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안아 줄까?”
“……됐어.”
섹스를 빙자한 가이딩으로 인해서 하루아침에 홀랑 나아 버린 다리는 멀쩡히 작동했다. 그저 아까 전, 길고 끈덕진 정사로 인해 다리 힘이 비실비실하게 풀릴 뿐이었다. 정작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한 점의 죄책감도 없이 복도 기둥을 지지대 삼아 걷는 내 옆을 느리게 따라서 걸어왔다. 내 거절에 그가 피식 웃었다.
“삐졌어?”
“…….”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지. 전전날 까지만 해도 어린 아이 마냥 내숭을 부리던 태도가 겹쳐서 나는 머리에 핏줄이 확 치솟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화를 내봤자 통할 것도 아니니 이걸 말도 못하고. 또 뭐라 했다가는 당장 복도에서 나를 엎어 놓고 다리를 벌리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여전히 내게 무해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어제 오늘 나한테 한창 박혀서 다리, 아프잖아?”
“……미친 새끼.”
맑은 미소에 나올 건 욕설뿐이었다. 아, 반응하면 안 되는데……. 내 말에 그가 실망한 듯, 표정을 시무룩하게 변했다.
“왜 그래 자기야. 우리 애기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는 사르르 웃으며 다가와 뒤에서 나를 안았다. 부드러운 손이 꼭꼭 닫힌 셔츠 자락을 헤치고 땀이 마른 복부의 살결 위를 살살 문질렀다. 배에 얹은 그 커다란 손을 쳐내려는 순간, 그의 손바닥 아래로 뜨거운 열기가 후두둑, 모였다.
가이딩이었다.
그 손짓에 소름이 돋아서 어깨를 쭈삣 올리자 그가 내 어깨에 턱을 올리고 낮게 웃었다. 그의 상냥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헤집고 들어올수록 오히려 몸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고운 말, 바른 말 해야……. 우리 여보 닮은 예쁜 애기 나오지. 응?”
“…….”
“도와줄까?”
가이딩을 할 듯 말 듯, 제 손에 가이딩을 모으고서 내게 은근히 속삭였다. 커다란 덩치가 뒤에서 덮쳐 오는 것도 답답한데, 엉덩이 위로 비벼지는 딱딱한 천의 마찰이 거슬렸다. 이럴 거면 도대체 물어보는 저의가 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말해 봐, 얼른.”
그는 아이 흉내를 내던 것을 버리지 않았는지 자꾸 졸라대었다. 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도와줘.”
“응. 도와줄게.”
내 부탁이 나오자마자, 안고 있던 나를 번쩍 안아 올려서, 제 품에 기대게 했다. 그냥 부축해 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공주님 안기에 나는 소름이 돋아서 버둥거렸다. 그러자 주현이가 혀를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거기서 끝나면 또 모르겠는데, 내 허벅지를 받치고 있던 손을 멍이 들었을 게 분명한 엉덩이 부근으로 옮겨서 툭툭 도닥였다.
“여기서 다리 벌리고 싶어? 그렇게 가이딩이 받고 싶어?”
“…….”
그 말에 내 피부 위로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그런 내게 그가 투덜대었다.
“가만히 좀 가자. 우리 늦었단 말이야. 아버지랑, 새엄마. 그리고 가연이, 우리 기다려.”
“가연이?”
그 이름에 내 몸의 반항이 뚝 멈췄다. 그가 나를 안정적이게 고쳐 안고는 대답했다.
“응. 가연이. 보고 싶지 않아?”
“…….”
보고 싶었다. 유일한, 내 가족. 내가 손으로, 곁에서, 길러 온 자식이나 다름없는 동생. 이 상황에도, 동생을 생각하면 난도질당한 것과 다를 바 없이 상처투성이인 몸은 반응했다. 그러면서 작은 불안도 함께 깃들었다. 혹시…….
“가연이, 잘 있는 거지?”
“응?”
주현이가 파란 눈을 내게 고정하고 웃었다.
“왜 그렇게 물어봐?”
“……대답해.”
나는 녀석의 셔츠의 판판한 가슴팍을 쥐었다. 그는 반항도 없이 내 멱살잡이에 제 목을 순순히 내어 주며 내게 이색을 띤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궁금하면, 지금 밥 먹으면서 보면 되잖아. 잘 있는지. 아닌지.”
“……가연이 손 하나라도 건드리면, 너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진짜로…….”
얄밉기 짝이 없는 말장난에 나는 손에 힘을 더욱이 주고서 울분을 터뜨렸다. 그가 내 멱살잡이에 숙였던 고개를 살짝 밀어서, 내 뺨에 입을 맞췄다.
“기대할게.”
그러고는 삐걱대는 낡은 복도를 뚜벅뚜벅 걸었다. 어두운 저녁 빛이 맴도는 현관 쪽에는, 전날에 보았던 박 비서가 있었다. 그는 내가 주현이의 품에 안긴 것을 보고서 고개를 숙이며 손에 들고 있던 모포를 건넸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아.”
주현이는 나에게 말하던 서글서글한 말투와 달리 냉정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박 비서가 건넨 모포를 받았다. 그러고는 잠시 나를 내려놓고는 꽁꽁 싸매었다. 어디 추운 기운이 들어갈까, 발끝마저 모포로 꼼꼼히 덮고서 내 이마에 또 입을 맞추었다.
“이제 바깥이 좀 쌀쌀해. 임신하면, 따뜻하게 다녀야 하거든.”
나는 그 모습에 돌연 놀라서 박 비서가 있는 쪽을 보았다. 그런 내 우려와 달리 박 비서는 모포를 건네주고 나서 그저 미동 없이 바닥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그 말에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덮인 모포 자락을 꽉 쥐었다. 그런 나를 주현이는 만족스럽게 보더니, 나를 다시 안고 현관 댓돌에 있던 제 신발을 신고서 박 비서에게 말했다.
“내일부터 출근 스케줄 잡아. 회복 됐으니까.”
“알겠습니다.”
뭐가 회복 되었는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박 비서는 간단한 대답 이후로 말없이 앞장서서 본채로 향하는 길잡이를 자처했다. 너른 정원수 사이로 산들거리는 풀숲의 소리는, 분명 도심 속에 있을 텐데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조용했다.
그 고요 아래 짧고도 긴 시간을 주현이의 품 안에서 보내는 동안, 갑갑하게 들이찬 나뭇가지의 그림자 무리 너머로 예전의 모습과 별 다를 바 없는, 거대한 현대식 저택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람은 세월을 맞으면 바뀌기 마련인데, 집들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 사실이 더, 내 기분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어둑해진 정원 사이로 간간이 세워진 전등의 불빛뿐만 아니라, 3층으로 이루어진 저택에서 1층 중앙 즈음에 위치한 통 유리창 너머로 아늑한 누런 불빛이 우리를 반겼다. 그 단란한 통유리창의 불빛 따뜻한 불빛들 사이로 커다랗고 긴 식탁과, 그 위에 진수성찬이 올려진 게 보였다. 그 주위로 앉은 머리수에 비해 과하다면 과한, 상차림이었다.
“…….”
그것 말고도 내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식탁에 앉아서 주름살 하나 없이 맑게 웃어대고 있는 가연이와……. 엄마였다. 내가 그 불안한 조합을 보고 있는 동안, 귓가에 소곤대는 목소리가 들어왔다.
“즐거워 보이네. 그렇지?”
화려한 상차림과 고급스러운 저택의 분위기, 그 안에서 웃는 모녀의 모습을 보니, 마음 한 곳이 불편하게 얹혔다. 내가 말이 없는 것을 두고도 주현이는 신경이 쓰이지 않는지, 박 비서가 열고 있는 본채 저택의 현관으로 향했다. 열린 문 옆에 서 있는 박 비서 뒤에 중년의 여자도 앞치마 차림을 한 채로 우리를 향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현이는 익숙한 것인지 시선 하나 까딱하지 않고 현관에 들어가서 신발을 슬리퍼로 갈아 신다가, 모포 속에 파묻혀 있는 내 뺨을 문득 손등으로 살살 쓸었다.
“그나저나. 아직도 가하는 고기반찬, 좋아하지? 예전에 좋아하던 거, 다 차려오라고 했는데……. 싫으면, 말해. 다른 거 바로 준비시킬게.”
“…….”
거기다 두고, 대호에게 말해 주던, 아저씨들에게 늘 말하던……. 나는 다 잘 먹는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주현이는 아까 우리가 보았던 식탁으로 가는 동안 내 기억에서는 이미 희미하고 색이 바랜 것들을 생생하게 떠올리는지 줄줄이 늘어놓았다.
“기억나? 우리 집에 있을 때, 조림 같은 거나, 구이 같은 거 잘 먹었잖아. 그때 뼈를 잘 못 발라 먹어서 얼마나 귀여웠는데. 아쉬워.”
그는 하하호호 소리가 연신 터져 나오는 식탁이 있는 방의 문을 열지 않고 그저 서서 내게 입을 빼쭉 내밀었다.
“계속 옆에 있었으면, 내가 해 준 밥 먹고 잘 자랐을 거 아냐.”
붉은 입술이 불만으로 동그랗게 모아지고, 내 무릎 뒤를 받치던 손이 나와서 모포에 가려진 내 가슴팍을 툭, 건드렸다.
“특히 여기. 예쁘게, 찌워서…….”
파란 눈에 감도는 음심에 눈을 감고 귀를 막아 볼 무렵, 방문 너머로 가볍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현이니?”
“……예, 아버지.”
그가 마치지 못한 말은, 아직도 잇자국이 나서 아파오는 유두 주변을 스치는 셔츠와 모포를 신경 쓰이게 했다. 아쉬움이 서린 주현이의 대답에 방 안에서 내내 허허, 웃던 중년의 목소리가 채근했다.
“녀석, 얼른 들어오지 않고……. 아.”
그 말과 함께 주현이가 나를 안고서 문을 열었다. 주현이가 방 안에 들어와서 문을 닫는 동안 가연이와……. 엄마의 놀라움 어린 눈길이 내게 향했다. 가연이가 먼저 일어서서 그 긴 식탁을 돌아서 내게 다가왔다.
“오빠!”
“……응.”
“좀 괜찮아? 다리는? 주현이가 그러는데, 약 맞고 나서 아파서 내내 앓았다며. 어제 힘들어하니까 오지 말라고 그래서……. 감기라도 걸렸어? 추워? 이건 왜…….”
가연이가 나를 싸고 있는 모포를 헤치고 요모조모 보는 것을 두고 주현이가 슬쩍 한발 물렸다.
“누나. 형, 몸이 안 좋아서. 이따가 얘기해. 지금은 밥 먹어야지.”
“아……. 응. 미안해. 어제 하도 아팠다는 말에 걱정이 되어서…….”
가연이가 머쓱한 얼굴로, 나를 보면서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전날 보다는, 혈색이 좀 도는 거 같아. 역시, 둘이 에스퍼랑 가이드라서 그런가?”
“…….”
그게 무슨 의미인 줄, 가연이는 알까.
아무것도 모를 게 분명한 가연이는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서 웃으며, 제 자리로 포르르 날아가는 듯 찾아갔다. 내…… 엄마의 바로 옆자리로. 동시에 주현이도 나를 가연이 맞은편에 소중히 앉히고, 내 오른편에 앉았다. 그것을 두고 식탁 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사람 좋게 허허, 웃었다.
“드디어 보는구나. 예전에도 들었는데, 바빠서 인사 한 번 못했지. 반갑습니다, 주현이 애비 되는 사람입니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은, 언뜻 주현이와 닮아 있었다. 분명 공사판 아저씨들과 연배를 나란히 할 텐데도, 답지 않게 피부는 반질거렸고 어디 하나 모나거나 관리 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나는 몸을 감싼 모포를 살짝 내리고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자식 놈이, 민폐를 끼쳤다고 들었습니다. 이거 참, 미안합니다. 애가, 제 짝을 못 찾아서……. 힘은 좋은데 영, 통제가 되지 않아.”
“…….”
“그래도, 이렇게라도 찾아서 참 다행입니다. 요즘, 이 사람이 옆에서 아무리 손을 잡아 주어도 잘 듣지 않는 바람에……. 아무리 가하 씨랑 같은 피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에스퍼가 아닌 가이드라……. 한계가 있어서 걱정이 그야말로 태산이었거든요.”
“여보, 밥 먹으면서 얘기해요.”
주현이 아버지 오른편에 앉은 엄마는 근심어린 그의 팔을 붙잡고 속살거렸다. 그러자 그는 짐짓, 미안한 표정을 지어내며 상차림을 손으로 권했다.
“아, 이럴게 아니지. 어서 들어요. 마음이 급했네. 어차피 자주 볼 사이인데…….”
“그럼요, 호호. 우리 주현이, 은인이나 다름없죠. 저도, 이렇게 만나서……. 반갑고요.”
엄마가 수줍게 웃어대는 것을 내가 가만히 쳐다보는 동안, 옆에 가까이 앉아 있던 주현이는 내 손에 수저를 쥐어 주다가 내게 말했다.
“내가, 먹여 줄까?”
“……괜찮아.”
나는 눈도 마주치기 싫어서 앞에 차려진 상차림을 본 채로 대꾸했고, 주현이는 으응,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커다란 식탁을 가로지르는 젓가락 소리가 시작될 무렵, 화려한 상차림 앞에서 엄마가 도미찜을 소담하게 덜어낸 앞 접시를 주현이 아버지 앞에 내려 두었다. 찜을 덜어낸 앞 접시가 식탁에 놓이자마자 주현이 아버지의 굵은 목소리가 다시 내게로 향했다.
“안 사람한테서 다 들었습니다. 그때, 사고 이후로 헤어졌다가 이제야 만났다고. 그동안 혼자서 동생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
내가 밥술을 뜨다 말고 그녀를 향해 쳐다보자, 그녀의 눈빛이 생생하게 옆에 앉은 가연이를 쳐다보면서 앞에 도미찜을 동생 앞 접시에 덜어내다가 나를 흘깃 보았다.
“가연아, 이것도 좀 먹어 봐. 오늘 새벽에 항구에서 잡자마자 바로 올려 보낸 거라 싱싱해서 맛있을 거란다.”
경고일지, 경계일지 그 모호한 선을 넘나드는 시선에 나는 김이 서린 하얀 밥공기를 보면서 대답했다
“……예.”
“그나저나 참, 기막힌 우연이군요.”
그 밥공기 위로, 내가 쥐지 않은 젓가락이 다가와서, 톡. 고기 반찬을 올려 주고 갔다. 내가 그 젓가락을 따라 보니, 주현이가 파랗게 웃었다.
“좋아하잖아, 고기.”
“우리도, 가하 씨를 무척 찾고 있었거든. 우리 주현이가 어렸을 때, 글쎄 한마디 상의도 없이……. 가하 씨에게 가이드의 보호를 걸어 버렸지 뭡니까.”
그는 제 몫으로 주어진 도미찜을 젓가락으로 후벼대며 한 점 한 점 떼어 먹으면서 말했다.
“난 에스퍼인데 말입니다. 보통, 그런 건 커서 각인을 할 상대에게 걸어 두는 거라서……. 물릴 수도 없고, 만약 깨지면 반동이 무척 크거든. 그래서 그동안 주현이가 고생 꽤나 했지. 이 사람도 그렇고.”
그 말에 주현이가 단정하게 밥을 먹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하지만, 그 덕분에 좋은 새어머니를 만났잖아요. 결국, 가하도 찾았고.”
또박또박하게 말하는 것을 두고 주현이 아버지는 믿기지 않는 듯이 주현이를 찬찬히 살피면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네 에스퍼를 찾아서 많이 좋아졌구나. 그래그래, 그랬지. 불행 중 다행이었어. 그나마, 같은 피를 가진 사람을 찾아서, 그동안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진정시킬 수 있었다는 게……. 참, 여러모로 신기한 인연이구나.”
주현이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옆에 앉은 엄마 쪽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식탁 아래로 자기 손을 내밀었다. 그 몸짓에 엄마도 손을 내밀고 꼭 잡았다. 둘의 시선에는, 20년 동안 내가 알지 못하는 연이 끊기지 못하고 얽혀져 있는 게 보였다.
결국 둥지를 이리저리 옮기던 새는 바라던 둥지에 제 날개를 내리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게 설령 나와 동생을 버리고, 또 나를 핑계 삼는다고 해도.
그 생각이 미친 나는 여전히, 밥숟갈을 뜨지 못하고 식어 가는 고기반찬을 가만히 보았다. 머릿속이, 텅 빈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생각이 꽉 차 있는 바람에 아무런 생각을,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저. 그런 내게 주현이의 손이 다가와서 식탁 아래에 앉아 있는 내 허벅지를 꽈악 쥐었다.
“맞아요. 카르마 시스템이 그렇다잖아요. 한 번 엮이면……. 죽을 때까지 서로가 얽힌다고.”
“…….”
그 말에, 그가 쥐고 있는 허벅지 다리가, 다친 쪽 다리의 맨발이 파득, 떨렸다. 나직나직한 목소리는 아까 욕실의 일을 떠올리게 했다. 가이딩. 그 생각만으로도 숟가락을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다들, 가이딩을 하면 좋다고, 편안하다고, 아프지 않다고 했는데. 어째서 내게는 뼈를 갈라내고 골수까지 쪼개어 드는 그런, 고통이 느껴질까. 내 맞은편에 앉은 동생이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오빠, 괜찮아? 아직도 몸, 안 좋은 거야?”
“주현아. 가하 씨 아직도 아픈 거면, 말을 하지 그랬니. 괜찮아요? 정, 힘들면…….”
“아주머니 부를까요?”
나와 주현이를 뺀 세 명이서 걱정 어린 말을 꺼내는 것을 두고 내가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괜, 괜찮아요…….”
그렇지만 내 허벅지 위에 올려져 있는 커다란 손은 여전해서, 나는 눈길을 어디다 둘지 모르고 그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자 주현이가 허벅지에 두었던 제 손을 올려서 내 등을 쓸었다.
“괜찮아요. 오기 전에……. 가이딩을 해 줬거든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봐요.”
주현이가 해사하게 웃는 것을 두고, 나머지 가족들이 수긍했다.
“아, 그러니? 20년 동안 떨어져 있었으면, 그럴 만하지……. 맞아. 가이딩 센터에서도 기록이 한 번 없었으니까……. 주현이가 처음 가이딩을 해 준 셈이겠군요.”
“……예.”
내 대답과 동시에 사람 좋게 표정을 유지하던 남자의 얼굴이 잠시 냉철하게 변하며 주현이를 쳐다보았다.
“각인은……아직 몸이 좋지 않아 안 했겠고……. 맞니?”
“…….”
나는 차마 그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각인을 했다는 소리를 하면 일반인인 동생마저도 내가 아팠던 것을 다른 식으로 해석할 것만 같았다. 달갑지 않은 쪽으로. 그리고 주현이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왠지 우리 사이를 당당하게 말할 것만 같았다. 제 아버지의 질문에 주현이는 내 생각 외의 말을 했다.
“……예. 아직.”
“그래. 잘했다. 어린 시절은, 어린 날로 끝내야지. 이젠 다 큰 어른 아니냐. 네, 정신줄 잡던 에스퍼도 드디어 찾았으니 잘 회복해서, 경영진으로 들어가야 할 것 아니겠어. 아무리 네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해도, 집에서 가만히 있으면 남들이 와서 뺏어갈 생각만 한단 말이다.”
분명, 어제……. 나는 밥공기만 쳐다보던 시선을 살그머니 올렸고. 주현이는 나를 보지 않고서 살짝 피곤한 눈을 하며 밥을 먹었다. 그 대답에 주현이 아버지는 또 안심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아무리 에스퍼라지만, 남자고. 게다가 네 새어머니 아들하고 각인을 하는 사이라면 남들이 뭐라 생각…….”
“……여보. 애들, 먹다 체하겠어요.”
그는 불만이 어린 말을 하다가, 엄마의 말에 문득 깨달았는지 나를 보면서 다시 씩 웃었다. 그렇지만 그 웃음에는 반가움이 없었다. 아니면 주현이의 아버지라서 그런가, 그게 계산이 다 끝난 주현이의 얼굴과 언뜻 닮아 있었다.
“나도 나이를 먹었나 봅니다. 즐거운 자리에, 괜한 말을 했어. 그래, 가연 씨도 많이 먹어요. 응?”
“네에.”
눈치를 살짝 보는 듯, 젓가락을 소심하게 놀리던 가연이의 모습에 나는 이 식탁이 더욱 거북하게 느껴졌다. 그런 가연이 옆에 앉아 있는 엄마가 가연이의 흘러내리는 머리를 집어서 귀 뒤에 넘겨주었다.
“그래요, 여보. 오랜만에, 아이들 보니까…… 좋은데 그런 소리부터 하지 말아요. 좋은 소식부터 알려 줘요.”
“응, 내가 실수를 했어. 마음이 급해져서 말이야. 가하 씨, 오해하지 말아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다 보니……. 그나저나, 아직 모르나 가하 씨는?”
“가하가 아파서, 말을 아직 안했습니다.”
주현이의 명료한 대답에 주현이 아버지가 뒤늦게 인정머리 많은 얼굴을 꾸며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사람한테 들었습니다만, 혼자서 동생 키우느라 참 힘들었겠어요. 안사람이 그동안 두 사람을 찾지 못해서, 속을 끓이는 걸 봐 온 터라……. 나도 남일 같지가 않군요.
“……그런가요.”
그녀가, 나를 찾았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다. 그걸 반박할 새도 없이 엄마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러니까요. 그 어린 것이 아버지도 없이 가이드의 보호가 그 자리에서 터지면서 얼마나 놀랬을지…….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찾은 거, 지금이라도 잘 해 주고 싶어요, 여보.”
“아, 물론이지. 그러니까 이렇게 부른 거 아니겠어.”
그는 눈물로 눈가를 촉촉하게 적신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는 믿으라는 듯이 단단히 말했다.
“나만 믿어요.”
“……아닙니다.”
수많은 거짓말들 사이에서, 내 대답만이 진실했다. 그렇지만 늘 진실 된 말은 무시당하기 마련이었다. 주현이 아버지는 내 대답을 의례 말하고 마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 사이에 겸양은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피 한 방울 안 섞였다고 하지만, 내 딸, 내 아들처럼 생각하고 싶습니다. 사실 아들 하나만 있어서 적적하던 차에, 딸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는데, 아주 잘 됐어요.”
“그러니까요. 저도 늘, 마음에 묻고 살았는데……. 가하야. 이럴 땐 사양하지 않는 게 그동안 살아온 것에 대한 예의야. 그렇지 가연아? 오빠한테, 기쁜 소식 말해 줘야지.”
“아……. 네에.”
동생은 제게 화제가 돌아 올 줄은 몰랐는지 고개를 나와 엄마 사이에서 부산스럽게 돌렸다. 이윽고, 내 눈치를 보는 듯 제 앞의 접시를 젓가락으로 깨작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빠, 그…… 이번에 엄……마도 만나게 되고……. 그러면서 말하다가……. 다음, 학기에 교환 학생 가는 건 어떻겠냐구 말이 나왔거든…….”
“……뭐?”
나는 동생을 보던 시선을 엄마를 향해 돌렸고 그녀는 동생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대신 항변을 맡았다.
“뭐 그리 놀라고 그래. 음악 하는 애들이라면, 다들 한 번 쯤은 가 보는 거지. 유학 가기 전에.”
그걸 나라고 모르겠나. 한 번쯤 TV에서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볼 때마다 동생이 입버릇처럼 가고 싶다, 가고 싶다 말하던 것을. 그렇지만 그게…….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보지 마렴. 애가 얼마나 가고 싶었는지 말을 할 때 내가……. 마음이 아픈지 몰라.”
그녀의 목소리가 더해질수록 입안에 들은 밥알이 모래알처럼 텁텁하게 막혀 왔다. 그리고 그녀가 덧붙인 말에 나는 밥을 먹던 것을 멈추고 가연이를 바라보았다. 가연이는 엄마의 항변에 조금 용기를 얻은 것인지 눈을 반짝거리며 내게 설명했다.
“그래도, 학교에서 장학금도 받을 거고, 비자 준비나 이런 것두 인터넷 보면서…….”
“…….”
행복한 얼굴을 만연하게 띈 채로 제 계획을 말하는 얼굴을 보니, 안 된다고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었고, 그저 끝에 단순하고도 당연한 질문을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어디로…… 가게?”
“아, 그걸 말 안했구나.”
내 질문에 가연이가 그제야 깨달은 사람처럼 손을 짝 쳤다.
“독일로…… 가려고. 오늘 황 변호사님, 만났는데. 그분이 그러는데, 음악은 주로 독일로…….”
“……대호?”
“그러고 보니 오빠랑 아는 사이랬지. 응. 황대호 변호사님…….”
기쁨을 잔뜩 머금고 말하는 가연이의 모습에 옆에 있던 엄마가 문득 짓궂은 얼굴을 하며 가연이에게 몸을 슬쩍 기대었다.
“엄마가 봤는데. 가연이 너. 황 변호사한테 마음 있지?”
“네? 아니,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어, 어떻게 저랑.”
가연이가 두 손을 내밀고 강력하게 부정하는 가운데, 주현이 아버지마저 가담했다.
“대호 녀석, 마음에 들면 당장이라도 소개시켜 줄 수 있다. 아저씨 친구 아들이니까. 허허. 말만 하거라.”
“아이,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로.”
“왜에.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니? 엄마가, 자리 좀 만들어 볼까?”
나만 빼고 다들 행복해 죽을 것 같은 분위기가 나를 숨도 못 쉬게 죄어 오는 듯 했다. 짜증과 배신, 증오 그 가운데 섞인 응어리가 내 머리와 가슴에 휘몰아치는 기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끽끽 끌리는 소음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왜 그러니?”
“속이 안 좋아서……. 잠시 화장실 좀.”
차린 것도 넘치도록 많았고, 겉만 보면 나쁘지 않았지만 그 안에 서린 압박감은 풍랑을 맞은 것 마냥 내 속을 아프게 했다. 주현이도 같이 일어섰다.
“도와줄게.”
“아니야. 됐어. 혼자 가고 싶어.”
내가 식탁과 의자 등받이를 기대어 일어서서 가자 주현이 아버지와 내 엄마가 만류했다.
“그래. 어디까지 쫓아가려고 그러냐. 그나저나 주현이 너, 대호랑 어렸을 때 잘 지내지 않았냐. 가연이에게 말 좀 해 줘라.”
“……그러죠. 이참에, 둘이 잘되면 좋겠네요. 저도.”
주현이의 평이한 말투에 나는 이유도 없이 가슴이 지끈거려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방을 나섰다.
‘대호는……. 좋은 녀석이지.’
내 동생도 그런, 그런 사람이랑 함께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그렇지만, 왜, 기분이 이상하지.
‘마치. 내가.’
식탁이 있는 방을 나오자마자 현관 쪽에 벽에 가려져 있는 박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박 비서는 그를 가린 벽 너머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을 걸었다.
“가하 도련님. 찾으시는 거 있으십니까?”
화장실이 어디 있냐고 대답하려는 순간에, 익숙한 목소리가 현관 벽을 울렸다.
“……가하?”
박 비서를 가리고 있던 현관 벽에서 양복 차림의 남자가 훅, 튀어나왔다.
“대호……야.”
“가하 너.”
내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는 대호를 박 비서는 막지 못했고. 내 손을 붙잡고 여기저기를 살피는 대호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만 보았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정말, 큰 호랑이가 내게 왔다. 복도에 켜진 전등 빛을 머금은 까만 눈이 내게 향하자 유난히 반짝거렸다.
“몸은 좀, 괜찮아? 어제 찾아가고 싶었는데 너 앓아 누워서 오지 말라고…….”
그는 이리저리 눈을 굴려가며 내 얼굴 주변을 살피다가, 문득 시선을 멈췄다.
‘밥 먹다가 뭐가, 묻었나?’
나는 그 시선의 방향 쪽으로 무의식적으로 손이 올라갔지만 대호의 손이 더 빨랐다. 셔츠의 높은 목 깃 위로 다가간 손끝이 부들부들 떨면서 더듬었다. 셔츠의 깃이 미처 가리지 못한, 귀 뒤의 잇자국.
“아…….”
주현이가 남긴, 자국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내가 손으로 그 자국을 감싸고 대호를 보던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이거, 이거는…….”
“……가하야.”
대호가 나를 부른 순간, 복도의 전등은 우리가 움직임이 없다고 인식했는지 뚝, 꺼졌다. 순식간에 대호의 얼굴이 캄캄하게 가려지고 현관에서 밀쳐진 박 비서가 뒤늦게 우리를 향해서 뚜벅뚜벅 다가왔다.
“황 변호사님, 지금 송 회장님 가족 분들 개인적인…….”
그는 말을 하다말고 갑자기 멈춰 섰다. 대호가 나지막이, 박 비서를 향해서 명령했다.
“현관으로 돌아가.”
“대호야……?”
평소 말하던 것과 달리 차갑게 느껴지는 말투에 내가 부르자, 그가 대답했다.
“오늘 기억에서 잊어. 방금, 전 일.”
내게 한 것은 아니었다.
꺼진 조명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는 대호의 얼굴이 내게 향하면서 내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그렇지만 내 심장이 덜컥, 가라앉은 것처럼 어깨에 진 그 손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박 비서의 고개가 힘없이 툭, 숙여지면서 무슨, 로봇 마냥 몸을 뻣뻣하게 돌아 세우며 어색하게 걸어갔다. 그 모습에 나는, 한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대호도, 나와 같은…….’
“가하야, 우리 대화 좀…… 할까.”
‘에스퍼였지. 그것도 등급이 무척 높은.’
그는 내 팔을 붙잡고 이 커다란 저택의 안쪽으로 향했다. 거실과 복도를 지나치는 바쁜 슬리퍼 소리와, 팔이 잡힌 채로 마지못해 쫓아가는 내 맨발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콩, 콩 울렸다. 복도의 코너를 막 돌아가는 순간, 앞치마에 손을 닦던 중년의 여인이 갑작스레 나타났다.
“황 변호사님? 돌아가시지 않고…….”
아까 주현이와 이 저택에 들어올 때 박 비서 뒤에 있었던, 이름 모를 가정부였다. 그녀가 앞치마를 입고서 우리를 번갈아 보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무렵, 나를 잡지 않은 다른 손이 그녀의 이마 위로 살짝, 닿았다. 그러자 그녀의 눈 또한 박 비서와 같이 흐리멍텅하게 변해 갔다. 그 변화의 원인은 대호가 가진 에스퍼의 힘이 분명해서, 나는 대호의 팔을 붙잡았다.
“대, 대호야.”
“우리가 만난 걸 기억하지 말고. 돌아가서 회장님 가족들 저녁 더 챙겨드리세요. 30분 동안, 식탁에서 떠나지 말고.”
“예…….”
그녀는 대호의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나타났던 복도로 다시 몸을 돌려서 천천히 걸어갔다.
그저 공중을 날아다니는 능력을 가진 나와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초능력이었다.
저 손에 닿는 순간, 영향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을 잃고 저렇게 인형처럼……. 주현이와 다르게 또 다른 무서운 힘을 눈앞에서 체감할 때 쯤, 내가 붙잡고 있는 손 위로, 대호의 따스한 손이 겹쳤다.
“괜찮아. 어디 해가 되는 거 아니야.”
마치 내 머리 속을 읽은 대답에 나는 어어, 하고 멍청하니 대답했다. 대호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대호는 그런 나를 데리고서 옆에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어, 어디가?”
그 와중에 나는 주현이가 우리가 같이 있는 것을, 만난 것을 알아차리고 금방이라도 쫓아올 것만 같았다. 그 불안이 삽시간에 내 마음을 달아서 내가 떠나 온 방 쪽을 향해 돌아보았고, 우려와 달리 뒤에 덩그러니 보이는 텅 빈 복도는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
“응?”
그 대답에 나는 다시 앞을 보았다. 평범한 방문이 열리자, 그 안에는 아득한 조명이 비추어 먼지 하나 없이 제법 반짝반짝 윤이 나는 세면대가 보였다. 서너 명은 들어가고도 남을 화장실 넓이와 그럼에도 어디 곰팡이나 물때 낀 자국 없는 모습을 두고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반전 같은 그 모습을 신기해서 바라보는 동안 대호가 작게 웃고는 나를 화장실 안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화장실 문의 잠금 쇠를 찰칵, 눌렀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작은 소리에도 괜히 찔렸다.
그 정도로, 주현이가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긴박감에 두근두근 대는 심장을 억누르며 숨을 쉬고 있는 동안 나를 붙잡고 있던 대호의 손이 내 셔츠 깃 부근으로 향했다. 목 주위 손가락 하나 들어가지 못하도록 꼭꼭 채운 셔츠의 경계선을 그의 섬세한 손가락이 삭, 더듬었다.
“가하야. 너…….”
타일만큼이나 하얀 세면대 위로 벽 한 면을 채우다시피 한 거울 너머에, 내 목 부근을 손끝으로 더듬는 대호의 등진 모습이 비쳤다. 그 거울을 정면으로 보고 있는 내 모습도 같이 비쳤다. 그제야 나는 내 목 위가 어떤 자국이 남겨졌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셔츠의 깃이 미처 가리지 못한, 귀 밑의 하얀 목덜미 부근에 벌겋고 둥근 잇자국이 반쯤 보이는 게…….
‘분명 뒤에서 하면서…….’
“아.”
내가 다시 떠오르는 어젯밤의 상황에 급히 손을 올려서 그 자국을 가렸다. 성애의 흔적이 역력하게 보이는 줄도 모르고 가족들이랑 밥을 먹었다는 것이 부끄러움에 수치를 더했다. 내 손이 목을 가리면서 갈 곳을 잃은 대호의 손이 내 뺨을 가볍게 쥐었다.
아마, 대호는 알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알겠지. 나야, 평생에 가이드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까 대호의 능력을 보아하니, 또 등급이 높은 그는 분명 가이드 센터에 다닐 테니. 가이드와 에스퍼의 관계가 어떠한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가만히 내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내 뺨을 쓸다가, 문득 나를 제 품에 꼭 안았다. 저번에 만났던 날들과 별다를 바 없이 잘 차려 입은 까만 양복 차림의 그에게서는, 대호네 집에서 빨래를 하면서 맡았던 섬유 유연제 냄새랑……. 묵직한 코롱 냄새가 났다.
“…….”
묵직한 향기가 좋아서 그랬을까, 내 무게를 그에게 맡기고 있는 게…….
나쁘지 않았다.
그 향기에 취해 내가 그의 어깨 너머로 눈만 깜빡이고 있는 동안, 짧은 침묵 사이로 그의 입이 열렸다.
“가하야.”
“……응.”
거울을 보고 있는 건 나 혼자라, 거울과 등지고 있는 대호의 얼굴은 보이지가 않았다. 그저 판판한 까만 재킷의 등판이 나를 껴안으면서 살짝 주름이 진 것뿐이었다. 그가 연신, 껴안고 있는 나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오기 전에, 욕실에서 목욕이 끝나고 주현이가 꼼꼼하게 말려 준 덕에 부들부들한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손이 얽혔다 풀렸다를 반복했다.
나는 그의 품 안에서, 식탁에서 나를 옥죄던 답답한 공기와 달리,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면서 나를 안고 있는 단단한 팔을 붙잡았다.
그때, 대호가 가자고 했던 손을 잡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잡아달라고 해야 할까.’
풍랑을 맞은 마음은 흔들림을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문득, 이런 나를 대호가, 이해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잘 살고 있는 애한테 괜한 부담을 지우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지만…….’
주현이의 번뜩이는 파란 눈을 생각하면 몸이 떨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입안에서 굴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가운데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다리는……. 다 나았어? 몸이, 아직 안 좋아?”
어디 아픈 곳은 없냐고, 그가 내 발치에 몸을 구부리고 앉아서 내 바짓단을 걷어내었다. 내 뒷덜미를 쓰다듬던 손이 상처 난 발목에 난 흉터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제법,
“……다 낫기는 했어.”
다정했다.
주현이도 내 발목을 만졌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다를까. 둘 다 같은 말을 하고 비슷한 행동을 하는데……. 내 말에 그가 나를 올려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런 표정하면. 다 나은 사람 같지가 않잖아. 아직도 거짓말 잘 못하네.”
세면대 쪽으로 몸을 살짝 돌려서 티슈를 뽑아 터진 내 눈물을 닦아 주는, 대호의 손길이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내 눈에 정을 부어 주는 듯 했다. 그는, 말이 없는 내게 재차 미안하다고 내게 사과하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
나는 작게 웃었다. 말만으로도 참 든든한 게, 옛날과 별반 다르지가 않았다.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 것이다. 분명, 그럴 애였다.
그런 애인걸 알아서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기도 했다. 내가, 나가고 나면……. 정말 어떻게든 아무것도 생각해 보지 않고 나갈 수만 있다면. 그 손을 잡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나를 이곳에서 빼 달라고, 어디든 좋으니, 무엇도 바라지 않으니 그저 내보내 달라고만 매달리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뺨에 다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대호의 모습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나만 나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긴 세월을 넘어서 주현이와 얽힌 엄마, 그리고 동생. 교환 학생 간다고 좋아하던, 동생의 밝은 얼굴을 생각하며 나는 안겨 있던 대호의 품에서 몸을 떼었다. 그런 가족들마저도 다 제쳐 두고 어딘가로 가 버린다면. 대호는.
“몸은 다 나았는데……. 아직 머리는 생각한 만큼 회복이 따라오지 못하나 봐. 미안.”
“……일주일 줄게.”
“…….”
대호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일주일 후에, 나 다시 돌아올게. 잘 생각해 봐, 어떻게 하고 싶은지.”
“……너는.”
나를 안고 있는 그의 품에서 울리는 고동이 점점 커져 갔다. 과연, 내가 이 말을 해도 되는지 고민했던 것들이 한 마디에 훅, 날라 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열상처럼 남은 온몸의 흔적들을 감각에서 지워 보려고 노력하며 그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변호사가 될 만큼 똑똑한, 대호가 나를 돕는 게 무슨 의미인 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도, 짧지만 주현이의 성질머리를 알았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 일의 결과는 우리의 바람과 달리 분명, 힘든 대가를 치루고 말 것이다. 나를 통해서 그가, 원하는 게 도대체 뭐길래.
“가족들은, 직장은 어쩌려고 그래…….”
“의절했어. 내가 원하는 직장도 딱히 아니고. 사표 쓰면 돼.”
딱 잘라 대답하는 것에 내 말이 막혔다. 나는 그 짧고도 무거운 말에 입이 다물렸다. 그는 웃지 않던 눈을 그제야 휘었다.
“뻔하지 뭐. 조폭 집안에서 변호사한다고 설치는데 좋게 볼 리가 있겠어.”
“……그래도.”
“내 걱정해 주는 거야 지금? 괜찮아. 알아서들 살겠지. 나 말고도 능력 있는 자식들 많아. 나 하나쯤 집 나간다고 신경 안 써.”
그는 큭큭 웃으면서 내 머리를 한 번 더 쓸었다.
“귀엽긴.”
나는 그 행동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니, 나 빼고 다들 왜 이렇게 몸집이 커졌나. 나도 나름 컸는데……. 자꾸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손 안에 쥐고 있던 축축한 휴지를 구겼다. 그런 내게 대호가 말했다.
“그리고 너……. 각인 깰 수 있는 방법도 찾아보자.”
각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에 놀라기도 전에 말의 내용에 내가 오히려 더 놀랐다. 이게, 깰 수 있는 건가? 분명히, 주현이가 한 번 엮이면, 죽을 때까지…….
“이거…… 깰 수 있어?”
대호가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최대한. 하는 때까지 해 봐야지. 좋아하는 사람, 다른 사람한테 매이는 거 싫어, 난.”
“……뭐?”
대호의 눈이 방글방글 웃을 때, 화장실 문고리가 요란하게 철컥 철걱대었다. 나는 예기치 못한 그 소리에 심장이 덜컥, 뛰었다. 죄 짓고는 못 산다고, 심장이 열개여도 남아나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오빠. 여기 있어?”
가연이의 목소리와 함께 화장실 문을 가볍게 통통,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어, 어…… 가연아…….”
나는 어쩔 줄을 모르며 간신히 대답했다. 가연이가 잠긴 문 너머로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몸 괜찮아? 화장실에서 너무 오래 있는 거 같아서……. 어디, 안 좋아? 주현이 불러올까?”
“아니, 아니. 괜찮아. 조금 이따가 나갈게. 부르지 마. 속이 좀…… 그래서. 꼴이 별로야.”
나는 안겨 있던 대호의 품에서 얼른 튀어 나오며 대충 말을 지었고, 내 앞에 있는 대호는 손으로 제 입을 가린 채 소리 없이 웃었다. 내 요상한 대답에 가연이가 대답했다.
“응, 알겠어. 나 다시 가 있을게. 천천히 와.”
“으응. 고마워…….”
가연이의 슬리퍼 소리가 직직 끌리는 소리가 멀어지고, 내가 조금 안심을 할 무렵. 한순간 긴장으로 식은 내 손을 대호가 잡으면서 말했다. 그림자가 은은하게 진 대호의 얼굴에 쓴 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그가 놀란 내 얼굴을 제 두 손에 쥐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몸을 어떻게 떼어놓을 새도 없이 맞추고 떨어지는 움직임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는 차근하게 대답했다.
“아무튼 생각해 봐. 여기서 나가면……. 뭐하고 싶은지. 내가 나머지는 알아서 할게.”
어떻게 라는 말은 없었지만 확고하게 말하는 그의 태도는 거짓말 같지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대호에게 나는 계속 드는 착각을 숨기고, 말을 꺼냈다.
“너는.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모든 것에는 이유와 원인이 있다.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그런 것도 없는 한낱 나에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주현이에게는 내가 그의 정신 줄을 잡고 있던 에스퍼니까 그렇다 치자. 같은 에스퍼에게, 그것도 보잘 것 없는 등급인 나에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 그건 내가 더 잘 알았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대호가 내게 살짝 몸을 숙여서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대었다.
“궁금해?”
“뭐……해.”
그 행동에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을 향했다가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무슨, 생각을…….’
“알려 줄게. 눈 감아 봐.”
둥근 이마가 맞대어지고, 대호의 까만 눈이 감기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별건 아냐. 그냥……. 너 한 번, 웃는 거 보고 싶어. 옛날처럼, 환하게.”
그리고, 머릿속에 작은 울림이 퍼졌다.
‘사랑해.’
그가 가진 능력을 통해서 소리 없이 들어온 그 말은, 감은 내 눈을 단번에 팍 뜨이게 했다.
“……그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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