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커서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를 간직한 사람이, 아주 드물지만 있다. 그리고 내 앞에서 서서 쓸쓸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가하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 감정에는 아주 작은 정이 서려 있다는 것을 나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나만, 바라보던 과거의 그 눈빛.
“주현아.”
“응. 가하 형.”
이전에도, 지금도 그는 변함없는 순수를 간직한 채였다. 나는 내 어깨만큼 자란 가하가 서 있는 자리의 주위를 천천히 돌면서 꼼꼼히 살펴보았다. 예전에 비하면 분명 볼품이 없는 옷차림이지만, 그 안에 간직한 귀한 반짝임은 어디 바랠 줄을 몰랐다. 티 하나 없이 하얗기만 했다.
여전했다.
그는 긴장이 되는지, 걸치고 있는 짙은 색의 체크무늬 셔츠의 옷자락을 연신 뜯어 내렸다. 손이 많이 상했네. 나와 같이 손끝이 상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이런 것까지 같을 것은 없는데. 현장에서 공사판 일을 한다는 보고서를 읽었던지라, 그 꺼칠꺼칠한 손끝의 흔적에 내 마음이 아파졌다. 바로 집으로 데려가야겠다.
“……나, 기억나?”
고생을 하는 것도 싫었지만, 무엇보다도……. 살짝 벌어진 그 애의 발간 입 안에서 사르륵 나오는 낯선 향기가, 내 코끝을 스치자마자 내 심장이 순간, 꽉 죄어들었다. 가하가 이 좁은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풍기던 ‘그’ 에스퍼의 향기.
설마……. 각인을 당한 건 아니겠지.
나는 가하의 주위를 돌면서 목덜미 부근을 살폈다. 다행히 그 애의 둥근 뒤통수 밑으로 뻗은 하얀 목덜미에는 아무런 자국도 없었다. 황대호가 제법 무른 성격이라는 게 이럴 때에는 정말 도움이 되었다. 그는 내 기묘한 행동에도 내 정신이 아프다는 말을 동생을 통해서 대충 들었는지,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가도 바로 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나는 가하의 흠 없는 하얀 뒷목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참을 수 없는 욕정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원래대로라면, 풋내가 나던 무렵에 그 목덜미는 내 잇자국이 보란 듯이 남았을 것을.
잘 여물은 지금에서도 그 과실은 아주 깨끗하고, 어느 자국 하나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살피던 것을 마치고 가하를 껴안으며 그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가득 들이켰다.
아, 이 냄새. 진짜, 너의 향기. 바람 한 번 불면 쓸려나가고 말아 버릴 이 희미한 향기. 체취를 가리기 위해 뿌리는 독한 향수와는 다른 바람처럼 투명하다 못해 가볍고 바스러질 것만 같은…….
나는 결국 몸 안에서 달아오르는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이를 드러내어 그 애의 하얀 목을 깨물었다.
“윽!”
그 아이의 연약한 목덜미를 가득 베어 물자, 마치 신선한 과일을 베어 무는 것처럼 같이 특유의 향기가 입 안에 가득 채워졌다. 흰 목덜미는 그 색깔과 같이 연약해서 그런가 내 잇자국이 붉게 패인 곳에서 비교적 진한 과즙과 같은 피 맛이 혀끝에 맴돌았다. 그 맛이 잘 익은 과실과 같이 달아서, 나는 입을 떼어 둘 줄을 모르고 여전히 목덜미를 물은 채로 있었다. 이 그리운 맛을 좀 더 느끼고 싶어서 침이 줄줄 흐르는 혓바닥으로 방금 뜯어먹은 하얀 피부 아래의 붉은 속살을 핥아 올리자, 가하의 살이 오싹함으로 떨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내게 애써 다정한 목소리를 숨기지를 못했다.
“주, 주현아. 아파, 그러지 마…… 왜 그래?”
“응? ……아파?”
나는 여전히 단맛을 내는 목덜미의 핏방울을 하나라도 놓칠 새라 입술과 혀로 쪽쪽 빨아들이다가, 목과 어깨에 이어진, 유난히 도드라진 뼈가 눈에 들어와서 입술을 찬찬히 내렸다. 그게 제법 간지러운지 가하가 내 품에 안긴 채로 등을 움츠렸다.
“응……. 그러지 말고, 우리 말로, 말로…….하자.”
“나도 아파.”
그 생경한 반응에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내 품안에서 빠져나오려다가도, 내가 주는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연신 바르작거리는 모습이 내 눈에는 그저 귀엽기만 했다. 그리고 그동안 곁에 두었던 가짜와 달리 진짜는 내 품에 안기자마자 내 안에 꼬여 있는 가이드의 힘을 도로 순환시켰다. 20년 만에 이렇게 가하를 만나고, 그제야 나는 비로소 숨을 제대로 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래, 네가 있어야 해. 내게는 네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삶인 것을.
내 대답에 가하가 연신 숨기던 얼굴을 올려서 나와 눈을 마주친 채로 당황한 눈치를 했다.
“아, 아파? 어디가?”
“마음.”
마음이 아파. 이런 너를 그동안 알지 못했다는 게. 그동안 네 손끝이 닳아 가는 동안 너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게…….
나는 그동안 가하를 찾으며 감내하던 고통과 시간을 애써 떠올리며, 짜증으로 인한 열을 얼굴에 모았다. 몰린 열기로 눈가가 뜨거워지는 감각에, 목이 서러움으로 적당히 메였을 때, 울었다.
예전에 새끼 사슴이 제 어미를, 애타게 부르는 것처럼.
“가하, 갔어. 말도 없이…… 나 버리고 갔어.”
“…….”
“그래서 아파. 마음.”
그러니 내게 오라고. 내게 다가오라고. 나를 구하러 오라고 그렇게 울먹였다.
내 말에 가하의 당황으로 벌어졌던 입이 꾹 다물리며, 안면이 점점 굳어져 갔다. 또, 그 입에서 은근히 풍기던 에스퍼의 냄새도 끊겼다. 그 애의 여린 부분을 정확히 파고든 그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아서, 고개를 살짝 숙여서 가하의 뺨에 내 뺨을 대고 꼭 붙었다.
“그래서 기다렸어……. 착하지, 나?”
보드라운 뺨의 안쪽은 이를 꼭 깨물고 있는지 근육이 팽팽했다.
‘그나저나, 제대로 밥을 챙겨 먹지 못했나. 예전에는 뺨에 살이 통통해서 더 귀여웠는데……. 너무 말랐어.’
나는 어서 집에 데려가서 매일매일 가하를 그득히 먹여서 살을 찌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디 부족함 없이 예쁘게 찌워야지. 안고 있는 팔 안에 감겨드는 가하의 골격에는 마른 근육 외에는 지방이라는 것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아마, 동생 뒷바라지를 하느라 제 몸을 제대로 챙기지 않은 것이라 그러겠지.
“가하 냄새, 생각하면서…… 기억하면서…… 계속.”
그렇지만 괜찮아. 예쁘게 우는 것도, 웃는 것도 다 내 옆에서 마음껏 보여 줘. 이제는 내가 네 곁에 있고, 너를 돌보아 줄 테니.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내 그리움이 절절하게 담긴 말에 가하는 결국 내 품에 폭 안겼다. 내 어깨에 제 이마를 기대고 괴로운 얼굴로 속삭이면서 저를 안은 내 팔을 꼭 붙잡았다. 마치,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미안해.”
“……왜?”
“……기다리게 해서…….”
아, 너는 어떻게……. 내가 바라는 바와 같이 태어나고, 이렇게 자라났을까.
죄책감이 역력한 얼굴로 미안하다 고백하는 것을 보니 그 작은 새가 담고 온 에스퍼의 사소한 냄새쯤은 단숨에 용서되었다.
그래, 다른 놈 집에서 자고 온 건……. 눈감아 줄게.
하지만 이번만이야.
나의 가하를 길게 기다리고 기다린 후에야 받은 고백은 그야말로 달콤하기가 짝이 없었다. 다른 것은 어찌 되어도 좋으니, 그 말 한 마디에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맴돌았다. 만약 가하가 같이 죽자고 하면 기꺼이 죽어 줄 마음도 있었다.
그래, 계속 그렇게 생각해. 내게 미안하다고, 내게 미련을 가지고, 울어 줘.
“이제, 같이 있으면 되니까……. 우린 늘 함께야, 그렇지?”
“응…….”
그렇게, 생각해서 네가 내 곁에 있기만 한다면. 나는 어떠한 말이라도 할 수 있다.
“착해, 가하.”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반쪽을 헤매었던 세월이 무색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던 무채색의 삶에, 비로소 의미를 되찾은 그런 이채로운 날.
나는 예쁜 가하를 다시 품에 껴안으면서 관자놀이 부근에서 맡은 냄새에, 불현듯이 머리털이 쭈뼛 서는 불안을 느꼈다. 이 냄새는…… 가하의 입 안에서 유난히 흘러나오던…… 그 냄새.
분명 아까 전에, 유가연의 핸드폰에서 울리던 목소리의 주인. 황대호의…… 냄새였다. 황대호, 묘하게 내 계획을 어그러뜨리고 방해하는 녀석.
“주현아?”
“…….”
어째서, 나보다 그 녀석과 먼저 만나고, 그 집에 가서 냄새를 묻혀 온 거야? 어차피 그 녀석은 에스퍼니까 네게 각인 따위는 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 조그만 입에서 은근히 풍기는 황대호의 냄새에 내 기분이 바닥으로 치달았다. 다시 초대하지 않은 색깔이 내 그림 위로 덧칠되어 간다. 네가, 다른 것으로 물들어 간다.
결국, 이렇게 미안하다, 옆에 있겠다 말만하고 또 어디론가 말없이 가 버리는 것은 아닐까. 만약에, 그런다면.
나는 다시 너를 평생 헤매는 삶으로 돌아가겠지. 네가 주는 따뜻했던 안락함에 목말라 있는 채로 텅 빈 그 집으로 돌아가,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날들을 반복하겠지.
결국은 너의 사랑 안에 나 혼자 갇혀서…….
나는 다시 되풀이되고 마는 지난 20년간의 고통에 내 가슴팍의 힘이 참지 못하고 훅, 뛰었다.
안 돼. 그건, 안 돼……. 너는, 내 곁에 있어.
나를 두고 가지 마.
품 안에 안겨 있던 가하에게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나돌았다.
“아, 아으! 흐허, 허헉…….”
내 안에서 꼬여 있는 힘이 그저 닿는다고 바로 좋아지지는 않는 것이라,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놓치면 이렇게 되어 버린다. 내 힘의 여파로 장판 바닥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눈물을 쏟고 있는 모습에 나는 조금 아차 싶었다. 실수였다. 그렇지만…….
“나빴어, 가하가.”
“아윽, 흑…… 으윽…….”
너무 아프고 아프다 못해 얼굴에서 각종 액체를 쏟는 모습은 내 아랫배가 묘하게 당겼다. 그러고 보니, 나 때문에 이렇게 우는 건…… 처음이던가.
“다른 냄새랑 섞였어……. 내 건데.”
나는 준비했던 웃음을 울고 있는 가하에게 보여 주었다.
아, 예뻐라.
* * *
가하를 집으로 데려오고, 나는 계속해서 어린 척을 했다.
그 애가 좋아하던 모습 그대로, 웃는 낯 그대로. 약점과 같은 어미와 여동생을 미끼로.
하지만 20년 동안 가하 없이 살던 삶은, 어느 순간 나를 땅 끝까지 밀어 흔들어 버리고 작은 불안에도 쉽사리 무너지게 만들었다.
“황대호가 찾아 왔다고?”
“예. 가하 도련님 문병 차……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다음부터는 바쁘다 하고, 돌려보내.”
“예.”
나는 박 비서의 보고에 불안함을 내심 감추고 급하게 뜀박질을 했다. 황대호가 왔다고? 그 사이에 혹시…….
아니야. 가하는 내가 제일 좋잖아, 그렇지? 분명 내 옆에 있겠다고 약속했잖아.
내가 제 어머니에게 억지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눈물에 젖은 가하의 얼굴을 상상하며 불안을 애써 눌러 내렸다. 나는 정원에서 돌아오는 길을 뛰어가다가 환히 피어 있는 이름 모를 꽃을 꺾어서 누워 있을 안쪽 방으로 급하게 향했다. 그 애는, 사소하고 작은 것들을 좋아하니 분명 건네주면 좋아하겠지. 나를 향해 울다가도, 받고나면 기뻐서…….
‘나를 먼저 안아 주겠지.’
황대호는 제쳐두고. 그렇게 가슴 속 깊이 기대했다. 그렇지만 내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보게 된 광경은, 그 부풀은 기대를 산산이 부셔 버렸다.
“……대호야.”
“응.”
두 사람이, 입술을 맞추고 황급히 떼어내는 모습. 둘의 맞닿은 입술이 색정으로 부풀어 오르고 그 애의 얼굴에는 눈물이 아닌 묘한 흥분감이 감돌고 있었다.
내게는 보여 주지 않았던 그런 얼굴.
내가 만들지 않은 그 감정.
‘왜?’
내 모습에 둘은 황급히 그 애 닳은 분위기를 정리했다. 마치, 애에게는 보여 주면 안 된다는 듯이. 아, 그래서 그런가.
“……이제 가는 게 좋겠다. 고마웠어, 오늘.”
“놀랐다면…… 미안해.”
내가, 계속 애인 척 굴어서 그랬나. 나는 작은 배신감도 들었다.
네 곁에 있는 사람, 나잖아. 내가 제일 좋은 거 아니야?
네가, 그때도 나를 불렀잖아. 불러서 나를 찾고, 나에게 구해 달라 했잖아. 그런데 왜…….
황대호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윽고 가하를 보면서 살포시 웃었다. 그 웃는 낯에 내 짜증이 더했다.
웃지 마, 그 애에게 그렇게 웃지 마. 너는 내 에스퍼잖아. 나는, 네 가이드잖아.
내 눈치와 대호를 신경 쓰는 가하의 태도에 다시 한 번 가슴팍이 두근, 하고 크게 뛰었다.
어차피 너는…….
“어…… 응. 그…….”
“또 올게.”
내 거인데……. 나는 크게 요동하는 가슴팍을 꾹 쥐고 어금니를 부술 듯이 갈았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왜, 너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을까.
왜……. 너는 그때와 같이 내게 돌아오지 않을 것 같지.
나를 버리고 훌쩍 날아가서, 웃어 버릴 것만 같지.
나는 이미 너의 하얀 세상에 가두어져 버렸는데.
나는 눈앞이 어질어질하게 돌아가며 나를 스쳐지나가는 황대호가 별채를 완전히 나가는 소리가 나자마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좋았어?”
“주현아, 그.”
내 눈에는 난감한 기색의 표정을 한 가하가 보였다. 왜, 그런 표정을 해? 왜, 나는 너에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인처럼 굴어?
내 곁에 있어 준다고 했잖아. 나를 사랑해 준다고 했잖아…….
그러니 너의 세계를 물들일 사람은 나 혼자여야 해.
가하는 말을 하고 싶은데 영 나오지가 않는지, 방금 전 키스로 살짝 부풀어 오른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그 모습이 내 화를 돋웠다.
그것도 내꺼야. 그런데 너는 왜, 그 애랑 키스를 해? 내게, 해. 하고 싶으면 내게 하란 말이야…….
그 생각이 미치자 나는 그 애에게 달려들어서 다른 사람의 자극으로 부풀어 오른 부드러운 입술을 집어 삼켰다. 정신없이 그 애의 입술을 맛보고, 입 안을 헤치자 그 애의 향기를 담은 피 맛이 내 혀 안쪽으로 흘러들었다. 그 맛을 야금야금 맛보는 동안 내 급작스러운 행동에 가하가 황급히 내 어깨를 밀었다.
“헉, 헉……. 왜, 왜 그래. 그러지 마. 응?”
“왜?”
나는 곱게 떨어지면서 가하 배 위에 올라탄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잔뜩 흥분한 내 다리 사이에 꼼짝없이 누워 있는 가하가 눈꼬리에 눈물을 머금고 애원했다. 그러지 말라고? 나는 다시 몸을 숙여서 누워 있는 가하에게 반문했다.
하지만 넌, 황대호랑 키스했잖아.
“내가 왜?”
“그……야, 우린 남자고…….”
나를 두고, 너의 가이드를 두고 다른 남자랑 키스했잖아. 그런데 왜라니. 그건 말이 맞지 않아. 아, 우리 가하는 머리가 조금 나쁘지. 그래서 더 귀엽지만 말이야. 그래서 모르는구나.
우리가 어떠한 사이인지, 무슨 관계인지, 그럼 알려 줘야지.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그 새끼는 여자라서 키스해도 되나 보지?”
“……뭐?”
나는 가하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허벅지 사이에 있는 그 애의 허리를 여전히 죈 채로 상체를 들어서 입고 있던 니트를 벗어던졌다.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는 얼굴에 나는 웃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옷을 슬슬 벗어 내리는 모습에 문득 겁이 나는지 나를 말렸다.
“하, 하지 마. 주현아, 내려와 응? 우리 말 좀, 해. 말 좀 하자.”
“안 해.”
가하는 내 원래 성격을 모르고 있지만 뭐. 그것도 오늘로 그만 해야겠다.
어린아이인 척을 해 봤자 별 소용도 없고, 이러다가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고 다른 남자를 졸졸 따라 갈 것 같으니. 지금이라도 나를 알려 주고 그냥 적응시켜야겠어.
그 자리에서 나는 강제로 가하를 품고, 사정에 오르기 전에 내 잇자국이 난 목덜미를 다시 물었다. 처음 내 물건을 몸에 품어낸 가하는 방금 가이딩을 흠뻑 받으면서 잔뜩 예민해진 감각으로 느끼는 쾌감을 연신 터뜨리며 울어대었다.
“아응, 하아으, 그, 그으……만…….”
“흐으, 느껴져?”
“응, 응. 안, 에……. 너무, 깊, 아응.”
“네 안, 내 좆 모양대로 만들어 가는 거…….”
나는 사정을 향해 솟구치느라 가하의 뱃가죽을 뚫어 버릴 듯이 파고드는 부분을 살살 쓸었다. 그러자 땀이 배어 예민한 가하의 살결이 내 손길을 따라서 부들부들 떨렸다. 은근히 볼록한 부분이 손바닥에 스치는 게 느낌이 좋아서, 나중에 이 배를 잔뜩 부풀게 만들어 보고도 싶었다.
내 애를 배고 숨을 몰아쉬는 모습도…….
“조아, 아, 거기. 좋아, 응…… 흐으……응!”
“그런데 어떻게 그만해. 이렇게 좋아 죽는데.”
“히이, 깊어. 하으, 너무으, 응.”
좋을 것만 같다. 너랑, 나의 피를 반씩 나눈 그런 아이. 너를 닮아서 우는 얼굴이 예쁘고, 웃는 얼굴은 또 각별한. 나를 닮아서 네 손만 타고 싶은 그런 아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행복할까. 우리끼리 가족을 이루고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이 산다는 게……. 그리고 설상 나를 떠나고 싶다 해도, 애가 있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그 어미를 찾던 새끼 사슴과 같이. 그러니까, 애가 하나는 꼭 있으면 좋겠어.
“……이걸 기다렸어.”
“아흑!”
나는 내벽 안쪽에 사정하는 순간, 그 애의 목덜미를 콱, 깨물고 깊숙이 내 이를 박아 넣었다. 한 번 물어서 연하게 자국이 난 상처 딱지가 다시 터지며, 내 붉은 가이딩이 파고들었다. 가이딩은 보통 상처를 치유해 주지만, 각인으로 남은 상처는 예외였다.
“이제 내 곁에 있어.”
마치, 낙인처럼 파고든다. 그 하얀 목덜미의 상처는 마치 문신을 새긴 것처럼 유난히 그 자국이 붉게 부어올랐다. 지워지지 않을 그 증거. 꺾인 그 발목에 난 자국도 분명 그러하겠지.
“영원히.”
나는 그 행복한 상상에 다시 육욕이 달아서 계속해서 가하를 안았다. 그 애는 결국 내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각인 후에 관계 도중 기절했지만, 그 와중에도 내 불안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나는 계속해서 가하를 안았다. 아무리 불안을 쏟고 안아도 마음 속 구석의 나날은 지워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나마 나는 가하와 비로소 각인을 맺었다.
둘 중 한명이 죽어서야 깨어질 수 있다는 그런 각인을.
그날 밤, 나는 아주 오랜만에 편안하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애를 품에 안고서 노곤노곤하게 젖어 드는 그런 달콤한 잠을. 그런 잠을 일깨운 것은 품에 기절한 듯이 자고 있던 가하가 일어나는 기척이었다. 나는 다시 안아서 잘까, 싶었다가도 가하가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해져서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가하는 내 품에서,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다친 다리를 질질 끌고 방 안을 기어갔다. 누가 봐도 멀어지고 싶은 모습인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이제 없다.
“알아?”
“……뭐, 가.”
“이제 가하한테서 내 냄새 나. 각인해서 그래.”
나는 그런 가하의 다친 다리를 붙잡고 애써 웃었다. 긴 기다림은 응어리진 불안을 만들고, 불안은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나를 좋아할 거야. 그래도 너는 나를 찾을 거야. 내가 네 가이드니까, 너를 사랑하니까…….
“우리, 평생, 함께 하기로 했잖아.”
내 옆에 있으면 그 아픔과 슬픔마저 내가 껴안고 다시 옛날 그날 그대로 돌아가게 해 줄게.
나의 가하를 아껴 주고 싶은 마음도 물론 있지만, 긴 세월동안 기다림 속에서 일그러진 내 안의 힘과 마음은 방해물과 같이 그런 마음을 비틀었다.
내 마음에는 여유라는 것이 없었다. 오랫동안 굶주린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손 안에 들어오는 확실한 무언가.
그래서 그런가 나를 거부하는 가하의 행동에 나는 매번 다시 불안이 치닫아 가하를 억지로 안고 안았다. 그런 억지투성이 관계를 맺어도 당시에 차오르는 순간의 충만감은 어디에도 비할 대가 없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훅 꺼져서 허무해지곤 했다.
특히, 내가 그 애의 품이 주는 편안함에 취해서 달게 잠에 들었다가도, 매번 품에서 일찍 깨어난 가하가 어딘가 가고 없을 때.
“……가하?”
또……. 어디, 갔지. 나는 졸음에 취해서 그 비어 버린 침대의 옆자리를 더듬으며 고개를 쳐들고 가하를 찾았다. 불안이 치켜드는 내 가슴팍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그 연결된 고동과 파동을 보아하니 가까이 있었다. 나는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로 누운 침대를 박차고 가하를 찾았다. 그러면 가하는 집 안 어딘가, 아니면 정원 어딘가에서 뒷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내 눈이 닿는 어딘가에 늘 있었다.
두 번 다시는 이전의 날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그 안정감에 나는 행복했다. 비록 그 애는 어딘가 쓸쓸한 눈을 보여도, 내가 더 잘 해 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하는, 나를 좋아하잖아. 우리 둘이서 연결되어 있는 각인을 따라서 점점 나와 마음을 같이 할 거라고. 은연중에 그러한 기대감을 가진 내게 가하는 쓰라린 아픔을 담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안 예뻐.”
“……예쁘다고 해 줘.”
“내 눈에 예쁜 짓을 해야 예쁘다고 하지.”
볼멘소리를 하는 가하의 모습은 나를 싫다하는데도 전혀 밉지가 않았다. 아니, 삐죽이는 그 입마저 당장이라도 입 맞추고 싶을 만치 예뻤다. 그러면서도 나는 조금 아쉬웠다.
너는 언제나 내게 예쁜데, 나는 네게 그렇지 않다는 게. 그래서 나는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가하를 꼭 안고 졸라대었다.
나도, 나도 예뻐해 줘. 네 것이라고 예뻐해 줘…….
“어떤 게…… 예쁜 짓인데?”
“……그냥…….”
가하는 제 등에 닿아오는 나의 체온과 살결이 적응이 되지 않는지, 어깨를 웅크리고 도드라진 날개 뼈를 볼록 드러내었다. 나는 하얀 살결에 싸인 그 둥근 뼈마디를 보자 입에 넣고 잘근잘근 물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러면 놀라겠지. 나는 입 안에 고이는 욕구를 애써 눌러 참았다. 가하는 끊었던 말을 천천히 이었다.
“……평범하게, 지내는 거?”
나는 그 대답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예쁜 짓이, 평범하게 지내는 거…… 라고?
나는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가하를 가만히 안고만 있었다. 그러자 가하는 자신의 말에 자신이 좀 더 생겼는지, 말을 계속해서 더듬더듬 이어 나갔다.
“그냥……. 그냥 가만히 보고 있어도 웃을 수 있는 거. 그런 거 같아.”
가만히 보고 있어도 웃을 수 있는 것.
그 말과 함께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는 가하의 시선을 마주 보게 된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평범한 거라는 거…… 그런 거 같아.”
가하는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내 품에서 빠져 나갔다.
나는 웃는 것보다, 우는 모습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것이야 말로 지워지지 않는 감정이라고.
하지만 가하가 말하는 ‘평범함’이란 웃는 얼굴이었다.
정반대의 감정.
정반대의 색깔.
나는 손 안의 모래알처럼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는 그 애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다시 붙잡았다가 보게 될 그 무언의 감정이 내 눈에 다시 보이는 것이 무서웠다.
그 애의 하얀 세상을 나는 무슨 색으로 칠하고 있던 걸까.
파란색? 아니면 검은색?
아니면.
붉은색?
“…….”
어째서, 나는……. 나는, 너와 함께 하고 있는데, 매일 입을 맞추고, 꿈에서나 그리던 날을 보내고 있는데, 왜 우리 사이는 서로를 없이 살던 이전과 별 다를 바가 없을까.
왜…… 각인을 하고도 고통스럽게 살던 날과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을까.
내 세상은 여전히 까맣게 죽어 있는 걸까.
그리고 너도.
나는 뒤늦게 가하의 뒤를 쫓았다. 텅텅, 하고 요란하게 울리는 마룻바닥의 발걸음 소리에, 천천히 복도를 걸어가던 가하의 움직임이 멎었다.
나를 다시 돌아보기 전에, 그 상처가 선연한 얼굴을 보기 전에 나는 가하를 안았다.
내가, 나 때문에…….
“왜 그래.”
“……내가, 잘못했어.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다시 보고야 말았다. 울고 있는 얼굴도, 웃고 있는 얼굴도 아닌 그저…… 무심한 얼굴. 내게 무엇도 느끼지 않는 그런 얼굴이 짧게 스쳐가는 모습에 나는 사고가 정지했다.
아니야, 내가 바란 건 이런 얼굴을 한 네가 아니야…….
포옹으로 서로의 가슴이 맞닿고 그 언저리에서 한 번, 두 번, 그리고 계속 천천히 울리는 파동이 내 입안의 모든 언어를 앗아가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 애의 표정을 다시 눈앞에 그려내다가 눈을 감았다.
이런 걸,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네가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삶을 내 곁에서 살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래.”
“나, 정말 잘할게. 정말, 잘할게. 예쁜 짓할게.”
내 가슴팍에서 이어진 감각은 따끔따끔하게 죄어 오며 가하의 감정을 전달했다. 나를 밀어내면서 무겁게 대답하는 것을 두고, 나는 쓰린 눈가를 손으로 쓸었다.
나는 그저……. 너의 세상을 나로 물들이고 싶었다. 네가 가진 모든 감정을 나로서 독점하고 싶을 뿐이었다. 아픔도, 슬픔도…… 사랑도.
그렇게 금방이라도 사라질 사람처럼, 내게 미련 없이 웃고 갈 사람처럼 있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까맣게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떡하면 좋지.
너를 어떻게 해야 예전처럼 내게 환하게 웃고, 사랑한다고 말해 줄까.
너의 세상에 나를 다시 한 번 들어갈 수 있게 해 줄까.
“……씻어. 늦겠다.”
나는 속절없이 느껴지는 가하의 저릿저릿한 감정을 하나하나 들이키면서 다시 흔들리는 불안을 붙잡았다. 무언가가 잘못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러지 않았더라면, 다시 황대호가 방해했더라면.
내가 너를…… 다시 잃어버린다면. 나는 죽는 것보다도 못한 삶을 반복하게 될 텐데.
그나마 네가 내 손 안에 있어서, 네가 아프다고 해도 나는 안심이 된다니. 생각보다 나는 네게 미쳐 있었던 것 같다.
가하를 집에 두고 회사에 돌아와서도 나는 올라온 보고를 한 귀로 흘려듣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가하가…… 예전처럼 나를 바라보아 줄 지 고민하면서.
“……올해 상반기 실적 보고 현황은…….”
미팅 룸에서 임원들과 하반기 기획 전략과 현황을 보고 받는 동안 옆에 대기하고 있던 박 비서가 옆으로 다가왔다.
“……상무님,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 딱히.”
그제야 나는 반복적으로 아침의 일을 떠올리던 것을 애써 머리 한 켠에 치워 두고 테이블에 놓인 내 몫의 보고서를 뒤적거렸다. 그는 한창인 PT 와중에 속삭였다.
“오늘은 오후 일정이 많지 않으니, 일찍 자택으로 돌아가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음.”
박 비서의 눈에도 내가 무슨 생각에 차 있었는지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박 비서가 제안한 말은 제법 나쁘지 않았다. 병원에 있었던 최근 몇 년 동안 회사에는 이름만 올려 두고 직분을 천천히 승진 시켰다. 하지만 아무래도 실무를 하지 않아서, 업무를 인계받는 과정이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 탓에 집에 일찍 돌아가지도 못하고 늘 늦은 저녁에 돌아가곤 했다.
그런 나를 기다렸는지, 잠에 지쳐서 침대에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은 이전에 몰래 잠든 이부자리에 들어가던 나날을 생각하게 했다.
그런 가하를 안고 잠드는 기분이란……. 참 좋았다. 그냥,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체온이 같아지는 게.
그렇지만, 오늘 아침 일도 영 마음에 걸리고. 일찍 돌아가 같이 밥도 먹으며, 얘기도 좀 나누어 볼까. 가하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고 싶은지, 물어볼까…….
나는 그렇게 보고서 종이를 넘기면서 가하가 좋아하는 음식 따위를 떠올리며 이 발표 후에 자택 가정부에게 연락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윽!”
가슴팍의 고동이, 그 애와 이어져 있는 파동이 무척, 급하고 불규칙적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 같지 않은 신체의 반응에 슈트를 입고 있던 상체를 미팅 룸의 테이블 위로 처박았다. 갑작스러운 그 모습에 보고를 하던 스피커의 목소리가 뚝, 끊기고 주변의 임원들이 일어서서 내게 다가왔다.
“상무님!”
“무슨 일이야, 송 상무 어디 아픈가?”
물론, 박 비서가 그런 사람들을 물리고 먼저 다가왔지만.
“도, 상무님!”
“크윽…….”
이게, 무슨 일이지……. 가하, 가하에게 또 무슨 일이. 아니면 설마. 폭주……인가.
나는 안정을 되찾을 줄 모르고 잔뜩 흐트러진 파동을 간신히 갈무리 하며, 빌딩에 상주하는 의료진을 핸드폰으로 호출하는 박 비서를 붙잡았다.
폭주였다. 나를 위한 에스퍼와 함께 각인을 하고, 가이딩을 하고서도 찾아온 유래 없는 폭주.
“박, 비서. 윽!”
“지금, 25층에 의료진 파견 부탁합니다. 예, 가이드입니다. 상무님, 어디에서 통증이…….”
“지금, 자택에 연락해. 지금, 당장!”
내 말에 박 비서가 의아한 눈을 했다. 내가 찢어낼 듯이 쥐고 있는 셔츠 가슴팍 너머의 심장이, 그 애의 감각이, 연신 불안정하게 뛰고 있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아주, 불안해서 온 몸이 고동칠 만한.
그래서, 내게 전해져서 이렇게…… 폭주를 일으키고, 내 힘이 엉켜드는 것이다.
“……예?”
“가하, 가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 당장, 별채에 가서, 확인해!”
“예…… 예, 알겠습니다. 당장 연락해 보겠습니다.”
“흐, 흐윽…….”
나는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깔끔하게 빗어 올린 머리채를 틀어쥐고서 온몸에 날뛰는 그 감각을 짓누르려고 노력했다.
괜찮아, 가하가 무언가 하다가 놀란 게 있어서 그런 것이다. 잘 놀라는 애다.
그때와 같은 일……. 같은 게 아니다.
그럴 수가 없어. 그 애는 동생을 아끼고, 어미를 그리워하고.
나를 좋아해.
가하는 내 곁에 있을 거야…….
되뇌던 나는 다시 불안이 날뛰어서 미팅 룸을 나섰다. 그런 나를 박 비서가 급하게 뒤쫓았다.
“상무님!”
“안 되겠어, 허억. 집에, 집에 가. 운전해…….”
나는 이제 호흡마저 제대로 컨트롤이 되지 않아서 미팅 룸이 늘어져 있는 복도 벽에 몸을 간신히 기대어 서고, 호흡이 가쁜 등허리를 들썩였다. 박 비서는 빌딩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한손으로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내게 다가와 부축했다. 나보다 키가 조금 더 작은 박 비서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기대어서 금방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고속의 엘리베이터가 하강하는 동안 박 비서의 어깨에 기대어 있는 내게도, 그가 연락하고 있는 핸드폰 너머의 규칙적인 음이 들렸다. 언제나 사람이 상주하기에 금방 전화를 받는 평소와 달리, 전화 너머는 사람의 목소리 없이 그저 기계음만으로 수화기를 울렸다.
―……음성메세지로 연결됩니다.
“어……. 다시, 걸어 보겠습니다. 점심시간이라…… 가정부가 바쁜 모양입니다.”
“……흐, 허…….”
나는, 덜덜덜 경련하는 손으로 엘리베이터의 난간을 붙잡았다. 힘이 비틀리기 시작한 손아귀가 닿자마자 쇠로 만들어진 난간을 휘어 버렸다.
젠장, 분명,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기 전까지 가하를 품에 안고 접촉을 했으니…… 괜찮았을 텐데. 왜, 내게…….
너에게 무슨 일이…….
그 모습에 나는 난간에서 황급히 손을 떼고, 박 비서에게 기대었던 몸을 물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좁은 엘리베이터는 그 작은 걸음에도 벽을 내밀며 나를 다시 가두었다. 등 뒤로 텅하니 닿는 벽에 기대어서 내가 힘없이 무너지자 박 비서는 핸드폰으로 다시 연락을 넣으면서 내게 다가왔다.
“도련님, 정신 차리세요. 병원, 병원으로 먼저…….”
“안 돼, 헉, 허억, 당, 당장…… 집으로 가.”
“……지금, 자택으로 전화 연결이 안 됩니다. 제가 자택으로 가서 확인할 테니, 도련님은 병원으로…….”
나는 만류하는 박 비서를 두고, 목을 갑갑하게 묶어오는 넥타이를 풀어 내렸다. 그리고 땀에 젖은 셔츠를 풀어헤치며 날뛰는 가슴팍에 손바닥을 대었다. 그동안 안정되었던 파동이 미친 듯이 뛰는 자리로 내 손톱이 파고들면서 상처를 내었다. 박 비서가 경악하며 나를 말렸다.
“도련님!”
“지금, 집으로 가…….”
상처로 인한 피비린내가 내 얼굴 앞으로 훅 풍기고, 회복기를 가지느라 날뛰는 힘이 조금 안정되는 것을 느끼면서 숨을 천천히 골랐다. 호흡을 안정시키고 눈을 또렷하게 뜨는 나를 내려 보던 박 비서가 눈을 꾹 감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가슴팍에 상처를 낸 손은 아직 멈추지 못하고 내 머릿속의 불안처럼 덜덜 떨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박 비서의 급한 운전 아래 집으로 돌아가니, 먼저 집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마주한 차고의 휘어진 문이 유난히 눈을 사로잡았다.
“……이게 무슨……. 경찰에다가 먼저 연락할까요?”
“…….”
우리는 차를 차고 안에 주차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차 밖으로 나와서 그 기묘하게 비틀어진 문을 보다가, 급하게 본채로 달려갔다. 그러자, 정원부터 해서, 본채까지 가는 길에 경비원과, 경비견들, 경호원들, 일하는 가정부와 정원사, 관리인까지 하나같이 바닥에 정신을 잃고 누워만 있었다. 단체로 약을 먹고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무슨, 어떻게…….
박 비서가 급하게 한 경호원을 깨우자, 그는 한창 정신을 차리지 못하더니만 이내 우리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박 비서님! 그, 도련님……? 여기는 왜…….”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왜 다들…….”
박 비서의 추궁에 경호원이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곧장 대답했다.
“안,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그게, 황 변호사님이 오시더니만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돌면서 다들 하나둘 씩 잠들어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걸 보고 연락드리려는 순간…… 저도.”
“도련님!”
황대호. 나는 그 입에서 나온 이름에 허탈해졌다.
또, 또 너구나. 또 네가 나를…… 가하를.
나는 그 대답을 듣자마자 별채로 달려갔다. 설마. 가하를, 황대호가 가진 그 정신계의 능력으로……. 내가 별채에 도달하자마자 보이는 것은, 복도에 널브러진 조아현이었다. 가하의 엄마.
“…….”
그녀가 손에 붕대를 감고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자, 겨우 진정했던 내 가슴이 두근, 두근 뛰었다. 나는 죽은 듯이 누워있는 그녀를 넘어서 복도를 걸었다. 옮기는 발걸음에 삐걱, 삐걱 대는 소리가 가슴속에서 나는 것만 같았다.
가하는, 방에 있을까. 있을 거야. 있어야 해. 어제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나는 복도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황대호의 초능력이 남긴 잔해의 냄새를 맡으면서 방문 앞에 섰다. 손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열려 있는 문 안쪽은 움직임도,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문을 열면서, 내 옆에 있겠다고 했던 말을 하던 가하의 모습을 눈앞에 그렸다. 그저 가하가 곤히 침대 위에 잠들어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며 장지문을 밀어서 열었다. 그저 악몽을 꾸어서 한 번 놀라서 일어났거니, 싶게…….
“……나, 왔어 가하…….”
그렇지만 방 안에는 정돈 되지 않은 침대 시트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가지런히 있을 뿐이었다. 아침과 같이, 예전과 같이, 과거와 같이. 나는 텅 비어 버린 방 안의 모습에 진정할 줄 모르는 애꿎은 가슴팍을 때렸다.
가하. 가하가, 다시 사라졌다.
“도련, 님. 헉, 헉. 괜찮으십니까? 가하 도련님은…… 어디에…….”
박 비서가 흐트러진 슈트 차림으로 나를 쫓아 왔다. 그가 살핀 곳에도 가하는 없던 모양이었다. 그제야 이 혼란스러운 파동의 의미를 깨달았다. 거친 풍랑과도 같이 흔들리던 가슴팍의 고동마저도 점점 멀어지면서 희미하게 울리고 있었다.
가하가, 어딘가로 먼 곳으로 가고 있었다.
나를 두고, 나를 버리고.
“……연락해.”
“……예. 누구한테, 할까요.”
그리고 아마, 이 집에 잔뜩 감도는 냄새의 주인을 따라서 가 버린 것이 분명했다.
“……황대호.”
“……예.”
박 비서는 다시 제 핸드폰을 꺼내서, 황대호에게 연락을 걸었다. 연결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나는 박 비서의 핸드폰을 받아서 내 귀에다 가져다 대었다.
한바탕 비가 온 후의 정원의 풀밭에서는 빗물이 질척하게 감도는 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나는 마루에 서 있던 발을 움직여서 젖은 풀밭 사이로 걸어갔다. 질게 젖어서 늪 마냥 부드럽게 발이 빠져드는 것을 느끼며 규칙적인 신호음을 들었다. 한 발, 한 발 딛을 때마다 푹푹 빠져드는 발을 붙잡는 진흙이 성가셨다.
그리고, 마침 전화기에는 특유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황대호입니다.
“…….”
―손님, 곧 이륙할 예정이라서 핸드폰 사용은…….
―알겠습니다. 잠시, 잠시만요.
그의 주위로 온통 시끄러운 소음이 뒤섞여서 들어왔다. 그 짧은 말에 나는 그가, 가하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 것이다. 저 하늘의 새와 같이 자유로운 하늘 위로, 이 땅에 나를 혼자 남겨 두고.
그는 어딘가로 움직이는지 이내,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소리가 조금은 멎어들었다. 그리고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불렀다.
―송주현.
“……가하, 어디 있어.”
나는 정원의 가운데에 서서 회색빛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빛이 한 점도 보이지 않는 구름은 고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저 위에……. 가하가 있다. 한국을 벗어나면 찾는데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괜찮다. 이 가슴에서 울리는 파동을 따라서 쫓아가서 찾으면 된다.
이 세상 어디에 있다 한다 해도, 난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설명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것들로 단단하게 이어져 있으니까.
죽지 않고서야 끊어질 수 없는 그런 인연으로.
그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황대호는 픽 웃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
“……내가 각인 했어. 내…… 에스퍼야.”
왜 안 되겠는가. 나는 그의 유일한 가이드고, 죽을 때까지 함께 할 반쪽이다. 그렇지만 그는 가하와 같은 에스퍼다.
그러니, 아무리 가하를 사랑해도, 이어질 수 없는 것을 안다. 아무리, 각인을 시도해도 그와 가하는 연결 될 수가 없다. 내가 이미 그 애의 세상 전부를 차지했으니까.
내 말에 그가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가하는, 네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 내가, 다 말했어. 그래서…….
“……뭐?”
―너와 이어진 그 각인, 끊어 달라고 했어.
그렇게 전화가 뚝, 끊겼다. 나는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기계적인 안내 음성만 나올 뿐이었다.
―전원이 꺼져 있…….
“……도련님.”
미친 듯이 다시 전화 발신을 시도해도, 돌아오는 것은 똑같은 대답이었다. 박 비서는 그사이에 내 뒤에 서서 나를 불렀다.
아, 황대호. 그냥, 죽여 버릴 것을. 그때 가하에게 입을 맞출 때, 흔적도 남기지 말고 죽여 버렸어야 하는데. 결국 내 가하를 데리고 이딴 식으로 할 것을 알았더라면. 가하가 그 애를 위해 슬퍼하면서 울고, 속상해하는 얼굴을 한다고 해도 그냥…….
내가 짜증에 겨워서 핸드폰을 정원에 퍽, 던져 버리는 순간.
내 가슴팍에 찌릿한, 통증이 흘렀다.
“……헉.”
상처로 아릿한 가슴팍의 셔츠 위로 손을 올리자, 박 비서가 다가와서 내 팔을 붙잡고 부축했다.
“도련님!”
그리고 내 가슴 너머로, 미미하게나마 느껴지던 가하의 파동이 뚝, 끊겼다.
“……안, 돼…….”
마치,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안 돼, 안 돼, 안 돼……. 가하, 가하, 안 돼…….”
그 애가, 죽은 것처럼.
그렇게 나와 그 아이에 이어져 있던 심장 속의 연결이 흔적도 없이 끊겨 버렸다.
예전에, 흔적도 없는 아이를 찾던 과거로 돌아가고 말았다.
“가하…….”
나 홀로 서 있던 그 자리, 그대로.
텅 빈 세계에서 푸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