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대호 너 키 큰 거 같아.”
“네가 줄어든 건 아니고?”
장난스러운 내 대답에 가하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 애는 거짓말을 할 때면 이렇게 꼭 티가 나도록 행동했다.
“……아냐. 나 요즘 우유 잘 마시고 있어.”
“거짓말. 너 어제도 급식 실 하수구에 버리는 거 다 봤다.”
“…….”
백지 같은 애라, 누가 봐도 ‘나 거짓말 합니다’ 하고 티를 내었다. 정말 알기 쉬운 애였다. 투명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그런 애. 그 하얀 우유처럼 부드러운 그 애가 우유 마시기를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나는 모르는 척, 짚었다.
“선생님한테 일러야지. 그럼 나 참 잘했어요 도장 받겠네?”
내 짓궂은 말에 가하가 내 체육복 자락을 꼭 쥐고 마치 벤치 옆에 핀 꽈리 꽃과 같이 불그스레한 얼굴빛을 띠었다.
“……안 돼…….”
“싫은데.”
나 때문에 곤란해져서 그 백지를 발갛게 물들여 가는 기분이 좋았다.
참, 이상하다고 할까.
그 애는 그런 애였다. 때타지 않은 그 순수함에 손이 가게 만드는, 그런…….
“…….”
그 애가 내게 뭘 원하냐는 듯이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 까만 옥석과 같은 눈동자에는 참한 순수가 담겨 있었다.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그런 순수.
“나랑 계속 짝꿍하자.”
“……짝꿍?”
“응. 다음 달에도, 다다음달에도, 계속.”
그걸, 내가 지켜 주고 싶었다.
투명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이 애를, 누구도 아닌 내가.
그렇게 엄마 다음으로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우연이라면 우연일까. 맨 처음과 끝이 이어진 그 아날렘마처럼, 가하의 이름도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었다.
우리 엄마의 말은 맞았을 지도 모른다.
내가 변함없이 있는다면, 그 자리에서 기다린다면 내 그리운 사랑이 다시금 돌아온다는 말은.
『이 애, 네 친구야?』
아버지 친구의 아들인 ‘그 애’와 만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응. 학교에서 내 짝꿍.』
『귀엽네.』
『……좋은 애야.』
대부분의 애들은 가하 안에 들어있는 진가를 보지 못하고 실체 없는 말들과 부모의 허물로 평가하곤 했지만, 나는 알았다. 가하는 그런 애가 아니라는 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그런 애라는 걸 곁에 늘 가까이 있어서 더 잘 알았다.
그래서 그 애가 평소와 다르게 드문 호감을 표현할 때 왠지 불안했다. 내 생일 보다도, 그 애가 그 사람 같지 않은 파란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게 영 신경이 쓰였다. 나는 불안에 몸이 달아서 괜히 가하를 불렀다.
“가하야, 주현이 마음에 들어?”
“어?”
내 말에 가하가 당황스러운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에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렇지? 내가 더, 좋지?’
“그렇지? 근데 외국에서는 쳐다보면 관심 있는 줄 알아. 너무 그러지 마. 내 친구인데 질투난다.”
“어, 어……. 조심할게, 미안. 쏘, 쏘리?”
내가, 내가 먼저 찾은 애였다.
내가 먼저 보고, 찾고, 지켜 주고 싶은 애. 누구도 아니고, 내가 드디어 찾은 태양.
그렇지만 저 높이 떠 있는 태양을 숨긴다 한들, 어느 누구도 모를 수 없는 법이었다.
생일 파티로 차려진 음식을 먹고 오후의 쨍쨍한 볕을 눈부시게 반사하는 풀장 안에 들어갈 때에도 그 애는 유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치 무엇을,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주현, 뭐 찾아?』
나는 작은 불안감을 숨기고 말을 걸었다.
『아, 대호. 그 애. 어디 있어?』
내 부름에 그 애가 반가운 얼굴을 했다.
『……누구?』
그 애? 나는 혹시, 하는 생각을 접고 다시 물어보았다.
『음, 아냐. 나 물 마시러 간다.』
그 애는 손을 저었다. 자신의 호감이나 관심이 무기가 되는 걸 잘 아는 애라 바로 숨기고 마는 훈련받은 사람 특유의 계산이 보였다.
『……응. 이따 봐.』
마음이 찜찜했지만, 우선 접어 두고 풀장 구석 쪽에 박혀 있는 가하를 찾았다. 어쨌든 그 애가 가하를 찾는다고 직접적으로 말한 건 아니니까. 내가 가는 와중에 가하는 반장에게서 물벼락을 맞아서, 온통 적신 물기를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반장 저 자식.
물로 홀딱 젖은 하얀 셔츠가 그 애의 몸 선을 따라 투명하게 살굿빛 살결을 띄었다. 물이 눈에 들어갔는지 까만 눈을 깜빡 깜빡거리며 젖은 팔뚝에 비비는 모습에 내가 비치 타월을 건네주어야겠다고, 집어든 순간이었다.
“어?”
가하의 놀라움처럼, 그 애가 언제 왔는지 집은 수건을 가하에게 폭 덮어 주었다.
그건, 그 애가 가져온 수건이었다. 평소라면 자신 빼고는, 어느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할 수건. 그걸 가하에게 덮어 주고, 싫어하는 애들이 풀장에 잔뜩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애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풀장으로 첨벙, 들어갔다.
나는 이때부터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엄마가 우리의 궤도를 떠나가는 것처럼, 내가 겨우 붙잡은 그 영원한 고리가 어디론가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그 방향은 그 애가 가하에게 보이는 관심으로 향했다.
“어…….”
가하는 그 애가 가진, 어디에도 없을 그 이국적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까만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난감한 듯,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한 듯…….
내가 얼른 정신을 붙잡고 풀장으로 들어가서 가하에게 다가가자 가하가 살았다는 듯, 안도한 얼굴을 했다. 그에 나는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가하를 편안하게 만드는 사람. 익숙한 사람. 더 오래 본 사람은 바로 나라는 그 확신.
“푸하! 뭐야, 가하 너 다 젖었네.”
“……반장이 그랬어.”
“그으래? 반장 안 되겠네.”
안 그래도 요즘 반장이 가하를 골리는 게 눈에 꽤 성가신 터였다. 괜찮아. 어차피 제대로 된 말 같은 거 통하지 않을 거고, 내가 더 친해. 그 자만에 취한 내가 잠시 반장에게 손을 보러 간 사이 어느새 둘은 제법 친해져서 눈과 손으로 대화 하고 있었다. 언어 따위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게 조금, 짜증났다.
그래서 다시 그 둘 사이에 껴들었다. 아니, 가하의 짝꿍은 원래 나였으니 원래의 자리를 되찾으러 간 거였다. 내가, 언제나 가하의 옆에 있었으니까. 그 애의 친구였으니까.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그 애는 내게 신경 하나 시선 하나 주지 않고, 가하만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 애, 여기 발 담그라고 해 봐. 반응이 재밌어. 대호, 네 친구 치곤 너무 귀여운데…… 그렇지 않아?』
기계를 분해하듯 샅샅이 살피는 그 눈빛은 싸늘하기가 짝이 없는 게, 그 시선의 대상이 된 가하의 피부를 열어서 속을 까뒤집어 볼 기세였다. 내가 아는 그 하얗고 연약한 순수를 깨트리고, 어지럽힐 것 같은 강렬한 시선.
“발만 넣어 보래.”
“아…….”
단순하게 축약해 버린 말에 그 애는 제대로 통역한 건지 모르겠다는, 살짝 의심스러운 눈빛을 내게 보냈다. 이런 걸 적반하장이라고 하나. 지금 그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야 할 사람은 누구도 아닌 나였다.
『왜 이렇게 관심을 가져? 너 결벽증 있잖아. 이런 애 말고 다른 애랑 놀아. 너랑 말하고 싶은 애들 저기 한 트럭이야.』
『귀엽잖아. 이런 애, 나 처음 봐. 아마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거 같아. 어디서 이런 애가 왔지? 매년 네 생일에 오지만 오늘 처음 보는데…… 참, 나 이 애가 무슨 말 하고 싶은지 궁금하니 네가 통역해.』
그 애는 시선을 달가워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게 좋은 의도든 나쁘든, 대화는커녕 감히 바라보는 것조차도 싫어할 정도였다. 게다가 보통 그런 시선을 가진 사람들은 그 애에게서 원하는 것들이 꽤 명확하다 못해 질척거리게 달라붙었다. 그 애는 그런 것들을 짜증스러워하다 못해 혐오하곤 했다. 옆에 있던 내가 봐도, 결벽증이 걸리는 게 이상하지 않다고 느낄 정도였다. 단순히 나이가 적고 많고를 떠나 그 애의 관심 하나면, 누구든 방패와 창이 되는 것을 아는 애가 만든 성질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걸 모르고 그 비위에 맞추려 노력하며 더욱 질리게 했으니 아이러니한 상황이기도 했고.
그런데, 평소와 달리 가하가 보인 그 순수한 호기심에, 열리지 않을 그 빗장 같은 성질이 나오기는커녕 도리어 끌려하고 있었다.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 애도, 나랑 비슷한 사람이라는 걸.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덜한 애는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벌써부터 알아차린 것이다. 가하가, 저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같이 흔한 애들이 아니라는 것을.
『……몰라. 나 다른 애들이랑 놀아야 해서.』
나는 그 애가 보이는 관심을 알려 주기 싫어서 도망쳤다. 내가 대놓고 방해하기에는 너무 벅찬 애이기도 했고, 그렇다고 순순히 알려 주기에는 내 마음도 만만치 않게 컸다. 아니, 오히려 그 애보다 크다고 말할 수 있었다. 가하가 편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애는 나만으로 족했다. 나하고만, 사이좋게 얘기했으면 했다. 내 비뚤어진 심술의 결과로 결국 그 둘은 말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나는 흔들 벤치에 다 죽어 가는 노인네처럼 앉아서 집안사람들이 양복을 걷어붙이고 파티 뒷정리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어차피, 그 애는 스웨덴으로 돌아가서 오지 않을 거고. 나는 모레 가하 옆에 앉아서 재밌게 얘기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잔뜩 돋았던 마음을 애써 가라 앉혔다.
그러다가도 나를 위한 날에 선물 같은 가하를 독점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치미는 짜증으로 손이 근질근질해졌다. 뭐라도 좀 부수고 싶어져 나의 생일 파티를 위해 정원사가 공들여서 높이 맞춰 깎은 향나무의 잎을 푸득푸득 사정없이 뜯었다. 그런 나를 보고 큰형의 심복인 지석이 형이 와서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야야야. 도련님, 생일 파티 잘 해 놓고 왜 그래요? 나무도 생명이요.”
“……저리가. 말 안 해.”
매몰찬 내 반응이 지석이 형에게는 익숙한 듯 머리에 걸쳐 둔 선글라스를 셔츠 가슴팍 주머니에 툭, 꽂고 내 의자 주변을 얼쩡거리며 약을 올려대었다.
“아, 또또또 이러신다. 내가 맞춰 볼게. 그 짝꿍 친구랑 잘 안 돼서 지금 이러는 거죠? 아까 보니까 그 송 회장 네 애랑 하하호호 하더만.”
“……하하호호 안 했거든.”
내 반박에 지석이 형이 과장된 몸짓으로 가슴팍을 당당하게 내밀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확신한다는 그 당당한 태도가 안 그래도 쌓여진 짜증에 불을 붙이고 부채질했다.
“뭘 안 해요. 그 까탈스러운 튀기 성격에 그 정도면 하하호호지. 걔 되게 웃기더라, 컵도 지꺼 따로 가져와서 쓰는 놈이 걔 풀 묻은 발 잡고 헤벌레해서는.”
“아, 말 안 한다고. 저리 가라니까.”
안 그래도 내 생각과 달리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화나 죽겠는데 기름을 붓는 지석이 형이 진짜 짜증났다. 결국 내가 분을 참지 못하고 손 안에 제법 수북이 움켜쥔 향나무 이파리를 그 얄미운 쌍판에 팍 던지자 지석이 형이 거세게 항의했다.
“이, 퉤퉤퉤! 아 진짜, 도련님. 전 도련님 편인데 왜 화를 내요. 어? 이런 성질머리로 어케 그 짝꿍친구랑 잘 살겠소?”
그게 마치 저번 뉴스에서 보여 준, 용역으로 뛰었던 모습과 얼핏 닮아보였다.
“…….”
내 편인데 왜 내 화를 돋워. 이씨. 내가 이빨을 뿌득 소리 나게 갈아 대자 지석이형이 킬킬 웃으면서 내 옆구리를 그 팔꿈치로 슬슬 건드렸다.
“솔직히 말해 봐요. 지금 짱 불안하죠? 짝꿍 친구가 기생오라비 같은 튀기 얼굴에 홀려서 따라 다닐까 봐 맘 졸이고 있죠?”
“…….”
나 진짜 말 안 할 거다. 흔들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허공을 보고 있는 나를 두고 지석이형은 내 의자를 그네 밀어 주듯이 휘휘 흔들었다. 그러면서 큰 소리를 쳤다.
“제가 또, 클랍 다니면서 얼마나 여자애들 많이 후리고 다녔습니까. 여자애들이면 그냥 딱! 요리할 줄 알잖아요. 저한테 물어보십쇼.”
“……걔 그런 애 아니야.”
걔는 여자애도 아니고……. 그러니까 더 어려운건데. 그런 복잡한 내 마음을 아는지 마는지, 지석이 형은 킹콩처럼 가슴을 쾅쾅 쳤다. 우스운 것도 잠시 나오는 말에 내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이 참, 답답하기는! 이래서 짝꿍 친구 옆에 있겠어요? 이러니까 걔가 한 눈 팔고 다니지.”
“한 눈 안 팔았어!”
‘내 편이 무슨 이래!’
이래서 집안일 하는 사람들 다 싫다니까! 내 편인 척 하면서 형들 편, 아버지 편, 남의 편 들면서…….
나는 울컥해서 외쳤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지석이형이 자기 귓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후비면서 능청스레 눈을 감았다.
“아유 참, 이건 또 작은 형님 닮아서 욱 하시네. 제가 팁 하나 드릴게요. 그 친구 보니까 애가 ‘암 것도 몰라용’ 이런 얼굴이던데 맞아요? 그래서 좋죠?”
“……응.”
몰라용?…… 아마 그런 거 같지. 가하는 사실 수업 시간에도 모르는 게 무척 많아서 내가 옆에서 늘 가르쳐 주곤 하니까. 그게 바보같다기 보다는, 그냥 귀여웠다. 열심히 끙끙대면서 문제를 풀고, 내가 아무리 얘기해도 진지하게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지난날들을 곰곰이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지석이형은 옳거니,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을 하며 손가락으로 스냅을 주면서 딱 소리를 냈다.
“그럴 줄 알았어. 이런 애들은 강하게 나가야 어버버하는 사이에 잡힌다니까요.”
“……강하게?”
어떻게? 나 충분히 강하게 나가고 있는데. 애들이 가하한테 뭐라 하면 몰래 뒤로 데리고 가서 입 안에 주먹 한대씩 먹여 주고……. 내가 그간의 ‘강한’ 행동을 생각하고 있는데 지석이 형이 박수를 짝짝 치면서 흉내를 내었다.
“그라요. 막 손도 잡아보고, 뽀뽀도 하고, 그러다가 걍 자빠…….”
자기 두 손을 잡아서 양 옆으로 둥기둥기 흔들고, 주댕이를 내게 내밀다가 주먹 사이로 엄지를 집어넣고 난리였다. 저건 또 뭐람.
“자빠?”
생소한 단어에 내가 되묻자 지석이 형은 침을 튀겨가며 신나게 말하다 말고 갑자기 목을 가다듬었다. 뭐라는 거야.
“흠흠. 아무튼 그러라고요. 강하게 나가야 언능 잡죠. 보니까 곱상하게 생겨서 그 반 남자애들한테 인기 좋겠던데. 빨리 채가요. 처음만 채가면 여자애들은 못 잊는다니까요.”
“여자애들이 더 좋아하던데.”
가하는 남자애들보다는 반 여자애들이 몰래몰래 좋아하던데. 가끔 반에 여자애들이 우르르 몰려 있을 때 늘 가하 얘기하는 걸 들었으니까. 막, 볼 깨물고 싶다, 나보다 하얀 거 같다, 키가 조금 작아서 여동생 같다는 애도 있었고. 뭐 그런 거……. 내 말에 지석이 형이 뒷통수를 슥슥 긁었다.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아 그래요? 역시 요즘은 시대가 다르구만. 신세대야. 여자애들이 같은 여자애를 더 좋아하고.”
“……걔 남자애야.”
내 말에 지석이 형의 눈에서 띠용, 하는 소리가 나올 듯이 커졌다.
“……뭐요? 아니 잠시만. 그럼 지금 도련님 같은 반 남자애 좋아하는 거요?”
“……하아.”
그동안 뭘 들은 건지. 나는 배 안쪽에서 기어오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까지 진지하게 말한 내가 천하의 바보멍청이다. 큰형네 심복이라고 말을 들어준 내가 진짜 왕 바보다, 왕 바보. 지석이형은 이제 혀가 꼬이는지 침을 마구 뱉어 가면서 내 흔들의자를 붙잡았다.
“아니, 형님들은 도련님이 이런 거 아세요? 아무리 막내라서 자식 걱정 없다지만 애는 보고 살아야죠! 아아니, 나는 걔 엄마처럼 선이 곱길래 머리 짧은 여자앤 줄 알았지!”
이씨, 축축해. 내 눈으로 들어온 침방울에 눈 주변을 찡그리며 주먹 쥔 손으로 지석이형의 팔을 퍽퍽 쳤다.
“……저리가. 나 이제 진짜로 말 안 해.”
왁왁 대는 지석이 형을 뒤로 하고 나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남자면 뭐 어때. 내가 좋은데. 애기 안 낳고 살지 뭐. 아니, 사실 좀 아쉽긴 하지만……. 가하 닮으면 예쁠 텐데.’
나는 이미 생각해 둔 미래 계획을 다시 다잡으면서, 지석이 형이 말해 준 조언을 다시 곱씹었다.
‘강하게라……. 강하게……. 손도 잡고, 손은 잡았는데.’
나는 그 생각에 고개를 음음, 끄덕이며 만족감을 느꼈다.
‘그리고 뽀……뽀도……그건……아직 안 했는데.’
그러면 다음은 뽀뽀인가? 가하랑, 나랑? 그렇게 상상을 하니, 문득 마음이 간지러워져서 나는 향나무 풀냄새가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잡는 것보다 기분…… 좋겠지?’
머리 말고 이제 가슴마저 콩닥거리는 거 같아서 가라앉히기 위해 에어컨이 한창 틀어진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나를 두고 지석이 형이 정원에서 우렁차게 소리쳤다.
“아 중요한 걸 말 안하면 어케요!”
……나 이제부터 지석이 형이랑 말 한마디도 안 할 거다.
진짜로.