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61)

* * *

정신을 차리니, 텅 빈 공간에 나 홀로 있었다.

하얗고, 끝이 보이지 않는, 아니. 끝이 없는 공간 속. 아무 것도, 아무도 없는 무한의 공간 속. 눈이 멀어 버린 것처럼 온통 하얀 곳.

마치 가하가 만든 세상처럼 하얀색 투성이.

그 안에 서 있는 나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하얗기만 한 곳에서 그나마 색깔을 갖추고 멀쩡하게 달려 있는 손과 발을 확인했다. 앞으로 한 발 디디니, 백사와 같은 모래가 발끝으로 자잘하게 달라붙었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분명, 비행기 안에서 폭주를 겪었을 텐데. 추락하던 비행기와 함께 혼란의 도가니에 있었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며 발밑의 모래를 쥐었다. 바닷물만 들어 와 있었으면 어디 이국의 해변이라고도 생각될 정도였다.

“…….”

‘그래, 소중한 그 애에게 무심코 걸어둔 ‘보호’ 가 터졌지.’

손바닥에서 스르륵 빠져나가며 소담하게 쌓인 하얀 모래의 언덕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가이드들이 가지는 자체 회복력에서 보여 주는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순간에 과도한 힘을 써 버린 탓에, 그 애의 부름과 함께 돌아오는 힘의 반동을 몸이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회복의 꿈은 이제껏……. 한 번, 두어 번 정도 꾸었던가. 아무리 지능이 앞서간다고 해도 육신의 나이는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니 그 반동은 어린 몸에서 영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그 애가 무사하기만 한다면…….

나는 어떻게 되어도 딱히 나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게 나는, 등급이 높은 가이드라서 이러한 반동도 이런 식으로 한숨 자고 나면, 자체 회복이라는 허울 좋은 능력으로 금방 낫게 되곤 한다.

그렇지만 그 애는 아니다.

별다른 능력도, 등급도 없어서 어디 한 군데 스쳐도 바로 발갛게 부풀어 오르고 마는 연약한 아이인 것을.

“……괜찮은 건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분명, 박 비서에게 잘 데려오라고 했는데. 황대호 네 큰형에게도 돈이나 부모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으니, 아이만 온전히 데리고 오라고만 지시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나를, 내 힘을 통해서 부르고 있던 그 애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나는 다시 떠오르던 그 처절한 부름과 함께, 평안했던 가슴팍이 다시 속도를 더하는 감각 때문에 다시 가이딩을 순환시키며 애써 가라앉혔다. 얼른 깨야 한다. 정신은 잘 돌아가는 것을 느끼자니 다 회복이 된 게 틀림없다.

이 꿈에서 깨서, 그 애를 옆에 두고서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잘 살펴봐야 한다. 그 애는 아픔 따위를 참는 것에 익숙한 애라서, 아무리 아파도 제대로 말도 못하니까. 상처도 아픔도 애써 숨기고 마니까. 그래도 이 정도로 내 힘을 빼 갈 정도라면, 아마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울고 있었다. 울면서 부를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건 조금은 기쁘지만.

생각보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가하.”

그러니까 소중한 것들은 잘 숨겨 두어야 한다.

대체로 그런 것들은 연약하고 부스러지기가 쉬워서 남의 손에 타게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 소중한 새가 자유롭게 살아가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옆에 묶어 뒀어야 한다. 의심 많고 예민한 아이를, 놀라지 않게, 천천히 다가갈 생각으로, 나만이 그 애의 유일한 무엇이 되기를 바랐던 생각이 어딘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터질지 모르는 보호를 무심코 걸어 두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 공간에 오는 일은 없었겠지만, 가하가 이렇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곱게 빻아져서 발밑에 펼쳐진 새하얀 모래를 쥐었다. 그러자 모래는 손바닥을 넘어서 떨어지며 공중에 연기처럼 흩날렸다.

그 순간, 공간에 커다란 파장이 둥, 하고 울렸다.

동시에 내 발 밑의 모래가 그 파동과 함께 일렁이며 중력을 거부하듯이 알갱이들이 위쪽으로 하나 둘씩 올라가면서 이 무한의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이윽고 공중에서 하얀 모래 폭풍을 일으키는 가운데 나는 휘날리는 머리와 옷자락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 자체 회복된 정신의 끝은 언제나 이렇다. 나는 선명한 정신이 가두어진 이 혼란스러운 공간 속에서 몸을 편히 누워서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나면, 눈물 젖은 눈으로 내게 매달려 오는 그 애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 * *

띠, 띠, 띠…….

내가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꿈속의 공간과 같은 색을 하는 하얀 벽이었다. 그 안에서 규칙적으로 울리는 기계의 소리가 들려오고, 그리고 희끄무레한 빛이 벽 가운데 위치한 창문에 블라인드 밑에 맺혀 있었다. 눈을 감기 전 보였던 하얀 모래 폭풍과 같은 가습기의 연기가 연신 뿜어지고 있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저, 박 비서입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머리맡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습기의 연기 사이로 황급히 일어나는 박 비서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응.”

침대에 누워 있던 나는 일어나 보려고, 조각조각 나 버린 근육을 움직여 보려고 바늘과 긴 호스가 달려 있는 손을 침대에 짚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앞으로 어설프게 쓰러지는 나를 부축해 주는 박 비서의 팔에 기대서 몸을 일으켰다. 병원인가.

“의사 좀 불러오겠습니다. 잠시만 앉아 계세요.’

“…….”

“맹 박사님 호출 부탁합니다. 유동식으로 우선 식사 준비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나는 그의 부축을 따라 그새 세워진 베개에 몸을 기대었다. 그는 옆에 있던 간병인에게 지시를 내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말을 마치고 돌아왔다.

“……도련님.”

“가하는?”

나는 카테터와 산소측정기 따위가 달려있는 손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덜덜 떨리는 손의 진동을 멈춰 보려 했다. 그렇지만 계속 가슴팍에서 역주행을 하는 힘의 순환과 같이, 한 번 떨리기 시작한 손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박 비서는 간병인을 병실 밖으로 보내고 내 침대 옆에 서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기대한 것과는 조금 다른 광경이었다.

“……죄송합니다.”

무거운 목소리로 전하는 말에는 애써 캐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대답이 있었다. 나는 말을 듣지 않는 손을 침대 시트 위에 툭 던졌다. 여전히 경련하듯이 손은 눈에 띄도록 떨리고 있었다.

나 홀로 쓰는 병실에는 내가 바라는 아이도 없이, 쓸데없이 커다란 크기를 자랑하고만 있었다. 박 비서의 대답도, 지금의 상황도 내가 바란 결과는 결코 아니다. 덕분에 내 기분은 저조를 달렸다.

“그동안 시간을 많이 주었던 것 같은데.”

“…….”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해.”

“……도련님.”

그는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나는 계속해서 흐름이 막힌 힘을 풀었다 쥐었다 속으로 반복하며 손의 경련을 비롯한 이상 증세를 멈춰 보려 했다.

설마 가하는 아직도 망한 집에서 버티고 있는 건가. 오늘이 며칠이지. 나는 그제야 머리맡에 놓인 전자시계의 날짜를 확인하면서 그를 채근했다. 벌써 비행기가 출발했던 날짜부터 3일이 지나 있었다.

“분명 내가 갈 때쯤, 황 전무가 움직였다고 보고 했던 것 같은데. 내 힘을 당겨 쓸 정도면, 제법 요란하게 한 거 같고…….”

“……예. 밑에 사람들 데리고 독촉 들어갔다고 보고 들어왔습니다. 다만…….”

박 비서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며 침울한 표정을 드러내었다.

“대호 도련님이, 독촉 작업 중간에 시간을 달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황대호? 나는 예상치 못한 이름이 나온 것에 떨리는 손을 보던 것을 돌려서 박 비서를 바라보았다.

“……뭐?”

“그래서, 가하 도련님을 바로 데려오지 못하고 잠시 시간을 주었다고 합니다.”

나는 논의했던 것과 달리 흘러가는 보고 결과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 작업 이후로 바로, 내 옆에 데려오기로 했는데. 그걸 중간에 이런 식으로 방해할 줄이야. 아무리 제 동생이 부탁했다지만…….

“그래서, 지금 어디 있는데. 어디 다친 건 아니겠지?”

설마 병원인가. 어디가 다쳤나, 누워 있어서 여기 있지 못하는 건가? 내 재촉에 그는 애써 올렸던 고개를 다시 숙였다.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그는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하더니만 내 재촉에 이윽고 대답을 어렵게 꺼내었다.

“그게……. 대호 도련님이 시간을 둔 그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지셨습니다.”

“…….”

사라졌다니.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머릿속으로 그려 둔 그림에 생각지도 못한 선과 색이 끼어들었다. 결코, 바라지 않던 그런 선과 색. 내가 온통 채울 것 같은 푸른 물감의 흔적 아래에 알 수 없는 색이 덧칠해지는 그런 기분. 나는 박 비서가 내놓은 대답에 안 그래도 지끈대는 머리가 멍하게 번져 갔다.

“그 집에서 황 전무네 사람들이 떠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도련님이 발작을 일으키실 때쯤, 집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났다고 합니다. 아마, 도련님의 폭주와 관련한 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갈 곳도 없는 애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분명 그 애 어미는 며칠 전에 집을 나가 버렸고, 있는 것이라고는 술에 찌들어 버린 아버지와 눈도 뜨지 못한 동생이 딸린 것을 아는데. 미리 매수해 둔 일가친척은 다 서울 어디에 사는 줄로 알건만. 사라졌다니. 어이가 없는 대답에 내가 가만히 그를 쳐다보고만 있으니 박 비서는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했다.

“뒤늦게 보고를 듣고 찾아가니 아버지로 추정되는 시신 외에는……. 아무도 남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변에 빈 집이 많아서 목격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찾아. 친척집이나, 예전 학교 친구들 집, 다 수색해. 아마 다친 건…… 아닐 거고. 온전한 애 하나야 금방 찾겠지. 눈에 띄는 외모니까.”

그 애의 아버지로 추청 되는 시신 말고는 없었다는 소리에 나는 계속해서 떨리는 팔을, 떨리는 다른 손으로 잡고서 기댄 베개에 좀 더 몸을 깊숙하게 뉘였다.

그 애는 죽지 않았다. 내 힘을 그렇게 빼내어 갔으니 분명, 어디 하나 아픈 곳 없이 무사할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만약 어디 다친 곳이 있다면…….

내 몸의 무게에 따라 푸욱 꺼지는 베개의 움직임과 함께 박 비서는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미 경찰과 협조 아래 추적하고 있습니다만. 다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목격자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이제는 조용히 할 필요 없어. 당장, 내 눈 앞에 찾아내도록 해.”

가하가 어디 다친 곳이 있기라도 한다면, 그 죽은 아버지든, 황대호 네 사람들이든지 그와 똑같이 만들어 줄 것이다. 애꿎은 화풀이라고 해도 좋다.

그 애가 다친다면 나는…….

내 세상은 다시 까맣게 죽을 것이다.

나는 다시 지끈대는 이마를 카테터를 꽂지 않은 손으로 짚으며 지시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눈에 뜨이지 않게 하려고 조용히 움직였던 게 실수였나. 황대호가 그 사이에 시간을 달라는 짓거리를 할 줄은 미처 몰랐다. 조용했던 놈이 어설프게 움직였다가 망쳐 버린 결과에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괜찮다, 어린 애지만 유난히 눈에 띄는 외모이니 금방 찾겠지. 좁은 서울 바닥에……. 나는 이마를 짚었던 손을 내려서 불안하게 뛰고 있는 심장 부근을 손으로 누르며 솟구치는 짜증을 애써 눌렀다. 가끔씩 학교에서 가하와 마주칠 때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것을 이런 식으로 내보내다니.

“알겠습니다.”

“나가 봐.”

“예. 더 필요하신 것 있으시면, 여기 콜 버튼 눌러 주시면 됩니다.”

박 비서가 병실을 나가고 나서 나는 참았던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나를 그렇게 부르던 너는 또 어디로 날아간 것인지.

그렇게 나를 애타게 부를 거면서 진작 왜 찾아오지를 않았는지.

눈 한 번 감고 내게 매달려 오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을 안겨 주고, 내 곁에서 보듬어 줄 텐데. 내가 그렇게 의지가 되지 않는 걸까.

아니면 내가 너를 그렇게 소중히 대해 주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

허하게 비어 있는 곁에서 느껴지는 무한한 공허함에 나는 다시 뒤늦게 놓쳐 버린 새를 떠올렸다.

흐리게 흩어지는 가습기 연기 사이로 사라지고 마는 환상 같은 새를.

“윽…….”

나는 구역질처럼 역류하는 힘의 반동에 베개 맡에 뉘였던 몸을 급하게 일으켰다. 참을 수도 없이 욱욱 대는 토기와 함께 벌어지는 입에서는 미처 넘기지 못한 침이 마른 침대 시트 위로, 입을 막은 손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벌써 시작인가. 나는 아직 회복되지 못한 힘이 날뛰는 현상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가까스로 토기를 참았다. 벌써부터 기미를 보이는 가이딩의 반동에 눈을 찡그렸다. 가하가 바로 옆에 있었더라면, 이런 더러운 기분 따위는 느끼지 않아도 될 텐데. 나는 입고 있는 줄무늬 입원복의 소매로 입매를 문지르며 침에 젖은 시트를 발로 구기고 차서 침대 아래로 던져내었다.

“가하…….”

그러니까, 소중한 것은 놓치지 말고 쥐고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놓치고 나면 치유될 수 없는 약점처럼 내 안을 파고들어오니까.

나를 멈추지 않는 불안 안에 가두어 두고 그 소중한 것이 언제 돌아올지를 모르는 채로, 언제 구해 줄지 마냥 기다리게 만들기 때문에…….

나를 이 떨리는 손과 같이 쉴 새 없이 흔들어 버려서 무너지게 만들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점점 돋아나는 예민한 신경의 반응에 다시 한 번 입 안에서 그 먹먹한 이름을 씹어대었다.

‘가하.’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마…….”

생각보다 난 인내심이 적으니까.

* * *

눈에 띄는 외모라고 안심했던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금방 찾을 것만 같았던 나의 새는, 어떻게 된 것인지 사라진 그 행방을 도저히 쫒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나가.”

박 비서는 내 병실 침대 맡에 다가와서 허리를 숙였다. 날이 지날수록 반복되는 사과와 소득 없는 결과에 남는 것은 치솟는 짜증뿐이었다.

어떻게, 이 좁은 도시에서, 이 작은 나라에서 어린 애 하나를 찾을 수가 없는지. 에스퍼와 가이드의 힘은 떨어져 있어도, 아무리 멀리 있다고 해도 서로를 찾을 수 있는 표적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앞선 폭주로 인해서 흔적도 없이 내가 걸어 둔 보호가 사라진 탓에, 내 힘이 느껴지는 파동을 따라서 가하의 궤적을 쫓을 수가 없었다. 참 불행 중에 악재가 겹친 격이었다. 그런 탓에 일일이 인력을 동원해서 찾아야 했다. 그 마저도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박 비서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계속 가이드 센터에도 주기적으로 수배령을 단단히 내려놓았으니, 한 번이라도 방문 하는 순간 기록이 남을 겁니다.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도 다…….”

“당장 나가라고 했잖아! 우욱, 커헉.”

“도련님!”

짜증이 뇌를 자극하며 다시 경련하기 시작하는 내 옆에 서 있던 박 비서는, 내 머리맡에 놓인 비상용 진통제를 내 목덜미에 퍽, 하고 주입했다. 익숙한지 지난번과 같은 자리인 목 언저리로 따끔한 자국과 함께 들어오는 약물이 빠르게 척수를 따라 뇌 안쪽으로 젖어 들어왔다. 진통제에 달린 바늘의 아픔을 따라서 약물이 신경을 먹먹하게 잠식해 가며 시작을 보이던 경련은 빠르게 가라앉혔다. 나는 둔해진 몸뚱어리 중에 그나마 자유로운 눈을 껌뻑였다. 박 비서는 나를 조금 쓰리게 바라보며 내가 기대고 있던 베개를 하나 꺼내서 나와 함께 평평하게 눕혔다.

“……도련님,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맹 박사님 모셔 오겠습니다.”

“…….”

“……진통제가, 다 떨어졌네요.”

눕혀진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허연 천장의 패턴과, 박 비서의 안쓰러운 눈빛뿐이었다. 그는 나를 방 안에 홀로 두고 내키지가 않는지 방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늘 상 상주했던 간병인도 폭주에 휘말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빈자리도 내버려둔지 오래였다. 괜히 내 힘에 책임지는 일을 만드는 것은 질색이었다. 나는 병실 문이 탁, 하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눈을 감았다.

“윽…….”

그리고 그가 나가기 전까지 애써 참았던 고통을 입 밖으로 뱉었다. 사실 맹 박사를 이리로 데리고 온다고 해도 별다른 해결법은 없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폭주하는 에스퍼와 가이드를 진정시키는 방법은 단 한가지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폭주와 관련된 가이드나 에스퍼를 곁에 두고서 꼬여 버린 가이딩을 풀어내는 수밖에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가하가 내게 돌아오지를 않으니, 나는 내 안에 풀리지 않은 매듭과도 같은 힘이 내뿜는 고통스러운 흔적을 그저 약물로나마 간신히 감내하고 있었다. 나는 심장 주위로 폭주가 일으키는 원인 모를 열이 들끓는 감각에 가슴팍의 입원복이 손아귀에 구겨지도록 부여잡고 더운 숨을 토해내었다.

“헉……. 헉, 하아, 아윽…….”

그 애가 돌아오지 않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나도 폭주로부터 회복하지 못하고, 병실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다 못해 아예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었다. 하지만 이곳에 머무른다고 내 안에 꽁꽁 풀리지 않은 매듭과 같은 힘이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가이드 등급이 높은 덕분에 스스로의 괴물 같은 회복력을 과신한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섣부르게 집으로 돌아간 날. 집에 발을 디디기도 전에, 예고도 없이 다시 날뛰는 힘으로 내가 서 있던 정원의 반이 날라 갔다. 그 후로 폭주를, 내 힘을 감당할 수 있도록 스웨덴에 있는 병실을 개조해서 지내는 중이었다.

어떻게 보면, 가두어진 셈이었다. 그 애를 가두려던 덫에, 내가.

그리고 내성이 생긴 진통제의 역할이 금방 끝나고 온 몸을 불사를 듯이 타들어 가는 감각에, 나는 둔해 빠진 손으로 침대를 긁었다.

“흐윽……. 으…….”

나는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머리끝까지 쪼개어드는 고통에 혼미한 정신을 차려보려고 몸부림쳤다. 과도한 힘이 들어간 손은 이윽고 파고 들던 침대의 매트리스 안을 찢어 놓았다. 그와 동시에, 급하게 다시 열리는 병실 문과 함께 여러 명의 발소리가 텅 비어 있는 병실을 쿵쿵, 울렸다.

“도련님! 박사님, 어서 마취제 처방을…….”

“예. 김간. 준비해요.”

박 비서가 맹 박사를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수간호사와 같이 대동한 맹박사가 이제는 낯이 익은 마취과 의사와 이것저것 의논하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말을 한다고 해 봤자 어차피 내게 처방되는 약물은 똑같다는 것을 안다. 처치용으로 놓인 진통제를 다 쓰고 나면 늘 처방 당하는 것은 마취제다.

사람에게는 쓰이지 않는 이 마취제는 맞자마자 정신을 금방 앗아갈 정도로 강력하고 중독적이었다.

“약물 반감기가 짧아지고 있어.”

“아무리 강한 등급이라지만 아이라서……. 이 이상 투여했다가는 좀.”

그런 내 베개 맡에 박 비서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고통이 쑤시는 내 뒤통수를 쓸었다.

“도련님, 조금만 참으세요. 곧 마취제 들어갈 겁니다. 한 숨 자고 계세요…….”

얼마나 더 참으면 이 고통이 멎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참으면, 그 애가 돌아올까.

수간호사가 내 손목 아래 동맥에 깊숙이 새로운 카테터 바늘을 꽂아 넣는 것을 바라보며 헛된 희망을 바라는 눈을 감았다. 이 통증 끝에 내려지는 끝은 지리하게 반복되었던 터라 무엇이 다가오는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깜빡일수록 잠식해 오는 멍한 약물에 취해서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반복하겠지.

그저 그 애의, 따뜻했던 손길을 그리워하며, 곧 꺼져 버릴 꿈속에서라도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까맣게 잠식하다 못해 죽어 가는 정신의 아득함에도 단 하나를 바랄 뿐이었다.

가하.

내 작은 에스퍼.

혼자 남는 것을 무서워하는 애가, 어디에 있을까. 평생을 그 작은 도시 한 번 나가 본 적 없는 아이가 어디서 누구와 있는 걸까…….

나는 그저, 살아 있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폭주하는 힘이 아프게 찔러 오는 온몸의 고통을 꽉 동여매는 약물의 반응에 비로소 정신을 떨어뜨렸다.

‘그래, 살아 있기만 한다면…….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어도 불편함 없이 내가…….’

피곤한 눈을 다시 떴을 때는 저녁이었다. 마취제가 제법 세게 들어갔는지, 꿈을 꾸었는지도 기억이 나지도 않을 정도로 까무룩 잠들었다. 그리고 깨어난 지금은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깊게 잠이 들었을 시간이었다. 병실의 바깥을 향해 귀를 기울여 보아도 돌아다니는 소리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나는 약 기운이 떨어져서 아까 전 보다 잘 움직이는 손을 들어서 푸석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흐으…….”

약 기운이 막 떨어져서 잠이 깼을 이 무렵에만, 아주 잠시 동안. 나는 비로소 평온을 찾고 제대로 된 정신 아래 사고를 할 수 있다. 대체로 생각하는 것들이란 그런 것들이다. 뒤틀려 가는 내 세상에서 그나마 온전했던 것들을 떠올린다. 하얗고 파랗던 나의 세상이 까맣고 붉은 색으로 오염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 내 곁에 있었던 가하의 평소 모습을 생각한다.

도대체, 어떻게, 누구와,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어미가 도로 돌아와서 애를 찾아간 것도 아니고.

내가 이곳에 갇히는 바람에 너는 내가 가진 파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엄한 하늘을 헤매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이 헛된 망상이 사실인 것처럼 그 어디에서도 가하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도 그 아이의 친인척들의 행보를 감시하고 떠올리며 고민했다.

빠져 나갈 수 없는 미궁 속에 나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시 외톨이로 남아, 하늘로 날아간 새를 그리워하면서.

나는 매번 곁에서 손을 잡아 주던 그 아이의 추억을 떠올리며 블라인드 너머로 스며드는 달빛을 따라 시선을 옮겨 카테터가 꽂혀 있던 손을 살펴보았다. 카테터와 호스가 연결된 손과 나머지 손. 이 열 손가락 끝은 하얀 붕대로 가볍게 쌓여 있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병실 침대의 매트리스나 콘크리트 벽을 찢고, 파고드는 행위로 인한 결과였다. 마취제에 절어 버린 채로 잠들어 있던 사이에 손끝의 상처가 터졌는지, 손끝의 붕대를 넘어서 불그스름한 빛깔이 감돌았다. 아마 자면서도 어디를 긁었겠지. 그래서 치료를 해도, 손끝이 아물어 딱지가 들러붙기도 전에 쉽사리 터지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혹시…….

“……다행이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더듬으면서 다시 한 번 안심했다.

그 애는 내 얼굴을, 웃는 얼굴을 예쁘다고 좋아하니 다시 만났을 때를 대비하여 언제나 성한 얼굴로 있어야만 했다.

손가락이나 팔다리가 어디 부러지고 상처가 나더라도…… 그 애를 만났을 때에, 전과 같이 변함없이 웃어 주기 위해서는 얼굴 어느 곳도 상한 곳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야 나를 알아보고 다시 돌아올 테니까. 내 색깔을, 신호를 보고 다시 날아올 테니까.

그래, 언제가 되었든 나는 그 애에게 그때와 같은 사람으로 만나서 안아 줘야 한다.

그런 내가 조금 안온함을 되찾고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폭주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 조용했던 병실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도련님. 깨어나셨습니까.”

“……그래.”

박 비서는 마취제 잠들기 전에 어디를 다녀왔는지, 조금은 캐주얼 해진 옷차림으로 내 곁에 다가왔다. 그는 옆구리에 종이 서류 더미를 끼고서 의자를 가져와 내 옆에 앉았다.

“가하, 찾았어?”

“……가하 도련님은 아직 입니다만…….”

영 면목이 없는지 다시 자신감이 푹 떨어진 박 비서의 얼굴에 짜증이 난,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나가보라는 뜻에도 오늘은 박 비서가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더 남은 얘기 없으면 나가.”

“저, 오늘 맹 박사님이 제안한 게 있습니다만.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는 조급한 얼굴로 내게 서류를 내밀었다. 보나마나 마취제 강도를 높여서 진정시키겠다는 소리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내 반응에도 박 비서는 내게 서류를 억지로 안겨 주며 설명했다.

“어제 가이드 센터에 가하 도련님 어머니가 방문했습니다. 그 자료를 분석하다가 알게 된 겁니다만.”

보여 주는 서류에는 가하와 그 애의 어머니가 가진 파장의 동질률을 분석한 그래프가 그려져 있었다. 둘은 에스퍼와 가이드라는 상이한 특성이었지만 핏줄로 이어진 탓에, 파장은 꽤 높은 확률로 동질하다는 분석 자료.

‘가하의 엄마?’

그 말에 이끌려서 서류를 찬찬히 읽고 있는 내게, 박 비서가 말을 빨리했다.

“보시다시피, 두 사람의 파장이 같아서……. 맹 박사님의 소견으로는 도련님의 폭주를 가라앉히는데 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나보고 그 여자랑 접촉을 하란 말인가? 그 욕심이 드글거리던 그 더러운 여자와? 맹 박사는 그렇다 치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박 비서의 태도에 내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자 박 비서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옆에서 내게 가하와 그 여자가 핏줄이라는 것만 빼면 닮은 곳이 없다는 것을 넌지시 피력하곤 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우선 도련님의 폭주를 진정시켜야 어떻게든 능력을 쓰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일반인이라, 잘 모르지만 그 여자가 가하 도련님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전에, 도련님이 가이드들은 자기 에스퍼에게 남긴 각인을 따라서 찾을 수 있다고 하셨다는 말이 생각나서 그럽니다. 파장이 비슷하니 어쩌면…….”

박 비서의 말과 함께 그나마 멀쩡한 상태인 내 머리에 작은 생각이 스쳤다.

언젠가 한 번, 스웨덴의 숲에서 아버지와 엽총으로 사냥을 하던 날을. 그는 풀숲에 가려진 사슴 하나를 향해 총을 쏘았다가, 잡고 난 뒤에 알았다. 그가 잡은 것이 성체가 아닌 새끼라는 것을.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죽어 가는 새끼 사슴을 보다가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지.

「그렇지, 우리 저 나무 뒤에 있자.」

황급히 내 손을 잡고 사냥개들과 함께 커다란 전나무 뒤에 숨는 아버지를 그때에는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피를 흘리고 낑낑 대는 새끼의 울음에 어미와 그 짝인 것이 분명한 수컷이 같이 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아버지는 엽총의 총부리를 겨누어 몽땅 잡아들였지.

「잘 봤지? 원래는 새끼는 잡으면 안 되지만……. 가끔 저렇게 쓸모가 있어.」

그렇다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작용하지 않을까. 그 애는 언제나 부모를 싫어하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그들의 얄팍한 정을 갈구하던 것을 알았으니까. 그 보답 받지 못하는 마음을 그나마 내 곁에서 위로 받던 것을 나는 모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건…… 아주 재밌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카르마 시스템이라는 게 영 도움이 되지 않다가도 이럴 때는 너무나도 반가울 따름이었다. 마침, 그 애의 어미는 가이드이지 않던가. 그러니 어떤 면에서 그 둘은 카르마 시스템이 엮어내는 그물에 걸려있는 셈이었다.

아, 바보같이 그걸 놓치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를 붙잡아 둔다면 어떻게든, 가하가 그녀에게 이끌려 올 것이다. 게다가 그 애의 어미가 갈구하는 것은 내가 넘치도록 가지고 있는 것이니, 또 얼마든지 옆에 두고 있을 수가 있다. 그 애가 돌아오는 그날이 오기까지 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다 제공할 수 있었다. 그녀의 욕심은 그런 것들이니까.

돈, 권력, 명예.

이미 커져 버린 평소의 씀씀이를 그만두지 못하고 빚에 쫓겨서 도망 다닌다는 보고를 듣고도 그냥 흘렸던 지난날의 나를 찢어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가진 힘이 폭주로 묶여 버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게, 지금의 제안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물론 평소 같았더라면 그런 손해밖에 없는 도박 따위는 하지 않겠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아주 우연하게 부모자식이라는 혈연, 그 안에 엮인 가이드-에스퍼, 카르마에 얽혀 있는 가하가. 그 애가 내게 돌아온다면. 그것보다 더한 수지는 없다.

나는 순간 구겼던 표정을 피고 웃었다. 그러자 박 비서가 설명을 하다 말고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괜찮……으십니까?”

“……응. 불러. 당장 데려와.”

박 비서에게 서류를 돌려주며 가볍게 명령하자 박 비서는 제가 제안해 놓고서도 살짝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겠지 나는 오랜만에 찾은 여유에 웃었다.

“……내가, 잠시 잊고 있던 게 있어서. 방금 떠올랐거든.”

“……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준비를 하러…….”

“그래. 잘, 데려와. 온전하게.”

아주 온전하게. 나는 그녀가 가진 최고의 효용을 생각하며 오랜만에 즐겁게 웃었다. 아, 역시 너와 나는 어떻게든 만날 운명이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늘이 내게 이런 좋은 기회를 줄 리가. 박 비서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거두고 내게 인사했다.

“예.”

그리고 다음날, 그녀는 이전보다는 퀭한 얼굴로 나와 마주했다. 그동안 맞닥뜨린 풍파에 찌든 눈에 여전히 서린 욕심은, 어떤 면에서 보면 참 변함이 없었다.

“아줌마.”

“……그, 부채 같은 건 애 아빠 이름으로…….”

아마도, 내가 황대호네 큰 형이 지운 어음, 즉 돈을 달라고 부른 줄 아는 모양이었다. 뭐, 어느 정도는 맞았다. 그 돈이 의미하는 목적만 같을 뿐이지만.

“얼굴이 많이 상했네.”

“…….”

“가하가 보면 슬퍼하겠어.”

“……가하가, 나를 찾니? 그러니?”

가하를 말하자마자 언뜻 희망찬 얼굴로 나오는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제 욕심에 애를 보내 놓고, 버려 놓고 이제 와서 찾는 모습이 우스웠다. 가하가 당신을 찾는다고?

그럴 리가. 그 애는 죽기 직전에도 나를 찾던 애다.

“아니.”

“……날 부른 이유가 뭐니. 할 말 없으면…….”

비참한 꼴에도 자존심은 있는지 내 장난스러운 대답에 얼굴을 붉히는 모습은 볼 만 했다. 내가 단순한 목적을 딱 잘라서 말했다.

“내 옆에 있어.”

“……뭐?”

“돈 줄게.”

“너, 지금 어른한테…….”

되도 않은 예의범절 따위는 우리 사이에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녀의 존재가 필요하지 그녀와 별다른 연결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고용인과 피고용인, 그 정도면 족했다.

“난 아줌마가 지금 필요해. 그리고 아줌마는 돈이 필요하잖아. 아니야?”

“…….”

“줄게 돈. 원하는 만큼.”

“너, 뭘 원하는 거니? 나는…….”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그러면서도 내가 건넨 제안을 놓치기는 싫은 눈치였다. 그렇겠지. 이미 돈이 주는 것들에 중독되어 버렸으니.

“그건 알 필요 없어.”

그리고, 내 목적을 안다고 해도 당신은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박 비서를 향해 가리켰다.

“내가 주는 돈, 필요 없으면 당장 나가.”

“…….”

그리고 그녀는 그날, 내 간병인으로 일한다는 계약서에 사인했다.

조아현. 그게 계약서에 적힌 그녀의 이름이었다. 가하와 닮은 얼굴을 한, 가하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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