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주차를 마치고 맨 위층에 위치한 우리 집으로 올라가는 길은 다시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불행은 언제나 한꺼번에 온다고……. 무척 구식의 것이었다. 세련된 엘리베이터가 아닌, 감옥같이 철장으로 만들어진 수동식 엘리베이터. 뭐, 큰 도시가 아니니 그러려니 하지만 이럴 때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참 큰 문제다.
“읏샤.”
나는 어깨에 겨우 둘러맨 그를 열려 있는 엘리베이터 구석에 대충 구겨서 앉혀 두고 열려 있던 철문을 차르륵 밀어서 닫았다. 그러고 맨 위층의 버튼을 누르니 엘리베이터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나는 엘리베이터 내부 난간에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지친 몸을 기대고 대충 구겨 앉혀 둔 그를 내려다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무슨 금덩이도 아니고.”
‘금덩이면 환영인데, 그런 것도 아닌 게 무식하게 덩치만 커 가지고.’
나는 다시 다가올 고생스러운 과정을 상상하며 눈을 꼭 감았다.
미안하다고 그랬으면서, 어떻게 나한테 다른 의미로 미안한 짓을 더 한다. 그렇게 속으로 욕을 하자니 그의 귀가 제법 간지러울 것 같은데, 일어날 기색은 없고, 정말 죽은 사람마냥 잠만 디립다 처자고 있었다.
‘젠장.’
결국 나는 그를 다시 들쳐 업고 그의 긴 다리를 꼬리처럼 바닥에 질질 끌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그를 소파에 대충 앉혀 두고 그 옆에 앉자, 움푹한 등골에 땀이 맺히다 못해 강줄기처럼 흘러서 입고 있는 티셔츠가 척척하게 감겨들었다.
“아, 더워.”
다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다가, 지친 몸을 일으켰다. 샤워 좀 해야겠다. 땀으로 금방 젖어든 몸이 찝찝했다. 욕실로 가기 전에, 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피곤에 좋다고만 들었지, 잠자는 공주님이 된다는 건 못 들어봤는데.”
‘그나저나 자는 모습도 더럽게 잘생겼네.’
소파 등받이에 비딱하게 기대어서 정신없이 자는 모습조차도 어디 성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경건한 모습이라, 은근히 반발심 같은 게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살라고 저런 사람이 다 있지.’
나는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겨서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로 시원하게 싹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거실 쪽에 서 있는 커다란 인영이 눈에 툭, 걸렸다. 그는 내가 욕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거실의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어요?”
“……응.”
“어디 아픈데 있어요? 카페에서 정신을 못 차리길래 우선 우리 집에 데려오긴 했는데. 아니면 그, 차가 안 맞는 체질이에요? 병원 갈래요?”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내가 넌지시 물어보자, 그는 내게 천천히 다가오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픈 건 아니었나. 나는 안심하면서도, 궁금증이 들었다.
‘어디 아픈 사람도 아닌 사람이, 그렇게 잠을 잔다고?’
보통의 사람이 가진 상식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다행이네요. 근데 잠을 많이 못 잤나 봐요. 되게 잘 자던데.”
“…….”
“아 참. 우리 아까 마저 말하지 못한 게 있죠?”
뭐 때문에 피곤한지는 말해 주지 않을 분위기로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그에게 주제를 꺼냈다. 대화로 분위기를 잘 풀어 볼 생각이었다.
“응.”
“저기 앉아서…….”
그가 내 코앞에 닿을 만치 다가와서 예상하지 못한 포옹을 하는 것만 아니면.
“저기…….”
“……보고 싶었어.”
아까 내게 말한 사과가 무엇이냐고, 내게 미안한 게 뭐냐고 물어봤을 것이다. 그렇지만 가만히 나를 껴안고, 정수리에 이마를 기대는 그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그가 나를 꼭 껴안은 바람에 기대고 있는 그의 가슴팍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하게 뛰는 심장소리만이 그의 마음을 짐작케 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고, 고르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내가…… 당신을 두고 갔어요?”
그것도, 꽤 오랫동안 그랬을까……. 무척 소중한 사람을 껴안는 것처럼 구는 그의 모습과 기억이 없는 탓에 평소에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을 가지고 넘겨짚는 습관으로 나는 말을 이었다. 내 말에 그의 몸이 움찔, 하고 떨리는 게 느껴졌다. 정곡인 모양이었다.
‘맞나 보네. 하지만 왜?’
나는 입안에 고인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왜 그랬는지 알아요?”
“…….”
내 정수리에서 느껴지던 무게감이 덜어지는 느낌에, 나는 그의 가슴팍에 묻고 있던 고개를 올렸다. 가까이 마주치고 있는 눈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아까는 시리도록 파랗기만 한 눈이었는데, 지금은 깊고 어두운 빛이 서리며 마치 폭풍을 맞은 겨울 바다와 같은 색깔을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의 끝이 그 눈을 찌를 듯이 내려온 모습에 나는 무심코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 파란 눈이 나를 보다가, 이윽고 눈을 감았다.
“……내가 잘못했어.”
“뭐를…… 잘못했어요?”
나는 그 예쁜 눈을 찌를 것처럼 뻗쳐들은 머리카락을 집어서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런 내 손등에 스치는 그의 숨결이 따끈했다.
그는 내게 무엇을 잘못해서, 그렇게 말을 하는 걸까. 그러면서도, 왜 도리어 상처받은 짐승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지 참 모를 일이였다. 심지어 나는 기억이 없으니까 이 사람이 왜 그런지 전혀 알 수가 없어서 조금은 답답하기도 했다. 내 대답에 오히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내 어깨에 그의 고개를 기대고 흐느낄 뿐이었다. 잘못했다고.
“……다, 잘못했어.”
하지만 잘못이, 죄가 사해지는 것은 언제나 당사자의 용서와 구제가 이루어질 때나 가능한 것이다. 기억이 없는 내게서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나는 그저, 그의 등을 껴안고 토닥여 주는 수밖에.
“……그래서 사과하고 싶어요?”
그리고, 사과해서 내게 용서를 구하고 싶을 만큼 그에게 나는 중요한 사람이었나 싶을 뿐.
‘착하네, 그래도 사과하러 오고.’
그는 내 어깨에 기댄 이마를 살짝 움직였다.
“……응.”
‘나한테 뭐, 크게 잘못했나.’
훌쩍 거리는 소리하며, 갈아입은 티셔츠의 어깨가 축축한 걸로 보아 또 우는 게 분명했다. 잡지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사람이 내 앞에서 어린애와 같이 우는 모습을 마주하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다 괜찮다고 말이 나올 뻔했다. 그런 충동을 가까스로 참고, 그를 진정시켰다.
“그럼 우리 우선 저기 앉아서 이야기해요. 나 일 하고 와서 다리 아파요.”
“……다리 아파?”
“그래요. 당신 자는 동안, 아주 열심히 일하고 오느라 힘들다구요.”
그러니까 서서 이러지 말고 거실 소파에 앉자는 말이었는데, 그는 나를 번쩍 들어서 들쳐 메었다. 아까 병든 닭처럼 자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저, 잠시만요. 아니, 저 지금.”
“가이딩 해 줄게.”
“예? 그거는 에스퍼나 하는 거잖아요.”
밀가루 봉지처럼 그의 등에 들쳐 메인 상황에 당황스러울 새도 없이,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의아해졌다.
‘가이딩이라니? 나는, 에스퍼가 아닌데?’
처음 듣는 소리에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나는 다시 그의 어깨를 떠나 소파에 앉혀져 있었다.
“저기, 저는 에스퍼가 아니에요.”
그는 소파에 앉아 있는 내 발치에 앉아서, 내 발목을 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넌…….”
방금 목욕을 마치고 나온 내 다리는 훈훈한 물로 한 번 씻긴 후라 그런가, 내 발목을 쥐는 그의 손에 어린 체온이 유난히 시렵게 느껴졌다.
“내 에스퍼야.”
나를 쳐다보는 그 눈의 색깔과 같이.
“내가…… 에스퍼라고요?”
처음 듣는 소리에 내가 반문하며 그의 떨리는 동공을 찬찬히 훑는 순간, 발목에서 차오르는 기묘한 감각에 나는 몸을 떨었다.
‘아.’
“……내, 유일한 에스퍼야.”
꿈에서, 그의 품에서 느끼던 그 따뜻한 감각이었다. 혼란스럽고, 아릿하던 심장을 금방 진정시켜 주던, 힘. 마치 폭풍이 이는 바다를 잠잠하게 만드는 것 같은 그 따뜻한 힘. 어떻게 보면 피가 은근히 들끓는 것도 같고, 몸 속 깊숙히 따스하게 덥혀 주는 그런 기분.
‘이게, 가이딩…… 이라는 걸까.’
나는 말로만 듣던 가이딩의 효력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우와. 진짜 피곤하지가…… 않네요.”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었다.
‘근데 나는 정말 이런 거 처음인데. 가이딩 같은 건 처음 느껴 보는 건데.’
나는 돌아오지 않는 기억을 살짝 답답하게 생각하며 다리를 보다 말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그쪽이…….”
‘내 가이드, 인가?’
내 말이 다 끝 맺히기도 전에 그가 방긋 웃었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할 지 아는 것처럼.
“네 가이드야. 가하는 나랑…….”
이런 사람과,
내가…….
“각인했어.”
서로의 반쪽으로 이어져 있었던 걸까.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나는 그의 말을 듣고서도 얼떨떨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나는 에스퍼인 대호에게 가이드에 대한 것을 언젠가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가이드가 있으면 에스퍼는 어떤 기분이냐고. 그때 대호는 분명 그랬다.
“……그런데, 왜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둘 사이에 이어진 감각 때문에 어디에 있든지, 어떤 기분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 수 있다고 그랬는데.
‘난 왜…….’
나는 평온하기 짝이 없는 내 가슴팍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그에게 재차 물어보았다.
“분명, 이어져 있어서 다 알 수 있다고 그랬는데…….”
‘난, 왜 평소와 같을까?’
그리고 내 말을 듣자마자, 그의 얼굴은 절망과 눈물로 뒤덮여 있었다.
에스퍼인 대호는 가끔, 내게는 잠시 나갔다 온다고 하고는 외박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서로 다 큰 어른들이니 어디를 갔다 왔는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한 번 대호의 바지를 세탁하다가 나온 <사설 가이드 센터>라 써 붙인 명함에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던 것이다. 도대체 ‘가이드’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에 대해 그는 살짝 난처한 표정을 하면서 일종의 감기약 같은 것이라고 했다. 에스퍼란 것들은 주기적인 가이딩이 없으면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힘들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고. 나는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다.
그래서 나는 에스퍼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대호가 나는 에스퍼라고 말해 준 적도 없었고, 하다못해 대호처럼 아파 본 적도 없었으니까. 한 번은 대호가 일이 바빠서 외박을 하는 시기가 평소보다 조금 늦은 적이 있었는데, 정말로 큰 몸살 감기에 걸린 것처럼 앓았던 적이 있었다. 그 몸으로 어디를 가냐고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아픈 몸으로 기어코 한 번 외박을 하고 오니 정말 다 나아서 온 모습에 다시 놀랬지만 말이다.
그런 대호의 모습을 아는지라, 그가 나의 가이드라는, 내가 그의 에스퍼라는 낯선 호칭은 무언가 목에 걸린 것처럼 혀 아래로 넘어가지가 않았다. 그리고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눈물로 카펫 바닥을 적셔 가는 그의 모습도 적응이 되지가 않았다. 그가 가이딩을 해 주느라 잡고 있는 내 발목을 도로 물리고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 울지 마요. 너무 많이 울면 눈 아파요.”
“……각인이 끊겼어.”
거실의 테이블에 놓인 티슈를 뽑아서 주려는 순간, 그가 말했다.
‘각인?’
그리고 카펫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그의 손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마치, 내가 무언가 깨지고 말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로 간질간질하게 내 뺨을 쓰다듬었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손끝의 짧은 손톱이 내 뺨의 피부를 이따금씩 비죽비죽 파고들었다.
“……그래서,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제가요? 읏.”
헝클어진 머리 밑에 드리워진 그림자 사이로 선연하게 드러난 파란 눈이 빛났다. 그리고 그의 조심스러운 손길은 방금 샤워 후에 갈아입어서 살짝 젖은 티셔츠의 내 목 뒤로 파고들었다.
“또, 나를 두고 가 버린 줄 알았어…….”
덕분에 등골을 쭈뼛 서게 하는 감각이 일었다. 내가 평소 같지 않은 감각에 눈을 살짝 찌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손은 개의치 않는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각인은…….”
커다란 손과 더불어 긴 손가락은 내 뒷목을 쓸어내리면서 그의 앞에 앉아 있는 나를 품 안에 더욱 가까이 두었다. 그의 팔 안에 가두어진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점점 이상해졌다.
“죽기 전까지 깨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깨어진 각인 때문에 그를 느끼지 못하는 걸까.
“……잠시만요. 그러면, 나는 에스퍼라는 거고. 뭐, 해요? 간지러워요.”
‘그럼, 우리가 각인한 사이인데……. 깨어졌다는 건가. 그것 때문에 내가 죽은 줄 알았던 거고?’
내가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동안, 그의 손이 내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중간 부분의 뼈 위를 손끝으로 덧그렸다. 그의 들뜬 웃음이 그가 덧그리던 뒷목의 볼록한 부분에 쏟아졌다.
“안 지워졌네. 내가 만든 각인…….”
나도, 그때야 알았다. 내 뒷목에 무언가가 움푹하게, 들어간 자국은 그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가 낮게 웃는 것을 두고 나는 목 뒤의 ‘각인’을 확인해 보려고 몸을 떼어내려다가 다시 도로 붙잡혔다. 그가 나를 두 팔로 꼭 껴안았던 탓이다.
“……가하 냄새.”
그리고 내 목덜미 쪽에 코를 박아서, 덕분에 나는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냄새? 나, 방금 샤워했는데…….’
“……나 냄새나요? 방금 샤워했는데.”
“……아니.”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들고 웃음기 어린 얼굴로 나를 달콤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마치 당연한 사실을 들은 사람처럼.
“가하는 에스퍼니까, 특유의 냄새가 나.”
“아, 그래요? 나는 잘 모르겠는데…….”
평소에 스스로에게서 무슨 냄새가 난다는 것을 느껴 본 적도 없고. 대호도 언제 한 번 그런 것에 대해 말해 준 적이 없어서 그런가, 나에게서 ‘에스퍼’ 냄새가 난다는 말이 어색했다. 나는 괜히 스스로의 어깨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하지만 햇빛이 좋은 이탈리아의 태양 아래 빠짝 말린 면 티셔츠에서 불쾌한 냄새 따위는 전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고개를 돌려서, 그가 입고 있는 양복의 목덜미 쪽에 코를 킁킁 맡았다.
오히려, 이쪽이 ‘냄새’라고 할 만한 것이 났다.
‘아니, 이 정도면 향기에 가깝지?’
“본인 향수 냄새랑 착각한 거 아니에요?”
“……향수? 난 향수 안 뿌려. 인위적인 향기 별로 안 좋아해.”
“어? 그래요? 되게 좋은 냄새 나는데. 그 뭐지.”
딱 잘라 말하는 것과는 달리 그에게서는 제법…… 좋은 냄새가 났다. 나는 코끝에 진하게 스치는 익숙한 향기를 맡아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 그 냄새다.’
“레몬 같이. 되게 시원하고…… 향긋한데.”
옆집에서 기르는, 저기 레몬 나무 옆을 지나갈 때 마다 은은하게 풍겨 오는 냄새.
‘맞다, 맞아. 그 냄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웃음기가 여전한 얼굴로 나와 이마를 맞대오며 속삭였다.
“……그건 가하 냄새야.”
“……내 냄새가 그래요? 난 정말 모르겠는데…….”
이마를 맞댄 채로, 코가 닿을 만큼 가까워진 그 파란 눈빛과 마주치고 있자니 어쩐지 빠져들어 가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내리고 다시 그의 목덜미 가까이 코를 대고 맡아 보았다.
“가이드는, 각인을 한 에스퍼의 향기를 따라가게 되어 있어.”
그가 나를 다시 꼭 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그 귓가에 파고드는 나직한 목소리에 등 결이 파득파득 떨렸다.
‘으아.’
“……그러니까, 내게서 나는 냄새는, 원래 가하 냄새야.”
“그, 그렇구나. 제가, 어…… 에스퍼라는 걸 지금 처음 알았어요.”
내가 무슨 곰 인형도 아닌데 덥석 덥석 안아드는 그는, 아까 카페에서도 보였던 예민한 얼굴과 다르게 참 거리낌이 없다 싶었다. 대호도 제법 잘 치대는 편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보다 더한 감이 있다고 하나. 그런데, 뭔가 좀 기분이……. 이상했다.
“대호도……. 아, 나 친구랑 같이 살아요. 그 친구도 에스퍼예요.”
그닥…… 좋지는 않은데, 또 엄청 싫지는 않았다. 그래도 같은 남자들끼리 부둥켜안고 있는 것도 뭔가 웃겨서, 나는 등을 뒤로 빼면서 머리를 긁었다.
‘외국인……이라서 그런가? 스킨십이 거리낌이 없네.’
대호의 이름을 말하려는 내 말을 앗아간 것은 그의 대답이었다.
“……황대호?”
“……어?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웃고 있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 놀랄 새도 없이, 나를 열렬히 쳐다보는 그 이색의 눈에는 격렬한 파란이 담겨 있었다. 그 눈에 어린 감정을 읽게 된 나는, 문득 불안함으로 뒷골이 당겼다. 그의 붉은 입술은 내 질문에 착실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그 쥐새끼 같은 놈이 내게서 너를 훔쳐 갔으니까.”
하지만…… 좋은 의미로 아는 것 같지 않아서 문제였다.
“…….”
“예전에도……. 이번에도.”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그의 주위로 무언가 다른 기류가 흐르는 듯, 급작스레 무거워진 공기를 체감하며 나는 작은 공포를 느꼈다. 질려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그는 찌푸린 낯을 황급히 샐샐 웃는 얼굴로 바꿨다. 그러면서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미안. 무서웠어?”
“……저기, 대호랑…… 무슨 일 있었어요?”
그래도, 순간 느낀 공포는 그의 얼굴 표정처럼 금방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방금 마친 샤워로 따끈해진 손 틈 사이에 파고드는 가늘고 긴 손가락이 유난히 차가웠다. 그는 내 말에 한 번 픽 웃고 말았다.
“예쁜, 가하. 내 가하…….”
그가 나와 맞잡은 손을 올려서 그의 뺨에 대고 문질거리다가, 내 손등에 살짝살짝 입을 맞췄다. 보드라운 붉은 색의 입술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갈 때마다 피어오르는 야릇한 감각을 피해보려다가 오히려 그와 잡은 손을 꼭 쥐고 말았다.
“나는 욕심이 별로 없는 편인데.”
그러자 그가 눈을 살짝 내리까고, 맞잡은 손을 보면서 읊조렸다. 이제는 나보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악력이 압도적이라서 어떻게 손을 빼내려 해도, 뺄 수가 없었다.
“너만, 보면 왜 이렇게 욕심이 생기는지, 모르겠어.”
“…….”
계속 쥐고 있을 것만 같던 손이 문득 스르르 풀리더니, 그가 소파 발치에 기대어 있는 내 얼굴에 손을 가까이 대었다. 파란 눈이 나를 담는 순간에, 나는 다시 가만히 그 눈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봐도, 순식간에 덮쳐드는 덫처럼 이목을 끄는…… 눈이었다.
“이렇게 예쁘게 웃는 너를. 무사하게, 온전히 데려오고 싶다가도…….”
뺨에 그의 커다란 손이 닿아오는 순간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덕분에 예민해진 살결이 다른 손길을 의식했다.
왼쪽 발목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손길.
“나를 두고, 그 새끼를 따라갔다고 생각하니…….”
내 기억이 맞다면, 오른쪽 다리와는 다르게 그곳에는 원인 모를 흉터 같은 것이 문신처럼 남아 있었다.
주변의 피부색과는 좀 더 짙고, 불그스레한…….
그걸 머릿속으로 되새길 즈음, 내 심장이 급작스럽게 쿵쿵 뛰었다. 그리고 몸이 떨리면서 절로 움직였다.
‘싫어.’
“시……. 싫어. 싫어. 하지, 하지 마요.”
나는 앉아 있던 몸을, 황급히 뒤로 질질질 밀면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는 고개를 고장 난 로봇처럼 간신히 저었다. 불안함으로 떨리는 시야 너머로 보이는, 당황스러운 얼굴의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가하?”
내가 몸을 뒤로 물리면서 내 발목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떠났다. 그렇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한 번 격동하기 시작한 몸은 금방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저 단순하게 돌아가던 머릿속이, 그저 싫다는 말로 가득차서 고장 난 라디오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멈추고 싶어도, 내게서 나오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하, 하지 마요. 아파, 아파요. 싫어.”
그의 차가운 손길이 닿던 발목을, 다리를 접어서 껴안고 등을 돌렸다.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껴안고, 손을 잡고 있어도 익숙하게 느껴졌던 사람의 손길은 쭈뼛쭈뼛 소름을 돋게 했다.
그와 닿으면 살결이 찢기다 못해 조각조각 날 것처럼, 무서웠다.
떨리는 내 손으로 만져 보아도 내 다리는 멀쩡하고, 이상하나 없는데.
“아픈 거, 싫어요. 하지 마요……. 싫어, 싫어요. 거짓말쟁이.”
나를 아프게 할 것 같았다.
“……가하.”
“거짓말……쟁이.”
통제할 수 없는 입에서 나온 단어에 그가 일어서서 내게 다가오다 말고 우두커니 섰다. 나는 높다란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키가 큰 그를 올려다보면서 왈칵 쏟아낸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뭐, 지. 이게 다 뭐지.’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단 하나의 단어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떠올라서 내 입으로 나왔다.
“거짓말쟁이……. 당신은 나를 아프게 할 거야. 예쁘다고 하고, 나를 아프게…….”
“……안 할게.”
가만히 서 있던 그는 결국 내게 몸을 숙여서 나를 안았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키면서 나를 공중에 안아 올렸다. 안정적으로 서 있는 그와 달리 내 몸은 뒤로 넘어갈 거 같아, 불안함에 무의식적으로 그의 목을 잡았다. 그러다가도 아까 전의 그, 공포스럽고 몸을 떨게 만드는 감각에 몸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나를, 바닥에 내려 주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 내 등을 껴안고 토닥이는 그의 손길만 아니었어도.
“……미안해, 가하.”
“싫, 싫어요. 아프게, 하지 마세요……. 가이드, 없어도 되니까. 가이딩도 필요 없으니까…….”
하지만 한 번 터진 눈은 멎을 줄을 모르고 연신 흘러나왔다. 나는 결국 그의 어깨에 눈을 파묻고 훌쩍거렸다. 나도,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그저 그 말이, 덜덜 떨리는 몸이 그 말을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마치 마음속에 꼭꼭, 눌러 쓴 일기처럼 그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에스퍼 아니에요. 에스퍼 안 할래요. 갈래요. 가고 싶…….”
“아픈 짓…… 안 할게. 진정해 응?”
내 등을 토닥이는 손 너머로 따뜻한 열기가 퍼졌다. 아까, 그가 내 다리를 고쳐 주던, 그 ‘가이딩’과 닮은 그런…… 온기. 그 온도에서 퍼지는 기운이 마치 마법처럼, 원인도 모르고 혼란스럽게 떨리던 몸을 그 손에서 퍼지는 열기를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천천히 진정되어 갔다.
“……정말이야. 약속할게.”
그의 토닥이는 손길과 나직하게 속삭이는 말은 마치 잘 듣는 진정제처럼 급하게 몰아쉬던 내 숨과 떨리던 몸을 돌려놓았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되던 ‘싫다’는 단어도, 점차 정리될 무렵이었다. 내가 겨우 정상으로 돌아가자, 그때까지 나를 계속 안고 있던 몸이 휘청거렸다.
“……윽.”
그 소리를 시작으로 그의 몸이 뒤에 있던 소파로 확, 무너졌다.
그의 커다란 덩치에 비하면 작은 소파이지만, 푹신한 쿠션이 좌석 여기 저기 놓여 있는 덕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그의 몸을 안전히 받아주었다. 나는 갑자기 쓰러지는 그의 품 안에 안겨 있는 탓에, 그의 몸 위로 덮치듯이 기대어 있었다.
“으윽…….”
“아…… 아…….”
아까 전에 느낀 공포로 그와 맞닿아 있는 피부와, 그의 몸에 지지하고 있는 손이 여전히 덜덜 떨렸다. 하지만 무척 고통스러운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마는 그의 표정과 신음에 덜컥 겁이 났다. 아까,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죽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잠을 자는 것도 그렇고, 지금은 더더욱 어딘가 아파 보이는 그의 파리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속의 불안은 더욱 달아올랐다.
결국 나는 내가 가진 공포를 끌어안고, 덜덜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뻗어서 그의 어깨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왜……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괜…… 윽. 우욱…….”
그는 내게 괜찮다고 애써 웃어 보이다가, 이내 고통이 극심한지 가슴팍을 손으로 쥐고 더운 숨을 뱉었다. 이건 누가 봐도 괜찮아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헛구역질을 참는 듯 한참 욱욱대며 헛숨을 뱉다가 결국 목 너머로 무언가가 넘어오는지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의 다리 사이에 엉거주춤 앉아 있던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서 핸드폰을 찾았다.
“병, 병원 가요. 아프면 말을 해야죠!”
떨리는 손으로 소파 앞에 있는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을 겨우 겨우 들어 올리자,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 자락이 뒤에서 죽, 끌렸다. 내가 118을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옷자락이 당겨지는 감촉에 뒤를 돌아보았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얼굴의 그가 붉은 핏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입술을 달싹였다.
“괜, 찮아……. 윽.”
“……혹시 무슨 병 있는 거예요? 피, 피, 나요!”
그는 계속 괜찮다는, 되도 않는 말을 하면서 입 주변을 막고 있던 손바닥을 검붉은 핏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끌려진 내 하얀 티셔츠는 그의 손이 닿은 자리에 진한 붉은 방울이 똑똑 떨어지면서 점점이 번져 갔다.
꿈에서, 그가 내리는 비에 맞았던 것처럼, 붉게.
그러다가 다시 피가 섞인 기침을 쿨럭 대자 주변 소파에 핏방울이 훅, 흩뿌려지는 모습에 나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어, 어떡해.’
나는 다시 몸을 숙인 그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굽히고 안 그래도 더 하얗게 질린 그의 낯을 들여다보았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내 말 들려요? 지금 앰뷸런스 부를 테니까, 어디가 아픈지 말해 봐요. 네?”
“……안 아파.”
“제발요, 이러다가 진짜 죽겠어요…….”
그는 꿋꿋이 멀쩡하다는 기색을 내비치려 했다. 하지만 입에서부터 시작해서, 코 그리고 이제는 두 귀와 두 눈에서 줄줄 흐르기 시작한 핏물의 향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를 쏟는 모습을 보고도 어떻게 괜찮다고 치부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괜찮다고 말을 하는 이 남자가 답답했다.
“지금 여기서 죽고 싶은 거예요? 내 앞에서 이러려고 온 거예요? 나는, 그런 거 싫어요. 얼른, 말하라니까요. 어디가…….”
“……내가 안 죽었으면 좋겠어?”
“당연히!”
그러자 그는 애써 기침을 눌러 참고는, 고통의 눈물로 젖은 파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 눈의 빛깔과는 전혀 다른 쪽에 있는 붉은, 피 섞인 눈물이 농도 짙게 뺨에 주르륵, 주르륵 흘렀다. 그 아프고, 고통스러운 모습에 당연하지 않겠냐고 대답하던 입이 다물렸다.
“…….”
“……대답 해 줘, 가하.”
‘울고 싶은 건 나인데, 왜 당신이 울고 있는 걸까.’
아까, 잘못했다고 계속 반복하던 말과…… 관련이 있는 걸까. 나는 그가 건네준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보려 해도 완성되지 않는 퍼즐 그림에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기억이 없는 것이 참, 답답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다 알아서, 시원하게 대답해 줄 수 있다면 좋을 것을.
여전히 신음하는 그는 가슴팍을 고통스럽게 부여잡던 손을 천천히 올려서 내게 뻗었다. 나는 내게 다가오는 손이 아까의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떠올라서 무서웠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제발 죽지 마요. 네?”
“……너무 착해. 우리 가하는…….”
살며시 올라가는 그의 입 꼬리를 타고 미처 흐르지 못한 핏물이 비죽 흘렀다.
“그래서 좋지만.”
이 상황에도, 웃음이 나오다니. 아니면, 내가 혹시라도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할 줄 알았던 걸까. 아무리 내 앞에 있는 그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나를 아는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만큼 속이 없지는 않았다.
“나 안 착해요. 궁금해서 그래요. 나한테 무슨 잘못했는지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이렇게 죽으면…….”
“……착해, 가하는.”
그의 손이 다시 내 뺨을 쓰다듬으면서 잔잔하게 웃었다.
“내가 너무 나빴을 뿐이야.”
핏물인지, 뜨뜻하고도 비릿한 내음이 그 손에서 훅 풍겼다. 그는 내 뺨을 만지던 손등으로 핏물이 번진 입가를 쓱 닦으며 담담하니 대답했다.
“그렇게 안 봐도 돼. 그냥, 오랜만에 가이딩 해서…… 그래.”
“……그럼 나 때문에 그런 거……예요? 왜 했어요?”
‘오랜만에, 한 거라고? 설마 아까 전에 내 다리에 해 준 가이딩 때문에?’
방금 전에 내가 내뱉던 이상한 혼란을 가라앉혀 준 그의 힘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면, 하지를 말지. 왜, 무엇하러.’
참 미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그는 그저 내게 두 손을 뻗었다.
“하고 싶으니까.”
“……내 말에 대답해요.”
그가 대답해 주기 전까지는, 그에게 다가가지 않을 생각으로 몸을 한 발 물렸다. 하지만 그가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핏물을 토하는 모습에 다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윽.”
“이봐요! 나 때문에, 그런 거면. 내가 다시 돌려줄게요. 가이딩 도로 가져가도 돼요.”
이러다가 진짜 죽겠다 싶어서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애원했다. 내게 준 힘을 가져가라고. 내 다리 조금 낫겠다고 눈앞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자 그의 고개가 천천히 들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네가 아프잖아. 그건 싫어.”
“……정작 당신이 죽을 판이잖아요. 당신 같은 사람 책임지는 거 딱 질색이에요. 얼른 가져가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나 말하는…… 됐다.”
이해가 되지 않는 그의 행동과 함께 내 심장이 점점 크게 두근댈 무렵에 가까이 있는 나를 그가 확 안았다. 그의 품 안에 안기는 순간 더욱 진하게 풍기는 피비린내에 눈을 질끈 감았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무리 봐도 죽고도 남을 출혈 같았다. 나는 소파 자리에 내려 둔 핸드폰을 향해서 손을 뻗으며 그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가져가요. 얼른요.”
“응.”
그는 가만히 나를 부둥켜안고 있더니만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낮게 웃었다. 내 뒤통수에 그의 젖은 손이 올라오며 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하면…… 읍.”
그리고 파란 눈과 마주치며 내 입이 같이 맞물렸다. 내 눈에 비친 그의 파란 눈은 계속 터지는 핏물에 잠겨서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아니, 힘을 도로 가져간다면서 왜…….’
이 급박한 상황에 벌어진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당황스러워서 입을 뒤로 물리려고 하는데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는 손길이 나를 어디 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 사이에 살짝 떨어진 입술을 그가 살살 물면서 다시 입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맞닿은 혀 안쪽이 얽혀들면서 쪽쪽 하는 소리와 함께 피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그는 서로의 체액이 묻어가는 바람에 미끌미끌하기 짝이 없는 내 혀를 연신 옭아매고 마치 갈증이 난 사람처럼 정신없이 빨아 당겼다. 나는 처음 마주한 진득한 키스의 향연에 어쩔 줄을 모르고 끌려가며 그의 품에서 피 맛 나는 키스에 빠져 있었다.
곧게 뻗은 그의 콧등이 내 콧등에 스치면서 이따금씩 마주치는 파란 눈이 부담스러워 눈을 감으면, 입 사이로 침이 얽혀들은 찐득찐득한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헉, 헉……. 지금 무슨…….”
한참을 그렇게 부둥켜안고 키스를 퍼붓던 상황에 내가 먼저 지쳤다. 그의 어깨에 쓰러지다시피 해서 그 길고 긴 키스를 끝내자 그는 만족스럽다는 웃음을 걸었다. 그러다가도 고개를 숙여서, 마치 더 하지 못해서 아쉬운 사람처럼 이미 닫힌 내 입술을 다시금 물었다.
“……고마워. 잘 돌려받았어.”
“……그, 그만해요.”
내가 그 나직한 대답에 정신을 차리고 가까이 닿아 있던, 그의 어깨를 툭 밀었다. 그러자 그는 순순히 떠밀려 나가며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나른하게 웃었다. 내가 생각하는 게 맞으면 난 이게 첫, 키스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날릴 줄이야.’
나는 억울함이 스멀스멀 떠오르는 것을 애써 누르며 그의 상태를 살폈다.
“……이제 괜찮은…… 거죠? 피, 멈춘 거 같은데.”
“……응. 가하가 키스 해 줬잖아.”
그가 지어내는 웃음에 이유는 모르지만 좀 얄미워 보였다. 그의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가만 보니, 아까 얼굴에서 피를 쏟던 것이 거짓말처럼 뚝 멎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와 내가 앉아 있는 소파 주변은 아까의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듯이 온통 핏물이 튀겨 스며들어 있었다. 방금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도 무리가 없어 보일 정도였다. 나는 유난히 번들번들하게 빛나는 그의 입술 끝에 말라붙은 피딱지를 보면서 그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호러 영화에 나올 법한 광경에도 잘생겼다는 게 미묘하게 짜증이 났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그…… 내가…… 키스하면 그쪽이 괜찮은 거예요?”
“가하는 내 에스퍼니까. 있지…… 한 번 더 해도…… 돼?”
그는 발갛게 물들은 얼굴로 내게 물어보았지만, 나는 그의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설명에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내 입을 손으로 막고 고개를 저었다. 죽을 뻔 했던 상황에서 한다는 게 키스고, 또 다시 키스를 조르는 모습을 보자니 이제는 그가 뻔뻔한 것인지 아니면 정신이 나가 버린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거짓말 하지 마요.”
“……거짓말 아냐. 에스퍼뿐만 아니라 가이드도 각인한 상대랑 주기적으로 가이딩 안 하면 아프게 되어 있어.”
“정, 말요?”
‘내 키스에 무슨 괴물 같은 회복력이 있는 건가…….’
그나저나 내가 에스퍼인 것이랑, 그와 키스를 해야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는 여유롭게 웃을 정도로 돌아온 그의 혈색을 보면서 여전히 손으로 입을 막은 채로 불퉁하게 대답했다.
“좀 설명을 해 줘요. 나는 대호랑, 그 에스퍼 친구랑 이제껏 같이 살았지만 다른 사람한테 이러는 거 못 봤어요.”
“황대호도 분명, 가이드를 만나고 오는 날이 있었을 거야. 그런 날, 없었어? 꽤 질펀하게 놀아야 풀어졌을 건데…….”
“그게 무슨……. 아.”
‘그럼 전에 가끔 나갔다 온 날들이…….’
“그 놈도 등급이 높은 편이라 그렇지 않고서야 몸이 배겨나지 못해. 나 설명 다 했으니까 이제 다시 키스해도 돼?”
그 말에 대호가 이따금씩 외박을 하던 게 대충 이해가 갔다. 감기약 같다는 게. 그런 말이었구나.
‘하지만 나는 아픈 적이 없었는데.’
나는 의아해져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키스를 조르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안 돼요.”
“너무해…….”
그는 불만이라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도, 키스는 좀…….’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내가 왜 아무런 영향이 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픈 적 없었는데. 등급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에스퍼에게도 등급 같은 게 있어요?”
“가하는……. 등급이 낮아서 그래. 등급이 낮을수록……. 초능력이 몸에 주는 영향이 별로 없으니까.”
‘그럼, 나는 등급이 낮다는 거지?’
“그래서 저는 등급이 낮은 거라……. 아프지 않은 거고. 그쪽은 나랑 가이딩 안 해서 지금…… 아픈 거예요? 그럼 그쪽은, 등급이 높아요?”
“……응. 황대호 보다 높아.”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잊혀진 기억 너머에 묻어두고 지금에서야 깨달은 정보의 양은 한 번에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의 무릎에서 일어나다가, 힘이 풀려서 다시 그의 가슴팍 앞으로 쓰러지고, 그는 나를 받아주면서 다시 토닥여 주었다.
‘대호보다…… 등급이 높다고?’
그럼 도대체 얼마나 높은 거지. 나는 짐작도 가지 않는 그의 등급을 막연하게 알게 된 채로 몸을 일으키며 되물었다.
“……그럼 또…… 다시 그렇게 아프게 되는 거예요? 막, 이렇게 피…… 흘리고?”
“…….”
“내가 그쪽 옆에 없으면……. 그런 거예요?”
“……가끔.”
그는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머뭇대다가 결국 짧게 대답했다. 그는 가끔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 말에 나는 알았다.
그가 나 때문에 또 이렇게 될 거라고. 계속 그랬을 거라고.
나는 아까 전의 광경을 떠올리며 눈을 꼭 감았다.
나는 어떻게, 이런 사람을 두고 떠날 수 있었을까.
‘도대체, 내게 어떠한 짓을 했길래.’
“……내게 되게 못된 짓 했나 보네. 이렇게 아픈 사람을 두고 가 버리고…….”
“……가하 잘못 아니야. 그 놈이…….”
조잘조잘 얄밉게 말을 늘어놓던 그는 어디가고, 그는 어딘가 슬픈 눈빛을 내었다. 아까 키스를 졸라대던 짓궂은 표정 따위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아주 가끔이야. 맨날 이러는 건 아니야.”
“그러고도 살아 있는 게 용하네요. 그러는 동안 빨리 나 안 찾아오고 뭐했어요.”
그의 파란 눈이 언뜻, 다정함으로 반짝였다. 그래도 말라붙은 핏자국이 그 예쁜 얼굴에 범벅인지라 스치는 다정을 느낄 새도 없었다. 내 말 한 마디에 일희일비 하는 광경을 보자니 내 마음은 오히려 걱정이 더욱 깊숙하게 치달았다.
2년 동안, 이런 식으로 살았을 그를 생각하니 그냥…… 마음이 좀 아렸다.
무슨 생각으로 내게 오지 못하고 그 고통을 다 감당한 것인지. 목숨이 달리면 무엇이든지 내놓는 게 한낱 사람인데. 그는 그러지 못한 이유가 뭘까.
무엇이 걸려서 내 반응 하나 하나에 전전긍긍하면서도, 내가 아프다고 하니 제 목숨 줄이 끊길 정도로 감내하는 이유가 뭘까.
“……가하.”
“이상하게 들리는 건 알아요……. 솔직히 당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나한테 사과를 해도, 왜 그런지도 모르겠고……. 같이 살던 대호에게도 아무 말도 못 들어서 내가 에스퍼라는 말도 다 거짓말 같아요. 아까…….”
나는 입안에 고인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그의 손길이 스쳤던 내 발목 부근을 만지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피가 언뜻 묻은 잠옷바지의 밑단을 걷어내니 그, 선명한 붉은 자욱이 보였다.
“여기를 만지니까 이상하게, 무섭기도 했고.”
“……미안해. 무섭게…… 하려던 거 아니야. 그건…….”
그는 내 발목을 보다가, 이내 나를 보고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이 뻗쳐오는 것을 두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무섭긴 했다. 갑자기 내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 튀어나오며, 그저 그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당신이 아프면 안 될 거 같아요.”
“……가하.”
“모르는 사람인데도 이러면……. 알았을 땐 더…… 그랬겠죠?”
갑자기 피를 토하고, 흘려대는 그를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일었다. 그가, 나를 낫게 해 주고 반대로 죽을 것처럼 아픈 것을 보고 있자니, 비가 오지 않아 멀쩡한 내 심장이 아프게 뛰고, 죄여올 정도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나의 가이드라고 하니. 더더욱.
“…….”
“각인……이면 우리 서로 이어져 있었던 거잖아요. 그럼, 다시 이어지면…… 안, 아픈 거예요?”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 손을 바라보니 유난히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평생, 아파도 좋으니까…….”
“…….”
“내 곁에 있어 줘.”
대리석 조각처럼 섬세하기 짝이 없는 손마디 끝에, 손끝에 오톨도톨하게 튀어나온 흉 자국들.
“다시 너의 가이드가 될 기회를…… 줘.”
새살처럼 돋아난 그 흉터의 자국은 내가 알지 못하는 기억과 함께 부자연스러운 부분이었다.
우선, 나는 핏자국이 진창인 그를 욕실로 밀어 넣었고, 소파에 잔뜩 핏자국이 난 것을 젖은 수건으로 연신 훔치며 핏기를 빼려고 노력했다. 바닥은 카펫 부분만 아니면, 매끈한 타일이 깔려 있는지라 청소하기가 수월했다. 대충 정리를 마치자 순간 겪은 일들로 지쳐 버린 나는 그나마 깨끗한 다른 소파에 편한 자세로 앉아서 천장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조용한 집안 구석에서 그가 씻는지, 샤워 물줄기 소리만 조그맣게 들려왔다.
‘뭐라도 같이 해 먹을까.’
피를 그렇게 많이 흘렸으니 밥이라도 잘 먹여야 하는 거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시간을 확인하려고 탁자에 놓인 핸드폰을 집었다. 그때 핸드폰 화면에 대호의 이름이 떠오르며 그새 도착한 메세지가 잔뜩 나타났다.
[한국 도착했어]
[일 끝났어?]
[보고 싶다.]
“……벌써 도착했구나.”
[빨리 도착했네? 가족들에게 안부 전해 줘.]
[응 끝났어.]
[나도.]
나는 답장을 써 내려가며 살짝 웃었다. 같은 사내자식이 뭐 이리 간지러운지. 그러고 보니 이렇게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인가? 매번 같이 지내고, 같이 밥 먹고, 같이 다녔으니…….’
나는 그간의 생활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내가 에스퍼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고, 또 내게 가이드가 있었다는 건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나는 대호에게 물어보려고 메세지를 화면에 쳤다.
[대호야, 나 에스…….]
“……에이.”
그러다가 바로 지웠다. 대호는 아버지 장례식으로 경황도 없을 텐데 괜히 신경 쓰이게 하지 말자. 나중에 대호 돌아오면 직접 물어보지 뭐. 그새 대호는 내가 보낸 메세지를 확인했는지 다시 메세지가 왔다.
[사랑해]
“아……. 또 이런다.”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황대호, 이런 거 하지 말랬지.’
하도 말해서 이젠 별 느낌도 없는 재미없는 농담에 나는 늘 대꾸하는 답을 보냈다.
[오랑해. 참, 우리 집에 손님 왔다.]
대호는 바쁜지 답이 없었다. 그 사이에 주현이는 샤워를 마쳤는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핸드폰을 다시 거실 탁자에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갔다.
“아, 샤워 끝났어요?”
“응…….”
“옷은 잘 맞아요? 내건 안 맞을 거 같아서 우선 친구 거 줬는데…….”
“괜찮아.”
그의 엷은 갈색 머리는 시원한 샴푸 향과 남아 있는 물기에 절어 있어서 그런가 조금 더 진한 색깔로 젖어 있었다. 그리고 더운 물로 샤워를 한 덕분인지 창백했던 그 예쁜 낯에 홍조가 은근히 돌았다. 카페에서, 그리고 아까 피를 흘리던 때보다는 확연히 건강해 보였다. 대호의 티셔츠와 츄리닝 바지를 꿰어 입고 있으니 평범한 우리 나잇대 같은 모습이 좀 귀여웠다. 다 큰 어른이 뭐 그런가 싶지만. 아무튼 그랬다.
“배고파요? 밥 먹을래요?”
“……응.”
그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자 차분하게 머리가 내려와서, 양복차림에 깔끔하게 넘긴 머리를 했던 성숙한 스타일과 다르게 제법 앳되어 보였다. 나는 미리 취사 버튼을 눌러 둔 밥솥 앞으로 가서 밥을 떠내고 그에게 손짓했다.
“저기, 냄비에 끓고 있는 국 좀 떠 줄래요? 반찬은 내가 꺼내 줄게요.”
“응.”
고슬고슬하게 잘 된 밥을 가지고, 냉장고에서 전번에 만들어 둔 반찬거리를 꺼내서 식탁위에 올려 두었다. 덩치 큰 그가 국을 식탁에 내려 두고 내게 얼른 다가와서 센스 있게 반찬통을 이것저것 들어 주었다.
“고마워요. 아, 혹시 못 먹는 거…… 있어요?”
“없어.”
“다행이다. 내가 좀…… 할아버지 입맛이라 같이 사는 친구가 가끔 투덜대거든요. 먹어요.”
대호의 장난스러운 투정을 떠올리며 내가 식탁에 앉아서 국을 떠 먹자 그는 맞은편에 앉아서 덤덤하게 말했다.
“……난 다 잘 먹어.”
“그래요? 되게 귀하게 자란 것 같이 생겼는데…….”
진짜로, 그의 얼굴 하나는 어디 도련님이나…….
“의외네요.”
‘귀하게 자란 태가 풍긴다고 하나.’
나는 그가 언뜻, 언뜻 비추던 예민하고도 까다로운 표정들을 떠올리며 젓가락을 놀렸다. 그도 밥을 같이 먹기 시작하면서 피식 웃었다.
“그런가.”
저렇게, 스스럼없이 반말 쓰는 것도 그렇고.
‘보통은…… 존대하지 않나. 아 외국인이라 좀, 다른가?’
나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궁금증을 숨기지 못했다.
“근데, 나이가 어떻게 돼요?”
“가하랑 같아.”
“어? 서른 둘? 진짜……로?”
“응.”
양복이 워낙에 잘 어울리다 보니, 나보다 나이가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은 충격이었다. 말도 안 된다고 속으로 곱씹다가 나는 씹던 밥을 삼키고 제안했다.
“아, 그럼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동갑이니까.”
“응.”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떠먹는 그의 숟가락질과, 반찬을 집어대는 젓가락질은 제법 능숙하고도 정갈했다.
‘얼굴은 천상 외국인 같이 생겼는데 뭔가…….’
내가 그를 빤히 쳐다보자, 그도 시선을 느꼈는지 반찬을 바라보던 파란 눈을 올려서 나를 쳐다보았다. 촘촘한 엷은 색의 속눈썹이 팔랑이며 호선을 그렸다.
“왜?”
“아, 아니……. 젓가락질 잘한다 싶어서. 참, 나는…… 어떻게 아는 사이야? 그, 알겠지만 내가 기억이 없어서…….”
“아…….”
그는 그 자신과 내 젓가락질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왜 웃지, 싶어서 나는 순간 그가 바라본 내 젓가락질을 보다가 깨달았다. 음?
“가하 아직도 x자네. 젓가락질.”
“……나 예전에도 그랬어?”
“응.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랬어.”
아, 부끄럽다. 예전에도 x자로 먹었다니. 기억은 잃어도 몸의 습관 따위는 바뀌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고쳐 볼 심산으로, 그의 젓가락질과 내가 쥔 젓가락을 번갈아 보면서 내 왼손으로 오른손의 손가락 위치를 움직였다.
‘아씨, 이거 어렵네…….’
그런 내게 그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어떻게 가하를 알게 되었냐 하면…….”
“……응?”
“가하가, 어느 날 내게 왔어.”
나는 젓가락질을 고치다가 그만 헛손질을 하며 한쪽 젓가락을 식탁에 툭 떨어뜨렸다. 순간 민망해져서 떨어뜨린 젓가락을 식탁에서 주우며 그의 말에 다시 정신이 팔렸다.
‘내가 갔다고?’
그런 내게 그가 샐샐 웃으면서 설명했다.
그와, 나의 첫 만남을.
“까만 눈을 반짝이면서 내 품에 날아왔어.”
“……내가 날아왔어? 내 초능력이 그런 거야?”
보통의 사람이라면 날아다닐 수가 없을 테니, 나는 대충 짐작을 해서 때려 맞혔다. 기억 없이 2년간 살다 보면 대충 대화를 이어 가는 감각을 터득하게 되는 법이었다. 내 말에 주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새 잘 마른, 결 좋은 갈색 빛의 머리끝이 말려들면서 살랑 흔들렸다.
“잘 아네.”
“그래? 난 전혀 몰랐어. 친구가, 이야기해 준 적도 없고……. 뭔가 신기하다. 날아다닐 수 있다니. 상상도 못 해 봤어.”
“……그래? 나쁜 친구네. 아무것도 안 알려 주고.”
“에이. 대호 그런 애 아니야. 아마…… 내 능력에 대해서 잘 모른 거 아닐까?”
“글쎄.”
방긋 방긋 웃던 그는 말없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나는 다시 궁금해졌다. 저렇게 잘생기고, 멋진 애가 왜 나 같은 애랑…… 엮여서 아파하는지. 이렇게 찾아와서 힘들어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아까 그러지 않았는가.
등급이 높은 대호와 달리 난 등급이 낮아서 별 영향도 없다고.
“근데, 있잖아 주현이 너는 왜 나랑 각인했어? 난 등급도 별로 안 좋다며.”
내 말에 그는 밥을 삼키고선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핏물로 인한 붉은 기가 싹 가신 파란 눈이 청명했다.
“좋으니까.”
“……응?”
그는 뭐 당연한 것을 물어보냐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며 담백하게 대답했다.
“가하가, 너무 예쁘고, 좋아서. 내 옆에만 있으면 좋겠어.”
“……어……. 내가? 진짜로?”
어디 다른 사람, 잘못, 본 건 아닌가. 싶었다. 예쁜 사람이 나보고 예쁘다고 하니, 뭔가 거짓말 같았다. 나는 시력 2.0이라서, 나름 정확하고 객관적인 눈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각인의 이유에 대해서 말했다.
“다른 사람과 말도 하지 말고, 눈에 띄지도 말고. 나만 보고, 나에게만 웃어 주고, 울어 주고, 사랑해 줬으면 좋겠어.”
“……컥.”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도 저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딘가 과해 보이는 요구를 태연스럽게 술술 말하는 것을 듣던 나는 국을 먹다가 사래가 들렸다. 그 말을 들으니, 왠지 내가 왜 떠났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저렇게 말했다가 내가 싫다고, 간다고 그런 거 아닐까?
‘예전에 내가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그랬다는 게, 설마 저래서…… 에이 설마.’
사래가 들려서 켁켁 기침을 하는 나에게 그가 걱정하는 얼굴로 황급히 일어나면서 손을 뻗었다.
“괜찮아, 가하? 물 마실래?”
“아니, 괜찮 케헥. 흠흠.”
나는 목을 간신히 정리하면서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만 같았다.
물론, 대호에게서도.
“있잖아.”
“응.”
“……그럼, 내가 왜 떠난 줄 알아?”
“…….”
“예전에, 내가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정말 아무런 기억이 없을 때……. 같이 사는 친구가 그랬어.”
그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그랬다고. 그래서……. 그렇게 왔다고.”
“……그 새끼가……. 그랬어?”
그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내게 말했다. 설마, 저게 대호를 지칭하는 건가 싶을 때, 그가 작게 하아,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렇지만 잇새로 욕설을 뱉는 것을 못 들을 수가 없었다.
‘씨발 새끼라니…….’
“……둘이 혹시 아는 사이야?”
“……몰라.”
‘거짓말 못하네, 얘.’
새침하게 발뺌을 빼는 모습에 나는, 주현이가 거짓말을 한다고 명백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솔직하게 느껴지는 분위기를 말했다.
“근데…… 아까부터 대호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처럼 말을 하는데. 정말 몰라?”
“……가하 그동안 뭐하고 살았는지 알려 주면 안 돼?”
화제를 돌리는 것은 뻔히 알겠는데, 꿋꿋이 둘이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기가 좀 그랬다. 금방이라도 살벌해지는 상황에, 더 이상 대호에 대해서 말을 하면 안 된다는 본능적인 느낌이 내 혀를 굳게 만들었다.
‘도대체 둘이, 무슨 사이였길래.’
나는 눈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대충 말해 주었다.
“그냥……. 대호랑, 동생이랑 같이 여행하고…… 그랬어. 그러다가 카페에서 일하게 되고…….”
“……좋았어?”
“…….”
그렇게 살벌하게 눈을 뜨고 좋았냐고 물어보면, 아무리 좋았다고 해도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어쩌지, 궁리하다가 결국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다음에는, 주현이 너도 같이 갈까? 여행.”
“…….”
그리고 내 대답을 듣던 주현이의 살벌하던 얼굴이 순간 미동 없이 굳더니, 이내 입 꼬리를 스르륵 풀어 내렸다. 뭔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싶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얼굴 같다고 하나. 어딘가 상반된 감정이 섞여드는 표정에 왜 저러나 싶을 때에, 그가 이내 웃었다.
“응. 나랑 같이 가자.”
“……으응.”
기분이 괜찮아진 것 같아서, 불안이 좀 덜어진 나는 다시 밥을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주현이는 신신당부 했다.
“나랑만 가는 거야. 가하 동생이랑, 황대호…… 말고. 우리 둘만. 알았지?”
“그건……. 생각 좀 해 보고.”
“왜? 가하가 같이 가자고 그랬잖아.”
내가 말해 놓고도 찔려서 다시 이걸 어쩌지, 이러고 있는데 거실에서 지지직대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 진동이 울릴 때 나는 소리였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거실로 향했다.
“어디 가?”
“전화 와서. 먹고 있어.”
‘누구지, 카페 매니저인가?’
대충 추측하면서 거실 테이블에 있는 핸드폰을 보자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호]
전화를 받기 위해 화면의 통화를 누르려는 순간, 화면이 까맣게 나갔다.
“아.”
내 엄지가 뒤늦게 반응 없는 까만 화면을 툭툭 건드렸다. 아까 낮 시간 즈음,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 내내 제법 오랫동안 전화를 한 탓에 배터리가 다 된 모양이었다.
내가 충전기가 있는 침실로 가려고 몸을 돌리자 등에 묵직하게 매달린 사람이 있었다.
“누구 전화야?”
주현이는 두 팔을 내 어깨 주위로 감싸고 내 머리 위에 제 턱을 꽂고서 콕콕, 찔러대며 우물대었다.
‘윽, 무거워.’
“아, 같이 사는 친구. 밥은 다 먹었어?”
“……으음 아니.”
“많이 먹어. 피…… 많이 흘렸잖아. 잘 먹어야지.”
“충분히 먹어서 이제 졸려.”
내 어깨에 둘러진 주현이의 팔을 풀고 뒤돌아서 보자, 대호 옷장에 있던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 주현이는 눈가를 살짝 찡그리고 한쪽 손으로 눈을 비볐다.
주현이는 아까 전, 카페에서 봤을 때만 해도 또래라고는 믿기지 않는 분위기를 풍기던 것부터 해서, 방금 식탁에 앉아서 살벌하게 분위기를 잡는 것까지 제법 거리감이 좀 느껴졌다. 말 하나 하나 하는 것도, 가만히 곱씹어 보면…….
‘내가 아는 범주에서 좀 비틀려 있다고 하나.’
그런데 또 이렇게 보면 달랐다.
“졸려? 어…… 그럼 잘래?”
“응.”
“그래, 그럼 방 가서 자. 아까 그렇게 피 흘려서 피곤하겠다.”
눈앞에서 피를 철철 흘린 이후로 주현이 하는 짓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좀 애 같은 구석이 느껴진다고 하나.
‘그것도 손이 많이 가는, 그런 말썽 많은 애.’
나는 꺼진 핸드폰을 손에 쥐고, 주현이의 팔을 잡고 끌었다. 밥 실컷 먹고 졸리다니. 아기들이 밥을 먹고 배가 불러서 낮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나는 예상치 못한 귀여운 모습에 픽픽 웃으면서 주현이를 안내했다.
“조금……. 그럼 가하는?”
주현이는 제법 졸린지 내가 끌어당기는 방향에 맨발을 질질 끌면서 쫓아오다가 문득 멈춰 섰다. 그러면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 했다.
‘진짜, 애 같네.’
내가 일찍이 결혼을 해서 지금 유치원 들어간 애가 있다면, 아니 하다 못해 보모가 된다면 어떤 기분인지 좀 알 것 같았다. 애들이 엄마나 선생님이 어디로 가는지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처럼 물어보는 지금의 주현이가 참, 어려 보였다. 아까 밥 먹을 때 보여 주었던 살벌함은 어디에 버리고 왔을까. 나는 천장에 제법 가까운 키와 산만한 덩치를 가진 주제에 졸음에 차서 한층 귀여워진 주현이의 귀 밑 머리를 넘겨주었다.
“나? 나는…… 설거지 좀 하고 자려고. 머리 빗 욕실에 있는데, 쓸래? 머리 부스스하다.”
“……아니……. 그럼 나도 같이 옆에 있을래.”
“졸립다며. 먼저 가서 자.”
내 대답에 주현이는 얼른 몸을 돌려서 방으로 가던 나를 다시 부엌 식탁 쪽으로 이끌었다. 즉각적인 반응에 나는 다시 그의 팔을 도로 당겼다. 내 말에 주현이가 다시 내게 몸을 돌리고 짐짓, 불안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가하랑 같이 있고 싶어. 무서워.”
“무……서워?”
‘아, 옆에 있어야지 괜찮다고 그랬지.’
“아까처럼, 피 날까 그래?”
‘내, 가이드니까.’
나는 무섭다는 주현이의 말에 거짓말 같던 그 광경을 떠올리며 이해했다. 그런 양의 피를 흘리는 상황이 다시 온다면, 나라도 분명 무서울 것 같다. 아까와 같은 고통의 시간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불안해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나지만 그의 사고를 보면서 더불어 고통, 공포 그리고 작은 연민을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자 주현이는 빤히 나를 보다말고 고개를 어렵게 끄덕였다.
“……응.”
“음…… 그러면, 잠시만 기다려. 빨리 끝내 놓고 옆에 있을게.”
“응.”
나는 주현이와 함께 다시 부엌의 식탁으로 돌아왔다. 주현이는 식탁에 놓인 그릇들을 나와 같이 들어서 싱크대 쪽으로 같이 옮겨 주고, 간단하게 남은 음식물 정리를 마친 내 옆에 섰다. 그에 나는 그를 올려다보면서 만류했다.
“가서 앉아 있어. 아까 그래서 힘들 텐데.”
“으응. 같이 하면 더 빨리 끝나잖아. 자.”
그는 그러면서 싱크대에 둔 스펀지를 들어서 세재를 비비고, 물을 묻힌 그릇에 쓱쓱 거품을 묻혀 두기 시작했다. 나는 그 거품 묻은 그릇을 건네받아서 개수대 물에 헹구어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렇긴, 하겠지.”
“빨리 하고 자자. 나 졸려.”
묘하게 논리적이라서, 뭐라 반박하기가 그랬다. 아픈 애가 식탁에 앉아서 기다린다고 해도 나는 별 생각이 없었을 것이지만…….
‘그래도 도와준다면 참 고맙지.’
나는 잘 헹군 식기들을 차곡차곡 건조대에 쌓으면서 정리한 다음, 젖은 손으로 주현이의 등을 살살 두드려 주었다. 지금 좀 유난히 애처럼 행동해서 그런가, 칭찬도 애들 다루듯이 저절로 나왔다.
“……그래. 착하다.”
“맛있었어. 밥.”
주현이는 한 손에는 스펀지를 들고 거의 다 끝나가는 설거지거리에 거품을 묻히며 환하게 웃었다. 좋은 말은 백번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다고들 하던가. 밥이 맛있었다는 칭찬에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웃음이 나왔다. 대호도 투정은 부리지만 결국 맛있다고 해 줄 때 기분이 좋았는데. 조금은 낯선 사람이 먹고도 좋다고 해 주니 뭔가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니까 더 민망하네. 그냥 남아 있는 것만 대충 차려서 먹은 건데…….”
“난 그냥…… 가하랑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좋았어.”
“아…….그, 런가. 그렇겠구나…….”
그 말을 들으니, 나는 마냥 기분이 좋다고 웃을 수는 없었다. 주현이에게서 마지막 그릇을 받고, 개수대에 잘 꽂아 두고는 싱크대 밑 서랍에 걸어 둔 행주로 손을 닦았다.
‘2년 동안, 주현이는 나와 밥을 먹지 못한 셈이니. 반갑고, 좋았……겠지.’
기억이 없는 나에게는 단순히 매일 먹던 밥을 먹는 것일 뿐인데.
저 애에게는, 의미가 좀, 아니 조금 많이 달랐을 것이다.
나는 축축함이 가신 손으로 뻣뻣한 뒷목을 쓸어내리면서, 거품 묻은 손과 스펀지를 싱크대 물로 쥐어짜는 주현이에게 어색하게 타월를 건넸다.
“고마워, 가하.”
“아니 뭘……. 설거지 도와줘서 내가 고맙지.”
“이제, 자러 가? 하암…….”
주현이는 촘촘한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나와 마찬가지로 타월로 손에 어린 물기를 훔쳐내면서 물었다. 졸음을 참을 수 없는지, 하품을 하는 입을 이윽고 손바닥으로 가리는 게 입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행주를 다시 받아서 싱크대 선반에 편편하게 걸어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세수하고…… 자자. 이리 와, 칫솔 줄게.”
“응.”
주현이는 와서 졸음으로 잔뜩 풀어진 눈을 샐샐 치뜨고 내 옆으로 찰싹 붙었다. 아까부터 가만 보니 애 같다, 애 같다 싶더니만 왜 그런지 이제는 좀 알 것 같았다.
그래, 지금 내가 알게 된 주현이는 어딘가 솔직하다. 드러내는 감정이나 의도 같은 게 저 애의 푸르고 맑은 눈과 같이 쉽사리 읽힌다고 하나. 나와 같은 나이와 한참 커다란 덩치에 비하면 참, 순수하기가 그지없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이런 거 보면, 곱게 자란 거 맞는 거…… 같지?’
이런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그런 애. 나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애를 가이드로 두었을까.
‘그리고…… 왜 두고 왔을까, 그것도 2년 동안이나.’
나는 화장실 쪽으로 가서, 세면대 위에 있는 벽거울을 양쪽으로 열고 새 칫솔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자.”
“고마워.”
웃으면서 칫솔을 받아드는 모습에, 그제야 머릿속에 걸리던 것이 생각났다. 아 맞다.
“아니 뭐……. 근데, 주현이 너.”
“응?”
“여기 올 때 숙소 같은 거 예약 안 했어?”
“어…….”
내 질문에 주현이는 짐짓 난처한 듯, 눈에 유난히 걸리는 그 파란 눈알을 데룩데룩 굴렸다.
‘왜 그러지? 혹시 예약했다고 그러면 여기서 쫓아낼까 그런가?’
나는 오늘은 이만 늦었으니 자고 가고, 내일은 숙소까지 내가 운전해서 바래다주겠다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 내게 주현이는 치약을 짠 칫솔을 입에 넣지도 못하고 어색한 눈치로 대답을 꺼냈다.
“했는데…….”
“아, 그래? 어디야? 그러면, 내일 점심에 내가 차로…….”
아, 했구나. 나는 조금은 예상한 대답에 치약 거품을 골고루 입안에 묻히면서 우물거렸다. 그렇지만 주현이가 내놓은 대답은 의외의 내용이었다.
“……가하한테 오다가 소매치기를 맞아서.”
“……어?”
“그래서 숙소 돈을 못 내고 왔어.”
‘소매치기?’
이탈리아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부류이지만 이런 작은 도시에 흔히 돌아다니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 휴가철에는 근처 큰 관광지를 따라서 흘러 들어오는 놈들이 종종 없지는 않았다. 게다가 주현이는 아까까지만 해도 제법 괜찮아 보이는 옷차림새였으니. 분명 타깃이 되고도 남았겠지. 나는 대충 털린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얼굴을 찌푸리며 전투적으로 칫솔질을 했다.
‘이런 아픈 애한테 소매치기를 해? 천하의 나쁜 놈들.’
“퉤, 소매치기 맞았어? 경찰에 신고는? 아, 진짜…… 나쁜 놈의 새끼들.”
“경찰이 영어를 못해서…… 그냥 왔어. 혹시, 돌아가다가 머리에 외운 가하 주소 잊어버리면 어떡하나 싶어서…….”
‘아, 경찰들. 영어를 못하긴 해…….’
나는 익히 아는 이탈리아 경찰의 현주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동네 개만도 못한 존재들이지. 내 공감에 안심이 되는지 그제야 칫솔질을 하기 시작한 주현이와 달리 나는 거품을 세면대에 뱉고, 컵에 물을 받아서 입 안을 헹궜다. 얼마 되지 않는 침묵의 시간동안 물소리를 반복하면서 나는 주현이가 점점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아는 애라고는 나랑…… 아마도 대호인데.’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나랑 대호는 찾아야겠고, 그런데 누가 소매치기를 하고, 거기다가 누가 도와주지도 않고. 나는 세수도 하고나서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는 동안, 여전히 칫솔질을 하는 주현이에게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으응. 잘했어. 참, 여권이나 이런 거는? 혹시 영사관 가야하는 거 아니야? 우리나라 쪽으로 가면 되나? 이따가 영사관 주소 찾아봐야겠다.”
“여권은 있어. 괜찮아.”
“아 그래? 다행이다. 여권 없으면 골치 아프지……. 그러면 지갑만 털린 거야?”
“……응.”
언뜻, 불안감이 서린 눈으로 나를 보면서 대답하는 주현이의 얼굴을 보게 된 나는, 픽 웃으면서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주현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마치 내가 여기 있을 거면 돈 내놓으라고 할까 걱정이 되는지 불안불안해 보이는 모습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너도, 참. 내 눈앞에서 피를 철철 흘리던 녀석에게 어떻게 그러겠어.’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 집에 신세 좀 져도 되냐고 은근히 물어봐도 될 텐데, 이런 데에서 말 한마디 안 하는걸 보면 은근. 순하게 자란 티가 난다.
“그래, 그럼. 당분간 우리 집에 있어.”
“……정말?”
내 말을 듣자마자, 주현이는 치약 거품을 입 주위에 허옇게 묻히고서 반색을 했다. 나는 얼굴을 닦은 수건을 걸이에 걸어 두고 입가를 가리켰다.
‘으이구. 입 주변에 다 묻었다, 묻었어.’
“입에 다 묻었다, 닦고 말해. 그래. 어디 갈 곳도 없잖아? 있어? 있으면…….”
“아니, 없어.”
주현이는 내 손짓에 세면대 물로 입안을 헹구고, 입 주위를 닦으면서 급히 대답했다. 어딘가, 좀 나사 빠져 보이는 것이, 어떻게 혼자 여기까지 온 건가 용해 보일 정도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세수를 마무리하는 주현이를 지나쳐서 화장실 입구 쪽에 서 있었다. 주현이는 이 좁은 집에서 내가 어디 도망갈 것 같은지, 급하게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얼굴 물기를 대충 닦았다. 그래도 주현이의 턱 주변은 여전히 물기로 흥건해서 나는 수건을 다시 들고 주현이 얼굴을 닦았다.
“그러고 가면 베개 축축해지잖아. 잘 닦고.”
“……응.”
‘너네 어머니는 너 키울 때 고생 좀 하셨겠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뽀송해진 주현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큰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주현이는 알아서 화장실 불을 끄고 나를 졸졸 쫓아왔다. 불이 꺼져 있는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앞선 양치로 시원해진 입 안을 쫙 벌리고 하품을 했다. 아까부터 힘도 쓰고, 조였던 긴장이 그제야 좀 풀리는지, 나도 제법 피곤했다.
‘아침부터, 대호 배웅하고, 일하고……. 뭔가 일이 많았긴 했네. 주머니가 왜 무겁지. 아, 핸드폰.’
“가하 어느 쪽에서 자?”
“아 나? 나는…… 오른쪽.”
나는 추리닝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의 무게감을 느끼고 다시 충전기에 꽂았다. 그러자 방전되었다는 표시가 뜨면서 까만 화면이 잠잠했다.
‘주현이 때문에 충전 시키는 거 까먹었네.’
주현이는 커다란 침대의 왼쪽으로 슬슬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침대에 들어가는 모습에 나는 웃음을 꾹 참았다.
‘이럴 땐 좀 뻔뻔하단 말이야. 소파에서 잔다고 말도 안 ……아, 같이 있어야 해서 그런가? 뭐, 침대 넓으니까 애초에 상관은 없지만…….’
주현이는 침대 왼편에 자리를 잡다가 오른쪽 편으로 들어오는 나에게 궁금한지 물어보았다.
“근데……. 왜 사람은 둘이 사는데 침대는 하나야? 그…… 같이 사는 친구랑 둘이 같이 자?”
“아. 응. 이사해서 들어올 때 원래 있던 침대가 이거였어. 바꿔야지 바꿔야지 하다가……. 돈도 들고, 귀찮아서 친구랑 그냥 같이 자.”
“……안 불편해?”
“그냥. 괜찮았어. 자주 여행해서 그런가……. 둘이서 맨날 방 같이 썼으니까.”
‘익숙해져서, 몰랐는데 그동안 이제껏 대호랑 둘이서 맨날 같이 잤구나.’
나는 목 위에까지 이불을 덮고, 나를 향해서 몸을 돌린 채로 베개에 누운 주현이를 보면서 씩 웃었다.
‘옆에서 다른 사람이 이렇게 자는 건, 또 처음이고.’
주현이는 아까 전 일이 영 불안한지 그런 내게 연신 당부했다.
“…… 나 자는데 어디 가면 안 돼.”
“응. 안 가.”
푹신한 이불의 감촉에 나는 눈을 감고 대답했다. 그러자 주현이는 목소리를 낮추고 다시 소곤소곤 속삭였다.
“가하 어디 가면 나 또 피 나.”
“알아. 말해 줬잖아.”
그래서 나도 이렇게 같이 누운 거고. 아까 먼저 자라는 걸 너도 뿌리치고 같이 설거지 했고. 나는 점점 느려지는 눈꺼풀을 깜빡이며 손을 올려서 이불 속, 옆에 있는 주현이의 팔뚝을 살살 쓸어 주었다. 알겠어. 안 가, 안 가. 졸리니까 그만 말하고 자라 좀.
“자. 나 진짜로 어디 안 갈게.”
“……진짜?”
“응. 약속…….”
약속해, 라고 말하려는 순간, 뭔가…… 걸려서 망설이는 순간. 주현이가 내 새끼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삭, 걸었다.
“응. 약속했다?”
“……어, 어…… 의심도 많다……. 속고만 살았어?”
“……혹시나 하는 거야.”
깜……짝이야. 갑작스러운 행동에 잠시 눈이 번쩍 뜨였지만, 이내 몰려 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종알대던 주현이의 목소리도 점점 멎었다. 주현이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잘 자, 가하.”
응…….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