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사람은 보이지 않으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잊거나 상상하거나.
나 같은 경우에는 흐르는 세월 속에 잊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도 그럴게 그녀가 돌아오리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아는 그녀는 잘난 둥지를 노리며 옮겨 나다니기를 좋아하는 새와 같았다. 안락한 둥지를 찾아서 알을 낳는 뻐꾸기.
그렇지만 참 이상한 일이지, 분명 우리는 가족이었고, 어린 나의 기억의 반은 그녀의 손을 잡고서 함께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늦게나마 조우하게 된 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다니.
알고 보니 나는 아직도 어린 시절의 상처에 머물러 있던 것일까. 아니면 나이를 먹어서 그 사이에 감정이 무뎌져 버린 걸까.
그것도 아니면 긴 세월동안 끊긴 인연으로 우리는 더 이상 연결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남남과 다를 바 없이, 어색하게 그저 지나가고 말. 그런…….’
나는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주현이에게 팔베개로 준 팔이 슬슬 저려와 잠든 사이에 슬쩍 꺼내 보려 했다.
“우웅…….”
“…….”
그러자 등을 보이고 잠들어 있던 녀석이 귀신같이 반응하며 내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래서야 꺼내기는커녕, 저린 내 팔이 내일에는 부디 멀쩡히 움직여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깨어난 나를 만나고서야 진정한 가연이도 식사하러 본채로 돌아갔다. 그 후로 박 비서를 통해 인력 사무소에 당분간 나가지 못할 것 같다는 전화와 대호에게 큰 일이 아니라는 전화를 돌리고 나니 벌써 저녁 시간이었다.
“…….”
피곤한 일들을 제쳐 두고 잠을 자고 싶지만, 원래 오라오라 하면 오지를 않는 것처럼 잠이 달아나 버렸다. 이 방 안에서 부유하는 무수한 생각들이 내 눈과 머릿속을 쿡쿡 찌르며 도리어 내 잠을 멀리 멀리 쫓아내고 있었다.
‘그래도, 엄마였고……. 내게도, 가연이에게도 잃어버린 엄마를 찾은 셈인데.’
그럼에도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반가움이란 다정한 감정 따위는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심장 한 구석이 텅 비어 버린 것 마냥…….
‘헛헛하다고나 할까.’
이상한 감정이었다. 잃어버린 사람을 찾았다면 기뻐해야 하는 게 당연한데.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자꾸 나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런 불안 사이로 들어오는 것은 주현이가 부리는 미세한 잠투정이었다.
“가…… 하…….”
‘주현이는 꿈속에서도 내 꿈을 꾸는 걸까.’
차갑게 식어 가는 머리와 이 쓸쓸한 밤공기 가운데서도, 주현이가 가진 따뜻한 온기가 나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그때도 그랬듯이, 지금도 이 애의 존재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건 참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곱슬져 엉킨 것처럼 보이는 그 밀 빛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그리고 주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그녀에게 주현이의 행동에 대해서 물어본다고 해도 사실대로 나오리란 보장은 없다. 그녀에게 언제나 우선은 그녀 자신이었으니.
지금 와서 내가 그녀에게 왜 나를 두고 갔냐고, 동생을 두고 갔냐고, 따진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는 것처럼. 그저 상처를 곱씹는 내 마음만 아프고, 동생만 상처받겠지.
‘마주칠 일도 없이 잘만 살았을 텐데.’
그저,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면 될 일이다. 나는 나대로 삶을 꾸려나가고, 그녀는 그녀가 선택한 것을 잡고서 살아가면 될 일이다. 내가 선택한 대상은 동생이었고, 그녀에게는 이 안락한 삶이겠지. 나는 주현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베개에 내 고개를 묻었다.
‘그렇지만 이 애는 어떡하지.’
내 엄마가 괴롭혀서 우는 이 애는, 그 시간 그대로 멈춰서 외로이 나를 기다린 애는…….
똑딱, 똑딱…….
방 저편에 위치한 키다리 괘종시계가 규칙적으로 똑딱거리는 소리는 내 부채감을 부채질 했다. 분명 주현이를 두고 가야한다는 건 아는데, 생각처럼 마음이 움직이진 않았다.
‘사라지지 말라고, 자기와 함께 있어 달라고 했지만…….’
그건 애의 사고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고, 어른의 사정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가 이 애를 어디 데리고 갈 수 있는 형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매일 일을 나가야 했고, 좁은 집에는 내가 도리어 돌봐 줘야 할 여동생이 있었으니까. 좁은 집처럼 여유 없는 형편에 사람 하나는 내게 너무나도 큰 부담일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우선 내 다리가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낫고, 그때 동생이 이 알바를 그만두면 난 다시 그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끔, 연락을 하고 말다가 잊혀질 그런 추억 속의 아이로…….
그나저나 잠을 잘 못 잔다고 들었던 것이랑은 달리, 내 팔을 베고 잠을 달게 자는 주현이의 모습에 나는 조금 의문이 들었다 아, 어제 하도 울어서 지쳐서 그런가……. 나는 품에 안겨 있는 이 커다란 애를 한 번 꼭 껴안았다.
“……미안해.”
‘그저 다리가 나을 때까지라도, 너를 지켜 줄게.’
약한 내가 깰 수 없는 한계를 씁쓰레하게 되뇌며 몸을 침대 위에서 살짝 뒤척거렸다. 그래, 다리가 나을 때까지만. 점점 무겁게 의식을 잡아끄는 눈꺼풀을 닫으며 나는 방 안을 채우던 생각들을 대충 정리했다.
‘다리가 나으면, 이 집을 어서 나가자.’
내가 겨우 지켜 온 나와 가연이의 삶에 그녀가 다시 날아와서 엉망으로 만들기 전에…….
“응…….”
애처럼 품 안에서 꼼지락 거리는 주현이의 움직임을 옅게 느끼면서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짹, 짹짹…….
졸린 나를 깨우는 청량한 새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껌뻑거리는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깁스가 어디 부딪히지 말라고 천장에 잘 걸어 둔 보조기.
“응? 깼어, 가하?”
옆에서 얼굴을 내미는 주현이었다. 나는 천진한 그 모습에 응, 하고 대답하면서 팔꿈치를 침대에 지지하면서 누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주현이가 내 등을 한 팔로 거뜬히 받치고 주변에 있던 베개 따위를 두어 개 집어서 허리 쪽에 받쳐 주었다.
‘녀석.’
나는 싹싹함이 돋보이는 주현이의 모습에 절로 주현이 머리에 손이 갔다. 부드럽기는 또 얼마나 부드러운지. 뻣뻣한 내 머리칼과는 영 다른 감촉이었다. 전날부터 자꾸 손이 갔다. 녀석도 그게 싫지 않은지 웃었고.
“고마워, 주현이.”
“으응. 가하, 나 착하지?”
칭찬을 받고 싶은지 파란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나는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애써 억눌렀다. 얼굴의 근육을 억누르느라 분명 추한 얼굴이겠지.
“흠흠. 응. 착하지, 주현이.”
“그럼, 상 줘.”
“상? 무슨 상? 참 잘했어요 도장 찍어 줄까?”
내가 장난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면서 대꾸하자 주현이가 흐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심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주현이에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도장 주면 찍어 줄게.”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내 말에 주현이는 투박한 내 손가락과 달리 유난히 하얀 제 손가락으로 저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응. 여기.”
‘입술?’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입술에, 도장 찍어 달라고?
“……도장을 입에다 찍어 주라고?”
펼쳤던 손바닥을 다시 주먹을 쥐고 살짝 입을 가리는 내 행동에 주현이가 파하하, 하고 웃었다. 뭐 웃긴 소리라는 듯이.
“아니, 근데 네가 말한 게 이런 거 아니야?”
내 말에 주현이가 내가 기대어 있는 베개에 자기 양손을 기대고, 자기 품에 나를 가뒀다. 은근히 내려다보는 주현이의 자세에 흘러 내려오는 색소 옅은 머리가 내 이마를 간질거렸다.
“아니.”
“……그럼?”
내 말에 주현이의 베개를 파고든 한쪽 손이 입 앞에 있는 내 주먹을 치웠다. 그러자마자 그 파란 눈이 나를 삼켜 버릴 것처럼 담고, 그 붉은 입술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말캉한 감촉의 무언가가 내 입술 위로 포근하게 눌렸다.
“주,”
주현아, 하고 부르던 내 입 안은 그 애의 입술로 밀봉되고 말았다. 그제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된 나는 주현이를 밀쳐 보려고 했지만, 워낙 덩치가 큰 애라 쉽게 밀리지가 않았다. 게다가 다리가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누워 있는 내 무력한 상태의 반항이 잘 먹히지도 않았다.
“읍, 으.”
나는 결국 꼼짝 없이 그 애의 누르는 팔 아래에 가두어진 채로 키스를 받아내었다. 그 애의 혀가 내 여린 입안의 점막을 한 점 한 점 맛보듯이 훑고 건드릴 때마다 달려오는 자극에 그나마 온전한 오른쪽 다리가 침대의 시트를 바득바득 긁어대었다. 점점 침범해 오는 혀를 밀어내 보아도 오히려 올가미처럼 끈적하니 엮여 들어오는 반동으로 인해 나는 입안에 점점 고여드는 침을 삼키고 말았다. 그게 내 것인지, 그 애의 것인지 알지 못하고 서로 섞여 버린 채로.
노가다판에서 구르던 내게 전혀 상종할 일이 없는 종류의 강렬한 자극에 나는 아랫배가 뭉친 듯이 당겨 오는 것을 느꼈다.
‘미친.’
나는 그 생리적인 반응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안간힘을 다해서 밀어냈다. 주현이는 한참을 그렇게 내 입안을 이리저리 건드리다가 내 반항에 자기가 생각한 ‘도장’을 원 없이 찍었는지 팍 떨어지는 입 안에서 제 붉은 혀끝을 꺼냈다. 그 와중에 진득한 침이 내 턱에 처덕하게 달라붙었다. 마치 턱 밑의 피부를 끈적하게 핥아 내리는 것처럼.
“하아, 하아…….”
온 몸에 자극적인 감각을 준 덕에 발기한 것을 숨기려고 웅크리고 있는 내 숨이 가빴다. 주현이는 그런 나를 보다가 살짝 부은 듯이 보이는 입술을 다시 가까이 대었다. 나는 혹시 주현이가 다시 달려들어서 그런 짓을 할까, 그리고 내 상태를 들키기도 싫어서 베개에 웅크린 채로 눈을 꾹 감았다.
“……하아.”
그런데 예상과 달리 아무런 감촉도 내게 붙어오지 않아서 나는 꾹 감았던 눈을 살짝 떴고, 주현이의 엷고도 긴 속눈썹이 깃털마냥 팔락거렸다. 그 애의 코팅된 것 마냥 반질거리는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기대했어?”
단순한 말에 내 입안을 휘젓고 달아오른 열이 머릿속으로 사정없이 침범했다. 그 말은 마치, 그 애의 입맞춤에 내 몸이 반응했다는 것을 그 애가 알아차린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냐! 무, 무슨.”
주현이는, 남자인데. 몸이 왜 반응하지? 아침이라 그런가? 아니면……. 요즘 자기 위안을 안 해서? 내가 가진 도덕과 달리 정직하게 반응하는 몸이 당황스러울 지경이라 대답하는 내 입이 덜덜 떨렸다. 그런 내게 주현이는 의뭉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하면, 더 해 줄 수 있는데. 그렇지만, 먼저 착하다 해 줘.”
주현이는 누르고 있던 내 손을 들어서 자기 머리 위에다가 갖다 대었다. 거친 손바닥에 닿는 폭신한 머리칼의 감촉마저 내 마음을 한 올 한 올 간지럽혀서 나는 황급하게 손을 떼어내면서 바락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내가 언제! 그, 그런 거 아니야! 원하지 않아. 아니야.”
“정말?”
“당, 당연하지! 그런 거 막 하는 거 아니야!”
어렸을 적에 당했던 이 애의 인사도 그제야 생각나며 땀이 축축하게 베여든 손으로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이라니, 도대체 누가 이렇게 가르친 거야. 아니, 그리고 나는 왜 반응을 하고 있는 거지? 생각해 보면, 이건 애가 하는 뽀뽀야. 뽀뽀. 얘는 몸만 어른 같지……. 애라고. 반응하면 안 되는 거야. 진정해.’
내가 속으로 애국가를 부르면서 당기는 아랫배를 진정시켜 보려는 동안 주현이가 침음을 내었다.
“흐음……. 근데, 왜 눈 감았어?”
“그야, 네가 키스해서, 다시 그러는 줄…….”
당연히, 그런 행동을 하고 다시 다가오면……. 주현이의 이어진 질문이 내 망가진 양심 한 가운데를 콕콕 찔러오는 것을 두고 내가 애써 설명해 보려 했다. 나는, 이상한 사람 아닌데. 정말인데. 성욕을 주체 못하는 공사판 아저씨들이 남자는 하반신의 동물이라고 그러면서 방석집 가는 게 내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 안되면 손도 있지 않은가. 그런 나를 두고 아저씨들이 고자 아니면 남자 좋아하는 건 아니냐고 가끔 면박을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이랑 살결을 부딪히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패닉으로 머리가 빙글빙글 돌 거 같은 내게 주현이가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마냥 탄성을 내었다.
“아하, 키스하고 싶었구나, 가하?”
“지…….”
‘지금이 키스 아니야?’
나는 당연한 명제를 당연히 아니라고 말하는 주현이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잠시만, 이게 키스……. 아닌가?
‘그나저나 지능이 아직 애라고 너무 성교육을 안 시킨 거 아닌가, 옛날에도 남자인 나에게 자꾸 애기 가지자고 얘기하는 것부터 해서…….’
어쨌든 이런저런 생각을 뒤로하고 우선 주현이가 준 자극으로 인한 생리적인 반응으로 팽팽하게 당기는 내 아랫배를 숨기기 위해 침대 위에서 몸을 비틀고 웅크리고 있는 내게 주현이는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으음. 가하, 버릇이 안 좋아.”
“……그건 너잖아. 누가, 키……. 이런 짓 하래. 남자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알겠어?”
누가 할 소리를. 나는 불만 어린 말로 항의하자 주현이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 버릇 안 좋아? 아니야. 방금, 가하 ‘잘했어요’ 도장 줬어. 그렇지?”
“…….”
“왜냐하면, 난 착한 애야.”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듣자마자 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다음부터는 이런 거 안 돼.”
“……왜애.”
귀엽게 투정을 부려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나는 눈을 감고서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단호한 목소리를 내었다.
“…… 아무튼 안 돼. 알겠어?”
“……알았어.”
‘……주현이가 두 번만 착했다가는 내 입술이, 아랫도리가 터지겠네.’
나는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랫배의 반응을 좀 식혀 보려고, 유난히 예민하게 느껴지는 입 안의 감촉을 지우기 위해 입술에 묻은 흔적들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때 닫힌 방문 너머로 오래된 마루 특유의 삐걱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들었다. 그러자 주현이가 내 몸을 훌쩍 넘어서 방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 모습에 나는 잔뜩 긴장해서 웅크리고 있던 몸에 힘을 살짝 풀었다.
“아. 세수하자, 가하.”
나를 넘어서 간 녀석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꺾어서 보자, 방문이 열리자마자 제법 큰 키를 가진 박 비서가 묵직한 놋쇠 대야에 맑은 물을 담아서 서 있었다. 그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나를 보고서 살짝 목례했다. 나 또한 엉거주춤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깔끔한 검은색의 양복 차림인 박 비서의 팔에는 어울리지 않는 핑크색 수건이 걸려 있었다. 그는 주현이에게 들고 있던 놋쇠 대야를 비롯해서 수건, 치약 칫솔 따위를 넘겨주었다.
“가 보겠습니다.”
“응.”
주현이는 바로 내게 돌아섰다. 그 행동에 놋쇠 대야에 담긴 물이 쏟아질 듯이 넘실거렸다.
“씻겨 줄게.”
뭐가 그리 좋은지 헤헤 웃는 주현이를 두고 나는 다시 아파 오는 아랫배가 혹여나 들킬까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겨우 짜냈다.
“여기 옆에……. 둬.”
“응? 안 돼, 가하. 못 움직여. 내가 해 줘야 돼.”
내 달아오른 상태도 전혀 모르는 게 분명한 주현이는 천연덕스럽게 실실 웃었다.
‘내가 거절하는 이유는, 그런 게 아니라고…….’
그걸 설명해 줄 수 없는 수치감에 나는 목소리가 커졌다.
“……여기 두고 가, 제발!”
“……음……. 알았어.”
다행히 주현이는 내 침대 위에 세수 용품을 얌전히 올려놓고 열린 방문으로 나갔다.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도 한숨을 푹푹 쉬어대서 그런가. 안 그래도 복잡한 뇌가 이제는 그 쌓인 한숨들로 인해서 꺼질 것만 같았다. 나간 주현이가 방문을 밀어서 탁, 닫자 박 비서가 아직 복도 쪽에 있었는지 말소리가 들렸다.
“벌써 다 하셨습니까?”
“아니.”
주현이의 대답에 박 비서가 분명한 목소리가 잠시 멈칫 했다. 주현이와 박 비서가 분명한 턱, 턱, 굵은 발자국 소리가 밖에서 울리면서 방에서 멀어졌다.
“가하는 부끄러움이 많아. 뭐, 내가 이해해야지.”
“어릴 때도 그러셨죠.”
박 비서는 이해한다는 듯이 주현이와 같이 방에서 멀어졌다. 여전히 가라앉을 줄을 모르고 불룩한 부피감을 자랑하는 내 아랫도리에, 나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주현이의 말은 가끔 예상치 못하게 정곡을 건드린다. 부끄럽긴 부끄러웠다.
‘아니, 내가 여자 친구가 아무리 없었다지만, 남자한테, 그것도…… 정신은 어린애나 다름없는 애한테…….’
세수 따위를 남이 해 주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나와 같은 성별을 가진 애와 접촉으로 이런 반응이 나온다는 게 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불편하게 괴롭히는 현상에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쌓였나, 아니면……. 미친 건가?’
한참을 걸려서 세수를 마치고, 간신히 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자, 주현이와 나는 아침상을 들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주현이가 먹여 줬다는 게 옳을 것이다. 그 애는 당분간 침대에 누워서 생활해야 할 나를 배려한 것인지, 아니면 아까의 짜증 섞인 말싸움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를 유난히 살뜰히 대했다.
“가하, 자 아― 해.”
“…….”
“이거 싫어?”
그걸 보자니 괜히 울컥했다. 정작 내게 이상한 반응을 일으킨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반짝거리는 얼굴을 하고 나만 괜히 반응한 것 같아 좀 억울하기도 했다. 그래서 괜히 두 번씩 반찬을 집게 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복수였다. 시금치나물을 집는 주현이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 다른 거 먹고 싶은데.”
“다른 거?”
내 말에 주현이가 집던 나물을 내려 두었다. 나는 아까 주현이가 입에 넣어 준 새콤달콤한 간장 소스가 일품인 너비아니 구이를 향해 턱짓을 했다.
“응. 고기 먹고 싶어. 저거.”
주현이는 이해한 듯이 너비아니 구이를 보다가 나를 향해서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돼.”
“왜? 나 고기 좋아해.”
“편식하면 안 돼. 가하. 빨리 다리 나아야지?”
그러면서 내 턱을 쥐고 젓가락으로 집은 시금치나물을 진지한 얼굴로 내 입안에 집어넣는 게 아닌가. 마치 자기가 내 아빠가 된 것처럼 성숙한 얼굴을 하고서 타이르는 모습에 만약 주현이가 정말 나와 같은 정상적인 어른이었더라면, 어떤 모습일지 조금 궁금해졌다.
‘전에 본 대호처럼, 막 양복을 입고, 회사를 다녔겠지?’
하지만 지금은 집안에서만 머무르느라 편안한 차림으로 얇은 니트와 면바지를 걸친 주현이를 찬찬히 뜯어보다가 저런 예쁜 얼굴과 커다란 덩치가 좀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막, 드라마에서나 보는 젊은 재벌 후계자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니지, 재벌 후계자 맞구나.’
주현이는 내 몫의 밥그릇에서 정갈하게 한 술 떠서 내게 내밀었다.
“가하, 아―.”
그런 애가 소꿉놀이 하는 아이처럼 내 밥이나 먹여 주고 있다니.
“응.”
윤기가 흐르는 쌀밥 위에 얹힌 늙은 호박무침을 같이 씹다가 나를 향해 방글방글 웃고 있는 주현이를 보았다. 가끔 주말에 하릴 없이 길거리를 지나다니다가 보는 어디 기업 광고판에 나와도 위화감이 없을 모습. 동서양이 오묘하게 조화롭게 섞인 얼굴은 늙수그레한 아저씨들만 눈에 익은 내 눈마저도 확실하게 잡아끌었다. 내가 입안의 밥을 꼭꼭 씹으면서 주현이를 보고 있자, 주현이가 은은하게 웃다 말고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맛없어? 다른 걸로 줄까?”
“아니. 맛있어.”
내가 무슨 염치로 밥이 맛이 있네 없네 하겠나 싶은데, 주현이는 진정으로 내가 싫은 게 무엇인지 신경 쓰고 있었다. 내 말에 주현이는 조금 안도한 듯, 또 내 몫의 밥을 떴다.
“넌 안 먹어?”
“나? 먹었어. 가하, 돌보려면,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해.”
준비된 남자라고 어깨를 당당히 피는 것을 두고 나는 작게 박수를 쳐 주었다. 그래. 잘한다. 그래도 도장은 안 찍어 줄 거지만. 그런 실없는 소리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 방 밖의 멀리서부터 종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삐걱, 삐걱…… 끼이익.
열려 있는 방 문 너머, 복도를 감싼 격자무늬 유리 덧문 뒤로 펼쳐진 푸르른 정원과 날씨가 눈이 부시도록 밝았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소리만 들으면 여기가 어디 이름 모를 산 속의 귀곡 산장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둘밖에 없는 방, 그 소리는 당연히 우리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누구지? 주현이 또한 궁금했던 건 마찬가지인지 일어섰다.
“누구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작게 열려 있던 문이 옆으로 홱 밀려났다.
“나란다.”
찬란한 정오의 햇빛을 받아서 얼굴의 솜털마저 하나하나 보이는 얼굴은, 입가에 예쁜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짙은 초록빛이 도는 레이스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은 뭣도 모르는 내가 봐도 우아했다. 그저 그녀의 빨간 입술에 걸린 미소는 우아함을 가장한 비열한 미소라, 그다지 조화롭지 못했다는 것만 빼면.
나는 엄마의, 아니 그녀의 등장에 잠시 잊고 있던 응어리가 다시 가슴에 뭉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안다.
저 미소의 의미를. 그 와중에 주현이는 뒤로 주춤주춤 오더니 내게 달려오려고 했다.
“으, 으…….”
“응, 주현아. 어디 가니? 저기 얌전히 있어야지.”
그녀가 붙잡지만 않았더라면, 내 상체에 보란 듯이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내 허리의 미래가 걱정된다며 또 속으로 한숨을 쉬었겠지. 그래도 그 너른 등판을 토닥여 주었을 것이다. 레이스 원피스에 가려진 그녀의 가녀린 몸에서 무슨 힘이 났는지는 몰라도, 주현이는 꼼짝을 하지 못하고 팔을 붙잡힌 채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다가 나를 향해 목을 뻣뻣하게 돌리면서 울먹였다.
“가하…….”
‘구해 줘.’
“구해 줘…….”
그 애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처럼 가랑가랑한 파란 눈으로 나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그 모습에 나는 손이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지……. 마세요.”
주현이에게 이리로 오라는 의미에서 내가 손을 뻗자, 그녀는 웃긴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여전히 주현이를 붙잡은 채로 나를 쏘아보았다.
“무슨 소리니? 어른들 말하는데. 애는, 나가 있어야지. 김 비서.”
“예, 사모님.”
그녀만 온 것은 아니었는지 복도에서 주현이 만한 떡대를 가진 한 양복차림의 남자와 그 뒤로 몇몇 사람들이 나타났다.
“데려가.”
“흑.”
투박한 얼굴을 가진 그를 향해 그녀는 주현이를 팩, 던지다시피 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났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아무리 덩치가 산만큼 크지만, 애였다. 내 반응 하나를 기대하고 실망하고 좋아하기 바쁜 그런, 애.
김 비서란 사내 뒤로 복도에 서 있던 여러 명의 남자들이 붙잡는 손에 떠넘겨진 주현이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발버둥을 쳤다.
“싫어, 싫어. 가하, 가하한테 갈래. 가하!”
“얼른 데려가. 시끄러우니까.”
“예.”
그 모습에 그녀는 짜증이 나는지 팔짱을 끼고서 턱짓으로 김 비서를 쫓았다.
“가하!”
끌려 나가는 와중에도 나를 향해서 손을 뻗는 주현이의 모습에, 내 몸 또한 그 쪽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덜컹, 하고 내 깁스를 고정하고 있는 고정기가 목조 천장을 허무하게 두드렸다.
‘이런 젠장.’
나는 어디 가지도 못하고 금방 제어되는 내 몸뚱아리를 탓했다. 그러면서 사람들로 인해 억지로 포박되었음에도 그저 나만을 향해서 시선을 꼿꼿이 고정하고 있는 주현이에게 짧은 위로만 더해 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괜찮아, 곧 갈게. 응?”
“가하아……. 무서워…….”
눈물을 줄줄 터뜨리면서 자기를 붙잡고 있는 덩치들에게 질질 끌려 나가는 모습에 내 심장에 무거운 응어리가 더 단단하게 뭉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바로 그녀에게 항의했다.
“지금 뭐하는……. 애가 무서워하잖아요!”
새엄마라면서, 그럼 좀 어디 좋은 엄마인 척이라도 하면 어디가 덧난단 말인가.
제 자식 버리고 이리 갔으면, 좋은 곳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그 친절한 엄마 흉내라도 내던가.
친 자식인 내가 봐도 정 없는 그 행동에 기가 막혀 하는 와중에 그녀는 우리가 있는 방문의 문을 탁, 밀어서 닫았다. 열려 있어서 바깥의 날씨를 보여 주던 장지문은 꼭 맞물리며 닫혔다. 그 문 위에 발라 둔 한지를 통해 들어 온 빛이 칙칙한 방을 음울하게 밝혔다. 그녀는 우리가 먹던 밥상을 잠시 보다가 너른 방구석에 위치해 있던 의자 하나를 가져와서 내 침대 가까이에 사뿐히 앉았다.
“밥은 대충 다 먹은 거 같으니 좀 얘기나 할까.”
태연하게 다리를 꼬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가라앉은 검은 눈이 나를 집어 삼킬 듯이 벌려든 뱀의 목구멍처럼 오싹하기만 했다.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요?”
“들으려고 온 거 안 보이니? 그때도 맹하더니 지금도 그런 건 여전하구나.”
그녀는 비웃듯이 나를 바라보며 머리부터 해서 발끝까지 살폈다. 그러고는 혀를 찼다. 쯧쯧.
“……가연이에게 대충 들었다. 노가다판에서 일하고 근근히 산다고.”
“……우리 둘에겐 그 정도만 되어도 충분해요.”
부잣집 마나님이 된 그녀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을 알지만 나는 부러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일종의 허세였던 것도 같다.
당신 없이도, 날 버리고 간 당신 없이도 잘 살았다고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런 내 말에 그녀는 소녀처럼 웃었다.
“충분? 네 눈에나 그렇겠지.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영 아닌 거 같구나. 입시 때 제대로 된 첼로도 하나 못 구해 줘서 그 고생을 시켰다며…….”
“……당신처럼은 못 살아도 애 하나 키우는데 부족함은 없어요. 이딴 이야기나 따지러 온 거면 나가요. 난 당신하고 할 말 없으니까.”
내 말에 그녀는 입 꼬리에 담았던 웃음을 거두고 곧바로 표독스럽게 나를 찔렀다.
“이럴 땐 차라리 돈이라도 좀 달라고 하는 게 현명하게 사는 거야. 씨는 못 속인다고 하더니, 같이 밥만 먹고 미련히 누워 있는 게 능사인 줄 알면 큰 착각이고.”
돈이나 타가라는 노골적인 말에 나는 가슴에 응어리진 말을 토해냈다.
“죽어도……. 당신에게 그런 말 하고 싶지 않아. 돈 같은 거, 난 바라지도 않고. 다리 낫는 대로 이 집 바로 나갈 겁니다. 가연이, 여기서 하는 알바도 더 이상 안 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내 말에 그녀는 넌지시 웃었다.
“가연이는……. 그런 거 같지 않던데.”
“그 입으로 내 동생 이름 말하지 마.”
나는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동생의 이름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빴다.
그냥, 그랬다.
‘원망일까, 이게.’
“……그 모지리가 빌려준 첼로를 받고서 그 애가 얼마나 기뻐하던지, 넌 모를 거야.”
그녀는 미묘한 표정을 했다.
“난 알고.”
“……비슷한 거라도 구해 줄 겁니다.”
비록 그 애가 지금 쓰고 있는 것만은 못해도, 구해 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입안의 살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말했다. 말 하나 하나가 나올 때마다 씹은 살결에서 터진 짭짤한 피 맛이 났다.
“첼로 다음에는, 뭘 해 줄 거니? 유학은, 시집은?”
그녀는 가연이의 교수와 비슷한 말을 꺼냈다. 나는 그 현실적인 질문에 입이 잠시 다물렸다가 이윽고 겨우 대꾸했다.
“……원한다면……. 어떻게든 보내 줄 겁니다. 일을 더 늘려서라도. 애 이름 앞으로 적금도 들어놨고.”
“그래? 어떻게? 그 적금 다 쓰면, 어떻게 할 거니?”
“…….”
잘 말했다 치면 금방 다시 들어오는 질문에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못 한다는 게 맞을 것이었다.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하루하루를 이겨내는 것도 버거운 상황이었으니까.
거짓말이라도 좀 잘했더라면, 조금이라도 저 얄미운 여자의 얼굴을 구겨 버릴 수 있었을 텐데. 내 호기로운 허세는 그녀가 말하는 현실적인 장벽을 만나자마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말 없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고운 곡선을 간직한 채로 말려 있는 단발머리의 끝을 만지작대면서 말을 이었다.
“……그 애. 첼로 하나는 참 잘 연주하더라.”
“……잘해요.”
이런 상황에서도, 동생의 칭찬은 귀에 달았다. 그래서 더 마음이 조각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이 자꾸만 내게 마음속에 묻어둔 미련들을 불러일으켰다.
더, 잘해 주지 못한 미안함 같은 것들을.
“저렇게 살면 어디 객원 연주자로 취직도 하고, 밥벌이 하겠다고 레슨 뛰어다니고 그러겠지……. 그 애 동기들은 저 멀리 유학 나가서 더 큰 세상을 맛보고 있는 와중에. 그러다가 변변찮은 남자랑 사랑에 빠져서 가족을 꾸릴 거고. 참 평범한 삶이야, 그치?”
“……그게 나쁜가요?”
오히려 평범히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
삶은 좋거나 나쁘거나 그 둘 중 하나밖에 선택하지 않으니까. 나쁜 삶을 살지 말라고, 평범한 삶을 주고 싶은 게 내가 나쁜 건가. 내 말에 그녀는 웃었다.
“가난하게 사는 게 나쁜 건 아니지. 그렇지만 도움은 되지 않아.”
그런 건 나도 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이 비교하기 시작하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넣는 행위를 멈출 수 없는 건,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내가 가진 독에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먼지만 쌓일 것 같아서. 조금이라도, 잠시만이라도 물을 담아 두었으면 하는 마음인 게 사람 마음인 걸 어떡하나. 그런 내게 그녀는 한껏 자비롭게 말했다.
“우리가 그렇게 헤어졌다 해도, 가족이었잖니. 아무리 그래도, 내 딸이라는 애가 팍팍하게 사는 건, 마음이…… 좋지 않아. 누가 뭐라 해도 난, 그 애 엄마잖니.”
“……그것 참……. 다행이네요.”
그녀에게 그나마 작은 염치라도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러자 엄마는 애살스럽게 웃었다.
“그래서……. 바깥사람에게도 가연이랑 너에 대해서, 얘기했단다.”
“……왜요?”
불쌍하니까, 도와주자고? 값싼 동정심 베푸는 바자회 따위엔 참여하고 싶지 않은 내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 그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왜긴, 우린. 20년 전 불행한 사고로, 서로 생사도 모르고 이제껏 헤어진 부모 자식이니 당연히 얘기해야지.”
“……뭐라고요?”
당신이, 버리고 간 거잖아. 말은 바로 하자고 하려는데 그녀가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는 시늉을 내었다.
“부모 된 도리로서, 지금이라도 도와줄 생각이란다. 그이가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 이 얘기를 듣더니 얼마나 마음 아파하는지 아니. 젊은 애들이 부모 없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온 게 참 안됐다고, 이렇게 만나게 된 거……. 같이 살자고 그러더구나. 잘 됐지 않니?”
이런 기쁜 소식 어디 없다는 듯이 생긋 웃는 얼굴에 나는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싸늘함을 느꼈다. 아니, 차라리 내 몸 속에 있는 피가 다 빠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거짓말이잖아요.”
당신과 같은 핏줄이라는 게, 내게는 너무나도 거짓말 같은 일이었으니까.
“……우리를 두고 가 버렸잖아요.”
“그래서 갚아 주겠다는데, 싫니? 생각해 보렴. 나이 서른에, 변변한 직업 하나 없고, 하루하루 버는 돈으로 세상 살고. 친구는 있니?”
“…….”
그녀는 그게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대상은 명확했다.
“고작 하나 남은 가족이라는 게 너 같은 애면, 어느 가족이 가연이 그래 반갑다고 데려가겠니. 가연이 위해서라면, 삼라에, 이렇게라도 호적을 두는 게 낫지. 마침, 나이도 딱 한 살 모자르더라. 아슬아슬했지.”
그녀는 빠른 생일로 학교를 일찍 들어간 동생의 나이를 말하며 입적하자고 기쁘게 웃었다.
“걱정은 하지 마렴. 아무렴 내 자식인데 소홀히 대할까. 오히려 같은 여자니까 더 잘 챙겨 줄 수 있어. 그 애가 바라는 것, 모두.”
“…….”
안 된다고,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도저히, 그 단순한 말 한마디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내 입에서 금방이라도 나올 듯 말 듯한 이 말 한마디가 꽉 맺혀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있는 나를 향해 마지막 말을 던졌다.
“그리고 말이야. 어차피, 너 때문에 저렇게 모지리 된 거, 옆에서 한 가족처럼 잘 챙겨줄 수 있으니 참 잘 된 거 아니겠니. 사이좋게 지내렴.”
“…….”
‘나 때문……이라니. 주현이 정신이 저렇게 된 게 나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