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기다리던 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새를 찾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나에게서 안락한 계절을 찾는 철새와 같은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 중에 내가 찾던 새는 결코 없었다. 내 안에 멈춘 시간을 흐르게 하고, 손에 두고 길을 들이고 싶은 새는 없었다. 그렇지만 높은 곳에 있을수록 올라오고 싶은 것들은 넘치기 마련이었다. 애든, 어른이든 그건 별 다를 바가 없다.
까만 욕심들로 더럽혀진 까만 새 떼. 사람들은 튀기인, 피가 섞인 나를 두고 더럽다고 하지만, 정작 더러운 것들은 그들이었다. 내 안에 간직해 둔 소중한 푸른색을 더럽힐 까만 새들이 싫어 별채에 혼자 지내며, 그 지저분한 관계를 피하는 것을 두고 어린 애가 참 유난스럽다고 까악까악 울었다.
나는 그저 내 세상의 색깔을 지키고 싶을 뿐이었다.
소중했던 그 새가 하늘을 날아다니다가도 지상에 남은 나의 푸른색을 보고 언제든지 돌아 올 수 있도록 지키고 싶었다.
그러자 새들은 이제 다른 사람을 향해 울었다. 말은 발도 없는 것들이 틈만 보이면 기어들어오기가 좋아서, 할머니란 사람에게 덤벼들었다. 선한 사람을 괴롭히던 사람의 말로는 비참했다. 세간의 사람들이 속닥대던 음습한 말은 덩굴처럼 타고 올라서 결국 할머니를 집어 삼켰다. 헛것을 보고 헛소리를 하기 일쑤였다.
「나만 보이나요? 저 파란 새.」
나이에 비해 이르게 치매가 온 할머니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망각한 채로 요양원에 갇혀 살다가 사고로 죽었다. 시간을 거꾸로 달리는 그녀는 소녀가 되어 요양원의 사람들을 난처하게 하는 장난을 즐기며 살았다고 했다. 최후를 지켜 본 간병인의 말로는 창문에서 그녀만 보이는 파란 새를 잡겠다고 설치다가 발을 헛디뎠다고 했다.
「잡기 전에 이미 몸이 넘어가셔서요.」
간병인은 이미 숨을 거둔 할머니의 마지막을 생생하게 전했다.
「그, 막 파란 새가 오라고, 오라고 해서, 갔다고 하시면서. 웃으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새를 가둔 사람의 최후에 걸맞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집에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없었으나 어려서부터 저 까만 세상으로 나가지 않도록, 별채에서 푸르게 살던 것이 버릇이 들은 탓에 집밖을 나가지 않았다. 넓은 집에 홀로 남은 튀기인 나를 신경 쓰는 할아버지가 어느 날, 나 혼자 있는 별채로 또래의 아이를 데리고 왔다. 낯선 얼굴은 아니었다. 집안 행사 때 이따금씩 보던 애였다.
“주현아, 할애비 동무 아들 녀석이다. 앞으로 잘 지내려무나. 자, 대호야. 가서 주현이 말 상대라도 해 줘라.”
“……예.”
우락부락한 얼굴들 틈바구니에 어울리지 않게 정원석에 서 있던 짧은 머리의 애. 그 애는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면서도 내 앞에 우뚝 섰다. 마루에 앉아 있던 나는 할아버지를 보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
“친구는 마음에 드니?”
“……응.”
“다행이구나.”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나갈 것이었다. 애들은 내 눈을, 내가 고수하는 침묵을 무서워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할아버지는 내 반응에 나름 만족스러운지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내가 쳐내는 손길에 얼굴을 찡그렸다. 옆에 있던 박 비서가 품에서 손수건을 건넸다.
“아이고.”
“회장님.”
“……녀석, 아직도 그러는 거니.”
“…….”
그의 주름진 손에 엷은 핏물이 들은 것을 보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닿는 게 싫었다. 닿으면, 그들과 같이 까맣게 번져 가다 못해, 나를 잃을 것 같았다. 그런 걸 두고 집 사람들이 결벽증이라고 했다. 내가 타인에 대해 결벽증이 있는 것을 집안사람들은 다 알았다. 그래서 나를 대할 때 더 조심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손을 뻗는 게 아니라. 내가 닿는 것을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부러 그런 것이다. 할아버지는 허연 머리를 멋쩍게 털면서 박 비서와 함께 그는 본채로 돌아가는 길에 중얼거렸다.
“맹 박사가 녀석이 자라면 좀 좋아질 거라 하는데……. 영……. 이리 사람 가려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걱정이야, 똘똘한 건 좋은데……. 어미가 없어서 그런가.”
“좋아지시겠죠.”
“…….”
할아버지의 긁는 목소리도, 박 비서의 발걸음 소리도 없어지고 나서도 내 앞에 있는 남자애는 가만히 서 있었다. 가을바람 한 번 쐬어 오니 그 바람의 자락을 타고 흘리는 냄새가 있었다. 에스퍼였다. 그것도 나랑 비슷한 등급의.
“……에스퍼?”
“……응.”
그는 나를 곧장 보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의 녀석은 내 눈을 보다가 시선을 슬그머니 흘렸다.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태도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내 눈을 보고 울거나, 겁에 질려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
“……앉아.”
나는 내가 있던 마루 옆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는 우두커니 서 있던 걸음을 옮겨서 열려있던 덧문의 저 끝자락에 앉았다. 또래의 애 치고는 조용하고,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애들에 비하면 나쁘지 않았다. 나를 겁내지 않는 사람 하나는 밑에 두어도 괜찮을 것도 같았다. 귀찮은 일을 대신 알아서 처리를 해 주기엔 제격일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남들이 보기엔 친구 같다고 하지만, 친구도 가족도 무엇도 아닌 근처의 사람으로 잘 지냈다. 그저 서로를 귀찮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그렇지만 그가 나를 겁내지 않는 다는 건, 아마 나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이기에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눈 색은 달라도 보는 것은 같았다.
“대호야, 걔는 누구야?”
“여기는 내 친구, 주현이야.”
나는 그의 별장에서 연례행사처럼 열리는 생일 파티에 축하하러 갔다. 박 비서가 고른 선물을 대충 전달해 주고 식사 자리에 앉는 순간, 촉촉함이 감도는 까만 눈의 새를 보았다. 틈 하나 없이 까맣게 물들어 있는 그 순수한 색깔의 새.
평소 같으면 그 더러운 까만색이 싫어서 무시했을 것인데. 그 하얀 얼굴만 빼면 온통 까만 것이, 왜 내 눈에는 한없이 티 없는 백색으로 가득 차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세간에서는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던가.
우리의 눈이 마주치자마자 새의 입이 조그맣게 열렸다.
“눈이 파랗네.”
“주현이 눈 신기하지? 근데 너무 쳐다보지는 마. 얘 그런 거 싫어해.”
혹시라도 내 심기를 건드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거리를 두는 대호의 주의에 그 새는 호기심을 애써 감추고 고개를 숙이고, 몰래 몰래 내 눈을 들어다 보았다.
보통의 사람이 그랬더라면 시선으로 까맣게 오염되는 것 같아 제법 기분이 나빴을 텐데, 그 애는 달랐다.
애써 숨기려 해도 티가 나는 그 애의 서툰 행동은 애초에 다 보여서 그저 기분이 좋았다. 그래, 귀여울 따름이었다. 맑은 호기심. 순수한 탄성.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 시선의 온기는 내가 가진 색깔을 온전하게 보았다. 다른 사람처럼 더럽히지도, 가지려하지도 않았다.
“아……. 미안.”
그 애는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햇빛을 받아서 반짝이는 결 좋은 까만 털을 흔들면서 나를 훔쳐보았다. 그 모습에 내 직감이 말했다.
그때, 그렇게 허무하게 잡지도 못하고 사라진 새가 긴 여행 끝에 돌아왔다고.
『이 애, 네 친구야?』
『응. 학교에서 내 짝꿍.』
내 안을 더 깊게 들여다보고 싶은지 연신 살피는 구석에 내 마음이 요동쳤다. 그동안 기다렸던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황대호랑 같은 학교라면.’
『귀엽네.』
‘전에 할아버지가 은근히 권유했던 사립학교가 아니던가.’
애들이랑 부대끼는 게 귀찮아서 거절했던 학교에 저 애가 다닌다는 말에 흥미가 솟았다.
『……좋은 애야.』
그리고 대호는 내 반응이 어떻게 튈지 긴장하는 눈치였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라, 나는 잠시 보였던 관심을 다시 갈무리 했다. 모르는 사람이 차린 식사에 손을 댈 생각은 애초에 없어서, 가만히 있는 동안 그저 모이를 먹고, 커다란 까만 눈을 신기한 듯이 굴려대는 그 까만 새를 지켜보는데 내 모든 신경을 더했다. 영어로 말하는 것을 못 알아듣는 것인지 대호와 내가 대화할 때 이해를 못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것마저 내 속에서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마치 내 곁을 떠난 새가 그러했던 것처럼.
까만 것이 속은 참 하얗다. 마치 누구도 밟지 않은 설원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이때의 나이의 아이들은 어느 정도 알아듣기 마련인데. 교육이 좀 덜 되었나.
‘아, 그래서 저 옆에 내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말 한 마디 해 주기를 바라는 애들과는 좀 다른가.’
내가 웃는 동안 옆에서 먹는 둥 마는 둥 나를 바라보는 애들의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빤히 보이는 목적은 단 하나다. 친구를 가장한 연결이겠지. 그 사이에 대호는 제 몫의 음식을 난도질하다가 작은 애에게 물어보았다.
“주현이 마음에 들어?”
“어?”
대호의 말에 그 애가 당황스러운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에 나는 웃었다.
‘거짓말.’
아니라고 하면서도 다시 한 번 나를 보는 것에 여념이 없는 게,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다. 나는 그 깜찍한 말에 웃었다. 내 얼굴 표정에 그 애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웃는 얼굴에 약한 편인가.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애의 모든 행동을 모든 감각으로 샅샅이 따라가고 있었다.
“그렇지? 근데 외국에서는 쳐다보면 관심 있는 줄 알아. 너무 그러지 마. 내 친구인데 질투난다.”
그 애의 얄팍한 대답에 대호는 내심 안심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하. 겁이 나는구나. 너도, 나랑 동류의 사람이니까.’
“어, 어……. 조심할게. 미안. 쏘, 쏘리?”
작고, 어디 물들은 곳 없이 순수한 까만빛의 뻐꾸기. 온통 까만 깃털 아래에 숨겨진 그 하얀 아이.
내가 그렇게 찾던 새라는 게 자명하게 느껴졌다. 그 새가, 그 애가 내 눈을 피하지 않고 깊숙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나는 움켜쥐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일찍이 집으로 돌아갈 것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부모를 닮아 욕심덩어리인 애들이 잔뜩 들어가 있는 지저분한 풀장에 들어갔다.
“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 애가 나를 바라보면, 나는 여전히 푸른색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애들의 장난으로 물에 흠뻑 젖은 옷을 하얀 피부 위에 달라 붙인 채로 풀장에서 달아나는 것을 내 품에 단숨에 채어서 집에 데려가고 싶었다. 그래도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나는 풀장의 턱에 기대어서 내가 준 수건을 꽁꽁 두르고 멀찍이 있는 그 애에게 손짓했다.
『이리와.』
아무리 수건을 두르고 있어도 풀장의 물에서 젖은 살결을 타고 희미하게 흐르는 향기는 내 민감한 후각을 피하기가 어렵다. 에스퍼다.
‘아주 약한, 에스퍼.’
그 사실이 나의 기묘한 식욕을 자극했다. 주춤주춤 내게 걸어오면서도 까만 구슬 같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 저 투명하고도 깊은 색의 까만 망막을 핥으면 까만 초콜릿처럼 달콤한 맛이 날 것만 같다. 그 애가 천천히 풀장에 발을 담그자, 어린 발이 내 손 안에 들어왔다. 곱게 걸러낸 밀가루로 반죽을 한 것처럼 손 안에서 말랑대는 살결에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간지러워…….”
그 애의 얼굴이 탐스러운 열매와도 같이 붉게 물들어 가는 모습이 내 마음을 두드렸다. 내 몸 안에서 요동치는 이 붉은, 가이드의 힘을 넣어 주면 어떠한 얼굴을 할까. 열기에 들뜬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 어떠할까. 이 작은 발을 바르작거리면서 매달려 오면……. 나는 이 작은 애가, 작은 새가 나 때문에 반응을 보이는 게 더, 좀 더 보고 싶었다.
‘저 조그만 입으로 내 이름을 불러 준다면.’
그 생각에 나는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주현.”
“주현……. 아!”
영어를 못하는 게 분명한 아이는 내 서툰 발음에 나를 향해서 의문스러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게 내 이름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는지 제 자신을 둥근 손끝으로 가리키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가, 가하.”
풀장의 물에 젖어서 윤기가 도는 그 애의 입술이 벌어지며 잘 익은 열매처럼 붉은 혀가 빠끔히 보이는 모습에 나는 웃음이 살짝 돌았다. 어디 한군데 달콤함이 맴돌지 않는 곳이 없었다.
‘가하…….’
입안에서 굴려 보는 이름은 절로 입 끝을 올리게 한다.
“가가하?”
작은 심술이 돋아 더듬은 것을 흉내 내자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볕을 받아서 그런가 얼굴이 좀 더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끄러워? 그것도 좋다.
“아니, 아니. 가하.”
알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웃을 때마다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 그 애의 얼굴이 귀여워서 부러 서툰 말을 읊었다. 이리 서툴게 말하면, 그 애의 입이 열리며 한 번 더 말을 해줄 테니. 좀 더 확고하게 입을 벌리자 하얀 이가 살짝 드러나며 읊는다.
“그냥, 가하…….”
“아, 가하……. 가하.”
가하. 저 귀여운 것이 내 이름을 달게 읊는 게 계속 듣고 싶었다. 제 둥지로 다시 날아가야만 하는 새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물속에서 작게 참방이는 이 작은 발을 꺾어서라도, 어디도 가지 못하게, 내 곁에 두고 아껴 주고 싶었다.
그때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가하…….”
나는 파티가 끝나고 느지막하게 밤이 깊은 집에 돌아와서도, 내 손 안에 가늘게 들어왔던 그 부드러운 살결을 떠올렸다. 어디 상처 하나 없이 온전하게 있던 그 하얀 피부, 까만 눈이 호기심에 젖어서 반짝이고, 부드러운 깃털 마냥 팔랑이던 그 머리카락…….
그 하얀 눈과 같은 애를, 내가 가진 푸른색으로 물들인다면, 어떠할까.
나만이 가진 색으로 저 애를 가진다면, 나는 전처럼 외톨이가 되지 않을 텐데.
‘외로이 그 집에 남겨지지 않을 텐데.’
그 발목을 어림잡아 손을 주먹 쥐면서,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발갛게 달아오르던 그 살결을 다시 눈앞에 떠올렸다.
그 입술의 색깔과 같이 내 손자국을 따라서 붉게 젖어 가는 그 살결을.
하얀 눈밭에 새겨진 그 선명한 붉은색.
파란색으로 가득 찬 내 세상에 그렇게 붉은 빛이 천천히 스며들어 왔다.
“……가, 하…….”
기름을 곱게 먹이고 잘 말려 둔 마룻바닥에 누워서 자연스럽게 번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혀끝에 마무리되는 이름은 단순히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달콤하게 젖어 갔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도, 찾지 못하던 것이 우연하게 찾아온 기분은 황홀했다.
어릴 때 찾은 게 다행이다. 아직 남의 손을 타지도 않았으니 더 좋다.
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기 전에 이 집에 가두고 나만 보고 싶다.
‘내가 직접, 예쁘게 흠 없이, 이 손에 길을 잘 들여서 키워 줘야지…….’
온전하게 커서도 내 이름을 부르며, 내 가이딩을 바라는 모습은 어떠할까.
상상만으로도 내 몸 안에서 흐르는 가이드의 힘이 요동쳤다. 나는 쥐고 있던 손을 풀고 작게 웃었다.
“……기대되네.”
워낙에 희미한 냄새였지만, 아까 풀장 물에서 확실하게 퍼지는 냄새에 내 뻐꾸기가 에스퍼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붉은색을 띄는 내 가이딩을 펴진 손 위에 모았다. 에스퍼라니. 허무맹랑한 운명론 따위는 믿지 않지만 내 짝이 얽혀야만 하는 상대라는 건, 없는 운명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에스퍼와 가이드는 한 번 얽히면 어떻게든 서로에게 돌아온다고들 하지 않던가. 이럴 때 운명이라는 건 참 편리하다. 그렇지만 어디 가서 돌아올 일도 없이 그저 내 곁에 머무르게 해서 아프거나 병들지 않도록 기꺼이 잘 키우고 싶었다.
“각인…….”
금 하나 가지 않은 그 순수한 결정체를, 마지막 디저트와 같이 달콤한 것을 고이고이 잘 지켜 주다가……. 적당할 때에, 평생에 죽도록 내 곁에 있을 수밖에 없도록, 각인을 하면 될 것이다. 어느 선택지도 무엇도 없이. 나만이 너의 나뭇가지가 되어 쉬어 가고, 둥지가 되어 살아가고, 자유로운지 아닌지도 모르고 살게 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결국에는 의지할 사람이 나밖에 없도록 해서 돌아갈 곳도, 도망갈 곳도, 받아 줄 사람도 없게 만들면 언제나 내 곁에 있겠지. 내 곁에서 나만 바라보면서 안락한 계절을 맞이하겠지. 이번에는 아무리 안쓰럽다 한들, 절대 놓아 주지 말아야지.
그때와 같이 놓아주고 평생에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혹은 다른 선택지를 향해서 나를 버리고 가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 애는 내가 웃는 것을 좋아하지만……. 난 그 애가 웃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웃음 안에는 감정을 흐리게 하는 것들이 많아서 잘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그녀가 웃고 떠났을 때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텅 빈 하늘을 바라보며 기다리기만 했던 것처럼…….
“…….”
그러니, 차라리 우는 모습이 좋다. 운다는 것은 내 곁에 있겠다는 의미니까. 나는 그날 이후로 홀로 남겨진 넓은 이 집에 돌아올 새를 기대하며 지나간 일을 애써 흘려내었다. 그 까만 눈이 나를 담고서, 내 곁에서 마음껏 울면 얼마나 더 예쁠까. 그 애는 눈물마저도 달콤할까. 아마 그럴 것만 같다.
나를 너무 사랑해서 우는 모습일 테니까.
손끝으로 톡, 하고 건드리면 깨질 것만 같은 그런 새. 연약하기 짝이 없는 투명한 유리를 녹여서 가늘고 얇게 뽑아낸다면 저런 형상일까. 나는 간밤에 몰래 들어간 이부자리 옆에서 희미한 숨을 쉬는 가하의 뺨에 돋은 하얀 솜털을 간질간질 쓸었다. 잠이 깊게 들었는지 눈꺼풀 하나 떨지 않고 달게 자는 모습에 절로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한 이불을 덮고 있는 그 애의 옆에 바짝 붙어서 아침에만 볼 수 있는 그 무방비한 장면을 놓칠 새라 눈에 가득 담았다. 아침을 깨우는 빛으로 반짝이는 얼굴에는 온기가 감돌며 따끈한 색이 활기차게 맴돌았다.
“……귀여워.”
이 귀여운 새와 가까워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까만 것들 사이에서 섞일 수 없는 이방인인 나와 같이 가하도, 낯선 둥지에서 불안해하며 날아다니고 있었으니까. 까만 것들이 보기에 별난 것들인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고 친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 애의 하얀 세계에 파랗게 침범했다.
조금만, 조금만 하던 것은 어느새 확 번져서 나는 그 애의 하얀 세계를 오로지 나로 물들이고 싶어졌다. 그 애의 하얀 삶이 까만 것들로, 악취를 풍기는 욕심에 더럽혀지기 전에 그 애의 전부를, 가지고 싶어졌다. 나는 한 번도 돈에 대한 귀중함을 느낀 적은 없지만, 이때만큼은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한 특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욕심으로 썩어 문드러진 부모의 둥지에서 이렇게라도 데려올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그런 사람들 곁에서 있어 봤자 이 애의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손에 돈을 쥔 사람들이란 늘 그렇다. 갑자기 늘어난 돈이 가져다주는 다양한 선택지가 눈앞에 돌아다니니, 돈이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이라고 늘 착각한다.
그렇지만 돈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 천지라는 것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헛된 욕심에 눈이 멀어서 제 자식이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몇 푼 떨어지고 말 이익에 내 손 안에 보란 듯이 넘겨 버린 것이겠지. 나는 박 비서가 올린 보고를 떠올리며 픽, 웃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자랑을 했다던가. 제 자식과 내가 친구라고…….
‘회장 손주의 유일한 에스퍼라고.’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걸 그 사람들이 말하기 바란 것은 아닌데.
“……네가 말해야지. 내가 네 각인을 할 사람이라고. 유일한 가이드라고 말이야.”
이렇게 온 게 무슨 의미인 줄은 이 애는 알까. 나는 그 작은 머리통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지. 이 애의 부모도 모르는 듯하니. 아마 이 애의 가치를 잘 알았더라면 애초에 말동무라는 형식으로, 이렇게 같이 살아도 된다고 넘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더 큰 대가를 바라면서 버텼을 수도 있고.
‘그래 봤자 그 작은 사업 따위가 망한다는 끝은 같았겠지만.’
그런 것도 모르고 그저 회장의 유일한 손주라는 내 환심 하나 사 볼 수 있을까, 제 사업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싶은 기대를 가지고 손쉽게 넘겨 준 것이 내 계획을 일사천리로 만들었다. 그저 환심 하나로 끝날 것이라면 이렇게 데려오지도 않았지. 뭐 하러 귀찮게 곁에 두고 신경을 쓴단 말인가. 어차피 또래의 애들은 멍청하고 뒤떨어지는 것들이 태반인데, 무어가 재미가 있다고. 아니면 황대호처럼 나쁘지 않은 정도라면 그냥 멀찍이 두고 신경을 쓰지 않았겠지.
“……너는 달라.”
나는 고롱고롱 숨을 고르는 가하의 관자놀이에 코끝을 비비며 레몬 향 사이로 희미하게 풍기는 에스퍼의 향기를 맡았다.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랑 목욕을 해서 그런가, 나랑 같은 레몬 베이스의 바디 워시 향이 났다.
이건 마치 나로 채워져서 점점 나의 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 같지 않은가.
나랑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것을 입혀서 내 세상에서만 날아다니는 모습은 얼마나 귀여울지. 그 행복한 상상에 내 입안에 한가득 웃음이 차올랐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같이 목욕하는 걸 부끄러워했지. 얼마나 길이 들면 그런 것들이 익숙하게 될까. 그것을 옆에서 보는 것도 앞으로 남은 날들의 재미가 될 것 같았다. 나는 가하의 관자놀이에 대었던 코끝을 내려서 보드라운 뺨에다 입을 맞추었다.
‘얼른 길이 들어서, 다음에는 발간 얼굴로 내게 키스를 졸라대면 좋을 텐데.’
“으응…….”
입을 맞춘 뺨과 눈꺼풀이 옅은 잠투정으로 떨리는 것을 보면서 작게 웃었다. 뭐, 사실 다른 것을 졸라대어도 기꺼이 해 줄 것만 같다. 돈이라든지, 값비싼 물건 따위라든지…….
그렇지만 새는 무척 예민하고, 의심이 많다. 그들의 날개는 그러한 특성을 위한 것이다. 조그만 의심에도 날아갈 수 있도록, 낯선 것들에 쉽사리 붙잡히지 않기 위한 것. 그래서 그런가 이 애는 뭐 하나 내게 제대로 요구하는 적이 없다. 내가 해 줄 수 있다고, 원하는 것이라면 다 줄 수 있으니 말해 보라며 작은 덫을 놓아도 제 부모와는 달리 얼른 그 덫에서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필요한 것이 없다며. 내 손을 잡아오니 아니 예쁠 수가 있을까. 제 부모의 뒤를 따르기 싫은 것처럼 영 무해하게, 이리 내 손에 잡힐 듯 말 듯 구니 오히려 내가 더 달아서 이것저것 안겨 줄 정도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내가 같이 놀아 주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하는 눈치였다.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나는 뜨끈한 피가 도는 가슴팍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잘 자고 있는 아이를 내 품에 꼭 안아 버렸다. 북방계인 어머니의 피를 따라 또래보다 넉넉하게 키워진 품은 작은 새 하나를 품기엔 충분했다. 그러자 새는 달 디 단 졸음을 깨고 속삭였다.
“주현……이야?”
“……응.”
“또 왔어? 몰랐어……. 하암, 자느라.”
졸린 눈을 조그만 손으로 비비는 것을 내가 말리면서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야, 예민한 네가 잠이 들기 전에 내가 이부자리에 들어가면 영 긴장해서 잠을 제대로 못자니까. 잠이 들고서 이불 안에 들어온 것을 지금에야 깨달은 애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더 자.”
“웅…….”
손이 한 번 쓸어내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까맣고 맑은 눈을 깜빡이던 것은 나를 바라보았다. 새들이란 본래 벗어나기 위한 감각이 발달한 것들이지만, 동시에 그 날개 아래 숨길 수 없는 호기심도 반대로 공존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가하가 좋아하는 얼굴을 했다. 나는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한껏 웃는 얼굴에 그 애의 눈이 경이로 다시 한 번 반짝인다. 작은 입이 벌어지며 탄성을 낸다.
“와아…….”
“……왜? 왜 와아?”
이 애는 내 얼굴을 좋아하는지, 웃는 얼굴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이색을 띄는 내 눈을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예뻐서.”
“나? 예뻐?”
“응.”
다 좋은 걸까? 내가 너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콤함이 흐르는 것을 참다못해, 한 입에 집어 삼켜 버리고 싶은 것처럼? 나는 한층 짙게 웃었다. 네가 더 예쁜 것을 모르니, 이런 점마저도 어리석어서 귀여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대답해 놓고 뭐가 부끄러운지 내 가슴팍에 얼굴을 숨기는 행동에 나도 모르게 손으로 쓸고 있던 가하의 머리 위에 가이딩을 불어 넣고 말았다.
조금은, 특별한 가이딩.
그것을 가하도 깨달은 것인지 내 품에 숨겨 두었던 얼굴을 빠끔 내밀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모르는 척 부러 눈을 치떴다.
“왜?”
“……어……. 머리…….”
나는 짧게 다듬어진 그 애의 둥근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머리?”
“뭔가……. 따끔하고, 뜨거웠어. 그, 가이딩……처럼. 주현이 너, 내 머리에다가 뭐 했어?”
‘했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몰라. 가하, 이해 안 돼.”
“그래? 이상하네……. 분명 따가웠는데.”
가하는 제 뒤통수에 있던 내 손을 떼어서 찬찬히 보다가, 아무런 흔적도 없는 것을 보고 제 뒤통수를 더듬었다. 그렇지만 이런 무형의 힘이 그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그가 떼어낸 손으로 솜털을 씰룩거리는 가하의 고 통통한 뺨을 톡톡 건드리며, 여전히 고개를 옆으로 갸웃대면서 되물었다.
“아파, 가하?”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아냐.”
“……응.”
가하는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졸린 눈을 감았다. 나는 모르는 척, 같이 옆에 누워서 이불을 다시 목 위에까지 덮어 주었다.
방금 나도 모르게, 각인 이전에 남겨 두는 가이드의 ’보호’를 걸고 말았다.
에스퍼에게 다른 가이드가 각인 따위를 걸지 못하도록 남겨두는 작은 흔적 같은 거라고 할까. 보호라고 불리는 이유에는, 말 그대로 에스퍼를 보호해 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전투형 에스퍼에게나 유용한 것이지만, 가하는 일반인이나 다름없기에 딱히 쓸 일이 없을 것이다.
아마, 어디 상처가 나면 절로 회복되는 정도겠지. 나랑 있는 동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무튼, 내 흔적을 이렇게 남겨 두는 건 제법 나쁘지 않다. 뭐, 내 손에 떨어진 이상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고도 분명하게 각인을 걸고 말 것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요즈음, 황대호가 은근히 바라보는 시선이 거슬리기도 하고. 어차피 같은 에스퍼라서 이루어질 수도 없는 것을 알 텐데, 나와 비슷한 눈을 띄고 있는 녀석의 눈을 뽑아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랬다가는 가하가 슬퍼하겠지. 이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흘리겠지.
내가 아닌, 그 애를 위해.
그건 싫다.
“후우.”
나는 몸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려서, 가하의 목덜미 쪽으로 내 고개를 묻었다. 그러자 내 입술 밑으로 가하 목덜미의 동맥이 뛰는 것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이 여린 목덜미가 적당하게 여물었을 때.
내 것을 이 애에게 품고, 이 목덜미를 한가득 베어물고 첫 피를 머금는 순간. 내 것이 될 것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내 것.’
나는 으레 잠투정을 하듯이 내 입술을 가하의 목덜미에 살짝 살짝 눌렀다.
그때까지만, 잘 간직하고 있기를. 나를 위해 준비해 두기를.
그런 마음을 담아서 쪽, 쪽하고 젖은 입술을 목덜미의 여린 살결에 접붙였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살금살금 내쉬는 숨이 제법 간지러운지 목덜미의 여린 살결 위가 사륵사륵 떨렸다.
“간지……러워. 왜 그래, 저리 누워.”
“……으응. 추워, 나.”
내 대답에 가하의 눈이 느리게 뜨이며 나를 담았다. 나른한 봄기운이 한창인 와중에 춥다는 소리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래도 모른 척 하고 몸을 웅크리고 가하의 팔에 바짝 붙으니 가하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추워?”
“응.”
“그러니까,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그랬잖아. 네 침대에서 누워서 가만히 자. 그러다가 감기 걸리면 아프잖아.”
가하는 괜히 투덜거리면서도 도톰한 이불 밑에 있던 제 팔을 내 어깨 위로 두르고 꼭 안아 주었다. 나보다 한 뼘은 위 아래로 옆으로 작은 것이, 나를 지켜 주고 싶은지 끌어안아 주는 게 얼마나 귀여운가. 나는 가하의 품에 안착해서 얼굴을 비비며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따뜻해, 가하 옆.”
“……주현이 너는…… 추운데서 자라서 그래. 나 별로 안 따뜻해.”
가하는 부끄러운지 웅얼거리더니, 이윽고 이불 밑에 잠긴 내 손을 잡았다. 늘 차가운 온도를 가진 내 손과 달리 가하의 손은 그 붉은 뺨처럼 따끈했다.
뭐가 따뜻하지 않은 걸까. 햇볕만 먹고 자란 것 같은 내 작은 새는.
나는 손 안에 쏙 들어오는 가하의 손을 꼭 잡고 웃었다. 그러자 가하의 손이 한 번 작게 떨렸다가, 가만히, 내 손마디 사이로 스르륵 껴들어 왔다. 동시에 내 입술에 미소가 스르륵 걸렸다.
‘이 작은 것이 언제 클까.’
언제 커서 내 모든 것을 졸라댈 것인가.
나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미래를 향한 즐거운 상상과 함께, 이 상황에 만족하며 눈을 감았다.
곁에 있는 가하, 나를 껴안고 따뜻하게 덥혀 주는 그 작은 품의 체온, 내 손에 빈틈없이 꼭 맞는 손. 모든 것이 맞춘 듯이 완벽했다. 나른한 고양감을 두르고 우리는 그렇게 한낮의 태양 아래 다시 잠들었다. 내가 세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들이 다 완벽했다.
하지만 드물고 귀한 새는 내 생각 외로 순수한 것이었다.
현장학습을 간 날, 급작스럽게 집으로 돌아간 새를 붙잡기도 전에 내가 박 비서에게 지시 했던 일은 잘 터졌다. 가하의 집과 주고받던 거래 물량을 늘리고 그 거대한 이익이 확립한 확고한 기대감을 이용해서 어음을 크게 두었다. 몇 번씩 미뤄 둔 어음은 가랑비에 젖어 가듯이 조금씩 늦게 돌려주었지만 기업의 이름 값 덕분에 그게 무슨 일을 가져올 지는 의심 따위는 할 줄 몰랐다. 운을 크게 타고 사업을 벌리던 자라 손해 따위는 모르고 사업을 굴렸기에 그 자신만만했던 모습을 잘 이용한 것이었다.
그가 무리하게 자금을 빌려 사업 확장을 하던 것의 거래를 막고 의도적인 부도를 내었다. 어차피 화학은 물산 쪽으로 흡수시킬 계획이었으니 우리에겐 별다른 손해 같은 것은 없었다. 그 사이에 둔 작은 덫을 잘 물었다. 나는 정원에서 강아지들 산책을 시키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강아지들은 박 비서를 반갑게 맞이했다. 박 비서는 몰래 다가와서 속삭였다.
“돌아오는 어음을 막으려고 결국 소개를 받고 황 전무네 집안 사채를 빌려 썼다고 합니다.”
“부도 날짜는?”
“다른 기업들과 의논하고서 순차적으로 터뜨릴 것 같습니다.”
그럼 겨울 즈음인가. 전에 분명 할아버지가 그랬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춥고, 힘들 시기에 데려오는 것도 좋지. 끝이 보일 때에 손을 건네어 주면 얼마나 의지가 될까. 나는 흔치 않은 만족을 느끼며 박 비서를 물렸다.
“수고했어.”
“예.”
이렇게 흘러가는 시기와 상황에 묻어서 꼼꼼하게 지시한 것들은 너무 잘 터지다 못해서 의도치 않은 결과도 가져왔다.
내 작은 새가 내 곁 말고는 돌아갈 곳이 없게 하려던 계획이었건만 그게 도리어 자유로이 날아가게 만들 줄은 몰랐다.
제 부모의 등쌀과 처음 겪어 보는 어려움에 금방이라도 내게 올 것만 같던 새는 날아오지를 않았다. 내가 스웨덴에 잠시 가야하는 날까지도.
“걱정마세요 도련님. 돌아오시기 전까지 꼭 확보해 오겠습니다.”
“……너무 늦었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황 전무 쪽 애들이 움직였으니 곧장 확보 될 겁니다.”
박 비서는 전세기를 띄우는 길을 걸어가는 내 옆에 서서 신신당부를 했다. 그래도 나는 짜증이 났다. 내가 여기 있는데, 왜 내 새는 계속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인지.
‘아예 집부터 경매로 넘겨서 길바닥에 두었어야 하는 건가.’
그렇지만 날이 추우니, 혹시라도 냉기에 몸이 상할까 집은 남겨 둔 것인데. 그냥 끝을 보여 버릴 것을. 그럼 금방 왔을 런지. 나는 가하가 떠난 날 이후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피곤한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면서 당부했다. 금방 내게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잡는 대로 연락해.”
“예.”
그렇게 나는 스웨덴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나는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 앉아서 그동안 벌려 둔 덫들을 생각했다.
그 펼치고 있는, 날개를 접고 땅 밑에 한 발, 디디기만 한다면. 그러기만 한다면 단숨에 잡아 올릴 수 있는데.
그 한 발을 디디지 않고 계속 공중에서 날갯짓을 하며 버티는 그 애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의심도, 예민함도 적지 않은 애는 내 생각처럼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래도 그 애를 지탱해 줄 수 있는 가족의 사업은 단숨에 말아 먹었고, 황대호의 큰형이 빌려준 자금. 액수가 제법 되는 그 큰돈을 갚을 여력이나 친지, 무엇도 없다는 것을 알아서 금방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 10시간 남짓 되는 비행을 끝내고 나면 내 집에 고이고이 도착해서 훌쩍이는 목소리를 수화기 너머로 들려주겠지.
‘주현아…….’ 하고.
나는 늘 울음을 참는 아이의 연약한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짜증이 넘치는 가운데에서도 그 애의 물러터진 얼굴을, 표정을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러면 나는 애써 위로하겠지. 서툰 말로 그 애를 연신 도닥여 주면, 그 애는 슬픔을 애써 참으며 나를 기다리고, 내 품을 바라고만 있겠지. 그 후에 집에 돌아가면, 내 품에 절로 안겨서 엉엉 울지도 몰라.
그 쓰디쓴 눈물은 얼마나 달콤할까.
나는 고생 끝에 먹게 될 달콤한 과실을 생각하며 비행기 좌석에 나 있는 창밖의 흐린 날씨를 보고서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심장에서 강렬한 힘이 터졌다.
“……헉.”
나는 순식간에 객실 주변을 휘몰아치며 폭주하는 가슴팍의 힘을 부여잡았다. 이건…….
“주현아!”
“회장님!”
가하에게 걸어 둔 ‘보호’가 터졌다.
“당장 비상 착륙시켜!”
얼마 없는 좌석에 앉은 어른들은 일어나서 난리법석을 떨고, 기내 안에는 요란한 경보음과 마스크 따위가 진창과 같이 뒹굴었다. 가이드의 보호가 터졌다는 것은, 에스퍼가 어딘가 다쳤다는 거다.
내가 심어 둔 힘을 넘어서서 이 정도의 반동을 일으킨다는 건…….
나는 가라앉을 줄을 모르는 힘의 폭주를, 온 몸을 으스러뜨리는 고통을 속절없이 받으며 좌석의 팔걸이에 기대어서 눈을 감았다.
“……하, 가하…….”
그 애가, 죽을 만큼 위험하다는 건데. 그러면 안 되는데.
‘주현아…….’
순간 머릿속에서 공명하는 에스퍼의 외침에 나는 폭주로 인한 후폭풍 아래 무너지는 몸을 애써 일으켰다.
내가, 곁에 가서……. 이 힘으로 너를…….
그러자 할아버지와 차관이 대동한 인력들이 나를 복도에 눕히고 급하게 같이 대동한 주치의를 찾았다. 나는 장기 내부에서 경련하는 고통에 몸을 웅크렸다. 젠장…….
“공항에 앰뷸런스 당장 대기시켜!”
이건, 의사로 될 일이 아니다. 내 보호를 받은 에스퍼에게, 가하에게 가서…….
‘도와줘…….’
나는 머릿속을 찢어낼 듯이 울리는 공명에 얼굴을 찌푸리고 주먹을 꾹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의 살결을 파고드는 고통에 혼미한 정신을 다시 한 번 더 깨웠다. 가야 해, 그 애에게 가서 우리 둘 사이에 엉킨 힘을 풀고.
구해 줘야 하는데.
‘도와줘…….’
아프게 우는 너를, 내 곁에 두고 치료해 줘야…… 하는데…….
하늘 위에서 급격하게 하강하는 비행기와 같이 내 정신도 같이 떨어져 내려갔다.
아.
그때와 같이. 내 아버지와 같이 저지른 큰 실수였다.
아주, 큰 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