 머리를 살살, 거둬서 쓸었다. 동그란 이마 위로 어디 유치원 졸업 사진에나 나올법한 이대팔 가르마 스타일을 대충 손빗으로 나누어서 깻잎 머리처럼 고정시켰다.

“음…….”

‘진짜 닮았잖아.’

자고 있는 이 눈만 뜨면 진짜, 진짜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될 지경이었다.

거기에다가 특유의 묘하게 말꼬리 짧은 어투까지 더하면…….

“……동생 있나, 진짜.”

나중에 일어나면 물어볼까,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차에 주현이가 달게 자느라 곤히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막, 첫 햇살을 받은 새벽하늘과 같은 색이 홍채에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아침 인사를 건넸다.

“일어났어?”

“……응.”

주현이는 누워 있는 채로, 눈만 올려서 나를 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제 이마에 머리를 우스꽝스럽게 갈라 둔 내 손을 잡아서 내가 뭐 어찌하기도 전에 손바닥 위로 제 입술을 쪽쪽 맞춰대었다. 부드러운 입술 자욱이 손바닥에 눌러 앉는 감촉에 놀라서 손을 빼려고 당겼지만 소용은 없었다. 그런 내 반응에 주현이가 다시 나를 보면서 살짝 웃었다.

“뭐 해, 갑자기.”

“좋은…… 꿈을 꿨거든.”

“……꿈?”

‘나도, 꿨는데. 물론 그 꿈이 좋다고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렇다고 하면서 동생의 유무에 대해서 물어보려는 순간이었다. 주현이가 내 손가락의 마디 하나하나를 만지작대면서 중얼거렸다.

“욕심이 너무 없어도 탈이군…….”

“응? 뭐라 했어?”

나는 손이 간지러워져 잡고 있는 주현이 손의 힘이 빠진 사이에 손을 빼고 침대를 나섰다. 일어난 김에 같이 아침 식사도 하고…….

‘아. 그렇지. 핸드폰.’

“으응, 아니. 배고파서.”

“아, 얼른 밥 먹자. 나도 배고파.”

주현이에게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충전기를 꽂아 둔 핸드폰을 들어서 시간을 확인하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대호한테 별다른 연락도 못하고 그냥 잠들었네. 그런데, 핸드폰의 화면이 까만 상태 그대로였다. 나는 전원 버튼을 쿡쿡 누르면서 전원이 켜지기를 고대했지만 이상하게도 전원이 켜지지가 않았다.

‘뭐지, 설마 고장났나?’

나는 핸드폰을 흔들거리다가, 나는 혹시나 싶어서 충전기 선을 뺐다가 꽂았다. 그런데도 방전 표시는커녕, 아무런 일도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충전기가 꽂혀 있는 침대 맡 탁자 뒤로 고개를 뻗쳐 보니 왜 핸드폰이 그런지 알 수 있었다.

“아……. 선 빠졌다.”

‘이러면 충전 하나도 안 됐겠다. 에이.’

충전이 다 되기를 바라고 간밤에 꽂아 둔 충전기 쪽의 선이 헐겁게 빠져 있었다. 충전기 선을 꽂는 부분이 좀 헐겁더니만 어제 충전기를 꽂아 두다가 빠진 모양이었다. 나는 상체를 수그리고 다시 꽂으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밥은 먹고 나서야 충전이 좀 되려나.

‘대호가 한 전화 못 받았지만……. 괜찮겠지.’

나는 평소 대호가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는 성질을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한국 잘 도착했다는 이야기겠지 뭐. 그 사이에 부엌으로 언제 갔는지 주현이가 나를 불렀다.

“가하, 빵 먹을 거야?”

“어? 아 어. 내가 할게.”

그 말에 허둥지둥 나가서 보니, 주현이가 이것저것 꺼내어 놨는지 아침용 접시와 포크, 나이프 따위가 정갈하게 식탁 위로 나와서 대칭처럼 마주보고 있었다. 잘 쓰지도 않는 앞치마는 어디서 꺼냈는지, 큰 덩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분홍 앞치마를 꺼내서 입은 주현이가 계란 프라이를 만들고 있었다. 침실에서 막 나온 나를 보더니 그가 방긋방긋 웃으면서 반겼다.

“계란 안 터지게 했어.”

“그건 또 언제……. 아니, 앉아 있어. 어제 그래서 몸도 안 좋을 텐데.”

“으응. 괜찮아. 저기 빵 이따가 하나 더 넣어 줘.”

토스터 기에서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막 구워진 빵이 솟아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접시를 들고 다가갔다. 그러면서 올라온 자리에 말랑한 빵을 다시 채워 넣고 내렸다.

“이건 언제 또 다 했대. 주현이는 커피 마실래? 아니면 주스?”

“방금 했어. 나는 커피.”

주현이는 그러면서 프라이팬의 계란을 능숙한 솜씨로 툭, 뒤집었다. 커피라고 말한 주현이의 의견에도 나는 주현의 몫의 잔에다가 주스를 따라 주었다. 어제 피 흘리고 무리한 애가 커피를 마시면, 좀 안 좋을 거 같았다. 그런 나를 등지고 있는 주현이가 계란 프라이를 다 만들었는지 인덕션의 버튼을 끄면서 말했다.

“……근데, 주스를 마셔도 좋을 거 같아.”

“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제 몸이 그래서 속이 어떤지 모르니까…….”

“응.”

주현이가 다 차리다시피 한 아침 식사를 함께 식탁에 앉아서 먹었다. 바삭바삭하게 구워진 빵을 베어 먹는 소리와 간간히 부딪히는 식기의 소리외에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다. 주현이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좀 어색한 기류를 느꼈다. 그냥, 어제 꿈도 그렇고 앞에서 식사를 하는 주현이의 모습이 좀 의식이 되어서 말없이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마도 미니 주현이가 그 꿈속에서 외로운 표정으로 말했던 내용들이 좀 걸렸던 것도 같다.

그래서 말을 걸었다.

“……너는…….”

“응?”

내가 운을 떼자마자 조용히 아침 식사를 먹고 있던 주현이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나를 담았다. 앞에 앉아서 무해하게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 때문인지 아니면 대호의 낡은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 풍기는 무방비한 느낌인지는 몰라도, 내게 찾아 왔을 때랑은 전혀 다른 느낌을 풍겨서 평소에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케 만들었다.

“뭐하고…… 지냈어? 나 없는 동안…….”

“…….”

그러자 주스를 꼴깍 꼴깍 마시던 주현이의 목 넘김이 멈추고, 마시던 유리컵을 식탁에 내려놓으면서 살짝 웃었다. 아까 나를 부엌에서 반기던 것처럼 즐거움이 엿보이는 기색은 아니었다.

어딘가 좀.

“가하를 기다렸어.”

‘왜 이렇게 쓸쓸해 보이지…….’

꿈에서 봤던, 그 어두침침한 집에 어른 하나 없이 남겨져 있던 그 아이와 같이.

“……얼마나…… 기다렸, 어?”

그 모습에 나는 뭐라, 말을 꺼낼까 하다가 간신히 짧은 질문을 던졌다. 내가 없는 기억으로 살아온 것이 2년 남짓 되는데, 그것보다 더 길게 기다렸을까. 내 말에 주현이는 식탁에 팔을 올려서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더니, 자조적으로 웃었다.

“……20년 정도 됐나.”

“……20년?”

“합하면, 그 정도는 되는 거 같아.”

“……어떻게……. 아니, 왜 그렇게…….”

나를 무려 20년 동안 기다렸다는 말에, 이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내 나이가 서른 둘…….이니까. 20년이면 12살 정도.’

나는 꿈에서 나온 애를 떠올리며 대충 그 나이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정도, 되는 것 같았지.’

내가 꿈의 아이를 떠올리는 동안 주현이는 쌉쌀하게 웃었다.

“그냥……. 기다리는 것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왜 나였어? 다른 사람도…….”

“말했잖아.”

아무리 봐도, 나는 저 애에게 채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인데.

내게 무슨 가치가 있다고 20년 동안이나 기다린 걸까. 그 애처럼, 그런 곳에서…… 주현이도 기다렸을까.

어른도 없이, 그저 혼자서, 비가 오든, 햇살이 좋든, 눈이 오든…….

“좋아하니까.”

그는 입에 묻은 빵가루를 터면서 담담히 말했다. 쑥스러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마치 당연한 것을 말한다는 태도였다. 그러고는 경직된 지금 분위기를 조금 환기라도 시켜 볼 심상인지 슬쩍 웃었다.

“그리고 네가 옆에 없으면 잠도 못 자게 만들어 놓아서 다른 사람을 선택할 수도 없어. 그러니까 책임져.”

“……어?”

“매일 내 옆에서 자.”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옆에 없으면 잠을 못 잔다니. 기억이 없는 탓에 새로운 정보만 들으면 얼빠진 반응만 내뱉지 못하는 내 자신이 멍청해 보일 따름이었다.

‘나 때문에 잠을 못 잔다고?’

그러자 주현이는 손바닥에 턱을 괴고서 살짝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잘 잤어. 깨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너, 나 없으면……. 잠, 못자? 진짜로?”

“자긴 자는데……. 그냥 좀 피곤해.”

내 걱정 어린 말에 주현이는 그건 아니라는 듯이 대답하며 다 먹은 접시를 들고 일어섰다.

‘그러면, 내가 없는 동안…….’

나는 어제의 일을 다시 생각했다. 그러자 주현이의 삶이 얼마나 지리하고 고통스러웠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20년 동안, 잠도 못자고, 피를 줄줄 흘리며 지내던 사람. 그저 나를 기다리며,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나를 기다리면서…….

그러면서 나는 이제 궁금해졌다.

이렇게 너에게 필요하고도 빼 놓을 수 없는 존재인 내가 왜 떠나 버렸는지.

나 또한 다 먹은 접시를 싱크대에 두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묵묵히 설거지를 하던 주현이가 나를 보고 손을 건넸다.

“줘, 내가 할게.”

“어…… 응. 도와줄게.”

원래 내 집인데 아니, 나와 대호의 집인데. 이렇게 보니 마치 나와 주현이의 집 같기도 했다. 나는 그의 곁에서 다시 어제와 같이 접시를 헹구어서 개수대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나를 좋아한다는 주현이를, 나는.

“…….”

‘나는 좋아하지 않았던 걸까?’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없어서 아픈 애를 떠날 수가, 있을까?

나는 물에 젖은 손을 싱크대 난간에 기대어 두고 그를 다시 살폈다. 잘 잤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지, 어제는 창백하기만 하던 얼굴이 즐거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어서 그런가 더욱 생기가 넘쳤다. 평범한 옷차림으로 콧노래까지 하면서 설거지를 하는 지금은 어제와 같이 맵시 있는 옷차림이 아닌데도……. 사람이 정말 빛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면 말이야…….”

“응.”

오색을 띤 비누거품이 간간히 날라 다니는 싱크대에서 접시를 닦던 주현이는 냉큼 대답했다. 그게, 어쩐지 좀 기뻐 보이기도 했다. 주현이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나를, 반기는 느낌이었다.

“나는 너, 좋아했어?”

“…….”

“아니면, 네가 아파도…….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어?”

콧노래가 끊기면서 거품 묻은 스펀지를 문질러대던 손도 멈췄다. 확연히 드러나는 그 반응에도 내 입은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나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으니까.

“그건…….”

그가 말하지 않는 내용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

주현이는 작게 한숨을 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설거지 거리를 마무리 했다. 그 모습에 나 또한 마지막으로 식기를 받아서 헹구고 거품이 묻은 손을 닦으려고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에다가 손을 갖다 대었다.

“……모르겠어.”

“…….”

그리고 동시에 주현이의 두 손이 들어오면서 같이 물줄기 사이로 서로의 손등을 스쳤다. 차갑고도 축축한 물줄기가 나와 그의 손등 핏줄을 따라 주르륵 흐르는 동안 그의 파란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손을 적시는 차가운 물줄기에 비해, 스친 손등과, 마주친 눈의 온도는 뜨겁기 짝이 없었다. 화상을 입을 것 같은 그 강렬한 감각에 데일 것만 같아서 시선을 피하려는데 그의 대답이 내 눈을 다시 사로잡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가하가 웃는 게 싫었거든.”

‘내가 웃는 게, 싫다고?

“그래서…… 반대로 계속 울렸던 거 같아.”

“……왜?”

‘내가 웃는 게, 싫다고?’

내 반문에 그는 진지하게 답했다.

“웃으면…… 다들 가하를 좋아하게 되니까.”

“…….”

“나 혼자서만…… 가하를 좋아하고 싶었어.”

참 들어 보면 어린애같고 말도 안 되는 일방적인 말인데. 화가 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황당한 말인데. 이상하게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현실과 착각하리만큼 생생했던 꿈속의 아이가 생각날 따름이었다.

새를 놓치고서 기다린다던 그 애.

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마음만이 앞서서 실수투성이인 그런 애.

그런 애가 몸만 커서 내 앞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애는 내 손을 수건으로 닦아 주면서 나직하게 읊었다.

“내가 가하의 전부가 되고 싶었어.”

“…….”

“가하에겐…… 그게 좋지 않았던 거…… 같아. 많이 울었거든.”

내 손을 덮은 수건 너머로 조물조물 물기를 훔치는 그의 커다란 손이 따뜻했다. 아까 생기 넘치던 것은 어디로 가고 주현이는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나와 눈을 마주치 못했다. 그저 촘촘한 속눈썹 아래로 파란 눈을 내리깐 채 스스로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읊었다.

“가하가 웃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아프게 떠나고,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이렇게 와서 보니까.”

“…….”

“웃는 게 예뻐서.”

그의 내리깐 눈이 속눈썹을 불안하게 흔들면서 살금살금 시선을 올리더니만, 이내 다시 나를 꿰뚫어 볼 듯이 쳐다보았다.

“정말 예뻐서…….”

그러다 눈을 한 번 깜빡이며 목울대를 끌어올렸다.

“……그때 웃게 해 줬더라면……. 나를 더 좋아해 주고.”

“…….”

“계속 내 옆에 있었을까, 싶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고개가 숙여지고 파란 눈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그의 코끝이 내 볼을 살살 찌르면서 입술과 입술을 가볍게 맞췄다. 쪽, 하고 마른 입술이 부딪히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렇게 다시 보드라운 입술이 닿으며 그가 내 볼을 손으로 붙잡고 입 안쪽으로 침범할 무렵, 요란한 전화 벨소리가 침실에서 났다. 그 소리에 내가 하고 있던 행동을 깨닫고 황급히 키스하던 주현이를 밀어냈다. 얽혀 있던 혀가 급하게 떨어지면서 미처 삼키지 못한 은실이 서로의 입가에 달라붙었다.

“…….”

“…….”

떼어 놓기는 했지만 우리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에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다시 요란한 핸드폰 벨소리가 나를 움직였다. 나는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그저 부엌을 나갔다.

맞부딪힌 입술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침실로 들어가자, 충전이 잘 되었는지 환한 화면 속에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대호……구나.’

나는 벨소리와 함께 진동하는 핸드폰 화면을 꾹 누르면서 전화를 받았다.

[대호]

“……하아.”

나는 방금 전 짧은 키스로 뜨끈하게 달아오른 뺨을 이제야 느끼고 손으로 문지르면서 한 번 숨을 크게 내뱉었다.

순간, 그냥…… 받아주고 말았다. 그냥, 왠지 모르게…… 익숙해서.

바로 연결되는 전화 너머로 대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대호야.”

―……전화를 왜 이제 받아.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

긴 비행이 제법 피곤했는지, 무척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호가 타박했다.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면서 아침의 일로 변명을 세웠다.

“아…… 미안, 걱정했지. 어제 손님이 와서 정신이 없었어. 그러다 피곤하다 보니 일찍 자 버리고……. 아침에 충전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충전기 선이 빠져 있어서 이제야 충전이 되었나 봐. 그러느라 답장 못했네.”

―……그랬어? 안 그래도 어제 받았던 메시지 때문에 전화했어. 우리 집에 온 손님이…… 누구야? 우리 아는 사람이야?

대호는 전화 했던 이유를 바로 꺼냈다. 아, 하긴 신경 쓰이겠지. 그냥 말 안 할 걸 그랬나 제 일로도 바쁠 텐데.

“그건 아니고. 카페에 나를 아는 사람이 찾아왔어. 그래서 어쩌다 보니…… 그게, 그 사람이 좀 아파서 우선 우리 집에 데리고 왔거든.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미리 말 못해서 미안, 너 일로도 바쁠 텐…….”

나는 어제 일련의 일들로 미처 말하지 못한 내용을 말하는 와중에 대호는 무엇이 급한지 내 말을 잘라먹고 다급하게 질문했다. 거기에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기분을 받았다.

―너를 안다고? 가하, 너를?

“어? 어…… 응. 내 이름도 알고, 말하는 걸로 보아 너도 아는 것 같던데. 이름이…….”

―…….

“송, 주현이라고 하는데, 대호 너도…… 알아?”

주현.

어딘가 중성적이게 느껴지는 이름을 입 안에서 굴리면서 밖에 있을 그 사람이 신경이 쓰여 방문 너머 바깥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기대했던 문 틀 바깥의 거실 광경은 없고, 내 눈앞에는 빳빳하게 말려 둔 새 티셔츠의 가슴팍이 가득 찼다. 어?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내가 고개를 살짝 올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주현이가 있었다.

“나, 불렀어?”

“어? 어…… 아니. 부른 건 아닌데…… 저기, 대호야.”

―…….

그새 언제 왔는지 소리 없이 뒤에 있던 녀석을 발견한 내 심장이 속에서 철렁거렸다. 사람 놀래키는데 재주가 있네. 그러면서도 핸드폰 통화를 잊지 않고 대호를 불렀다. 조용하기 짝이 없는 핸드폰 너머에 순간, 끊긴 건가 싶기도 했다. 다급하게 이어지는 대호의 말만 아니었더라면.

―그 새끼 당장, 내보내.

“응?”

―가하, 너 얼른 차 타고 가. 가연 씨한테 가. 지금 당장!

“대호야, 그게 무슨 소리야, 가연이 프랑스에…….”

황망하기 그지없는 소리의 연발로 내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되묻는 사이에, 내 어깨에 은근슬쩍 무게감이 실렸다. 그러고는 내 핸드폰이 있는 쪽에 조근조근, 주현이 특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미 늦었어.”

―…….

“네가 아무리 그래도, 바뀌는 건 없어. 황대호.”

“저리 가요. 통화 중…….”

뭐가, 늦었다는 거지. 나는 다시 일어나는 불안감과, 내 어깨에 고개를 걸치고 머리를 비비적대는 주현이의 행동이 그 무엇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들, 아는 사이……인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의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등에 짐짝처럼 매달린 그가 뒤에서 부터 나를 안아 왔다.

“네 능력으로 가하 기억 지우면 다 끝일 줄 알았어?”

“……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내 기억을…… 대호가, 지운 거라고?

내 눈이 주현이에게 돌려지자, 주현이는 보란 듯이 미소 지었다.

“우리 가하, 대호가 말 안 해 줬구나……. 가하 기억 지운 사람이 누구인지.”

“그게 무슨…… 대호야, 그게 무슨 말이야?”

―……송주현 말 듣지 마. 내가…… 내가 나중에 설명할게.

“그게 무슨 말이야. 정말로 내 기억, 네가…… 네가 그런 거야?”

내 질문에 대호가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에 나는 더 혼란스러웠다.

‘그럼, 그게 맞다는…… 건가.’

주현이는 여전히 뒤에서 나를 안은 채로 내 머리에 얼굴을 비비적대었다.

“아쉽네. 가하가 나한테 가이딩 받는 모습을 좀 봤어야 하는데. 아, 넌 에스퍼라서 잘 모르지? 가이딩 받을 때 가하가 얼마나 예쁜지…….”

―이…… 미친 새끼. 가하 손대지 마, 너 같은 새끼한테…….

늘 다정하고, 감정의 굴곡이 무난한 편인 대호가 평소답지 않게 거친 욕설을 내뱉는 것을 듣고 나는 놀랐다. 그 말을 나만 들은 것은 아닌지, 주현이가 작게 웃었다.

“오랜만에 해서 피가 좀 나던데. 그렇게 데려 가 놓고 한 번도 안 했나 봐?”

―……가하야.

확실히, 주현이는 피가 철철 나긴 했지. 나는 아까 보았던 그 끔찍한 광경에 고개를 저었다. 으. 그런 게 가이딩이라면, 평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가이딩을 받았을 때 그런, 이상한 반응을 보였던 걸까.’

주현이가 아픈 게 싫어서?

그 생각을 비집고 들어온 대호의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대답했다.

“어…… 응.”

―……어쩐지 불안하다 했다. 거기다 널 혼자 두고 온 내가 병신이지.

“……왜 그래.”

또, 욕을 하는 모습에 나는 이제 뭐가 뭔지 모를 지경이었다. 대호가, 내가 아는 대호가 아닌 것만 같았다. 그는 내 작은 타박에 씁쓸한 듯 한숨을 쉬었다.

―……내가 도둑 조심하라고 했잖아.

아까 욕설을 내뱉는 게 환청이었던 것처럼 그는 평온한 투로 내게 말했다. 갑자기 웬 도둑 타령인지. 평소에도 농담을 많이 하는 녀석이긴 했지만, 이 상황에도 그럴 줄은 몰라서 나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주현이가…… 도둑이야? 뭐 비싼 거 훔쳐 갔어? 멀쩡하게 생겼는데…….”

―겉만 보고 그러면 안 돼.

나름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대호가 문득 끅끅,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놓고 매번……. 내 소중한 걸 가져갔거든.

‘도둑치고는 너무……. 멀쩡하게 생겼는데.’

나는 스스로가 가진 편견을 한 번 되돌아보며 침대 끄트머리에 느긋하게 앉은 주현이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아무튼, 나 지금 바로 돌아갈게. 송주현 그 새끼 말 듣지 말고……. 우선은 우리 집에서 내보내. 나 지금 가면 내일 아침에 도착할거야. 차 돌려요. 인천 공항으로 다시 가게.

“……지금…… 온다고? 너, 장례식은 어쩌려고…….”

그는 혀를 찼다. 그게 무슨 중요한 것이냐는 듯이.

―다 늙어서 죽은 거, 볼 필요 없다고 했잖아. 젠장. 아무튼, 송주현이랑 아무것도 하지 마. 말도 하지 말고, 손도 잡지 말고. 알겠어?

“……어, 어…….”

‘이미, 손도 잡고…… 키스도 했는데.’

나는 그의 당부가 무색한 아까 전 일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무슨 애한테 사탕 주는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말라는 투를 유지하면서 그는 신신당부했다.

―계속 핸드폰으로 연락하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차타고 가연 씨에게 가. 그 새끼 나가라고 해. 꼭. 안 되면 경찰이라도 불러.

“……알겠어.”

다 큰 남자에게 뭔 걱정이 그렇게 많은지 싶었지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현이의 동태를 다시 한 번 살폈다. 침대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주현이는 여전히 방글방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그저, 침으로 반짝 대는 입술만이 조금…… 신경 쓰여서 내가 등을 돌렸다.

‘왜 그랬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자니, 내가 도둑에게 손수 밥도 먹여 주고, 키스도 어쩌다 보니 두 번이나 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러니 대호가 걱정할 만하다.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하지만 세상에 훔치러 온 도둑에게 밥 먹여 주는 멍청한 사람이…… 있을까?

‘없겠지.’

아니, 그래도 이건 내가 기억이 없어서, 몰랐던 걸로……치자. 내가 스스로를 조금 합리화 시키는 와중에 핸드폰 너머로 머뭇대는 대호의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

―그리고……. 기억은.

“…….”

―……나중에, 다 설명할게. 지금은 그냥……. 너 위해서 그런 거라고, 말해 주고 싶다.

“……응.”

혼란스러운 그 가운데에도, 대호의 말이 거짓말 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기억이 없던 내 옆에서 대호는 늘 한결같았으니까.

―여기, 거스름돈은 필요 없어요. 나 출국장 바로 들어가야 해서. 다시 들어가서 연락할게, 핸드폰 손에서 놓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알았지?

“응……. 조심해서 와.”

우리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전화 화면이 없어지는 핸드폰 화면에는 대호가 보낸 메시지가 수두룩하게 쌓여 있었다.

손님이 누구냐고, 이웃이냐고, 가연 씨냐고, 한국 사람이냐고, 우리 아는 사람이냐고…….

“…….”

그도, 손님이 주현이라는 걸 어렴풋하게 짐작은 하고 있었던 걸까.

나는 엉켜드는 이 기억들 가운데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침대에 앉았다. 그러자 내가 앉은 쪽 끝에 앉아 있던 주현이가 넌지시 물었다.

“……뭐래.”

“…….”

대호가, 주현이랑 말하지 말랬는데. 나는 어정쩡한 요구 가운데 차마 말을 못하고 있었다. 대호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진짜 하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런 내게 주현이는 다 안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랑 말 하지 말래?”

“…….”

고개만 대충 끄덕이자 그는 킥킥 웃었다. 그러고는 웃음이 멎을 때 쯤, 그가 침대 시트 위로 팔을 뒤로 기대고 천장을 보면서 하, 한숨을 쉬었다.

“이미 다 했는데.”

“…….”

“밥도 먹고……. 나랑 가이딩도 오랜만에 하고.”

가까이 있는 탓에 대호와 내가 한 통화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 주현이는 자연스럽게 기지개를 피면서 몸을 일으키다가, 여전히 침대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씩 웃었다. 거기다 대고, 우리 집에서 당장 나가라고 하기가 좀 그랬다. 하지만 여기다 둘 수도 없었다. 대호가 그렇게 반응을 하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까.

“같이 잠도 잤는데.”

“……저기.”

“응.”

아까 가까이 있었으니 통화를 들었을 게 뻔했을 텐데 주현이는 제 발로 나간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그는 갈 곳이 없다고 했으니 당연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말해야 하는데…….’

어쩌나 싶을 때 그가 거실 쪽으로 향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주현이의 행동에 얼른 일어나서 쫓아갔다.

“어, 디 가?”

“나가려고. 당장 나가 줬으면 하는 얼굴인데. 아니야?”

“…….”

그는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웃고는 현관의 걸쇠를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같이 있었으니 됐어. 나 있었다가 황대호가 가하한테 소리 지르는 것도 싫고. 아, 옷은 내일 세탁해서 줄게.”

“……너 지금 갈 곳…… 있어?”

내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어딘가 쓴 맛이 풍기는 얼굴을 했다.

“……왜 이렇게…… 의심이 없을까. 우리 가하는.”

“…….”

“나 믿지 말라고 들었으면.”

그는 미련 없다는 듯이 문을 열고 발걸음을 바깥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내게 문득, 문고리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착각인가 싶었지만 문이 열린 현관 앞에서 나를 등지고 서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낡은 철장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더 확연히 보였다.

“……믿지 말아야지.”

내 집을 나서서 조그마한 거리가 생긴, 그의 왼손에서 퍼지는 떨림이.

그에 나는 현관의 문을 닫다 말고 다시 열어서 결국 말을 걸고 말았다.

“저기.”

“왜?”

“……내가 옆에 없으면…… 아픈 거…… 아니야? 그, 손 떨리는 거…….”

믿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그가 쓰러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았다.

그런 광경에도 불구하고 그저 믿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내보냈다가 어제처럼……. 피를 잔뜩 쏟고 아프면 그것도, 참 그렇다. 불편하고, 마음이 아플 것 같다.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내 쪽으로 몸을 살짝 돌려서, 떨림을 인지하지 못한 왼손을 알아차리고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치떴다가 이내 은은하게 웃어 보이며 떨리는 왼손을 등 뒤로 숨겼다.

“……괜찮아. 가하가 어제 가이딩 돌려 줬잖아.”

“…….”

“우리, 오랜만에 가까이 있었잖아.”

가까이라고 해 봤자 하룻밤 정도의 시간 아닌가. 그가 기다렸다는 시간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그런.

짧은 시간.

그는 애써 괜찮다고는 하지만 왠지, 그가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입에서 나온 거짓말들은 생각보다 티가 너무 잘 났다. 나는 저 입과 하던 키스를 떠올리며 마주친 눈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은근하게 말을 걸었다.

“내 걱정했어?”

“……그냥. 피 보는 건 질색이라.”

대호는 뭐라 하든지 믿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나는 왠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몸을 돌렸고, 내 어깨 너머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 봐.”

“…….”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땡, 하고 도착하는 소리와 함께 등 돌린 내 뒤로, 타일 바닥에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마치 액체가 쏟아지는 듯한 그런 소리. 설마. 나는 어제 거실 바닥을 후두둑 적시던 무거운 핏물 소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고,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철장을 열지도 못하고 간신히 기댄 채로 하얀 타일 바닥을 검붉은 피로 소리 없이 적시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주현아!”

“괜……찮 들어, 가.”

몸이 튀어나가며 그를 부축하자 그가 만류했다. 대호의 말도 있었고, 아직도 그의 입으로는 풀리지 않는 것이 잔뜩 있었지만……. 집 바깥으로 나가는 정도로 거리를 두어도 저렇게 힘들어 하는 애를, 나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커다란 덩치가 무색하도록 피를 쏟는 그를 다시 집 안으로 들였다.

“그러지 말고 들어와.”

“……나를 믿어?”

그는 힘이 없는지 내게 이끌려 들어왔다. 그러면서도 대호의 말이 신경 쓰이는지 말을 더했다. 내 발등 위로 그의 입에서 흐르는 피가 툭, 툭 떨어지며 번졌다.

“……다른 건 몰라도, 너 아픈 건 믿을 수밖에 없겠다.”

나는 그를 소파에 앉혀 두고 피가 줄줄 흐르는 입술에 다시 내 입을 맞췄다. 찝찔한 피 맛이 그닥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멎지 않는 피를 흘리는 이 상처를 낫게 해 주고 싶었다.

그의 손이 다시 올라오며 내 고개를 붙잡고 서투른 키스에 응했다. 얼마나 서로의 혀를 옭아맨 채로 그러고 있었을까. 언뜻 입안의 피 맛이 연해진 것 같다고 느낄 때쯤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그의 맑게 반짝이는 파란 눈에는 고통은 온데간데없고 기쁨이 서려 있었다.

‘이제, 좀 괜찮은 건가.’

나는 되었다 싶어서 입을 얼른 뗐고, 그가 아쉬운 얼굴로 떨어져가는 내 입을 바라보면서 언뜻, 쑥스럽게 웃었다.

“……아픈 것도 나쁘진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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