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61)

* * *

그 두 명이 만나지 않을 거라는 내 예상은 보기 좋게 깨졌다.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가하와 반이 떨어진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귀국자녀로 학교에 등록한 그 애가 일반 수업으로 들어오며 우리의 거리는 멀어지다 못해 끊어졌다. 그것만으로 끝났다면 내가 이렇게 속상하지도 않을 것이다. 순식간에 가하의 옆을 차지한 그 애는 이제 나 대신 가하를 지켜 주었다. 애들의 과도한 관심과 욕망으로부터 그 강력한 가이딩과 같은 보호막을 펼쳐 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게 못내 섭섭하고 억울했다. 원래, 그건 내 역할이었다.

‘내가 있었던 자리였는데…….’

그렇다고 저 둘의 사이에 끼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어렸다. 어차피 내가 끼어 봤자 그 애의 말을 통역하는 사람으로 남을 걸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호시탐탐, 그 애가 가하의 옆자리를 비우기만을 기도하며 살피던 어느 날.

가하가 홀로 복도로 나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붙잡았다.

“가하야.”

“대호야.”

방학 때부터 만나지 못한 가하의 얼굴은 변함없이 나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서 용기가 솟았다. 물론 붙잡고 난 뒤에 가하를 뒤따라 나오는 그 애와 눈이 마주쳐서 기분이 살짝 나빠졌지만. 그래도 가하가 준 용기와 지석이 형의 조언을 힘입어 나름 강하게 나갔다.

“오늘 시간 있으면 우리 집 갈래?”

“오늘?”

내 말에 가하는 그 애를 한 번 보더니 난감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거절의 표시에 큰 실망감이 들었다. 왜?

“오늘은…… 나 친구 집 가.”

친구 집? 네 친구, 나잖아. 우리 집 말고 어디를 간다는 거야? 설마, 하던 그 마음이 날카로이 벼려지다 못해 뾰족하니 그 애를 찌르고 말았다.

“어디? 너, 친구 없잖아.”

“……주현이네.”

아차, 이런 말은 아닌데. 내가 뱉은 말에 뒤늦게 후회하고 있을 무렵에, 가하는 잔뜩 가라앉은 얼굴로 나를 지나쳐서 뛰어가 버렸다.

‘안 돼, 사과해야하는데…….’

“어, 야! 유가하!”

내가 그 애를 따라가려는 차에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다.

“대호.”

가하의 뒤에 멍하니 서있던 그 애였다. 어눌한 한국어로 나를 부른 그 애는 그새 키가 좀 큰 건지 나보다 한마디 정도 큰 다리를 비딱하게 서서 내 팔을 잡고 씩 웃었다.

『가하 우리 집 갈 거야. 너 방금 너네 집 가자고 그랬지?』

『……너 왜 그래?』

『뭐가?』

『너 낯선 사람 안 좋아하잖아. 왜 자꾸 가하랑 다녀?』

『아, 가하?』

그 애는 붙잡은 내 팔에 가이딩을 흠뻑 주입하면서 대답했다. 일반적인 가이딩보다 양을 차고 넘치도록 주는 탓에 팔 안쪽이 저릿저릿하게 통증을 알렸다.

『내 꺼니까.』

그렇지만 그 애는 아까와 여전히 똑같은, 편안한 얼굴을 했다.

『내 꺼야.』

『……뭐?』

『다른 사람 손 타는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그 애의 손에서 특유의 붉은 빛을 뿜는 가이딩이 거친 파도처럼 흘러나오며 나를 감쌌다.

풍부하게 감싸다 못해 마치 익사시키려는 듯한, 그런 힘.

나는 처음으로 마주한 그 애의 힘에 머리가 잔뜩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그건 에스퍼에게 힘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압도적인 힘을 불어넣어서 에스퍼를 길들이기 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치, 오르지 못할 나무를 오르는 벌레를 간단히 손톱으로 찍어 눌러 버리는 것처럼.

『너, 이거 놔!』

『건들지 마.』

나는 내 몸에 들러붙으며 흘러오는 그 힘을 다급하게 떨치려 했다. 그 애는 그런 내가 우스운지 잔뜩 즐거운 표정을 했다. 마치 장난을 치는 사람처럼 그 커다란 힘을 내 몸을 가로지르다 못해 틈 하나 없이 잠식해 나갔다. 특히 내 목과 심장 쪽을 찢어발길 것처럼 위협적으로 겨누었다.

『손, 대지마.』

명백한 경고였다. 나는 그게 더욱 약이 올라서 간신히 가이딩을 막아내면서 반항했다.

원래, 하라고 할수록 하기 싫은 게 사람이잖아.

『……싫어. 내가 먼저 친구했어.』

『그래?』

그 애는 웃음으로 젖은 파란 눈을 더욱이 반짝였다.

『그럼 나, 가하 따라다니면서…… 괴롭힐까?』

『……뭐?』

뭐라고? 가하를 괴롭힌다고?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손대지 말라고 한 애가 말한 것 치고는 내용이 좀, 이상했다. 그 애는 무언가를 상상해 보는 듯, 복도의 창문가를 멀찍이 바라보며 내게 중얼거렸다.

『궁금한데.』

『너 지금 뭐라 했어?』

『나 궁금해. 걔 눈이 무척 새까만 게, 울면 까만 눈물 흘릴 거 같아. 아주 예쁘게. 그렇지 않아?』

『……너 미쳤어?』

『아니. 진짜 궁금해. 나 보면서 웃는 것도 귀엽고, 다른 애들한테 이상한 소리 들어도 가만히 참는 것도 귀엽고. 그게 너무 귀여워서, 이제는 나 때문에 엉엉 울면 진짜 귀여울 것 같아.』

내 반응에도 그 애는 하하, 하고 웃을 뿐이었다. 이보다 어떻게 더 진심이겠냐는 듯이…….

『나 보고 싶어. 걔 눈물 흘리면, 왠지 까만 초콜릿맛 날 거 같단 말야.』

그 애는 붉은 혀로 입맛을 다셨다. 갈증에 목마른 짐승과 같은 태도에 나는 등줄기가 서늘했다. 미친…….

『하지 마!』

제정신이 아니야. 그 애는 내 몸을 파고드는 모든 힘을 다시 거둬들이면서 경고했다.

『그럼 가하한테 다가오지 마.』

『너…….』

너, 그 애를 지켜 주려는 거 아니었어? 도대체……. 내 작은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안 그러면.』

콧노래를 부르는 그 애는 주저앉은 나를 지나치면서 복도를 저벅저벅 걸어갔다.

『가하 맨날 울면서 학교 다니는 거 볼 줄 알아. 난 그래도 좋거든.』

말문이 막혀서 가만히 있는 나를 두고 그 애가 즐겁다는 듯이 하하 웃었다. 마치 고대하던 선물을 기대하는 애처럼, 그렇게 잔뜩 고양된 얼굴로 웃었다. 그 일그러진 마음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가하의 곁에 서 있는 애는, 가하를 지켜 줄 애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가이드가 에스퍼의 부속품이라고들 생각하지만, 가하와 같이 낮은 에스퍼에게는 그보다 더 잔혹해질 수 있는 지배자도 없었다. 나마저도 그 애의 힘으로 이렇게 괴로운데…….

‘가하는…… 얼마나 아플까.’

나는 그 애가 불어 넣은 과도한 가이딩으로 인해 온 몸과 얼굴 한쪽에 만든 멍을 숨기면서 마중 나온 차를 향해 갔다. 높은 등급의 에스퍼인 내가 이렇게도 무력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우울해하는 나를 뒤에서 붙잡았다.

“대호야.”

가하였다. 나는 아까 전, 그 애가 말한 내용이 생각나서 등이 움찔거렸다.

「울면 진짜 귀여울 거 같아.」

아니, 아니야.

“대호야, 얼굴…….”

「그럼 가하한테 다가오지 마.」

나는, 네가 웃는 게 좋다.

“손 대지마!”

행복하게.

「안 그러면 가하 맨날 울면서 학교 다니는 거 볼 줄 알아.」

나는 그 애를 지키고 싶었다. 울리거나,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하는, 내가 찾은 소중한 사랑이었으니까……. 애써 외치는 나를, 가하 뒤에 선 그 애가 바라보고 있었다.

‘말해.’

그 애의 잔혹한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너 싫어. 나한테 오지 마…….”

“미안해, 대호야…….”

내 말에 가하는 충격을 먹은 듯, 잠시 멈칫 하더니 이윽고 사과했다. 불안하게 떠는 눈이 마치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하는 게 훤히 보여서 나는 마음이 아팠다.

아니야, 나 너 안 싫어해…….

‘좋아해.’

그렇지만 내가 가까워질수록, 다가갈수록 가하를 괴롭힌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그 애는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이상 넘어오지 마. 그 애의 눈이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됐어. 나 갈 거야. 이제부터 말 걸지 마…….”

나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하기도, 가하의 슬픈 얼굴을 보기도 버거웠다.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떴고 내가 차에 타기 전, 뒤를 돌아보았을 때에는 시무룩하게 어깨를 떨어뜨린 가하를 그 애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안아 주고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

그 일 이후로 나는 가하에게 다가가지도 않았고, 마주친다 해도 이전처럼 말을 걸지 않았다. 혹시라도, 나 때문에 그 애가 가하를 괴롭혀서 울거나, 슬퍼하는 건 도저히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투명 인간처럼 지나치던 그 애의 이야기와 마주하게 된 건, 여느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둘째 너 요즘 삼라 화학 다녀온다면서.”

희끗한 머리를 한 아버지는 여전히 꼿꼿한 기백을 숨기지 못했다. 식탁에 잔뜩 차려진 반찬 중에 나물을 집던 둘째 형이 먹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박 상무가 불렀습니다.”

“화학의 박 상무? 뭐가 필요하다고? 어차피 그 화학 산업 부도 낼 거라 했잖냐.”

어린 나이지만 항상 식사시간마다 나오는 말들을 반복해서 듣는 덕에 대충 무슨 말이 오가는지는 알았다. 우리 집이 삼라의 불법적인, 나쁜 일을 어떻게 도우는 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치 한 하늘에 태양과 달이 있는 것처럼, 그들이 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행하는 어두운 일들을 아버지와 형들이 작업하곤 했다. 아버지 밑에 심복들이 있는 것처럼, 송 회장의 숨겨진 심복은 우리 아버지였다. 그 돈독한 사이와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다는 배경, 나이가 비슷했던 것까지. 그 애와 내가 닿을 수 있었던 접점들이었다.

“사업장 하나가 탐이 나나 봅니다. 송 회장은 모르는 거 같습니다.”

“……송 회장이 몰라? 뭔 회사를 가지는데 몰라?”

“그게…….”

답지 않은 긴장이 어린 둘째 형은 유리컵에 담긴 물로 마른 입술을 살짝 축이더니 말을 이었다.

“박 상무 말로는 그 손자네 가택 비서가 지시한 거라고 합니다. 송 회장 모르게 따로 지시한 거 같습니다.”

“주현이? 그 애가 뭐 원하는 게 있다고? 대호야, 너 뭐 아는 거 있니?”

“……아뇨.”

나는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나 또한 둘째 형의 말에 놀랐다. 그 집 가족 중에 부회장에 가까운 그 애의 아버지나, 회장인 할아버지가 아니면 굳이 회사 일에 지시할 사람이 없었다. 그 애는 자기의 주변 애들이 부모의 등쌀에 부탁하는 것을 싫어해서 일부러라도 집안일에 연결된 행동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기업 행사에도 모습을 비추지 않을 정도니 말 다한 셈이었다.

그런 마당에 일을 지시한 사람으로 나온 이름은 그 애의 가택 비서라는 건, 결국 그 애의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애가 그런 말들을 직접 지시하기에는 한국말이 너무 서툴렀다.

혹은, 자신이라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거나.

“그게…… 최종 담보로 타겟인 사업장 네 애를…… 대신 데려오라고 그럽니다. 나중 가서 돈 안 받아도 되니까, 애만 멀쩡히 잘 챙겨오라고요……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애?”

아버지 또한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혹시…….

“예. 그 사업장네 애랑 같이, 학교 다니는 거 같던데…… 박상무도 좀 찝찝하다고 그럽니다. 그 전에는 오히려 자회사 비중 낮추고 그쪽 사업장 거래 늘려 주라고 지시가 들어왔는데 갑자기 이러는 게 좀 이상하다고요.”

같이 학교를 다닌다고? 그럼 설마……. 나는 말을 꺼내지 않고 그저 귀만 열어서 듣고만 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어……. 그 녀석 무슨 생각이지. 회사 일에는 통 관심도 없어 보이더만. 피는 못 속인다고, 벌써부터 집안일 손대기 시작하는 걸 보니 그 집 자식이긴 모양이다. 뭐 됐다. 가만히 있어라. 애가 뭐 해 되는 거 할까. 나중에 애비가 송 회장하고 말해 보마.”

“예.”

우리는 그렇게 식사를 마쳤고, 나는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 둘째 형 방을 두드렸다.

쾅쾅.

그러자 형이 예. 하고 대답했다.

“형.”

“대호냐? 웬일이야. 안 자고 뭐해.”

정갈한 느낌의 방에 들어가자 서재에 앉아 있는 형이 회사 서류를 읽다가, 네모난 안경을 벗고 고개를 내 쪽으로 올렸다. 나는 서재 책상 앞으로 슬슬 다가가서 형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최종 담보가 뭐야?”

“뭐야, 너도 그게 궁금하냐?”

형이 피식 웃었다.

“짜식, 집안일엔 관심도 없는 게 웬일이냐.”

“걔랑 같이 학교 다니면 우리 학교 애니까…… 누군가 싶어서.”

내 말에 형은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네. 그러고 보니 송 회장 손자랑 너랑 다 같은 학교 다니지? 뭐 간단하게 말하면 돈 대신 그 집 애 데려오라고.”

“왜?”

내 반응에 형도 어깨를 으쓱이며 책상에 두었던 서류를 다시 들어서 훑어보았다.

“글쎄. 나야 모르지. 걔가 쓸모가 있어 보이나 봐? 어디 듣기로는 그 담보가 에스퍼라고 그러는 거 같던데. 그래서 그런 거…… 아, 여기 있네. 어디 보자…… 등급이…… D?”

그렇게 능력이 좋은 건 아닌데. 흠. 그러게. 왜 그러지?

형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서류를 팔랑팔랑 넘기면서 말했고, 나는 형의 대답으로 불안함이 터지며 비로소 알았다.

“박 상무 말로는 그 사업장네 부부가 좀 욕심이 많다고 하더라. 그놈 말로는 애를 그 송 회장 손자한테 붙여 가면서까지 그렇게 아양을 떨었다고 그러던데. 맞아? 근데 걔 성격에 그거 순순히 받아 줄 애 아니잖아? 그래서 짜증 좀 난건가…….”

담보로 걸린 애가 가하라는 것을. 그 애는, 송주현은 가하를 자기 옆으로 데려올 셈이었다.

영원히.

“짜증치곤 좀 무섭네. 사업 하나 골로 보내고, 대신에 애 데려가고. 그 어린 애가지고 뭔 짓을 하려고. 이놈은 외국물 들어서 그런가 뭔 생각하는지 도통 모르겠단 말야.”

형은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너 아는 애야?”

“……아니. 아닌 거 같아. 그냥 궁금했어.”

“그래? 신기하네. 너 집안일 듣는 거 싫어하잖아.”

“……몰라.”

나는 부러 모르는 척 했고, 형은 연륜으로 쌓인 눈빛을 숨기지 않으며 나를 훑어보았다. 방을 나서는 내게 형은 내 등에 대고 경고했다.

“아는 애라고 뭐 도와준다던지 그런 생각 하지마라. 아무리 네가 철없을 나이라도 집안일에 그런 사사로운 감정 끌어당기면 곤란해.”

“모른다니까.”

쾅, 하고 문을 닫는 나에게 방 안에 있는 형은 비웃듯이 말했다.

넌 정이 많아서도 이런 일 안 맞아.

“……할 생각도 없어.”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다. 그게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을 아프게 할 거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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