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61)

* * *

짹짹대는 새소리가 내 귀를 깨우고, 등 뒤로 느껴지는 나른한 한숨과 같은 숨이 퍼져 오며 내 감각을 일으켰다. 언제 잠들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밤은 지고 아침은 어김없이 온다. 설령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시간이 흐름에 맞추어 지나가고 만다. 뻑뻑한 눈 사이로 깜빡 깜빡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나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응…….”

그러자 시트가 잘 덮인 허벅지 위로 단단한 팔이 툭, 떨어졌다. 나를 뒤에서 껴안고 있던, 깊은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주현이의 팔이었다. 덩그러니 내 허벅지 위에 놓인 팔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잘 집어서 그가 덮고 있는 시트 아래로 넣어 주었다. 한낮이지만 웃통을 벗고 있어서 그런가 그의 품에서 나온 상체가 살짝 추웠다. 아마 그도, 비슷하게 추울 것 같았다.

나는 욱신대는 허리 부근을 주물거리면서 슬금슬금, 침대 위를 기어서 빠져나왔다. 기어가다가도 중간 중간 침대 위를 너무 흔드는 것일까 걱정이 되면서 뒤를 돌아보자, 시트에 가려져 있던 손의 끝이 내가 있던 자리를 툭툭, 더듬고 있었다.

“…….”

“으응…….”

이런, 이러다가 깨겠다 싶어서 나는 다시 돌아가서, 내가 베고 있던 베개를 그의 품안에 안겨 주었다. 그러자, 허전하게 시트 아래 있던 팔이 베개를 소중하게 꼭 안으며 풀린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만들었다.

“…….”

‘나를 안고 잘 때마다 저런 표정을 하는 걸까.’

그게 무척, 편안해 보여서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나는 다시, 침대를 조심스럽게 빠져나가며 불쑥 튀어나오는 마음들을 정리했다.

그렇지만 바뀌는 건 없다.

내가 후들대는 다리를, 카펫 바닥에 툭, 딛자 바닥 여기저기에 흩뿌려진 옷의 잔해가 보였다. 나는 그나마 더럽혀지지 않은 바지와 그나마 성한 버튼이 달린 주현이의 셔츠를 입고 열린 방문을 나섰다.

문지방을 넘기 전에, 침대를 바라보니 그는 여전히 안고 있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색색, 고른 숨을 내뱉으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미처 자지 못한 잠을 몰아서 자는 사람처럼, 편안한 그 모습을 뒤로하고 나는 낡은 목재 바닥의 복도로 발을 디뎠다.

삐걱…….

무거운 추를 매단 것처럼 축축 떨어지는 발걸음이 한 발 한 발, 나아갈수록 바닥이 따라서 끼이익, 끽하고 울었다. 그럴 때마다 뒤를 돌아보면 장지문이 만들어내는 그늘 사이에 누워 있는 커다란 몸은 안정적으로 고르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나는 가로지르는 복도의 앞에 열려 있는, 격자무늬의 유리 덧문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먼지 하나 없이 투명하기 짝이 없는 덧문의 네모난 유리 칸 위로 내 지문이 하얀 먼지처럼 찍혔다. 복도 마루 밑으로 소담하게 깔린 잔디에 댓돌이 우두커니 얹혀 있었다.

「일주일 후에, 나 다시 돌아올게.」

그늘을 만드는 처마 선을 넘어서 비추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가늘게 뜬 눈 위로 손 그늘을 만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 하나 없이 맑고 파랬다. 끝도 없이 펼쳐진 정원에 심어진 푸르른 나무 위로 펼쳐진 하늘은 내게 한없이 자유롭게만 보였다.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나를 향해 이리 오라 손짓하는 것 같았다. 나는 흉터 자국 아래로 여전히 시큰대는 발목을 마룻바닥 밑, 잔디 위로 뻗었다. 높이가 고르게 다듬어진 푸른 잔디는 새벽에 내린 이슬을 머금은 것인지, 조금 축축했다.

「잘 생각해 봐, 뭐하고 싶은지.」

정말 나가면, 무엇을 할까. 또 노가다를 할까. 아니면, 어디서 조용히 농사를 짓거나 물고기라도 잡아야하나. 하얀 발이 축축하게 젖은 까만 흙으로 물들었다. 나는 정원의 가운데로 지친 몸을 가만히 이끌고 천천히 걸었다.

‘그럼, 대호는 무엇을 할까. 나를 그렇게 빼내고 나면…….’

평범해 보이는 낮의 빛이 가득 채워진 정원의 한가운데로 가면 갈수록 내게 미소 짓던, 내 손을 잡던, 입술에 입을 맞추던 그 애가 생각났다. 머리를 따뜻하게 데워 가는 볕 사이로 바람이 스스스 불었다. 담장도, 옆집도 보이지 않도록 촘촘히 심은 정원수들이 한들한들 흔들리고 내 머리카락을 흔들어 놓았다.

이렇게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마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그 애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내게 손을 뻗는 게 다였다.

그렇다고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말에 그는…….

「사랑해.」

나는 머리 안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던 그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 나는 단추가 터진 셔츠 자락을 붙잡고, 더러워진 발을 꼼질거렸다. 나 말고는 누구도 듣고 알 수 없었던 그 조용한 말에 상처투성이 마음이 채신머리없이 뛰었다. 그러면서도, 작은 고민.

‘내가, 그 손을 잡아도 될까. 이미 나는…….’

마음의 불씨를 타고 고민의 연기를 피어오를 참에, 뒤에서 거대한 몸집이 나를 푹 안았다.

“……아.”

“……어디 가.”

그가 바지만 대충 입은 채로 무거운 팔을 내 어깨에 둘렀다. 뒤를 돌아보니 졸음이 가득한 푸른 눈에 나른한 눈물방울을 머금은 주현이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거기에다 대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정원이 보고 싶어서.”

“……그랬어? 말을 하지. 하암.”

그는 피곤해 죽겠다는 하품을 하면서 그 커다란 몸을 내게 기대어 있었다. 방금까지도 이불 안에 있던 사람이라 그런가, 등 뒤로 전해져 오는 특유의 체온이 따끈따끈했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그가 입은 바짓단과 발에 젖은 흙이 나처럼 지저분하게 튀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또 기분이……. 이상했다. 이미, 나는 그의 손아귀에 있는 사로잡혀 있는데.

내가 어디라도 가 버릴까, 사라질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죽이도록 미워하고 싶은 마음이 한꺼풀 꺾이는 게 있었다.

왜 그럴까, 저를, 사랑해 달라고 속삭이던 것 때문일까, 아니면 내게 걸어 버린 각인 때문일까. 아니면, 아니면 내가 이미 일주일 뒤에 있을 마음을 미리 정해서 그럴까…….

어찌됐든, 이런 것마저도 주현이는 참 이기적이었다.

‘죽이고 싶게, 죽고 싶게 만들다가도 그러지 못하게 하는 게…….’

내가 받기엔 넘치도록 혼란스러운 감정들 가운데 내 불퉁한 목소리가 나왔다.

“깨우고 싶지 않아서. 불면증 있다고…… 그랬잖아.”

내 말에 주현이가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반갑게 말했다.

“아. 그거. 이제 점점 좋아질 거야. 여보랑, 자주 가이딩 하고 있으니까. 걱정했어?”

졸음이 걷힌 목소리에는 작은 기쁨이 깃들어 있었다. 거짓말투성이인 애가, 그 감정 하나만은 진실했다. 이게, 걱정일까.

“기분…… 좋다.”

주현이가, 샐샐 웃음 어린 숨결을 내 귀 위로 불었다.

“여보가, 내 걱정하고. 나에 대해서, 알아 가려는 게…… 기분 좋아.”

“…….”

“나를, 사랑해 주고 싶은 거지?”

누구든지, 이 애가 손을 까딱하기만 하면 다 따르고, 요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다 내놓을 텐데. 심장을 달라하면 빼어다 줄 텐데. 정작 그 애는 가진 것도 없고, 어디 잘난 구석 없는 내 관심 한 점 얻어 보겠다고. 이리 행동하는 게 참, 내 기분을 이상하게 뒤흔들었다. 그 와중에 마지막 이성이 흔들리는 나를 붙잡았다.

어차피 우리가 서 있는 위치가 다른 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평생을 모르고 살 수도 있다.

20년 전처럼.

“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돼.”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그가 말문을 막았다.

“나중에.”

“…….”

“가하가 내게 말해 주고 싶을 때……. 말해 줘.”

“……그래.”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싶다가도.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언뜻 본 그 애의 얼굴엔 순수한 행복이 퍼져 있어서 나는 다시 뾰족하게 벼려진 마음을 접었다. 어차피, 어떻게든 헤어질 거라면.

이 애를 슬프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어린 시절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그런가, 아니면 방금 전 베개를 붙잡고 행복한 얼굴을 하던 것을 봐서 그런가. 나도 내가 납득이 잘 가지는 않지만 그랬다.

‘어차피, 내가 가고 나면…….’

주현이도 힘들게 분명했다. 지금, 내가 자리를 비워도 이렇게 안달하는데, 눈앞에서 사라지면 분명, 그 더럽고 미친 성질을 부려댈 것이다.

‘얼마나 아파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을 만큼 아플까. 내가 아파한 요 근래만큼, 아파 볼 수 있을까.

내가 그러했듯이, 너도.

우리가 방에 돌아오자마자 박 비서가 방 문 앞에 장대처럼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현이는 댓돌에 발을 디딘 나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손.”

“괜찮아.”

“발 더럽잖아.”

그러고 보니, 결벽증을 가지고 있다고 알던 주현이의 발도 무척 더러웠다. 거기에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내가 손을 마지못해서 건네주자 그가 잡고 강하게 당겨서 나를 안았다. 그야말로 힘이 어디서 솟는지 궁금할 지경으로 주현이의 체력이 장난 아니었다.

‘아니면, 내가 약한 건가……. 그래도 나름 공사판에서 일했는데.’

그가 나를 안고 욕실로 가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곧 준비할 테니까 나가서 대기해.”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박 비서와 우리가 서로 반대쪽 복도로 걸어가면서 목적지를 달리했고, 나는 살짝 피곤함이 감든 주현이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그가 방긋, 웃었다.

“발, 씻겨 줄게.”

“……어디, 가?”

욕실에 들어가는 동안 주현이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회사. 그동안…… 오랫동안 여보 기다리느라, 일을 제대로 못했거든. 그동안 미뤄 둔 자리, 받아야 하니까.”

“아…….”

그가 나를 욕조의 단에 앉히고, 내 다리와 제 바짓단을 걷어붙였다. 그러고는 바로 욕조에 붙은 샤워기를 꺼내어 들고 손에 온도를 맞추고 있는 것을 보면서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을 생각해냈다. 요 며칠 날이 가는지도 모르고 늘 붙어 있느라, 깜빡 잊고 있었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내로라하는 기업의 자제였다는 걸.

그는 한창 맞추던 온도가 제법 마음에 드는지, 내 발 근처에 쭈그리고 앉아서, 샤워기의 물줄기를 발에다 대고 손수 내 발에 묻은 흙뭉치를 뽀득뽀득하게 덜어내었다. 발가락 사이로 씻겨 내려가는 그 흙의 잔해들을 보다가, 정작 그의 발이 더러운 게 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것에도 그는 개의치 않고, 그저 내 발을 씻길 뿐이었다. 그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눈이 갔다.

“……주현아.”

들렸을까 싶을 정도로 희미하게 부르는 내 목소리에도, 그는 내 발을 씻기던 것을 멈추고 곧장 나를 향해 그 파란 눈을 맞추어 들었다.

“응.”

“……너는, 발 안 씻어?”

아.

그는 그제야 아직도 지저분한 제 발을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할거야, 가하 먼저 씻겨 주고.”

“……너 결벽증 있는 거 아니었어?”

그는 내 발가락 사이를 연신 그 커다란 손으로 주무르며 간지럽히다가 말고 고개를 들었다.

“있어.”

‘근데 왜…….’

그 대답에 나는 눈을 가만히 뜨고서 그 파란 눈을 쳐다보았다. 한낮의 빛과는 다른, 침침한 욕실의 노란 불빛이 그의 파란 눈에 맺혀서 유난히 반짝거렸다. 여전히 틀어져 있는 샤워기의 물줄기가 욕실 바닥에 촤, 쏟아지며 수챗구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래서, 가하 네 발 더러운 게 싫어. 나와 있을 때는 늘 깨끗하게, 해 주고 싶어.”

“…….”

그 말에 나는 내 발에 뻗어 오는, 주현이의 손에서 발을 치웠다. 그 행동에 주현이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그래? 아직 다 안 끝…….”

“다……. 씻겨진 거 같아서.”

나는 멋쩍게 대답하면서, 욕실의 단을 짚고 일어섰다. 그러자 주현이가 샤워기를 들고서 작게 웃었다.

“앉아 있어. 내가 수건 가져올게.”

“아니, 그러지 말고.”

세면대 쪽으로 가려는 손을 내가 급하게 잡자, 주현이의 흐트러진 머리가 흔들리며 나를 보았다. 내가 그 파란 시선을 피하면서 팔을 끌었다.

“여기 좀, 앉아 봐. 너, 발 씻어야지 더럽잖아.”

“……응.”

그는 타박하는 내 말에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내 옆에 앉았다. 나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의 손에서 샤워기를 뺏어 들었다. 샤워기의 물줄기가 햇빛 하나 본 적 없는 창백한 발등에 쏟아질수록 그의 키만큼 사이즈가 남다른 그의 하얀 발이 드러났다. 나는 그 발을 씻겨 주었다. 아까, 주현이가 하던 것처럼 그리했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했다.

뭐가 그리 급해서, 어렸을 때부터 질색하던 더러운 것들을 밟고서 내게 달려왔을까.

‘어차피…… 어차피…….’

끝맺을 수 없는 말 가운데 떠도는 가운데 그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피하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가하 손, 간지럽다.”

내가 그렇게 애써 피하던 얼굴은, 한껏 행복함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틀어 둔 샤워기의 물줄기가 걷어붙인 바지와 허벅지를 적시는 것도 모르고 그 행복한 표정에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

그렇지만, 바뀌는 건 없다.

비틀리고, 꼬여 버린 사이가 죽어야 끝난다면, 차라리 죽은 것처럼 살고 싶었다. 이렇게, 나를 잃고서 가족과, 미쳐 버린 너와……. 남은 삶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내가 바라는 작은 소원이었다. 일주일 뒤에, 말하고 싶은 소원.

그게, 누군가의 마음을 빌어서라도 이루고 싶은 단 하나의 소망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바지를 벗고, 방에 놓인 새 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내 옆에 서 있던 주현이도 마찬가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티 없는 하얀 셔츠의 단추를 채우던 녀석은 내가 면바지와 티셔츠를 꿰어 입자마자 눈앞에 훅, 다가와서 나를 놀라게 했다.

“깜짝이야. 왜 그래.”

“해 줘.”

뭘? 설마 옷도 갈아입혀 달라는 건가, 싶었는데 방글방글 웃는 주현이의 손에는 빨간색의 넥타이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그 얼굴과 넥타이를 한참 번갈아보다가 고민했다.

‘이거……. 넥타이 매달라고 하는 거……지?’

“나 넥타이 할 줄 몰라.”

나는 난감하다 싶었다. 못 다한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넥타이를 매는 학교가 아니었던 탓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주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못해도 되니까 그냥 해 줘. 아무렇게나도 좋아.”

“……그냥 박 비서한테 해 달라고 해.”

이제는 하다하다 못해 못하는 것도 해 달라고 하는 판이구나. 내 말에 주현이가 여전히 넥타이를 손에 맨 채로, 투정 어린 말을 꺼냈다.

“그럼 나 안 갈래. 회사.”

“…….”

네가 애냐,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지만……. 미친 애한테 말이 통하지 않는 건 애저녁에 알았다. 나는 애써 침음을 삼키면서 그 손에 있는 넥타이를 뺏었다. 그제야 주현이가 기대 어린 웃음을 짓고 무릎을 구부려 제 목을 내게 숙였다. 나름의 키 높이를 맞추기 위한 몸짓은 참, 그동안 쌓아 온 나잇값 못한다 싶었다.

‘네가 열 살도 아니고 서른이다, 서른.’

나는 넥타이의 앞뒤를 맞추면서 녀석을 봤다. 얼른 하고 보내자. 딱히 주현이를 위한 게 아니라, 저 밖에서 말 한마디 어렵사리 못하고 세월아 내월아 기다릴 박 비서가 불쌍했다. 20년 동안 이런 고집을 옆에서 다 받아냈을 것 아닌가.

‘진짜 너는…….’

나는 한숨을 쉬면서 내게 기울인 몸을 바로 세웠다. 거슬렸다.

“똑바로 좀 서 봐.”

“응.”

그는 이럴 땐 또 말을 잘 들었다. 말을 잘 안 듣는 거는…….

‘침대에서, 음…….’

생각하지 말자. 나는 무심코 열었던 기억의 문을 닫으며 잔뜩 깃을 세운 주현이의 셔츠 옷깃 주위로 빨간 넥타이를 둘렀다. 한 번 둥글게 매듭을 지은 나는 넥타이의 두 끝자락을 잡고서 고민했다. 넥타이를 매 봤어야 이것도 어떻게 하는지 알지.

‘끄응…….’

그냥 여기서 죽, 당겨서 죽으라고 목이나 졸라 버릴까 보다. 속으로 도대체 왜 이런 거를 해 달라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하고 있는 가운데 주현이 손이 내 손에 겹쳤다. 그는 능숙하게 내손을 가지고 넓은 쪽 천 끝을 이리저리 쑥쑥 당겨서 매듭을 보란 듯이 지었다. 그 모습에 그가 쥐고 있는 내 손을 빼려 했지만 그가 놓아주지를 않았다.

“뭐야……. 할 줄 알잖아. 네가 해.”

“싫어.”

그는 여전히 제 손 아래 내손을 겹친 채로 쇄골 쪽에 지어진 매듭 사이로 넥타이 끝을 끼워 넣었다. 이건 무슨. 내가 매는 건지, 지가 매는 건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다.

‘잘하면서…….’

왜 이런 짓을 하나 싶을 때 내 손을 가지고 어정쩡하게 맨 탓인지 매듭이 헐렁하게 너덜거리는 게 보였다. 그렇지만 주현이는 제가 한 말마따나 그게 딱히 상관없는지 넥타이를 매느라 높이 세웠던 셔츠의 깃을 적당히 접었다. 그러고 양복바지를 집어 들고 양말을 신은 제 다리를 꿰어 입었다. 가죽 허리띠의 버클을 능숙하게 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도로 침대에 턱 앉았다. 혹시 벨트도 내게 매어 달라고 하면 짜증이라도 낼 준비를 하면서.

다행히 그는 그런 말없이 묵묵히 제 옷매무새를 챙기고 마지막으로 남은 양복 재킷까지 걸쳤다. 무슨 망토 두르듯이 물 흐르게 입는 모습이 잡지에나 나올 법 했다. 그런 완벽한 자태를 보고 있자니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매사 찢어 죽여 버리고 싶은 자식이긴 하지만 이렇게 입 다물고 있기만 하면 어디 내놓아도 빠지는 거 없는 녀석이었다. 녀석이 재킷의 단추를 한 손으로 채우면서 내게 씩 웃었다.

“어때. 멋있어?”

“……괜찮네.”

나름, 멋있긴 했지만 굳이 말을 해 주고 싶진 않았다. 그런 내게 주현이가 툭, 툭 걸음을 옮겨서 다가왔다. 은근히 위압적인 덩치의 접근으로 나는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올려서 가슴팍을 감쌌다.

“……왜?”

“가기 전에…… 안아 주면 안 돼?”

“…….”

다가온 그가 내 옆에 앉는 것을 두고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최대한, 맞춰 주자 라는 생각이 들어 싫은 것을 꾹꾹 참았다. 조금만, 조금만 참자…….

“……얼른 와.”

‘일주일 뒤면 아니 이제, 평생을 안 볼 테니까.’

“응.”

내 억지 섞인 대답에 그가 뛰어들 듯이 안겨 왔다. 덩치 차이가 좀 있다 보니 내가 그에게 안겼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안 그래도 전날 밤 난폭했던 섹스로 저린 허리가 안긴 무게로 훅 넘어갔다.

‘씨발, 도망치기도 전에 허리가 먼저 분질러지겠다.’

우리 둘이 안고서 텅, 하고 침대를 울리는 것을 두고 난 슬슬 짜증이 났다.

“얼른 가. 박 비서 기다리잖아.”

“……이대로 있으면 좋겠다.”

그 말에 나는 참았던 짜증이 터졌다. 이러다가 또 잘 입은 옷 벗어던지고 침대에서 한판 하자고 할 거 같아서. 어떻게, 너는 조그마한 감동도 하나 간직하게 못하는지.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어제 네 맘대로 다 했잖아.”

“……그렇긴 했지. 아팠어?”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아프지, 지가 뒤에 안 뚫린다고, 아프지 않아 보이나. 이런 천하의 개새…….’

나는 드물게 말하는 욕을 뱉으려다가 나를 바라보는 파란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하늘을 닮은 눈이, 이상하게 오늘 따라 애처로이 보였다. 어제 대호 핑계로 괴롭히던 잔인한 눈은 어디다 두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지경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나를 안고 있는 주현이가 목 뒤 너머로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 화나서 그랬어.”

“…….”

들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말이었다. 또, 나를 아프게 한 이유에 대해 사랑 타령을 할 줄 알았다. 그 의외의 말에 내가 입을 꾹 다물었다.

‘반응하지 말자.’

“그래도, 여보랑 하면서……. 나 좀, 많이 괜찮아졌어.”

나는 아닌데. 더 나빠졌다면, 나빠졌지. 두 번 화가 나면 내가 남아나지 않겠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나를 안은 팔이 강해지며 나를 제 품 안에 꼭 가두었다.

“고마워.”

오늘따라 은근한 투정이 심했다. 아까 발을 씻겨 주어서 그런가. 나를 안고 있는 팔을 푸르고 몸을 일으키자 그도 같이 일어섰다. 주름 없던 양복에 그새 선이 그어져 있었다. 내가 주현이의 손을 잡고 침대 밖으로 당겼다.

“얼른 가……. 늦겠다.”

“응.”

그는 내 재촉에 알겠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내리고 있자 몸에 꼭 맞춘 양복과 달리 헐렁한 매듭의 넥타이가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갈게.”

주현이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문지방을 넘어서려는 것을 두고 결국 내가 멈춰 세웠다.

“……잠시만.”

“응.”

아무런 의심 없이 우뚝 멈추는 것을 두고 나는 뒤통수를 긁었다.

“……에이씨. 이리 좀 와.”

“응.”

“…….”

순순히 내 앞에 선 주현이에게 나는 일어서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옥의 티처럼 헐렁한 넥타이 매듭을 어떻게든 이렇게 저렇게 당겨 보며 흔히들 보는 깔끔한 넥타이를 만들어 주었다.

“제대로 좀 하고 다녀. 거울 보면서.”

“……응.”

미소를 띤 주현이의 대답에는 들뜬 마음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웃지 않으려고 턱을 씰룩이는 것을 두고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짜증나. 미친놈한테 이게 무슨 짓이지. 잘하고 다니든 말든 알게 뭐냐고…….’

나는 나도 모르게 동생을 챙겨 주는 마음이 튀어나온 것을 작게 후회하면서 주현이의 양복 가슴팍을 툭, 밀었다.

“가.”

그런 내게 주현이가 무언가 말하고 싶은지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머뭇대었다. 나는 불퉁하게 다시 말했다.

“뭐 해, 가라니까.”

“……저기, 키스해도 돼?”

“……뭐?”

어제 저녁에 진창 나게 한창 박아대던 놈은 어디가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물어보는 주현이의 태도로 내가 다 기분이 이상했다. 주현이가 양복에 맞추어 깔끔하게 올려붙인 머리를 긁으면서 말했다.

“하고 싶어…….”

“하아…….”

한숨이 푹 쉬어졌다. 좀 잘 해 주니까 더 더 하는 게 진짜……. 그러면서도 나는 얼른 애를 보내자는 마음에 손을 가볍게 저었다.

“……이것만 하고, 정말 가. 알겠어?”

내 힘 빠진 대답에 주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조금 순순한 모습에 나는 조금 마음이 따끔거렸다.

‘사실 내가 이렇게 구는 건…….’

입술 위에, 평소와 같은 거칠고 억지로 하는 입맞춤이 아닌, 부드럽고, 정중한 느낌.

“…… 회사 갔다 올게.”

더없이 소중한 것을 다루는 키스가 왔다. 평소답지 않게 벌써, 끝내나 싶을 정도로 짧게 입맞춤을 한 주현이는 아까 욕실에서처럼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

그의 머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짐작이 가지 않는 것처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주현이는 모를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모른다. 그저 막연하게만 알고, 막연하게만 서로를…….

나는 삐걱대는 복도의 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발걸음을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는 일주일 뒤면 오게 될 대호를 따라서 이곳을 나갈 것이고. 우리는 20년 동안 마주치지 못한 것처럼, 어쩌면 평생을 모르고 살게 될 수도 있다.

나는 평범한 삶으로, 그는 그의 삶으로 돌아가고 서로의 높이를 유지하면서…….

살면 된다.

옛 기억은 흐르는 시간에 묻어 두고 그저, 그저 작은 삶으로. 나는 아까부터 자꾸 묻어 나오는 이상한 감정을 꾹꾹 누르면서 자신을 타일렀다.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가족들을 핑계로 나를 옭아매는 것을 생각해.’

그건, 사랑이라고 할 수가 없다. 적어도 내게는, 사랑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사랑을 받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야 이렇게 부드럽게 굴지만 또 화가 나고, 심기가 뒤틀리면, 무엇을 할지 모른다.

‘통제가 되지 않는 괴물처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두근대는 심장 부근을 꾹, 꾹 눌렀다.

‘괜찮아……. 너무, 너무 가까이 단둘이서 계속 봐서 그래. 헤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마……. 싫증이 날 수도 있어.’

문득 그렇게 생각하자니 두근대는 심장이 좀 가라앉는 듯도 했다.

‘그래. 싫증이……. 날 수도 있어.’

그렇게 나를 타이르면서도, 상처투성이 마음이 조금 따끔했다.

오늘따라 주현이 태도가 좀 달라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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