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언제 잠이 들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눈을 떴을 때, 끈끈한 무언가가 흐려진 눈앞에 얽혀서 눈이 따가웠다. 그 따가운 것을 헤쳐 내려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다가 코끝을 자극하는 비린내에 비로소 그 지옥 같던 밤이 끝났다는 것만을 알았다.
“…….”
멍하니, 뭉친 속눈썹을 껌뻑거리는데 바깥에서 짹짹거리는 이름 모를 새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에는, 살색의 단단한 가슴팍이 고르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으응…….”
주현이었다. 나는 속눈썹 사이로 손을 쓸어 올리면서 엉긴 무언가를 걷어내었고, 아까보다 더 맑아진 시야로, 손끝에 엉긴…….
“미친…….”
하얀 정액이 묻어 있었다. 무엇을 했는지 짐작은 가지만 나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하얀 침대 시트 위에 손끝을 미친 듯이 닦아내는 수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구겨진 시트 위로 묻은 그 흔적을 보고도 한숨 하나 나오지 않았다. 하도 신음을 빙자한 비명을 지르느라 헐어 버린 입 안이 메이고 메였다.
‘……이런 게, 가이딩이라니.’
내 안의 알 수 없는 감정이 이리저리 뒤섞인 채로 내 정신을 갉작댔다. 그런 내 등을 사슬처럼 팔로 꼭 껴안고 곤히 잠이 들어서 잠투정을 내는 그 애의 살결이 소름이 끼쳤다.
‘나를…….’
깨어진 몸을 일깨우는 흔적들의 감각에 나는 잔뜩 몸을 굳혔다. 옆에서 자는 주현이가 금방 일어나서 다시 나를 범할 것만 같아서 몸을 웅크리고서 떨었다.
“웅…….”
그렇지만 걱정과 달리, 주현이는 어떻게 잠이 깊게 들었는지, 나를 안고 있던 팔 근육이 두어 번 파득거리는 것을 빼면 큰 움직임이 없었다. 그 모습에,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나가야겠다.’
어떻게, 언제, 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떠나야겠다는 생각만이 내 지친 몸을 일으키게 했다. 그렇지만 생각과 달리 어젯밤 당한 몸 위 숱한 흔적들이 나를 보내지 못하고 시선을 끌었다. 주현이와 한 이불을 덮어서 가려진 하체와 달리 적나라하게 보이는 상체 부근은 만신창이 라는 말 그대로였다.
손목부터, 팔뚝, 갈비뼈 근처, 가슴팍 곳곳에 동그랗게 베어 물은 잇자국과 전염병 마냥 수 없이 붉은 낙인들이 찍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누가 보면 어디 짐승에게 끌려가서 죽지 않을 만큼 물렸다고 해도 믿을 모양새였다. 그나마 생각나는 어제의 선명한 기억 가운데, 주현이가 매번 삽입마다 뜯어 발길 듯이 빨아대던 유두는 가벼운 시트가 스륵스륵 스쳐도 쓰라리게 느껴질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다.
나중에 애기를 낳으면 젖 주는 것도 익숙해져야 하지 않겠냐는, 말도 되지 않는 미명을 방패로 벌어진 흔적이었다.
“…….”
상체도 이런데 하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시트를 굳이 치우지 않아도, 누워 있자니 비부부터 해서 배 안쪽 까지 얼얼하게 열상이 느껴지는 게 어제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쉬지도 않고 연속된 섹스로 몸에 힘이 풀려서 내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자, 주현이는 나를 억지로 뒤집고, 뒤에서 삽입하면서 팔을 당기며 허리를 연신 쳐올렸다.
가만히 허리만 쳐올리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벽에다가 내 몸을 기대고 귀 뒤부터 해서 목, 어깨, 등을 사정없이 물어대었던 탓에 침대 시트에 스치는 등의 상처들이 연신 화끈거렸다. 심지어 내 등에 닿은 녀석의 따뜻한 팔이 그 상처 자국을 잊지 말라는 듯이 더 눌러대었다.
그러고 나서는 기억나는 게 없지만, 주현이는 전혀 지치지 않는 사람마냥, 내가 흔들리는 몸 때문에 억지로 정신을 다시 차릴 때에도 내 사타구니에 붙어서 범하고 또 범했다. 발목을 다쳐서 한쪽 다리의 반이 깁스를 한 건 별 문제도 아니었다. 의사가 움직이면 안 된다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게 분명한 주현이는 그저 내 다리를 벌리고 깁스한 다리를 태연하게 쥐고……. 불완전한 기억의 파편은 뻐근함으로 둔한 하체의 이유를 짐작케 했다.
진짜 미친 새끼라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정신이 온전한 건지 나간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라고 할까. 정상적인 성인 남성이라면 어렸을 적 놀이를 지금까지 끌어오지는 않을 테니까. 겨우내 터지는 내 한숨과 함께 떨리는 몸은, 다리를 타고 천장에 매달린 깁스 고정기를 삐걱거리게 했다. 그 소리에 내 시선도 자연히 따라 붙었고, 어제 거침없이 깁스를 쥐고 허릿짓을 했던 것과 달리 깁스가 된 내 다리는 얌전하게 언제 움직였나는 듯 고정기에 얹혀 있었다. 기절해서 정신을 잃은 내가 그 사이에 알아서 다리를 올린 것은 아닐 테니, 나를 제 품에 안고서 색색 코를 골면서 자고 있는…….
“가……. 하…….”
주현이가 한 게 분명했다. 그 차가운 숨결이 내 상처투성이 어깨의 잇자국 상처에 닿아올 때마다 나는 발작하는 사람처럼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금방이라도 주현이가 일어나서 이 뻐근한 몸을 손에 쥐고 다시…….
나를 어젯밤처럼 범할 것 같았다.
그 예쁜 얼굴로 웃으면서, 잔인하고 더러운 말을 내뱉으면서……. 이 모든 일이 내게는 다 처음이었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이 모든 게.
‘미쳤어.’
나는 나를 품에 가둔 것처럼 안고 있는 주현이의 팔을 확 밀었다. 그러고 잠시 후회했다. 일어나면 안 되는데. 그러면, 또…….
“흐…….”
“…….”
다행히도 어제 나를 잡아대던 그 괴물 같은 힘과 달리, 여전히 잠에 곤히 빠져 무방비한 주현이의 팔은 쉽게 밀렸다. 나도 힘들어 죽겠지만, 그 또한 잠도 없이 연달아 그런 짓을 했으니 잠이 달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불면증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한동안 못 일어나는 건 아닐까?’
그 상상에 나는 쿵쿵 뛰는 심장 부근을 누르며 몸을 살짝 일으켰다. 힘이 없어서, 파들파들 떨리는 팔이 고요했던 침대 위를 부들부들 진동시켰다. 허리가 분리될 것처럼 쓰리고 아프지만, 그래도 여기 있고 싶지 않았다.
몸에 새겨진 고통보다 그 마음이 더 컸다.
나는 슬금슬금 엉덩이를 밀어서 주현이가 누워 있는 쪽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러자 천장에 달린 깁스 고정기가 끽끽 대며 매달린 다리의 존재감을 알렸다.
‘아.’
“으으…….”
나는 없던 힘을 짜내서 천장 고정기에 걸치고 있던 깁스 된 다리를 꺼냈다. 내 안도와 달리, 부족한 힘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탓에 힘이 없던 다리는 깁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
‘들킬…… 거야.’
내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릴 게 분명해서, 나는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조용한 방 안에 텅, 하고 침대를 강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침대를 짚고 있는 손끝에 전해지는 진동이 미미해질 무렵 나는 눈을 떴고, 주현이는 내 쪽으로 팔을 뻗은 채로 곤히 잠든 자세 그대로였다. 그저, 진동이 느껴지지 않을 때 쯔음 뺨을 한 번 움찔거린 게 다였다.
“…….”
‘이러면, 혹시.’
거기에 나는 조금, 더 자신을 얻어서, 후들대는 팔을 침대에 겨우겨우 기대어 힘없는 하체에 밀면서 엉금, 엉금 기었다. 그 애의 발치가 보일 때까지 기어가는 동안, 그 애가 내게 퍼붓던 그 뜨거운 체온과, 내 몸 어딘가로부터 진득하게 따라 붙는 냄새. 그 모든 게 나를 당장이라도 붙잡아서 도로 그 품에 안기게 할 것만 같았다. 그 긴장감으로 안 그래도 떨리는 몸에 격동하는 심장의 발작이 더해졌다.
‘미쳤어, 미친 게 틀림없어…….’
저 새끼는, 아프다 못해, 정신이 완전히 나가 버린 게 틀림없다. 어디든 나가서 도움을 구해야 했다. 그런 마음을 품고서 너른 침대 끄트머리에 기어서 달달 떨리는 발을 디디려고 내미는 순간이었다.
“응? 가하……. 어디……. 아.”
졸음을 떨치지 못하는지 유난히 나른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나는 화드득 놀라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크게, 확실하게 굉음을 내며 카펫 바닥에 우당탕 구르고 말았다. 몸이 아픈 걸 떠나서, 귓가에 다시 또박또박하게 박히는 목소리가 내 마음을 꽉 쥐고 놓아주지 못했다.
“왜 그래. 화장실 가고 싶었어?”
내가 떨어진 침대 위에서 주현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일어나서, 하품과 함께 크게 기지개를 폈다.
“하암. 말을 하지. 괜히 아프게 구르고 그래.”
쓰러진 나를 안아 올리려는지 두 손을 내 양쪽 겨드랑이 사이로 넣으며 속상하다는 말투로 혀를 딱, 찼다. 그 모습 하나 하나가, 참 자연스럽기만 했다. 잠을 푹 잔 덕일까, 아니면 내가 잠을 잘 자지 못한 탓일까. 어눌함은 어디에 버려두었는지 오랜 연인을 연민하는 그 행동과 말투에 나는 더, 두려움이 일었다.
‘아니야, 이거, 아니야…….’
그래서 나를 붙잡은 그 애의 손을 할퀴고, 꼬집고 쳐내려했다.
“놔, 놔, 저리가!”
그러자 주현이가 아야야, 하고 살짝 신음하며 나를 잡은 손을 놓았다. 정직하게 내말을 따른 탓에 힘 하나 없는 내 몸이 허물어지듯이 카펫 바닥에 다시 떨어졌다.
“나 아파. 화장실 급해서 그래?”
그는 할퀴어진 손을 가볍게 탈탈 털면서 태연히 바지만 꿰어 입으며, 바닥에 덩그러니 쓰러진 내게 다리를 굽히고 쳐다보는 그 모습에 내 마른입이 달싹였다.
‘너…….’
“너, 너…….”
‘너 아픈 게, 아니야. 이런, 이런 눈으로, 말투로…….’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주현이는 아픈 사람이 아니라는 걸. 저 푸르고 빛나는, 이색적인 색깔에 가려진 광기를 선명히 눈에 담아 볼 수 있었다. 뒤늦게 깨달은 나는 몸을 뒤로, 질질 물렸다. 반라를 한 채로 내 앞에 구부정히 수그려서 방금 손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는 주현이의 모습 하나로 몸이 덜덜 떨렸다. 깁스에 꽁꽁 감싸인 다리 한쪽도, 그런 내 움직임에 따라 결 고운 카펫 바닥에 미끄러지듯이 헛발질을 했다. 주현이는 옅게 핏줄이 터진 제 팔을 보다 말고 뒤로 물러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 여보야, 신혼 첫날부터 싸우고 싶은 건 좀 너무하지 않아? 나, 간만에 잘 잤단 말이야. 자기 덕분에.”
그 천진한 얼굴에 내 입에서는 알 수 없는 의문이 튀어나왔다.
“왜……. 왜, 왜 그러는 거야…….”
내 말을 듣자마자 빙그레 웃는 모습에 나는 이제 울음이 터졌다. 홧홧한 눈물샘 너머로 뜨끈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본 주현이가 짐짓 마음 아픈 표정을 지었다.
“아, 울지 마. 새 신부는 원래 침대 위에서만 우는 거야. 자꾸 그러면, 섹스하자는 걸로 안다?”
“이 미친……. 새끼…….”
내 욕설에 그는 픽 웃었다.
“오늘은 똑똑하네. 맞아. 나 너한테 미쳤어. 이제 알았구나.”
그가 바라던 정답을 맞춘 게 못내 기쁜지 그는 함박웃음을 얼굴에 담고서 박수를 짝짝 쳤다. 이런 씨발……. 그 모습에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가 더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왜……. 나야? 나한테 왜 그러는 거냐고!”
“아…… 알겠다. 그 말이 듣고 싶었구나? 그럼 솔직하게 말을 하지. 난 언제든지 말해 줄 수 있는데.”
그는 고민하는 눈치를 보더니 박수 치던 것을 멈추고 내 깁스한 한쪽 다리를 턱, 잡았다. 순식간에 그 커다란 손은 다리를 움켜쥐자마자 손등에 푸른 핏줄을 도드라지게 내보였다. 그러자 빠각, 하고 내 다리를 곧게 감싸고 있던 깁스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소리와 다리의 위치가 마치 그때처럼.
내 발목을 꺾어 버린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놔, 놔!”
뒤늦게나마 손에 잡힌 다리를 빼내려고 몸부림을 쳐도 별 소용은 없었다. 살짝 부은 듯 유난히 색이 짙어 보이는 붉은 입술이 샐쭉거렸다.
“사랑해.”
그 맑은 푸른 눈이 깜빡이는 움직임 하나 없이 내게 눈높이를 맞추고 다시 속살거렸다.
“사랑해.”
“…….”
사랑……한다고?
“온 마음을 다해서,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어.”
사랑해서, 나한테…….
“거……짓말.”
이런 짓을 했다고?
세상 어느 누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데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나는 전혀 말과 전혀 다른 주현이의 앞선 행동들에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주현이는 심각한 목소리로 내 다리를 공을 던지듯이 공중에 가볍게 툭툭, 던지고 받기를 반복했다.
“이상하네. 왜 못 믿지? 내가 가하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정말 아직도 모르겠어? 더 증명해 줘?”
내 시야로 뻗쳐오는 주현이의 손을 나는 짝 소리가 내도록 쳐냈다. 일종의, 자동적이고도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이……. 미친 새끼…….”
잇새로 아무리 욕을 해도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잠시 그 행동을 후회했다. 나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는 파란 눈에는 어린 조용하고도 섬뜩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건 어젯밤 나를 침대로, 눕혔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그는 내가 쳐내면서 발진처럼 빨간 손자국이 난 제 손을 가만히 보다가 그 조용한 얼굴에 히죽, 띄웠다.
“아, 가하는 더 거친 게 좋아? 난 부드럽게 다가가고 싶었는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금이 가 있던 깁스를 한 손으로 간단히 부셔 버리고 그 안에 있는 내 발목을 다른 손으로 꺼냈다. 공기를 마주한 다리가 반가울 틈도 없이 나는 다시 반복될 그 잔인함이 서린 행동에 있는 힘껏 발길질을 하며 반항했다.
“하, 하지 마. 하지 마!”
“응? 무엇을.”
그렇지만 무력한 건 바뀌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괴물같이 내 두 다리를 양손에 잡고 힘을 주는 그 행동에 나는 지레 겁이 나서 다리의 근육이 풀렸다.
‘꺾어 버릴 거야. 실수가 아니라, 진짜로…….’
다리의 힘이 풀리다 못해 덜덜덜 떨렸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형체 없는 간절함에 기대는 것뿐이었다.
“제발……. 하지 마……. 하지 마…….”
어제 밤 내내 펑펑 울어서 쓰라린 눈이, 나올 눈물도 없는 눈이, 기어코 눈물을 질질 흘렀다.
“나를, 사랑하는데 왜 그래……. 왜, 아프게 해.”
“…….”
그러자 주현이가 쥐고 있던 내 다리를 카펫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고 나에게 다가와 꼭 껴안았다.
“울보네, 가하.”
“하지 마, 하지 마……. 제발…….”
그는 여전히 두려움으로 덜덜 떠는 내 몸을 꼭 안고서 내 정수리 위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쪽쪽 하고 머리 위에서 나는 입맞춤의 소리가 내 떨리는 살결에 진동을 더했다. 그가 어린 아이를 달래듯이 속삭였다.
“안 해. 안 할게. 그냥……. 다리 나은 거 보여 주려고 그랬어.”
“흐흑, 흑…….”
그는 울고 있는 내 얼굴을 손에 쥐고 조곤조곤 설명했다.
“많이 아팠어?”
나는 그저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그런다고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작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나는 잡고 싶었다.
“그러니까, 하지 마…….”
그렇지만 내 바람과 달리 그는 카펫에 놓인 반파된 깁스의 잔해가 묻은 내 다친 다리를 다시 쥐고, 보란 듯이 무릎 관절을 굽혀서 내 눈앞에 들이대었다.
“봐. 덕분에 상처 다 나았다?”
눈앞에 맺힌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면서 선명해지는 시야 앞으로 어제까지만 해도 보았던 꺼멓게 죽은 살결의 발목이 아닌, 상처나 아무 흠도 없는 하얀 발목이 보였다. 나는 하루아침에 나은 발목의 모습에 눈가가 경련하는 기분을 받았다.
‘어떻게…….’
“딱, 예쁘게 금만 두르고.”
그렇지만 온전하게 나은 것은 아니었다. 원래대로의 모습을 회복한 발목 위에는 마치 누가 붉은 끈을 두른 것 마냥, 불그스레한 빛을 띄는 얇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주현이는 헤실헤실 웃었다.
“다시 안 꺾을 거니까, 그만 울어. 응? 이리와.”
여전히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을 진실처럼 약속하는 그는 훌쩍거리는 나에게 두 팔을 벌렸다. 과연 내가 저 품에 가지 않아도, 주현이는 똑같이 내 다리를 꺾지 않을 거라 말 할 수 있을까?
“이리와. 씻자.”
무언의 협박이 도사린 그 팔 안에, 나는…….
“착하다.”
그는 그의 품에 엉금엉금 기어가는 나를 얼른 안아 올렸다. 그러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제 어깨에 내 몸을 기대어 잡고 방을 성큼성큼 걸어 나섰다.
“그러니까, 도망가지 않으면. 아플 일도 없잖아.”
“…….”
그 말은 마치, 내가 침대 밖을 벗어난 이유를 읽은 것처럼 들렸다.
단순히, 화장실이 가고 싶은 게 아니었다는 걸, 그는 아마 알았을 것이다.
그는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소리 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는 나를 안은 팔을 고쳐 매었다. 그가 걸어가는 복도와 정원의 경계를 따라 꼼꼼히 닫힌 덧문의 유리창 너머로 한창 눈부신 낮의 볕이 들어오며 우리를 비췄다.
까만 밤을 하릴 없이 헤매던 내가 갑자기 마주한 빛 무리에 눈이 부셔서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을 두고 그가 손으로 내 눈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그게 퍽 다정할 법 한데도, 그 손 그늘 틈으로 비추는 빛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는 호선의 붉은 입술은 내 불안을 더했다.
“알아?”
“……뭐, 가.”
어린 시절과 바뀐 곳 하나 없이 잘 보존된 이 고가옥은, 여전히 똑같은 그 자리 그 장소에 욕실이 있었다. 그저 어린 시절과 다를 바가 있다면, 어렸던 우리를 살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다.
“이제 가하한테서 내 냄새 나.”
해가 중천인 이 대낮에 긴 복도를 알몸으로 돌아다녀도 누구 하나,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혹시라도 꺾인 복도 저 너머에서 누가 나와서 발가벗은 내 꼴을 볼까 걱정하며 그의 품 안에서 눈을 굴렸다. 우려와 달리 욕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발걸음 소리 외에, 정원수가 간간히 흔들리는 소리 외에는…….
“…….”
“각인해서 그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제 품에 한 팔로 가볍게 안고서 욕실 문을 옆으로 열었다. 보통의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큰 그의 높이 보다 살짝 천장이 낮은 욕실의 문을 수그리며 들어갈 즈음에,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순간, 본능적으로 눈을 꾹 감고 말았다.
“우리, 평생, 함께 하기로 했잖아.”
그러자 드르륵, 하고 닫히던 문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마치, 문을 닫다 멈춘 것 마냥……. 잠시 동안 미동 없는 그의 품 안에서 궁금증이 일어난 나는 눈을 살포시 떴다. 나를 내려다보는 파란 눈이 쌉쌀함을 머금은 채로, 머리 쪽으로 뻗은 손을 공중에 멈춘 채로,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뭐라고 하지는 않을까, 나는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사람마냥 지레 눈을 피했다. 내 생각과 달리 그는 다시 나를 고쳐 안으며 전날 끝없던 정사로 인해서 땀에 푹 젖은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많이 아팠지?”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에 젖은 몸이 주체를 못하고 파득파득 떨었다. 그건 내가 멈추고 싶다고 멈추고, 하고 싶다고 하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서 내 뺨을 툭툭 쓸었다.
“미안, 마음이 급했어.”
“…….”
“다음부터는……. 더 부드럽게 할게.”
나는, 그 말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기가 싫었다. 애초에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어버린 가증스러운 태도도 그랬고, 그의 말과 행동이 반대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더 그랬다. 무엇보다도 애초에 그딴 짓을 하지 않을 거란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는 게, 내 머릿속을 스치면서 마음속의 답답함과 분을 키웠다.
“사랑해, 가하.”
하다 못해서, 그런 다정한 말 아래 숨겨진 그의 파란 눈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화상을 입을 듯 열띤 눈을 가지고 있어서 목구멍에서 치솟는 거북함을 더했다. 내 일그러진 얼굴이 비추어질 정도로 맑은 눈은 정말,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순수한 파란 빛을 담고서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내게 은근히 느껴지는 이 빠른 고동도, 그가 입에 담는 의미에 진실함을 더했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사랑은……. 이런 게 아니었다.
이성과 감성이 일치하지 않는 이 꼬여 버린 길의 중간에서, 나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멈췄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세면장과 욕조가 있는 내실을 분리하고 있는, 뿌연 김이 잔뜩 낀 중간 문 앞으로 데려갔다.
중간 문을 넘어서자 언제 누가 준비해 두었는지, 향긋한 목재 향기가 도사리는 커다란 욕조 안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맑은 물이 넘칠 듯이 가득 차 있었다. 하얀 타일이 깔린 넓은 욕실은 마치 한증막에 온 것 마냥 훅훅 찌는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 욕실 안으로 세면장의 비교적 시원한 공기가 들어오던 것이, 탁 하고 중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끊겼다.
“같이 씻자.”
그는 내가 무겁지도 않은지 나를 안고 있던 팔 자세를 유지하면서 넓은 욕조 저 멀리 설치된 유리벽이 세워진 샤워 부스로 데려갔다. 그는 벽에 붙은 샤워기의 온도를 조절하고선,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꼭 품에 안고서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켰다.
“후우.”
그 짐승 같은 몸짓에 나는 긴장해서 침을 삼키고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손도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그가 내 목덜미를 물어뜯지 않기를, 이런 곳에서 다시 범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기껏 공들여서 묻혔는데. 아깝지만……. 씻고 들어가는 게 기분 좋을 테니까…….”
그러면서도 아쉬운지 제 코를 박고 있던 목덜미를 잘근잘근 물었다. 벽에 붙은 샤워기의 버튼을 꾹 눌렀는지. 쏴, 하는 소리와 함께 나를 안고 있는 체온보다 조금 낮은, 미지근한 물이 머리 위로 우수수 쏟아졌다. 내 눈앞이 쏟아지는 물줄기를 타고 옅게 흐려졌다. 나는 눈 안으로 들어오는 물줄기를 피하려 눈을 내리깔았다.
“…….”
덕분에 내 몸에 묻은 곳곳에 말라붙은 정액의 흔적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샤워기의 세찬 물줄기에 따라 그 말라붙은 것들이 녹아내렸다. 그 흔적들이 물줄기를 따라 저 밑의 은색의 수챗구멍으로 소용돌이치며 사라져도 내 코와 입에는 여전히 그가 내게 밤새워 쏟아내던 땀과 비린 백탁액의 향기가 맴돌았다. 그는 내 몸에 묻은 것들을 제 손으로 닦아 내리면서도 그것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작은 미련이 담겨 있었다.
그때에 나는 작게 후회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반대로 선택한다면. 나는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내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을까.
머릿속에 가득 찬 절망을 곱씹는 동안 그는 나를 욕조 밑단에 앉히고 바디 워시와 샴푸 거품을 풍성하게 내어서 제법 꼼꼼하게 씻겼다. 그는 능숙한 손길로 내 머릿속을 거품으로 헤집으면서도, 거품이 내 얼굴로 흐를까, 연신 손날로 얼굴에 묻은 거품을 걷어내었다.
그 모습은 강압적으로 나를 굴종시키던 어제의 모습과 극점을 달리고 있었다.
“…….”
나는, 눈을 감았다.
가만히 앉아서 손 하나 까딱 하지 않고 그의 손길을 받고만 있는 내게 그는 불평 하나 없이, 조용히, 저 더러운 흔적들을 씻기는데 열중이었다. 부드럽게 하겠다는 말을 지키고 싶은지 손에 힘을 빼고 살살대는 게 더 아이러니였다. 그 흔적들을 만든 사람이 나를 깨끗하게 만들고 있다는 게. 병 주고 약 주고라고 밖에 할 수 없는 행동에 나는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철없는 어린애처럼 굴던, 그 애는 어디 있을까.
땀과 정액, 그리고 고통이 말라붙어 있는 내 아랫도리를 보면서 얼굴을 붉히고 뿌듯한 얼굴을 하는, 저 애는……. 내가 아는 그 애가 아니었다.
내가 오랫동안 소중히 여기고, 지키고 싶던 그 애가 아니었다. 그 사실이, 그 현실이 내 살결로 다가와 나를 못내 괴롭게 했다. 피딱지가 나 있을게 분명한 아랫도리에는 물과 비누거품이 들어가면서 신경 줄을 툭툭 긁었다. 그걸 두고 그가 연신 살살 문지르면서 속삭였다.
“좀, 따가울 수도……. 가하, 많이 아파? 개구리 눈 되겠다.”
그는 내 허벅지 사이사이를 문지르다가 말고, 거품 낀 손으로 내 뺨을 쥐었다. 나는 울고 있었던 걸까. 샤워 물줄기로 젖어 버린 얼굴은 감각을 둔하게 했다. 물로 젖은 속눈썹을 들어 올리자 그가 내게 다가와 내 뺨을 쥐고서, 엄지로 잔뜩 부은 입술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예뻐.”
엄지의 도톰한 지문이 터진 입술 위를 문지를 때에, 싸한 향기를 풍기는 바디 워시의 맛이 입 안으로 간간히 느껴졌다. 부은 입술을 연신 문지르던 그는 내 입안에 그 엄지를 스르륵 넣으며 내 입을 벌렸다. 동시에 내 시선도 입을 벌리는 움직임과 함께 올라갔다. 그러자 눈앞에 같이 맞은 물줄기를 맞은 그의 금빛 머리카락이, 촘촘한 속눈썹이 진하게 젖은 채로 발간 얼굴에 그늘을 만들며 내 벌려진 입 안을 바라보는 모습이 들어왔다.
입 안 쪽에 들어온 그 애의 엄지가 쓰라린 혓바닥 위를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마른 입 안은, 벌려진 입 꼬리 너머로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을 그 엄지의 등을 타고 비죽, 흘렸다.
“……가하.”
동시에 그의 파란 눈이 푸르게 젖어 가고, 굵은 목울대가 느리게 일렁였다. 그는, 깊은 눈매를 살짝 찡그리며 낮게 탄식했다. 그리고 내게 붉은 입을 맞췄다. 물기로 젖은 입술 사이로, 젖은 살들이 마찰되는 소리가 조용한 욕실 안을 울렸다. 그가 숙인 고개의 선을 타고 물줄기가 흐르며 살결에 묻은 거품 위로, 톡, 톡 떨어졌다.
입 안에 있던 거품의 쓴 맛은 그가 밀고 들어오는 혀가 앗아가며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가볍게, 입술을, 살짝살짝 물어 가며 연신 내 혀를 쓸어내렸다. 그저, 반항도 무엇도 없이 가만히 있는 나를, 내 혀를 달콤한 과실을 흠향하는 사람 마냥 살금살금 뜯어내려가는 모습에는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누가 보았더라면, 전날 밤만 아니었더라면. 실로 깊은 연정에 빠진 연인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게는, 내 몸에 오싹하게 불어오는, 내 몸이 느끼는 이 절제할 수 없는 쾌감은 나 또한 그와 같은 괴물로 만들어가는 듯 했다. 어제만 해도,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게…….
그가 말한 각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와 연결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를 이 눈앞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나를 같은 괴물로 전염시킬 것 같은 이 기분을 어서 떨쳐내고 싶었다. 연신 터지는 눈물로 눈앞이 뿌옇게 변할 때, 나는 내 입 안에 이어진 이 붉은 연결을 우드득, 소리가 나게 씹었다.
그러자 내가 바란 것과 같이 우리 둘 사이를 이어 주던 연결은 떨어지고 대신 붉은 쇠 내음이 비어 버린 입 안에 잔뜩 풍겼다. 동시에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을 훔쳐 주고는 아까 전만 해도 수줍은 소년처럼 내리 깔았던 눈을 그가 날카롭게 치켜떴다. 그의 붉은 입술처럼 선명한 피가 흐르는 입 꼬리를 손등으로 슥, 닦자, 물과 섞인 핏물이 자국을 남기며 번졌다.
“이걸 왜 카르마 시스템이라고들 하는지 알아? 한 번 엮이면, 죽을 때까지 서로 이어져 있어서 그래.”
그는 혈흔이 남은 손으로 내 턱을 쥐고 눈을 파란 눈을 번질번질하게 들이대었다. 거센 악력에 내 턱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고통에 달은 나와 달리 그의 표정은 편안하기만 했다.
“근데, 난 좀 궁금하거든. 정말 죽고 나서도 이어져 있는지.”
그는 빙그레 웃으며 붉은 빛을 몸 전체에 둘렀다. 나는 그 빛깔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어젯밤 내내 섹스를 가장한 가이딩을 할 때마다 나오던 빛이었으니까. 반항도 무엇도 하지 못하고 가이드의 힘을 그저 바라며 무력하게 만들고, 혹은 실수라고 웃으면서 내 다리를 꺾어 놓던…….
“우리 한번, 해 볼까?”
악몽과 같은 밤이 다시 반복될 것 같은 기분에 내 턱을 잡은 손을 떨치고, 그 힘으로 부터 피해 보려 일어섰다. 그렇지만 젖은 바닥이 내 서툰 몸짓을 받아줄 정도로 넉넉한 마음을 가지지는 못했는지 나를 미끄러뜨렸다. 쿵, 하고 바닥에 부딪히는 것을 두고 그가 한숨을 쉬었다.
“……아, 상처 났어. 기껏 가이딩 해서 다 낫게 했더니만.”
오싹한 한 마디에 나는 욱신 욱신거리는 몸을 다시 일으켜서 가다가, 그의 거친 손길에 뒷덜미를 잡혀서 샤워부스의 투명한 유리벽에 텅, 하고 부딪혔다.
“다시 해야겠다.”
아픈 건 둘째 치고 나는 당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미친 듯이 반항했다. 그에 내 앞으로 벽처럼 막은 샤워부스의 유리벽이 텅텅, 하고 진동했다.
“놔, 놔! 하지 마!”
그렇지만 내 목을 쥐고 유리벽 쪽으로 콱 누르고 있는 그의 악력과 젖은 샤워부스의 투명한 벽은 내가 아무리 몸을 부딪히고 두드린다 해도 깨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안 돼, 안 돼. 이러다가는…….’
연신 내 목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을 할퀴고 떨쳐내려는 순간,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작게 호선을 그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내 턱을 쥐고 있는 손부터 해서 뜨거운 열기가 내 몸 속으로 사정없이 스며들었다가,
“아…….”
“각인하니까 역시 빨리 빨리 되는구나.”
내 안에 있는 열기는 다시금 모이더니 이번엔 그의 팔을 향해서 미친 듯이 빠져나갔다. 그 어떤 따뜻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젖은 몸에 희미하게 남은 온기를 사정없이 흡수해 갔다. 그 와중에 투명한 물방울을 머금은 붉은 입술이 웃었다.
“느껴져?”
동시에 내 머릿속은 수분이 증발해 버린 것처럼 바싹 말라비틀어지는 통증을 일으켰다. 덕분에 정상적으로 돌아가던 사고가 뚝, 멈추면서 불에 지지는 것 마냥 머릿속을 끊어놓고, 아프고 쓰리게 헤집었다. 내 목을 붙잡고 있는 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두 손을 올려서 쪼개질 것 같은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했다.
“아, 아…….”
멈춰 버린 사고와 달리 심장은, 반대로 점점 빨라지다 못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심장을 감싸고 있는 이 갈비뼈를 당장이라도 부수고 나올 만큼 쿵쾅거리는 격한 고동이 귀를, 뇌를 울리며 계속 헤집어 대었다. 나는 폭주한 것처럼 달리는 심장 위로 손을 내려서 움켜쥐었고, 그는 굽힌 다리 위에 턱을 괸 채로 중얼거렸다.
“왜 에스퍼와 가이드가 서로를 못 놓는 줄 알아? 엮인 가이드의 힘 말고는 살아 갈 수가 없거든.”
나를 붙잡던 지지대와 같은 그의 손에서 자유로워진 몸은 욕실의 딱딱한 바닥 위로 힘없이 무너졌다. 머리를 부딪힌 아픔은 둘째 치고 바닥을 구르는 내 눈앞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갈증과 고통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막혀들어 가는 숨을 좀 쉬어 보려고, 아무리 입을 크게, 열어도…….
그 무엇도 내게 들어오지 않았다.
“가이드도 마찬가지야.”
그 무엇도 이 갈증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 나는 이 상황이 못내 괴롭고 고통스러워져서 욕실 바닥에 머리를 대고 비볐다. 까슬한 타일 아래 피부를 짓이겨 보아도 한 번 뼛속 깊게 새겨진 고통은 쉽사리 지워지지가 않았다.
“에스퍼가 없으면……. 아무리 등급이 높다고 해도 가이딩을 못하는 순간 미쳐 죽지.”
그는 굽혔던 다리를 피고 일어섰고, 나는 떠나가는 그의 행동에 몸이 달았다. 나는 그에게 뻣뻣하게 굳은 손을 뻗었다.
“아, 아……아……. 아으……. 도, 도…….”
‘도와줘…….’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고와 끊긴 호흡은 몸에 잔뜩 교란을 일으키며 부들부들 떨리게 했다. 이제 내가 누워 있는 곳이 차가운지 더운지 분간도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난 너에게 미쳐 있다니까.”
덜덜 떨리는 몸과 마찬가지로 진동하는 시야에는, 파란 핏줄이 드문드문 불거진 그의 하얀 발등이 그림자를 드리운 게 보였다. 초점이 맞지 않은 눈을 감을 수 조차 없을 때에, 그의 목소리가 내 머리 위에서 동아줄 마냥 나직하게 내렸다.
“도와줄까?”
“아, 아으, 제에…….”
제발…….
마음먹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힘을 잃은 채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다가 다시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두고, 그가 몸을 굽혀서 나를 안았다. 여전히 덜덜 떨리는 눈앞에 뿌연 김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욕조가 보였다. 그가 나를 안은 채로 들어가자 물이 가득 차있던 욕조에서 감당하지 못하는 물줄기가 촥촥 소리를 내며 욕실 바닥으로 넘쳤다.
이런 상황에 목욕을 하는 행동이 해결책이라니, 여유가 넘쳐도 너무 넘쳤다. 굳어 가는 내 살결을 따갑게 지지는 뜨거운 물이 내 허리에서 넘실거릴 때, 그가 천천히 욕조 안에 앉으며 여전히 파들파들 떠는 내 등을 물 안에 가득 잠기도록 살살 누르며 쓰다듬었다. 멀어져 가는 귓가에 그의 속삭이는 숨이 살랑살랑 지나갔다.
“아, 좋다. 우리 여보랑, 늘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어.”
눈앞에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사람을 두고서, 그는 뜨거운 물의 편안함을 즐기는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는 가까스로 잡고 있던 정신이 날아가며 그야말로 죽을 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본능이 머리를 스쳤다. 그런 내게 그가 눈을 반짝 뜨고는 달큰하게 권유했다.
“끝내 줄까? 역가이딩.”
“흐, 흐흐…….”
내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저 신음하자, 그는 물 안에 잠긴 내 몸을 쓸다가, 그가 씻겨 내려간 비부의 근처를 만지작거렸다.
“간단해. 가이딩 하면 돼.”
“하, 하…….”
‘할게.’
조각 조각난 그 말을 그가 용케 알아들었는지 환하게 웃었다.
“잘 생각했어. 나도, 사랑하는 내 반쪽을 이렇게 아프게 하고 싶진 않거든. 그동안 쌓아 둔 사랑만 주고 싶단 말이야.”
그는 투정을 부리 듯, 제 어깨에 기대고 있는 내 머리를 바로 세워서, 곧은 콧등을 비볐다. 그렇지만 입술을 맞추진 않았다.
“키스해 줘.”
사람은 참 간사하게도, 죽고 싶다, 죽고 싶다 말은 하지만 진정한 고통 아래에서는 그저 살고 싶다는 본능이 앞선다. 그게 사람이었다. 거기서 별다를 바가 없는 나는, 벌벌 떨리는 몸을 조금 더, 움직여서 바로 앞에 있는…….
그 상처 난 붉은 입술에, 내 입을 맞췄다.
보드라운 입술은 내가 닿자마자 양 옆으로 얇게 늘어졌다. 마비된 것처럼 입도 벌리지 못하는 내 입술 위로, 물에 젖은 살결이 마찰되며 만들어내는 특유의 쪽쪽, 소리가 났다. 미세하게 열려 있는 내 입술 사이로 미약한 쇳기 어린 침이 들어오며 우리 입술 사이를 그 어떤 것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끈끈하게 이었다. 늘어나지만 절대 끊어지지 않을 그런 끈처럼…….
“하으, 아, 우으…….”
그런 속박조차도 육체를 지배하는 고통에 비하면, 달콤한 치료제에 불과했다. 그와의 키스가 끊이지 않고 길어질수록 깨질 듯이 아팠던 머리의 고통이 슬금슬금 물러나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미약했고, 나는 더욱이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에 그의 어깨를 몸을 바짝 맞대고 더욱이 그의 입술을 갈증 난 사람마냥 정신없이 빨았다. 그러자 그가 답지 않게 혀를 빼며 나를 피했다.
“응. 이건 이제 됐어.”
“우, 으. 흐…….”
접촉이 떨어지자마자 다시 쪼개질 듯이 눌러오는 머리의 고통에 나는 얼굴을 찡그렸고, 그는 웃었다. 나는 겨우, 눈을 뜨면서 애원했다.
“아, 이, 입…….”
입, 맞춰 줘…….
그렇게 말하는 것을 두고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마치 모든지 달라고 요구하는 어린 아이를 타이르듯이. 그는 천장에서 똑, 똑 떨어지는 증기를 뺨에 맞으며 살짝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이제 윗입 말고, 아랫입에 맞춰야지. 공평하게. 응?”
그러면서 물속에 잠겨 있는 내 허리를 움켜쥐었다. 다분히 의도가 선명한 행동에 내 몸이 그 물살에 따라 살짝 흔들렸다.
‘안 돼, 안 돼……. 그거, 하고 싶지 않아. 아파. 싫어…….’
나는 조금이나마, 마비가 풀린 손을 물 안에서 허우적대며 그의 물건이 있는 위치를 찾았다. 거칠게 파도가 이는 수면 위와 달리 고요한 물속에서, 보란 듯이 딱딱하게 세워진 것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가 그의 물건을 손에 쥐자 그가 하얀 이를 살짝 드러냈다.
“응.”
그리고 그는 내 허리에 올려 두었던 손을 스르륵, 내려서 물 안에서도 연신 발씬거리는 비부 안쪽으로 미끄러지듯이 손가락을 두어 개 집어넣었다. 다물린 비부의 틈 새로 굵은 손마디와 함께 욕조의 뜨거운 물이 화르륵, 새어 들어갔다.
“으.”
그 이물감에 허리를 어정쩡하게 띄운 나를 두고 그가 산뜻하게 명령했다.
“움직여.”
동물을 길들이는 것에는 징벌이 필요하다고들 하던가. 그의 손가락이 내 안 쪽을 찌르고, 내 손이 그의 꼿꼿한 성기를 느리게 문지르는 동안 그제야 나는 문득 기억 속의 말 하나가 생각났다.
「예전에 아끼는 새를 하나 키웠는데.」
증기가 맺힌 욕실 천장에서 간간히 물방울이 수면 위로 떨어지는 소리, 나와 그가 움직이는 것에 맞추어 욕조의 물이 같이 이리저리 참방거렸다. 수면 위에 드러난 살결은 고통으로 예민해진 가슴 언저리를 산들산들 간지럽혔다. 그 야릇한 쾌감에 내가 눈을 감자 내 엉덩이 사이를 파고드는 손가락도 개수를 늘려오고, 움직임도 빨라졌다. 착착대는 수면의 소리와 함께 내 입에선 들뜬 신음이 나왔다.
“하아, 흐, 으으……으응.”
「그래서 계속 찾고 있다고 그랬어.」
빠르게 쑤셔 오는 구멍의 깊은 안쪽으로 새어 들어온 물의 뜨거운 열기가 아닌, 무언가가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간지럽고 자극적인……. 그걸 좀 더 건드려 주면 좋겠다 싶을 때 그가 움직이던 손을 딱 멈췄다. 나는 해소되지 않는 욕구의 발현과 함께 나도 모르게 절로 허리를 움직이며 그 손에 비부를 비비던 것이 부끄러워서 자박하게 비춰지는 욕조의 물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그가 습하게 웃었다.
“더, 하고 싶지?”
“…….”
「원래 새를 키울 땐 날개를 좀 잘라 두는 거라고.」
“아니야? 하지 마?”
그가 내 사타구니 사이에 있는 팔을 내리려던 것을 나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모으고 막았다. 그러자 그가 얕게 웃었다.
“내가 어찌하면 좋겠어? 말 안 하면, 난 몰라.”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담백하게 말하는 그에게 나는 입을 천천히 내려서 맞췄다. 연신 쪽, 쪽 대는 것에도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로 말이 없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 눈 안에 비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해 줘.”
그 말이 정답이었는지 그는 목울대를 낮게 울리면서 내 뺨에 입을 맞췄다. 내 관자놀이에 그의 촘촘한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응. 사랑해 줄게. 죽어서도, 자기만 사랑할게.”
그리고 그의 두터운 손가락이 빠진 자리에, 내 손에 있던 그의 커다란 성기가 들어갔다. 나는 간신히 벌려 둔 복부를 다시 한계치까지 빠듯하게 채우는 그 부피감에 숨을 삼키며 눈을 떴다.
“흐윽.”
“이제 알려 줬으니까, 알아서 하는 거야. 두 번은 없어.”
그는 만족한 얼굴로, 나를 얼싸 안고서 우리가 이어져 있는 비부를 손끝으로 슬슬 더듬었다. 마치, 우리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다시 일깨워 주고 싶은 것처럼…….
“아버지가 같이 점심 먹자고 했지만……. 우린 한창 신혼이니까, 이해해 주실 거야. 그렇지?”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내 허리를 잡고 살짝 올려서, 물 안에 잠긴 허리로 쾅쾅 찍어대며 퉁퉁 부어 있는 유두를 입에 담았다. 나는 어린애처럼 빨아대는 그의 머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시선을 느낀 듯, 내 젖을 빨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대답해, 여보야.”
“……응. 여, 보.”
「그래야 어디 도망가지 않고 집 안에서만 머물 수 있다고.」
욕실 저편의 불투명한 창 너머 보이는 정원의 녹음과 한낮의 볕 사이로의 새 그림자만이 현실의 경계를 알렸다. 그 새가 드리운 그림자 너머로 동생의 목소리 같은 환청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