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61)

* * *

“……아 글쎄, 그 놈이 저기 xx기업 자식이라서 꼭 기소유예는 받아야 해. 저기, 중앙 형사 3부 중에 아는 검사 있어?”

이제는 동료가 아닌 로펌의 변호사는 사건 소장을 쓰다말고 옆에 앉은 다른 변호사를 재촉하고 있었다. 내가 나가는 일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 셀 수 없이 바쁜 일상들 중의 하루였다. 제법 유명한 기업의 자제 하나가 마약을 하다가 잡힌 것을 두고 무마해 보려고 애쓰는 모습.

정의라는 테두리 안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 그동안 버텼던 세월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들어오지 말 것을.’

나는 말끔하게 치운 데스크를 다시 한 번 눈으로 훑고, 돈 뭉치 대신에 내 간소한 짐을 정리한 사과 박스를 들어올렸다. 그동안 머물렀던 사무실의 유리문을 열고 나가서 누가 봐도 휘황찬란한 인테리어가 된 복도 끝에 위치한 인포데스크에 내 이름이 적힌 출입증을 올려두었다.

[박&장]

명패를 벽에 크게 박아둔 인포데스크의 여직원이 내가 돌려준 사무실 출입증을 두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마, 내가 나갈 줄을 몰랐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가 퇴사를 논했던 시니어 변호사가 생각보다 입이 무거웠던 걸까.

“예, 도와드릴……. 황 변호사님?”

“출입증, 여기 있습니다.”

“아, 예…….”

그녀는 내가 내민 출입증을 머뭇머뭇하며 받아들였고, 나는 잠시 데스크에 걸쳐 둔 짐 박스를 다시 들었다. 이 로펌과 영원한 이별을 하기 위해 막 발을 떼는 나에게 인포의 여직원이 급하게 손을 뻗었다.

“아, 저!”

“……무슨 일 있습니까?”

“아……. 그, 황 변호사님, 혹시……. 퇴사…… 하세요?”

“예.”

그녀는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지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왕방울만 하게 떴다.

“왜,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야.”

그런 그녀를 두고 옆에 있던 그녀의 동료가 작게 타박을 했다. 그녀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그녀가 다니는 이 로펌은 한국에서 제일 크고 잘 나가는 로펌이었으니까. 계속 다니게 된다면 성공이 다분히 보장된 멀쩡한 직장을 때려 치는 내가 미친놈으로 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렇지만.

“그냥…….”

난 성공을 원하는 것도, 돈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옳은 길을 걷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더러워서요.”

이 세상에서 사라진 그 애에게 부끄럽지 않을, 그런 길.

내 말에 여직원의 얼굴이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마치,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은 거 아니냐는.

“네?”

아무리 잘 꾸민 인테리어와 비싼 가구를 들여놓는다고 한들 저 안에 사람들에게 배인 썩은 내는 사라지지가 않는다. 아니, 그런 걸로 가려질 법한 게 아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서 주차장으로 향하는 지하층을 누르고 피어오르는 헛웃음을 픽픽 뱉었다.

‘어차피 태생은 못 속인다, 이건가.’

더러운 손이 되어 사는 인생이 싫어서, 가장 공정하고 밝은 길로 가리라 마음먹고 온 길인데. 이쯤 되면 꽤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날렘마 같네.”

태양은 움직이는 거 같지만 사실 그 자리 그대로 있다.

그저 내가 움직이는 바람에, 착각하게 만드는 것일 뿐.

내가, 가족들과 정반대의 길이라고 생각한 ‘법’은 결국 이름만 다르지 멀리하고 있는 가족들이 하는 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조하고 있는 내 머리위로 띵, 하고 엘리베이터 특유의 소리가 나며 주차장 입구로 문을 열었다.

그렇지만 그 일도 오늘로 끝낼 셈이었다.

이제 연수를 마쳤으니 변호사 자격은 수료한 셈이라, 나름 모아 둔 돈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인권 변호사를 할 생각이었다. 이미 작은 사무실을 열 오피스텔도 알아봐 두었고.

모든 게 완벽했다.

내가 하는 일에 대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아버지의 말이 아니면, 모든 게 완벽했을 것이다.

“삼라 쪽 법무 팀에 들어가라.”

그렇게 내 인생의 고리가 다시 한 번 꼬이고 말았다.

“……농담이시죠?”

지금, 뭐라고 하신거지.

“지금 애비가 농담이나 할 나이냐.”

“…….”

아버지는 내게 했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형형한 눈빛을 띄며 내게 종용했다. 변호사 자격도 땄으니 삼라 계열사에 들어가라고.

김이 올라오는 뜨거운 밥공기를 한술 뜨기 위해 닿은 차가운 손이 마치 화상을 입은 듯 저릿저릿했다. 나는 맞은편과 내 옆에 앉은 큰형과 둘째 형의 느긋한 수저놀림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형들은 그런 내게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구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다 못해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했다. 큰형의 옆자리이지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형수만 이 분위기가 낯선 듯 눈웃음으로 샐샐 웃어 보이며 나를 좋게 좋게 타일렀다.

“도련님, 요즘 변호사들도 많아져서 옛날 같지 않대요. 이왕 기회 온 거, 큰 회사도 다녀 보시면…….”

“저는 그런 회사 다니려고 변호사 된 거 아닙니다.”

다만 그런 상냥한 타이름을 받기에는 내 머리가 너무 커졌다는 게 문제였다.

어린 시절의 나였더라면, 또 모르지만.

“아니, 그냥……. 저는…….”

내 야멸찬 대답에 형수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가만히 밥을 먹던 큰형이 눈을 내려뜨며 나를 작게 꾸짖었다.

“아버지 말씀 자세히 들어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그러는 건 뭐냐. 너한테 나쁜 거 하라는 거 아니잖냐.”

기회를 보고만 있었던 것인지 곧이어 둘째 형도 가세해서 나를 향해 이죽거렸다.

“너, 설마 그 인권인가 나부랭인가 한다는 거 진심이었어? 허, 참 이게 굶어 죽으려고 작정을 했어. 난 또, 자소설용 말인 줄 알았지. 너무 꿈속에서 사는 거 아냐?”

내가 형의 계획대로 영감의 길을 가지 않는 게 제법 불만이었던 모양이었는지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비아냥거렸다. 가족들이 그렇게 내게 한마디씩 푹푹 찌르고 가는 와중에 아버지가 최종적으로 낮게 일갈했다.

“언제 애비가 대호 네 녀석 하는 일 가지고, 말 한마디 한 적 있냐.”

“…….”

놀랍게도 그동안 없었다는 게 내 침묵의 원인이었다. 어쩐지 차려 준 밥상을 보란 듯이 걷어차도 답지 않게 말이 없다 싶었다. 결국 이렇게 하려고 그랬던 거였나. 나는 여기까지 오기 위해 노력했던 그동안의 나날이 문득 바람 빠진 풍선과 같이 식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허울 좋은 회사원이자 떳떳한 조폭이 되지 않는 것을 두고 아버지 성격치고 너무 조용했지. 그렇지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젠장…….’

나는 사방이 막힌 그물에 걸린 꿩이 된 기분으로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사실은 사실이고. 아버지는 내 태도를 한풀 꺾은 것에 만족스러운지 나이 들어 시원찮아진 목구멍을 정리했다.

“크흠, 변호사 자식 둔 애비 체면은 세워 줘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그 놈의 체면을, 하필 내가 세워야한단 말인가. 그 회사에서 한 자리 크게 차지하신 ‘능력 좋은’ 형들은 어쩌고. 나는 점점 떨어지는 입맛에 쓰게 국을 퍼먹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녀석 따까리 짓 평생 하라는 거 아니다. 더도 말고 2년 만 해. 그럼 그 후에 인권이고 나발이고 나가서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으마.”

‘그 녀석? 삼라 부회장을 말하는 건가.’

2년.

길고도 짧은 기한에 나는 머리가 복작복작해져서 더 밥을 먹었다가는 영 얹힐 거 같아 국만 죽 퍼먹고 있었다.

솔직히 생각해 보자. 싫다. 난 이딴 조폭 집에서 좋아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그들과 같이 길을 하고 싶지 않은 건 확고했으니까. 그렇지만 여기서 내 고집만 부리며 단칼에 거절했다가는……. 아버지 성격은 둘째 치고, 형들까지 가세하면 아무리 막내라 오냐오냐한다한들 이 집에서 무사히 나가는 건 기대하기 어렵겠지.

아버지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에게 자식은 단순 혈연이 아닌, 의리로 맺어진 사람들을 포함하니, 말 안 듣는 놈 하나 정원 뒤편에 몰래 파묻는다고 흠 될 것도 없었다. 그게 내가 아는 아버지였다.

“……알겠습니다.”

고집만 부리면서 무작정 우기는 짓은 멍청한 놈들이나 하는 짓인 것을 난 안다. 이럴 땐, 시간이 조금 더 걸려도 돌아가는 수밖에는 없다. 내 얌전한 대답에 아버지는 심각했던 얼굴을 살짝 누그러뜨리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알 생각했다. 사내자식이라면 모름지기 큰 곳에서 놀아야지. 지지부진한 거로 살 생각 말고…….”

아버지의 말에 나는 이제 헛웃음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원래 그런 사람인 것은 알지만, 그걸 또 말로 듣는 것은 다르다. 지지부진하다니. 당신에게서 난 자식이 그 손으로 직접 키운 조직을 무너뜨려도, 지지부진하다고 할 건가. 그렇지만 나는 도리어 힘껏 웃어 보였다. 아버지는 알지 못할 생각을 머리 뒤에 숨기면서.

2년. 그동안 탄탄하게 쌓은 조직 잘 지켜 보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거 참……. 기대됩니다.”

“그래. 이렇게 말 좀 잘 들으면 얼마나 좋아? 아버지, 이게 다아, 막내라고 오냐오냐 거려서 그래요. 요즘 애들 고생 길 피하려고 난린데 너는 어떻게 미련하다는 말도 모자르게 고생길을 자처해.”

둘째 형은 그동안 많이 참고 있었던 것인지 나를 그 팔로 툭툭 쳐대며 말을 얹었다. 나는 그 말을 순순히 다 들어주며 입안의 돌멩이 같은 밥을 꼭꼭 씹어서 으스러뜨리고 제일 먼저 식탁을 떠났다. 그가 말한 자식으로서의 이 마지막 도리만 끝내면, 어디 남만도 못하게 굴어 주리라고 칼을 갈았다. 그런 내 뒤에 대고 큰형이 핀잔을 주었다.

“배운 놈이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닌 녀석이.”

나는 방 안으로 돌아와서 내일이면 영영 떠날 예정이었던 침대에 나를 푹 던졌다.

‘젠장. 뭐 하나 하려하면 꼬이기만 하고.’

나는 그들의 안일한 작태에 한숨을 푹푹 쉬며 이불에 나를 묻었다.

“하…….”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체면도 세워 주고, 내려 주는 것도 나면 되겠네.

나는 지끈거리는 눈 사이를 엄지로 꾹꾹 눌러대며 마음을 다잡았다. 2년만 버티면 뭘 해도 말이 없겠다고? 그동안 내가 보아 온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가족들이 등 돌리는 게 더 무서운 걸, 알 사람이……. 그래도 피로 이어진 자식이라 믿는다 이건가.

그럼 그 믿음, 부응시켜드려야지.

그렇지 않다고.

그렇게 나는 변호사 자격을 받자마자 삼라 건설 법무 팀의 사내 변호사로 발령 받았다. 사실상 낙하산이나 마찬가지로 입사한 셈이었는데, 법무 팀 사람들은 예상 외로 별 생각이 없는지 잡음 하나 없이 제법 친근하게 굴었다. 예를 들면 이렇게.

“황 변호사님, 커피 드세요. 방금 빼서 맛있어요. 호호.”

나는 출근하자마자 캡슐 커피를 빼와서 내 책상에 올려 두는 여직원에게 어색하게 감사를 표했다.

‘귀찮아…….’

“이 대리님 감사합니다……만, 수고롭게 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빼 먹을 테니까…….”

나는 손이 있다는 의미로 손을 올리자 여직원은 그걸 이상하게 이해했는지 하이파이브를 하고 깍지를 살포시 꼈다가 꺅, 하고 웃었다.

“…….”

‘이건 또 뭐지.’

“아유, 이런 게 뭐가 수고로워요. 일도 아니지. 과장도 심하시네!”

하루하루 진화하는 그녀의 대응에 대처 할 새도 없었다. 부담스러운 행동만큼 우렁차게 웃는 그녀는 얼굴에 흐르는 붉은 끼를 숨기지도 않고 성큼성큼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굳어서 오염된 손을 보고 있던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옆에 있는 선배 변호사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의 끝을 쫓다가 내 책상에 있는 커피에 도달하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잔, 빼 드릴까요.”

“나는 빨간 캡슐로 줘. 그게 맛있더라.”

내 예상이 맞았는지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반가움을 표했다.

‘차라리 대놓고 빼 오라고 시키지.’

“예.”

귀찮긴 하지만, 사회생활을 편하게 하려면 어느 정도 기름칠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지라 나는 탕비실에 가서 커피 머신에 선배 몫의 캡슐을 하나 넣어서 추출 버튼을 눌렀다.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커피 특유의 향긋한 냄새가 탕비실 안에 퍼지고 있는데, 다른 부서의 직원들이 들어와서 내게 아는 척을 했다.

“진짜로요? 웬일로 온대요? 어, 황 변호사님!”

“말로는 좀 나아졌다고 하는데, 아 모르지. 결국 그 첩이랑 같이 살고 싶은 거 아니겠어? 남자들이 다 그렇지. 어, 황 변. 커피 마시러 왔어? 역시, 잘생겨서 그런가 맛도 잘 보나 봐.”

여기 법무팀네 탕비실이 젤 비싸고 맛있는 커피 마신다니까. 옆 사무실에 위치한 마케팅 부서의 오 과장은 껄껄 웃으면서 괜히 내 어깨를 만지작대었다. 중년의 나이를 맞은 그는 머리가 벗겨진 게 신경 쓰이는지 다른 손으로 뒷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옆에 있던 비서과 대리가 내게 가까이 왔다.

“과장님도 참, 황 변호사님 커피 빼 드릴까요?”

“아뇨. 전 이미 마셨고, 선배님 드리려고요.”

커피가 다 나온 컵을 가지고 가려는데 오과장이 검지를 과장되게 양옆으로 까딱까딱 흔들었다.

“아니, 요즘 젊은 것들이 더하네. 누우가 우리 잘쌩긴 황 변 뭐가 모자라서, 어! 가암히 커피 시중을 시키나? 직접 타 주지는 못할 망정…….”

“괜찮습니다. 저희끼리 돌아가면서 하는 거라.”

내가 그의 격렬한 반응을 대충 진정시키면서 탕비실을 나서자, 오 과장 무리가 나가는 내게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지 오면서 하던 말들을 다시 이었다.

“햐, 아침마다 호강이라니까. 잘생긴 얼굴에 비싼 커피. 음.”

“역시, 잘생긴 사람은 뭘 해도 달라.”

“그러니까요. 능력도 완전 짱이잖아요. 저 젊은 나이에 벌써 변호사, 게다가 SS급 에스퍼……. 하아, 여자 친구 있겠지? 넘 부러워…….”

“워낙 과묵해서 자기 이야기를 안 하니까 그렇게들 상상하지, 근데 혹시 알아? 벌써 애가 셋일지. 누군지는 몰라도 완전 조상신이…….”

애가 셋이라니. 있지도 않은 아내와 가족계획을 뒤에서 이리저리 쑥덕이는 게 영 거슬렸지만 나는 우선 자리로 돌아가서 선배에게 커피를 건넸다.

‘설마 저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믿는 사람이 있겠어.’

내가 건넨 커피를 보고 선배가 무척 좋아했다. 어제 야근을 해서 꽤 피곤한지 아침 커피가 무척 고픈 모양이었다.

“아이, 고마워. 울 황 변 아님 내 커피 챙겨 주는 사람도 없다니까.”

“뭘요.”

나는 엊그제 올라온 해외공장 계약서를 모니터에 띄우고 스크롤을 내리며 영문과 국어로 작성된 조항을 비교 확인하고 있는데 옆의 선배가 이젠 입이 심심한지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맞다, 황 변 그거 알아?”

“뭐가요.”

“요즘, 우리 아들 뽸밀리 결혼할거라던데. 들었어?”

그는 소위 삼라 오너 가족을 통칭하는 ‘패밀리’ 중 아들의 재혼 소식을 알렸다.

‘송 회장의 아들이면……. 부회장?’

“재혼……. 말씀이십니까?”

“그래. 새장가 든다고 지금 사옥에 쫙 퍼졌어. 내일이면 아마 못해도 신문 1면에 기사 날걸? 벌써 저번 주에 그 아들 세컨이랑 막내 뽸밀리 귀국 비행기 표 결제도 다 났다고 재경 팀 한 대리가 그랬으니까. 요즘은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해. 어떻게 자기 애 돌봐 주는 도우미랑……. 완전 영화 ‘하녀’ 시즌 투라니까.”

선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내가 가져온 커피를 숭늉마냥 후루룩, 마셨다.

그 애가, 못 돌아올 이유도 없지만, 돌아온다는 소식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지라 얼떨떨하기도 했다. 아니, 애초에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세월의 먼지를 머금고 가려져 있던 애였다.

나는 잊혀진 기억 속의 그 애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에 대해 알 수 없는 미묘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어차피, 그 애는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돌아와 봤자 언론의 좋은 먹잇감이나 될 텐데…….’

그래서 스웨덴에서 내색 하나 안하고 이제껏 살아오던 것 아닌가.

멀쩡한 놈들도 감투를 쓰고 보면 난도질당하기 마련인 세상이건만. 나는 모니터 속의 계약서에 간간히 맞지 않는 문장들을 고치려고 키보드를 간헐적으로 툭, 툭 두드리며 머릿속에 피어오르는 어린 시절의 향수에 빠져 있었다.

한창 떠들던 선배는 사내 메신저로 무언가를 전달 받았는지, 모니터를 바라보며 으음, 하고 침음을 내다가 자기 책상에 꽂혀져 있는 서류철을 슥슥 뒤졌다.

“뭐, 도와드릴 거 있으십니까.”

내 말에 그는 손을 내저었다.

“아아, 아냐 아냐. 내가 할게. 넌 그 해외 공장 노동 계약서 마무리 해. 아, 대신 이거 복사 좀 해 주라.”

“예.”

그는 작성은 자기가 하겠다며 펜을 꺼내들었고, 나에게는 서식용 종이 한 장을 꺼내서 복사를 부탁했다. 나는 바로 그 서류를 받아서 복도 입구 쪽에 위치한 복사기로 향했고 동시에 받은 종이의 내용을 스치듯이 읽게 되었다.

[단기간 고용 계약서]

‘알바? 이 시기에?’

내가 알기론, 이번 단기 인턴이나 알바들은 채용이 이미 끝난 걸로 아는데……. 딱히 누군가 도중에 그만뒀다는 말도 못 들었고. 나는 선배가 부탁한대로 한 부 복사를 해서 자리로 돌아와 원본과 함께 다시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어어, 땡큐……. 참나. 별 걸 다 요구하네…….”

“뭐를요.”

그는 혀를 쯧쯧 차면서 서류철을 정리했고, 나는 대충 대꾸해 주었다.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의 투덜거리는 대답이 곧장 따라왔다.

“아 글쎄, 비서과에서 첼로 연주자 하나 구하래내. 귀찮게…….

그는 모니터와 서류를 번갈아 보면서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아마 고용 기간이나 특수 조항인 듯 했다. 소위 말하는, 비밀조항 같은 거 말이다.

‘그나저나, 첼로 연주자?’

“……첼리스트요?”

“어어. 맞아. 그거.”

“왜요?”

“걔, 막내 뽸밀리 말야. 정신 좀,”

그는 조항을 쓰다말고 파티션 너머로 미어캣처럼 휘휘 망을 보더니 내게 눈만 빼꼼 내밀고 작게 속삭였다.

“안 좋잖아? 그때 사고 나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손상된 정신이 육체의 나이를 따라오지 못하는 걸 짚어 주는 선배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형들에게 들어서 애저녁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러자 선배는 역시, 너도 아는군, 같은 눈빛을 띄고서 마치 큰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입을 조용히 뻐끔대었다.

“그래서 그런 건진 몰라도, 첼로 연주가 없으면 잠을 못 잔댄다. 뭐, 사고로 후유증으로 인한 불면증. 그런 거 있잖아……. 나 참……. 귀는 또 얼마나 고급이신지 CD음악도 아니고, 사람이 바로 앞에서 잘 때까지 연주해 줘야 한대.”

그 비자금, 괜히 그만큼 펑펑 쓰는 게 아니었나 보다고, 그는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게 선배의 돈도 아닌데 마치 자신의 돈을 쓰는 것처럼 아까워하는 게 조금 아이러니했지만. 우린 그저 그들의 창고지기인데, 가끔 주인이 된 듯이 행동하는 노예가 있다. 슬프지만.

“아참.”

선배는 내게 좀 더 커진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황 변 혹시 첼로 전공하는 애 알아?”

“……아뇨.”

“그래?”

죽은 어머니면 몰라도. 고등학교까지 취미로 연주하던 첼로가 방구석에 늘 세워져 있는 것을 자연스레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선배는 잠깐 실망한 듯, 흠, 한숨을 쉬었다.

“누구 아는 사람 없나……. 이걸 아무나 뽑긴 좀 그런데…….”

그 깊은 고민이 서린 한숨에 나는 문득 바이올린 연주자인 형수라면 건너건너 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악기 연주하는 사람은 아는데. 한번 아는 사람 있는지 물어볼까요?”

“오우. 부탁 좀 할게. 알지? 이런 건 ‘알바지옥’ 이런데 못 올리는 거. 이런 일 골치 아파서 생판 모르는 사람 들어오면…….”

그는 손날로 자기 목을 스윽, 그었다.

“우리 다 모가지야. 나 아직 애기들 초등학교도 못 들어갔어. 살려 줘라, 대호 형님!”

나는 선배 특유의 넉살에 피식 웃었다. 그는 귀찮기는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아우. 그럼 그럼. 부담 갖지 말고.”

뭐, 형수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 애의 일이라는 것을 알면 아마 큰형도 도와주라 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선배 말대로 선뜻 외부인을 들였다가는, 우리가 책임져야 할 귀찮은 일거리들이 많아질 테고. 어차피 2년만 채우면 나갈 직장이지만 열과 성을 다해야할 일을 만드는 것은 사양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번 연락해 보겠다고 운을 띄웠다. 그러자 선배는 한뜻 산뜻한 얼굴로 오늘 점심을 쏘겠다고 선심을 팡팡 썼다.

“으아, 배불러. 역시 회는 스시조가 짱이지.”

“전 연락 좀 하고 오겠습니다.”

“어, 어. 그래. 갔다 와. 오래 있다 와도 돼. 내가 말해 줄게.”

“예.”

나는 선배와의 식사 후에 점심시간의 막간을 이용해서 형수에게 연락을 했고, 그녀는 내가 사옥 1층의 흡연 공간에서 여유롭게 담배를 태우고 들어갈 무렵에야 답장을 보내왔다.

[내 친구의 제자 하나가 마침 연주 아르바이트 구하고 있대요.

친구 말로는 순하고 착한 애라는데.

연주도 수석 급이고.

어디 빽도 없고.

집도 어려운 편이라 돈만 잘 챙겨 주면

입단속은 전혀 문제없을 거래요.]

나는 그럼 연락처 전달해 달라고 다시 답장을 보내며 회사 안으로 들어갔고, 양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자 내 핸드폰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의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최 교수님 소개로 연락드리는 유가연입니다.

편하실 때 답장 부탁드립니다.]

‘유가연?’

나는 모레 회사에서 보자고 답장을 주었고, 이름으로 보아 여자일 게 분명한 번호의 주인은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형수의 말마따나 고액의 알바 자리가 간절한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혹시 첼로도 같이 들고 가야하나요?]

‘음대 교수인 형수가 아는 사람의 제자면 뭐……. 어련히 잘하겠지.’

무겁기가 짝이 없는 악기를 들고 다니는 수고를 굳이 끼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사인만 하러 오면 된다고 답장을 한 후에 핸드폰의 알람을 껐다.

‘사실, 돈을 주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건데.’

뭐 해야 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의심 한번 안 하는 게 내 기준에서 용할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책상 위에 있는 삼라 로고가 박힌 모니터를 보고 문득 깨달았다.

“아.”

‘대기업이라서 딱히 생각이 없나.’

밖에서 보기엔 그럴 만도 하겠군. 기업 행사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책상에 놓인 달력에 늘어나고 있지만 줄어든 것 같지 않은 x자 표시를 오늘 날짜 위로 하나 늘리면서 다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업무로 돌아갔다. 뭐가 됐든지 난 2년을 버티고 나가면 됐다.

인권 나부랭이로 아버지의 조직을 언젠가 무너뜨리겠다는 목표 하나로.

판권

뻐꾸기 새장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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